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200
제5장 새로운 아침
동굴 벽에 한줄기 빛이 새어 들어와 환히 비추었다.
윤언강은 눈이 부셔 잠에서 깨어났다.
“음…….”
나른한 기분에 조금 더 잠에 취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가로운 아침이었다.
그러나 개운한 느낌과 달리 몸은 굉장히 묵직했다.
윤언강은 일순 그 이유를 깨닫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다. 벌떡 일어나 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랫배를 손으로 눌러 보았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내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내공이 없다.
단전은 깨어졌고 윤언강이 평생 모아둔 수 갑자의 내공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무인의 상징이며 생명과도 같은 내공이었다. 어떤 말로 수식한다 해도 중요함을 표현할 수 없는, 무인에게는 만 냥의 황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일생을 쌓아왔던 모든 업적이 한 번에 무너진 걸 이미 경험했던 탓일까?
윤언강은 다소 서글프긴 했으나 놀랄 만큼 빠르게 체념해버렸다. 어쩌면 그건 더 이상 무인으로서 아까워하거나 허탈해야 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인지도 몰랐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네놈이 또 뛰쳐나가서 발광할까봐 내가 그래 놨다.”
윤언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홍오의 등이 보였다. 홍오는 동굴 입구에서 좌정한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랬군.”
윤언강은 담담하게 수긍했다.
홍오가 삐죽댔다.
“마음에 안 들어. 네놈 속도 좁으면서 은근히 신선같이 군단 말이다.”
“누가 신선이 되고 싶다 했는가. 싸움에 졌으니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인 걸세.”
“흥. 알면 됐다.”
윤언강은 일어설 생각도 않고 자리에서 멍하니 홍오의 등을 바라보았다.
“며칠이나 지났나?”
“그건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너나 내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윤언강이 비릿한 실소를 지었다.
“나더러 심산유곡에 처박혀 살아가라, 그리 말하는 건가?”
그제야 홍오가 돌아보았다.
한층 깊어진 주름살, 축 처진 피부, 벌겋게 충혈되어 진물이 가득한 노안(老眼).
홍오는 삽시간에 수십 년이나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무리하게 나라밀대금침술을 이겨내려 진원진기를 쏟아낸 탓이다.
홍오가 피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네놈은 운이 좋은 줄 알아. 내가 그리 오래 네놈을 괴롭힐 수는 없을 것 같거든.”
“내 단전을 조금만 더 내버려두지 그랬나. 그랬으면 자네 머릿속의 금침을 제거해줄 수 있었을 거야.”
“네놈이 잘도. 내버려둬라. 그냥 사부의 유품이려니 하고 살련다.”
홍오는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돌렸다.
윤언강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나와 함께 있던 그 친구는 어디 갔는가?”
“아침거리 찾으러.”
“자네의 새 제자인가? 제법 쓸 만하더군.”
“아서라. 내가 제자라고 하면 또 무슨 사부의 약속이 어쩌고 하게?”
“사람을 너무 몰아붙이는 거 아닌가?”
“네놈이 한 짓을 생각해봐. 안 그러게 생겼나. 소림에서 분탕질한 것도 모자라 강호 무림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뻔했잖아.”
윤언강은 소리 없이 웃었다.
“뒤집어 놓지 못해서 억울하군. 하나 나는 아직도 내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네.”
“패배자의 역설이지.”
“그래. 그렇군.”
윤언강과 홍오는 잠시간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대화는 어딘가 맥락이 없었고, 질문과 답도 명확히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내용의 대화도 지금의 둘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현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아왔다. 고현도 공명검에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안색이 파리했다.
고현은 깨어난 윤언강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말없이 사슴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손질한 사슴을 굽고 먹고 하는 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윤언강은 실로 오랜만에 배가 두둑해질 때까지 마음껏 포식을 했다. 홍오과 고현도 마찬가지로 배가 터져라 먹고 또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고현은 남은 고기 한 덩이를 챙기고 나머지는 정성껏 나눈 후 짚으로 묶어 앞에 놓았다.
그리곤 곧장 떠날 채비를 했다. 채비라고 해봐야 사문의 검을 챙기고 머리나 단정히 묶는 것으로 끝이었다.
준비를 마친 고현이 홍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태상, 어디로 가실 거요?”
“발길 닿는 대로.”
고현은 조금 섭섭한 투로 물었다.
“이제 다시 못 보는 거요?”
“내세에서 내 할 일은 끝난 것 같군. 고 문주, 서로 갈 길을 갈 때가 되었네.”
이번엔 윤언강이 고현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고현이 말을 흐리자 윤언강은 다시 물었다.
“아니, 어디로 가는지 묻는 것보다 무엇을 하려는지 묻는 게 낫겠군.”
고현은 그 물음이 더 답을 하기 어려웠는지 서서 생각에 잠겼다.
윤언강이 말했다.
“비록 소림사에서는 한 발 물러서야 했으나 여전히 자네는 강자임에 틀림없고 자네를 원하는 추종자들이 남아 있네. 원한다면 무림의 반쪽은 당장에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고, 굳이 어려운 길로 간다 해도 통합 무림맹의 초대맹주가 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 자네가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을 걸세.”
윤언강의 말을 들으며 한동안 생각을 한 고현이 윤언강에게 물었다.
“그리하면 내가 권력자가 되는 것이오?”
“그렇게 되겠지.”
“내가 권력자가 되면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바뀌겠소?”
윤언강은 지그시 고현을 응시했다.
“변화는 결코 한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네. 대저 변화란 모든 구성원의 합의 속에서 비로소 탄생하는 법이지. 기존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는 당금 무림에서 자네가 바라는 변화에 대해 얼마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그래도 굳이 내가 하겠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네를 폭군이라 부르겠지. 그리고 나머지 반쪽에 있는 이들은 자네를 쓰러뜨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을 게야.”
고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그건 내가 원하는 세상은 아닌 것 같소.”
고현이 잠시 더 생각했다가 말을 꺼냈다.
“내가 처음 폐관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매우 절망했소.”
“무엇 때문이었는가?”
“부모님과 가문의 복수를 위해 칼을 들었는데 벨 적이 없었소.”
고현은 허망한 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소. 사파는 패망했고 마교는 멀리 새외로 쫓겨나 숨었으며, 강호의 협사들은 패악한 이들을 앞 다투어 쫓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소. 그 어디에도 사마의 무리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던 거요.”
고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절박해졌소. 어떻게든 강호에서 살아가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소.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소. 베어야 할 사마외도의 무리가 없는 세상에선 이미 협의는 사라지고 남은 명분은 오직 이익뿐이었소. 사람들은 오로지 이익 때문에 울고 웃고 싸우고 다투더이다.”
고현은 윤언강을 쳐다보았다.
“검성, 당신 말씀대로 누군가와 누군가가 서로 간에 손에 쥔 것을 빼앗으려 싸우는 세상이었소.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 싸우고, 거대 문파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중소 문파를 쥐어짜오. 그런 일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왔소. 당신께선 그게 옳은 세상이라 보시오?”
홍오가 끼어들었다.
“그게 옳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유지하려 한 것이겠지. 안 그래?”
윤언강이 고현에게 되물었다.
“자네가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자유로운 세상이오.”
고현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오. 생각이 다르고 서로 부딪쳐 고이지 않고 흘러갈 수 있는 세상이오. 한 가지 생각만이 군림하지 않고 여러 생각들이 섞여 만들어가는 세상이오.”
“거기에는 사파도 있고 마교도 있고, 협의도 있는 세상인가?”
“무엇이 됐든 지금처럼 고여서 썩어 들어가는 세상은 아니게 될 것이오.”
“확실히, 지금의 틀 안에서 자네가 반쪽이든 혹은 완전한 맹주든 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겠군.”
“하여 나는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이오.”
“처음부터?”
“이번 일로 난 내게 기존의 질서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새롭게 시작할 만큼의 능력은 없다는 걸 깨달았소. 그러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볼 것이오.”
윤언강이 웃었다.
“자네가 기존의 질서에 반목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네를 사마외도의 무리라 부를 걸세!”
고현은 홍오를 돌아보았다.
“태상, 태상이 내게 말했소. 천하제일이 되지 못한다면 천하의 대마두가 될 것이라고.”
홍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분명히 그랬지.”
고현이 단호하게 결심한 듯 말했다.
“허면 나는 대마두가 되겠소. 사마외도의 무리가 되겠소. 사람들이 사파라 부른다면 사파가 될 거요. 나를 무엇이라 부르든 언젠가 세상을 뒤엎어서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겠소.”
고현은 윤언강과 홍오를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고현의 물음에 윤언강과 홍오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윤언강이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게 자네의 세상 아닌가?”
홍오도 킬킬대며 말했다.
“사파의 대종주(大宗主)가 탄생하는 순간이군.”
고현은 조금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고현을 바라보는 홍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가시게.”
“태상.”
“무엇을 하든 포기하지 않고 문주의 꿈을 이루어가길, 진심으로 응원하겠네.”
고현은 울컥 감정이 치밀어서는 한동안 홍오를 바라보더니, 옷매무새를 수습하며 정중히 홍오에게 절을 했다.
홍오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마주 절했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윽고 홍오와 고현이 차례로 일어섰다.
“강녕하시오.”
“문주도.”
고현은 윤언강에게도 포권을 해 보이고는 다시 홍오를 바라보다가 동굴을 떠났다.
한 사람이 떠났을 뿐인데 동굴은 괜히 더 허전했다.
윤언강이 말했다.
“내가 보기엔 자네가 거둔 이들 중에 가장 멀쩡한 제자였네.”
“제자는 무슨.”
홍오는 코웃음을 쳤지만 동굴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감추지 못할 감정이 실려 있었다.
홍오가 자리에 앉자 윤언강도 같이 앉아서 함께 밖을 보았다. 홍오가 윤언강을 이상한 투로 보며 물었다.
“넌 내가 왜 네놈을 구해왔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궁금하지 않네.”
“왜?”
“나와 같겠지.”
“네놈도 나처럼 억울했냐?”
홍오의 말에 윤언강이 홍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홍오가 투덜대며 말했다.
“참으로 부러웠다. 좋은 스승을 두고 좋은 제자들을 거두어 마음 편히 살아가는 네놈이. 나는 소림사에 갇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하나 있는 제자 놈까지 절연했는데, 네놈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제자까지 여럿 두고 남들에게 존경까지 받으며 살았잖으냐.”
윤언강은 처음으로 듣는 홍오의 진심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홍오 자네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왔지. 늘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처럼 한시도 쉬지 못하고 살았다네.”
“그러냐…….”
홍오와 윤언강은 머쓱해져서 뻘쭘한 표정으로 환한 동굴 밖만 내다보았다.
한참의 침묵 속에서 윤언강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새로운 세상의 새 아침이군. 누군가에겐.”
“그래. 새로운 아침이야. 우리가 아주 오래 전에 맞아야 했던…….”
홍오와 윤언강은 오랜 세월을 지나 되돌아온 추억을 길게 만끽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동굴 안으로도 따뜻한 햇살이 들어와 두 사람을 비추었다. 어느새 바람까지도 따스해져 기분 좋게 불어오고 있었다.
“언강아.”
“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생각한 적 있냐.”
“글쎄…….”
“이런 날이 오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였어?”
“으음…….”
“그것도 몰라?”
윤언강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문득 홍오가 조용해진 걸 깨달았다.
“홍오야.”
“…….”
“홍오 이 친구야.”
“…….”
윤언강이 홍오를 살펴보니 홍오는 편안한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윤언강은 소리 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은 맑고 귀를 간지럽히는 산새소리는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 ☆ ☆
금분세수식이 끝났어도 장도윤은 장건과 마찬가지로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승려들 태반이 부상을 입고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소림사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는 오히려 스스로 남아 돕기를 자청했다.
장도윤은 소림사에서 마련해준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긴급히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타인의 아픔을 살필 줄 알고 함께 슬퍼하며, 또 좋은 일에는 누구보다도 기뻐해줄 줄 아는 호인이었다. 거상이었으나 파렴치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소림사의 승려들 모두가 장도윤을 좋아했다.
그런 장도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원호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원호는 굳게 마음을 먹고 아침 일찍부터 장도윤을 찾았다.
이른 시간인데도 장도윤의 방에는 장건과 양소은, 백리연 그리고 하연홍과 제갈영의 네 소저들이 함께 있었다.
“방장 대사님!”
원호가 자신을 반기는 이들에게 짧은 반장으로 답했다. 그리곤 장도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본사를 위해 힘써주시는 걸 알면서 너무 늦게 찾아뵈었습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건이의 사문 일인데 제가 두 팔 걷고 나서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빈승도 마음이 놓입니다.”
하지만 장건은 말과 달리 원호의 표정이 밝지 않은 걸 보고 의아해 했다.
“방장 사백님, 무슨 일이세요?”
“내 춘부장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단다. 정확히는 사과를 드리러 왔다고 해야겠구나.”
장건과 네 소저들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자리를 비키려 했는데 원호가 말렸다.
“괜찮다. 그냥 있어도 된다. 네게도 해당되는 얘기니.”
장도윤과 장건이 어리둥절해 하는데 원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실은 말입니다. 저는 오래전엔 건이를 아주 미워했습니다.”
장도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건 화보다는 놀람에 더 가까웠다.
“그 말씀을 왜……. 전 아들놈에게 방장 대사님께서 굉장히 아껴주신단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예전에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건이 때문에 모든 불상사가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건이가 없어야 본사가 안정을 되찾고 외부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건이를 참 많이도 미워했습니다.”
“방장 사백님…….”
원호가 장건을 보며 말했다.
“네가 겪은 많은 일은 사실 내 탓으로 비롯되었던 게다. 그건 네 탓이 아니었어. 정확히는 내가 널 어떻게든 쫓아내려다가 그게 더 큰 사고로 이어진 것이었다.”
원호는 당황스러워하는 장도윤과 장건을 번갈아 보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우내십존이 개입했고 그 때문에 건이가 이렇게 고생을 하게 된 겁니다. 제가 건이에게 그 같은 못된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건이는 지금쯤 집으로 돌아가 행복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을 테지요. 몇 번을 사죄한들 저의 죗값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장 대인께서는 저의 죄를 용서치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원호는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려 했다.
장도윤을 비롯해서 장건과 네 소저도 깜짝 놀랐다. 소림사의 방장이 고개 숙여 사과하다니!
하지만 원호는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허리와 머리를 막 숙이고 있는 어정쩡한 채였다.
원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알 수 없는 무엇이 앞을 막고 있었다.
“건이, 이 녀석아. 이러면 내가 더 우스워지잖으냐.”
그제야 다른 이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장건이 뭔가 했다는 걸 알았다. 장건은 기의 가닥을 뻗어 원호가 숙이지 않도록 막은 것이다.
장도윤이 온화한 얼굴로 원호를 잡아 일으켰다.
“저 같은 필부가 강호의, 그것도 대소림사의 방장 대사께서 겪으셨을 고민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마는…….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우리 건이가 이렇게 무사히 잘 자랐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방장 대사님과 소림사에 깊이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무사히, 라는 말을 하자 장건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전신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었으니 아주 무사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얼굴에도 눈에 띄는 흉터가 여럿 남아 있었다.
장도윤이 헛헛하게 웃었다.
“아, 물론 애엄마는 조금 놀라겠지요. 하지만 뭐…… 저런 상처는 좀 있어야 남자답지 않습니까?”
사실 장건의 모친인 손씨 부인은 장건이 천하제일 무림고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벌써 한 번 기절했다 깨어난 뒤였다. 장건이 전신에 흉터를 안고 돌아온 걸 보면 또다시 기절할지도 몰랐다.
원호가 장도윤의 너스레에 어색하게 웃고 있는데 제갈영이 끼어들었다.
“아무렴요! 천하제일 고수인데요! 천하제일 고수가 그 정도 상처도 없으면 이상하잖아요.”
양소은이 제갈영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쥐어박았다.
“이그, 눈치도 없이. 지금이 네가 낄 자리냐.”
“이씨! 키 안 크게. 두고 보자. 내가 정실부인이 되면, 언니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흥!”
제갈영은 눈물을 그렁거리면서 볼을 부풀리고 하연홍의 뒤로 도망가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곧 건이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면서요? 다른 사형제들도 모두 궁금해 하더군요. 건이 너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느냐?”
네 소저들이 건이의 신부감 후보로 경연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소림사에서도 누가 이겨서 장건의 부인이 될지 소소한 내기까지 걸곤 했다.
장건은 얼굴이 빨개져서 뒷머리만 긁었다.
“저야 뭐…….”
“사문의 상황이 이러해서 괜히 늦어지고 있겠구나.”
장도윤이 읍을 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미 아이들에게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 말해두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아이들이 마음이 착하여 이해해주었습니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건이는 금분세수식을 마쳐 강호의 은원에서 자유로우니 더 이상 사문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물며 혼인은 인륜지대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원호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하여 오해 없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뒷일은 본사에 맡기시고 건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떠하신지요. 건이도 가업을 이으려면 준비할 게 많지 않겠습니까.”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산을 권유하는 표정이었기에 장도윤은 다소 어리둥절해 했다. 하나 곧 이유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소림사에서 벌어질 일 때문이라면 저희는 괜찮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에 백리연이 대신 답했다.
“저희 가문에서 아버님께서 직접 일 개 조의 검수를 데리고 출발하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다른 가문과 문파들도 전투 조를 속속 보내고 있으니 몸조심하라고…….”
양소은도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소림사로 출발했다고 어제 전서를 보내셨던데. 전 그게 시험 때문인 줄 알았거든요.”
제갈영이 옆에서 조그맣게 ‘그러니까 힘만 센 바보.’하고 중얼거렸다. 양소은이 눈을 부라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장도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원호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원호가 ‘음……’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걱정하실까봐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표면적으로는 이번 북해빙궁의 일에 대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는 일입니다. 하나 실제로는 서열을 정하는 힘겨루기의 자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각 문파에서 전투 조를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장도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런 말씀은 좀 그렇습니다만, 그런 상황이라면 건이가 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원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건이는 강호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질 않았습니까.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저는 건이가 더 이상 소림의 일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건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인 게지요.”
“허어…… 어찌 그런…….”
“사과를 드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실은 그 말씀을 드리러 온 것이기도 합니다. 더 어수선해지기 전에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으음…….”
장도윤이 침음성을 내며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는데 제갈영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기요, 방장 대사님!”
“왜 그러느냐?”
“그럼 삼황선원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양소은과 백리연, 하연홍은 제갈영이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는 걸 깨달았다. 세 소저는 누구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검성의 심득!”
원호는 잠시 말을 멈추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까 말한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문파가 삼황선원의 조사에 대한 우선권을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싶구나.”
서열에 대한 다툼은 천하제일 문파였던 소림사와 화산파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자연스럽게 생기는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윤언강의 최후 심득이 걸려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화산파로서는 윤언강의 최후 심득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고 다른 이들은 보길 원한다. 서열이라는 이유 이외에도 한 문파의 자존심과 무공이 걸린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질 터였다.
그것이 유혈사태로 이어지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필연적으로 칼부림이 벌어질 것이 명약관화했다. 원호가 장도윤과 장건에게 돌아가라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제갈영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물었다.
“근데요. 삼황선원은 소림사 거잖아요? 당연히 소림사에 우선권이 있는 거 아닌가요?”
원호가 대답했다.
“소림은 이번 일에서 물러서기로 했단다. 삼황선원에 관련해서도 관여하지 않을 게다.”
“예?”
“원주회의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 일이라 판단했고, 강호 활동을 자제하기로 한 결정도 있으니 말이다.”
소림사는 실질적으로 힘겨루기를 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데다 힘겨루기를 한다 해도 사실상 결과가 뻔했다.
소림사가 다시 천하제일 문파의 자리에 서길 원치 않는 문파들은 힘을 합쳐서 북해의 포로까지 놓아준 소림사를 성토할 테고, 이후에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터였다. 최악의 경우 소림사는 지금보다도 더 좋지 않은 상황에 몰릴 수 있었다.
하여 이번에야말로 원호는 강호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뗄 생각이었던 것이다.
장건이 못내 궁금했는지 제갈영에게 물었다.
“검성 할아버지의 심득이 뭐야?”
정작 본인이 모르고 있으니 모순적인 일이긴 했지만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그 말을 한 게 장건이니까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왜 오라버니가 마지막에 멋지게 흘려냈다는 검성의 최종 검초 있잖아. 그거 최후에 얻은 심득이었대.”
하연홍이 덧붙였다.
“화산파 검법의 정수가 담긴 심득이라고들 해. 그런데 정작 화산파에는 전수해주지 않았고.”
백리연도 한마디를 했다.
“그게 유일하게 소림사에, 그것도 삼황선원의 절벽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거예요.”
“아아…….”
장건은 윤언강의 마지막 일검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사느냐 죽느냐, 쓰러뜨리느냐 쓰러지느냐의 기로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집중하자 곧 윤언강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윤언강의 주위를 감싼 수많은 검기들이 그의 손짓에 따라 춤을 추듯 한데 모여 겹쳐지고, 무한대의 위력을 간직한 채 차곡차곡 쌓여간다.
공포스러우면서도 또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한평생 검에 매진해온 윤언강 그의 일생이 담긴 일검이 펼쳐진다.
“궁극의 매화검법 화화총경 오의. 절식 여의총람…….”
분명히 윤언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록 마지막에 왜인지 윤언강의 집중력이 일 푼 정도 떨어져 장건이 피해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껏 보아온 무공 중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일검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일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유산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화산파에는 둘도 없는 보물일 터였다.
“하아.”
장건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젠 윤언강의 그 검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게 아쉽기까지 했다.
장건이 눈을 뜨자 원호와 네 소저들이 놀라서 장건을 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뭐가요?”
양소은이 재차 물었다.
“설마 그게 그 검초의 이름이야? 화화…… 총경이라고? 맞아?”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검성 할아버지가 그랬어.”
하연홍이 놀라서 양손을 마주잡았다.
“대단해……. 화화총경의 오의 절식 여의총람. 이건 정말 강호사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될 거야.”
양소은도 동의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거 아마 화산파에서도 모르고 있을걸. 알고 있었으면 벌써 소문이 나고도 남았겠지.”
제갈영이 말했다.
“화산파에 알려주지 말자! 화산파는 왠지 얄미워! 알려줘도 공짜로는 안 돼!”
장건이 ‘움찔’했다.
원호가 장건이 왜 그러나 하고 보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의 말처럼 화산파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건 단지 몇 마디 글자에 불과하지만 화산파에서는 백 냥의 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정보일 게다.”
장건이 다시 움찔했다.
“황금 백 냥!”
“백 냥이 대수겠느냐. 절벽에 새겨진 그 화화총경의 검초는 무인들에겐 만 냥의 가치로도 바꿀 수 없지.”
“마, 만 냥!”
장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건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그러느냐?”
네 소저들이 긴장했다.
그건 장건이 뭔가를 아까워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설마?
이상함을 눈치챈 원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던졌다.
“백 냥?”
“…….”
“만 냥?”
“…….”
“공짜?”
움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