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202
제7장 그들의 선택, 그리고……
서가촌의 무림 대회는 소림사와 아무 상관없이 별개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덕에 소림사는 차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더불어 장건이 관람료로 벌어들인 은자 오천 냥을 시주함으로써 소림사에서 장건이 해야 할 일도 끝났다.
장도윤은 마침내 소림사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하여 떠나기 전날, 장도윤은 저녁 자리를 빌어 정산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드디어 백리가와 제갈가, 양가장의 가주와 하연홍의 조부모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하분동은 그런 자리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며 나오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은 운려와 함께 나왔다.
가벼운 야채 볶음과 면 요리, 좋은 향이 나는 술이 상에 올랐다. 본래 성대하게 치러져야 할 자리였으나 소림사의 사정을 감안하여 소수만 초대해 조촐하게 차려진 저녁상이었다.
장도윤이 일어서서 길게 읍을 했다.
“모여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드립니다. 언짢아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나 본가의 전통에 따라 며느리를 구하는 수순이었으니, 모쪼록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백리상과 제갈유, 양지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딸과 장도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매우 미묘했다. 당장에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견제하며 뜨거운 경쟁열이 있었는데, 오늘은 왠지 눈치를 보는 듯하며 조용했다.
심지어는 괄괄한 성격의 신창 양지득마저도 별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양소은이 의아해하며 양지득에게 몰래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넌 가만있어, 이놈아.”
“왜?”
다른 소저들이나 장도윤도 이 미심쩍은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할 건 아니었다.
장도윤이 물었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양지득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어서 진행하십시다.”
백리상과 제갈유도 찬성했다.
“어서 결과를 들읍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정산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도윤이 총관을 불러 차용증과 정산 서류를 들고 오게 했다.
총관이 말했다.
“먼저, 남은 자재와 점포의 집기 등 값어치가 있는 모든 사업체의 상품은 저희가 오늘 오전까지의 시장 가격으로 추산하여 합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발표직전이 되자 당사자인 네 소저들은 크게 떨렸다.
백리연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나지막이 숨을 몰아쉬었고, 제갈영은 발을 동동 굴렀으며 양소은은 대놓고 안절부절못했다. 하연홍은 할머니인 운려의 손을 꼭 잡았다. 운려는 몸이 좋지 않아 힘든 기색이 역력했으나 부드럽게 웃으며 하연홍을 바라봐주었다.
장건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다가 하분동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하분동이 얼굴이 벌게진 채 더 어색해해서, 장건은 아까보다도 훨씬 더 뻘쭘해졌다.
다행히도 곧 총관이 발표를 시작했다.
“우선 양 소저이십니다. 영랑(令娘)께서는 은자 오천 냥을 출자하여 무관 등의 사업을 하였습니다. 외상으로 산 각종 집기의 대금을 중고가로 상환하고 오늘 아침까지의 임대료, 그리고 일 할의 이자로 이백 냥을 제하여…….”
양소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천육백육십팔 냥을 남기셨기 때문에 총 삼백삼십이 냥의 적자를 보았습니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제갈영과 백리연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양소은은 양지득의 눈치를 보며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양지득은 일그러진 얼굴로 ‘네가 그러면 그렇지, 무슨 장사를…….’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양소은이 항변했다.
“아냐아냐, 아빠. 서가촌에서 무관할 때 입관비를 못 받은 게 있어서 그래. 그거만 다 받았어도……”
“됐다, 됐어.”
“안 때려?”
“안 때려.”
“아빠, 무슨 일 있어?”
“안 때린다니까 왜 자꾸 때리래? 이걸 그냥 확!”
양지득이 주먹을 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됐다, 됐어.”
“어딘가 모르게 비정상적인 부녀지간인데?”
물론 남들이 보기엔 지금이 정상적이다.
장도윤이 온화한 미소로 정중히 읍을 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양소은의 얼굴에 홍조가 생겼다. 양소은은 황급히 팔을 내려 포권했다.
“아니에요. 수고는요…….”
백리연의 부친인 백리상이 제갈영의 부친인 제갈유와 눈을 마주치더니 양보했다.
“제갈가에서 먼저 하시지요.”
제갈유가 고개를 끄덕이자 총관이 바로 발표했다.
“제갈 소저이십니다. 영애(令愛)께서 출자하신 금액은 은자 천 냥으로 제갈상회 분점을 운영하셨으며 관납, 건축자재 납품, 상품 판매, 관광지 등으로 구백십 냥의 수익을 내셨습니다. 이자를 제하고 총 팔백십 냥의 이익을 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제갈영은 양소은이 보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양소은이 분해하며 주먹을 떨었다.
“아휴, 진짜…….”
길지 않은 기간에 은자 팔백 냥이라는 거금을 벌었으니, 굉장한 장사 실력을 보인 셈이었다. 물론 제갈가의 본가 상회에서 도움이 있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일 터였다.
“엣헴.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훨씬 많이 벌었을 텐데.”
이번에도 장도윤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열심히 해주어 고맙구나.”
“아녜요. 헤헤.”
제갈영이 뿌듯해하고 있는데, 총관이 다음 발표를 이어갔다.
“다음은 백리 소저이십니다. 영교(令嬌)께선 은자 천 냥을 출자하였고 주 업종은 다관이었습니다. 남은 다기(茶器)를 중고가로 환산하고 은자 한 냥 이하 금액을 절사처리해서…….”
백리연이 조마조마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고운 이마에 땀까지 송글 맺혔다.
총관은 사람들의 애를 태우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이자를 제하고 현재 금액이 삼천오백육십 냥으로, 총 이천오백육십 냥의 이익을 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제갈영과 양소은을 비롯한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가촌에서 다관이 한창 잘되어 지점까지 낼 정도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두 배를 넘게 이득을 남겼을 줄은 몰랐다.
백리연이 ‘그렇지!’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는 다소곳이 앉았다.
장도윤은 이번에도 백리연에게 인사했다.
“고맙네. 좋은 결과가 나서 기쁘군.”
“아니에요, 아버…….”
백리연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데 백리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고생했다.”
고생했다고 말은 하는데 기뻐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백리연은 부친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제갈영이 벌떡 일어나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어떻게 두 배를 넘게 벌 수가 있어? 보통 장사를 해도 삼 할을 벌기 힘들다구! 내가 이것저것 얼마나 열심히 해서 그 돈을 벌었는데!”
백리연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대하고 있던 건물을 전부 샀거든.”
“뭐?”
“분점을 낼 때마다 건물을 아예 사서 임대료를 최대한 아꼈어.”
제갈영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총관에게 따졌다.
“나도 건물 있어요! 그거 빼놓으신 거 아녜요?”
총관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백리 소저께서 내신 다관들은 중심가에 있었기 때문에 서가촌의 투자열풍을 타고 건물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만, 제갈 소저의 상회 건물은 외곽이라 변동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의 시세로 말이지요.”
“으아아아앙…….”
제갈영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장건을 쳐다보았다.
“으앙…… 오라버니.”
장건은 난처했지만 최대한 달래주려 애썼다.
“영아, 울지 마.”
제갈영이 훌쩍이며 장건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제갈유가 막았다.
“아버지…….”
제갈영이 사정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으나 제갈유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하연홍에게 쏠렸다. 하연홍은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하연홍에게 오래 머물지 않고 백리연에게로 옮겨갔다.
하연홍은 너무 많은 돈을 빌린 데다 국수를 말아 판 것 말고는 별다른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경쟁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이자만 계산해도 천 냥이었다.
“다음은 하 소저이십니다. 영녀께서는 은자 만 냥을 출자하셨고…….”
총관이 하연홍의 정산 결과를 발표하려는데 갑자기 백리상이 일어서서 발표를 중단시켰다.
“할 말이 있소이다.”
어딘가 모르게 비장한 분위기가 풍겨서 백리연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님? 아버님, 왜 그러세요?”
백리상은 백리연을 무시하고 장도윤에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오만 우리 백리가는 이번 시험을 포…….”
그때 하연홍이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
덕분에 백리상은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놀라서 하연홍의 옆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떨어뜨린 운려를 보았다.
운려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하분동도 놀라서 뭘 어찌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비켜나시오!”
양지득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운려의 맥을 잡았다. 내공을 흘려 넣어 상태를 확인한 양지득의 표정이 크게 어두워졌다. 양지득은 운려의 명문혈로 진기를 흘려 넣어 운려의 혈색을 조금 되돌린 후, 안타까운 눈으로 하분동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서 의원으로 옮기셔야겠소이다.”
☆ ☆ ☆
같은 날, 늦은 밤.
본래 장도윤의 초대에 가려 했던 원호는 다른 일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밀서를 받고 하남 외곽의 한적한 곳에 세워진 관제묘(關帝廟)를 찾게 된 것이다. 비밀스러운 소환장이었기에 원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절룩이는 걸음으로 원호는 관제묘로 들어섰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원호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허름한 관제묘의 내부에는 스무 명 가량의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등불 하나 켜지 않은 어두운 관제묘엔 팽팽하게 날선 분위기가 가득하다.
원호는 사당 지붕의 깨진 기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하여 모인 몇몇 이들의 면면을 대략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문파의 장문이거나 장문령의 권한을 가진 수석장로들이다. 서가촌에 각대문파의 장문이 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애초에 파견된 무인들과 다른 경로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실질적으로 당금 무림을 움직이는 수뇌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그 긴장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원호에게 앉으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남궁가의 대표가 말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굳이 예의는 차리지 않겠소.”
원호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남궁가 대표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사당 안을 울렸다.
“여기 모인 우리는 십대 문파와 팔대 세가, 새로이 오개 방(幇)을 대표하였으며 소림사와 화산파는 피의결권자로서 결의권을 박탈. 십대 문파 중 무당파 또한 소림사와 관련된 의사표시를 포기. 이에 따라 전날 나머지 스물한 명의 대표는 각기 주어진 권한에 따라 소림사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였소.”
그제야 원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슨 처분이란 말이오?”
남궁가의 대표는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으냐는 투로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말씀드리리다. 본 위원회는 소림사의 해명을 인정하고 북해빙궁의 인질을 놓아준 데 대한 책임추궁을 않기로 잠정 합의하였소.”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는지 원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남궁가 대표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금분세수식을 주관한 자로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각파의 고수들에게 해를 입힌 것에 대해 마땅히 배상을 물려야 하나, 소림사 내의 재정악화로 인한 사정을 감안하여 책임을 묻지 않고 각 문파에서 인도적 지원을 하기로 약조하였소.”
원호가 되물었다.
“이미 몇몇 문파의 요청에 의해 본사에서 요양하고 계신 원로들에게 자파에서 전해온 영약을 건네드렸소만.”
“인도적 지원이란 소림사 제자들의 부상 치료에 필요한 약재뿐 아니라, 소림사가 강호활동을 금지한 십 년 간 매해 양곡 삼백 석, 삼베 오십 필의 제공을 포함하는 것이오.”
원호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어쩐지 좋은 결정들만 난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빈승에게 원하시는 게 있소이까?”
원호의 질문에 대답한 건 남궁가 대표가 아니었다.
한쪽 자리에 있던 기이한 분위기의 노인이 가볍게 읍을 하며 나섰다.
“참으로 불편한 자리이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원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독주……? 황궁에서도 나오셨소?”
동창의 우두머리인 태감 정안이다.
원호가 놀란 투로 정안을 쳐다보자 정안이 재차 허리를 굽혔다.
“저희도 정리할 일이 남은 것으로 아옵니다.”
“본래는 그리하려 했으나, 어차피 본사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일. 하여 소림은 이번 일에서 한 발 물러서 있기로 했소이다. 황궁의 일은 여기 계신 다른 분들과 의논하시는 게 좋겠소.”
“그런 것치고는 귀사의 제자가 너무 큰 소동을 벌였다고 생각지 않으시옵니까.”
“그야 소림을 대변한 게 아니라 스스로 상인으로서 나선 것이니 동창에서 따질 일은 아니라고 보오.”
“물론 저도 그렇게 믿고 싶사옵니다. 하나 삼황선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잔뜩 널린 문구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요. 뭐였더라……?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황궁 비밀 결사단이라고 하였던가요?”
정안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처럼 음지에서 일하는 이들이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만큼 불유쾌한 일은 없지요. 소관도 소식을 듣고 참으로 깜짝 놀라 한달음에 달려왔으니, 그게 의도했던 바라면 누군가 참으로 대단한 묘수를 지닌 자이옵니다.”
원호가 잠시 어색한 헛기침을 하더니 물었다.
“황상께서 그리 말씀하시더이까?”
“그럴 리가요. 요즘처럼 불안한 적이 없으시던 황상께서는 귀사의 영민한 제자 소식을 들으시고 참 마음이 동하셨나보옵니다. 천하제일인을 부마(駙馬)로 염두에 두셨으니! 그것이 황상께 위안이 된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말이옵니다.”
“부마? 사위로 삼겠다고 하셨단 말이오?”
“물론 가당키나 한 얘기겠사옵니까?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소관은 소인배인지라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은 원치 않사옵니다. 물론 여기계신 다른 분들도 그런 일은 원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혹시나, 황상의 부마가 되어 금의위라도 장악하게 된다면…….”
정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요전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겠지요.”
원호는 정안의 속셈을 눈치챘다. 부마가 내시들의 기관인 동창을 맡지는 않을 테고, 무림을 두려워하는 황제를 위해 호위를 맡아 금의위의 수장이 될 확률이 가장 크다. 그렇게 되면 금의위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는 동창의 세력은 한순간에 벼랑까지 몰리고 말 터였다.
“음…….”
잠시 생각하던 원호가 고뇌의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빈승더러…… 건이를, 본사의 제자를 팔아넘기라는 것이오? 그 대가를 받고?”
정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뼈마디만 남은 검지를 들며 덧붙였다.
“거기에 삼황채의 봉쇄까지 더해진다면 소관에게 더욱 만족할 만한 결과가 될 것이옵니다. 아시다시피 소관은 은혜를 잊는 법이 없습지요. 소림사는 적어도 십 년 동안은 불공에 전념하실 수 있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아마 황실에서 후원하는 호국법회를 다시 주재하게 될 지도 모르지요.”
원호가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건이는 내일 본사를 떠날 것이오. 그리고 다시 본사로 돌아올 일은 아마 없지 않겠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요.”
청성파의 대표가 끼어들어 언성을 높였다.
“원호 대사를 믿을 수 없소. 그건 나뿐 아니라 여기 모든 대표들이 마찬가지요. 장건은 젊소. 그가 언제라도 회귀할 여지를 남겨 둘 수 없소.”
심지어 몰락의 위기를 걷고 있는 당가의 대표도 위원회에 참여해 있었는지, 지켜보고 있다가 못마땅한 한마디를 더했다.
“우리는 금분세수식을 주관한 소림사가 강호의 도의를 무시하고 소림소마를 전면에 내세운 데 대해 매우 실망하였소이다.”
모용가의 대표 또한 말을 더했다.
“하여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조치하길 원하오. 소림소마는 다신 무림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오.”
원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원호를 바라보는 대표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누가 봐도 장건을 내세운 건 확실한 무리수였다. 그 선택이 일견 소림사를 구했지만, 많은 문파들의 뇌리에 씻을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겼다. 장건이 어떤 형태로든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소림을 구하고자 한 내 선택이 결국 비수가 되어 다시 내 목 밑까지 들이밀어진 셈이구려.”
원호의 한탄 섞인 혼잣말에 정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비수가 아니라 푸짐하게 잘 차려진 한상이옵니다. 그저 누가 떠먹여주기보다는 주지 스님께서는 한술 뜨시기만 하면 되는 일이옵지요.”
원호가 자조 섞인 어조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일 소승이 거부한다면……?”
위원회의 대표들이 조소 어린 표정으로 원호를 지켜보며 말했다.
“대사가 거부한다면 그 여파가 어디로 튈지는 뻔하지 않소? 그때야말로 요리상이 아니라 비수가 될 게요.”
“소림소마가 안된다면 소림사가 되겠지.”
강호의 전 문파가 합심하여 나섰다. 설사 천하제일의 고수라 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있는 법…….
이전에 종암이 그렇게 당했듯, 이번엔 장건의 차례가 온 것이다. 이들의 결정을 무시하면 그들의 칼날은 장건이 아니라 소림사로 향하고 말 터였다.
원호는 한참 만에 눈을 뜨고 모든 것을 포기한 투로 물었다.
“빈승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위원회의 대표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위원장으로 나선 남궁가의 대표가 몇 개가 이어진 죽간을 원호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소림사와 화산파, 무당을 제외한 모든 문파가 합의한 내용이오.”
죽간을 받아들고 내용을 달빛에 가볍게 비춰본 원호의 얼굴이 굳었다.
형산파의 대표가 말했다.
“죽간의 합의 내용은 소림사의 제자들에게 어떻게든 전해야 하겠지만, 이 자리에서 있던 우리들의 일까지는 발설하지 마시오. 만일 외부에 발설하게 된다면 방금까지의 결정은 무효로 돌아가고, 그 책임은 어떠한 형태로든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날 거요.”
원호가 죽간에서 눈을 떼고 형산파 대표를 노려보았다.
“그 정도는 알고 있소. 내가 아무리 본사의 제자를 팔아넘긴 파렴치한 자가 될지라도, 약조한 바까지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외다.”
남궁가의 대표가 다시 말했다.
“잊지 마시오. 이 중에는 소림사가 약조를 어기기를 바라 마지않는 문파도 있다는걸.”
싸늘한 협박이었다.
“귀하들이나 잘 지키시길.”
원호는 침중한 얼굴로 한 번 좌중을 둘러보고는 가볍게 반장했다. 반장을 하는 원호에게 포권으로 예를 취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이 비웃음만이 던져졌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찰나 원호의 입가에는 왠지 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때마침 짙게 드리운 달무리가 원호의 표정을 완전히 감추었고, 원호가 고개를 들었을 때엔 미소는 온 데 간 데 없이 음울한 표정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 ☆
원호가 소림사로 돌아가는 길은 자정이 훌쩍 지난 야반(夜半)이었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쉬엄쉬엄 길을 가던 원호는 소림사의 산문 밖 즈음에서 우연히 몇 무리의 무인들을 마주쳤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리가와 양가장, 그리고 제갈가의 이들이었다.
“아니, 왜 자꾸 이 밤에 돌아가자고 하는 거예요? 싫어요. 난 안 가요. 가더라도 내일 가면 되잖아요!”
“아빠아아!”
백리연도 제갈영도 난리를 부렸지만 그들의 부친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차피 깨어진 일. 내일까지 남아 있어봐야 미련만 생길 뿐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상인 나부랭이 집안에 첩으로 보낼 것 같으냐?”
양소은은 혈도를 짚였는지 뻣뻣하게 굳어서 들것에 들려 가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제갈영이 원호를 발견하고는 대뜸 달려왔다. 제갈영은 울먹거리면서 원호의 승복을 붙들었다.
“방장 대사님, 방장 대사님! 우리 아버지 좀 말려주세요. 왜들 저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제갈유가 호통을 쳤다.
“네 이 녀석! 냉큼 돌아오지 못하겠느냐!”
제갈가의 무인들이 달려와 제갈영을 억지로 끌고 갔다.
“싫어어어! 무가 여식이 상인에 시집가는 게 어때서? 출가외인이잖아! 난 첩이라도 상관없단 말야!”
제갈유가 언성을 높여 무인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먼저 길을 가고 있거라! 만일 한 번 더 달아나려 하거든 혈을 짚어서라도 데려가거라!”
“예!”
그건 비단 제갈영뿐만이 아니었다. 백리연도 거의 끌려다가시피 각자의 소속 무인들에게 붙들려 갔다.
이들이 멀어져 가자 백리상과 양지득, 제갈유가 원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원호는 그들의 눈빛을 보고 짐짓 말을 던졌다.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제갈유가 물었다.
“방장 대사께서는…… 선택하셨습니까?”
원호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제갈유가 ‘아’하고 안타까운 탄성을 냈다. 백리상과 양지득도 서로를 돌아보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장 대사께서 결국 소림사를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본인들도 가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우리는 따로 동의하지 아니하였으나, 전 문파가 따르기로 결정한 사안이니 우리라고 뾰족한 도리가 없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처음엔 저 작자들을 골탕 먹인다고 신나서 방장 대사의 일을 도왔는데 그게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소. 칵, 퉤!”
양지득은 가래침까지 바닥에 뱉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솔직히 건이란 놈이 마음에 들어서 첩이래도 좋으니 내 딸년을 데려가기만 한다면 보낼 작정이었소. 하지만 젠장할 황궁까지 나서서 강호 전체가 녀석을 어떻게 해보겠다는데 그런 와중에 딸을 보낼 순 없잖겠소?”
백리상도 말했다.
“정실 문제도 문제지만, 복잡한 일에 휘말려 본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도 한 가문을 책임진 자로서 해야 할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럴 땐 가주라는 자리가 부끄럽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머쓱하게 서 있던 네 사람은 곧 작별인사를 하려 했다.
그때 원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시험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갈유가 헛헛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연홍이란 아이, 제법 맹랑하더군요. 그 아이가 이겼습니다.”
“호오, 그랬습니까?”
“예. 은자 만 냥을 빌어 서가촌의 노른자 땅을 모조리 사버렸다지 뭡니까?”
양지득이 옆에서 거들었다.
“엄청나게 땅값이 올라서 스무 배도 넘게 차익을 남겼다고 하외다. 어마어마한 돈을 거머쥔 게요. 본래는 임대료나 받을 생각이었다나 그랬다는데…….”
“허허허.”
원호가 감탄하여 놀라고 있는데 양지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그럼 뭐하오.”
“왜 그러십니까?”
“그 아이의 조모가 지병을 앓고 있는데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소. 몇 달 넘기기 힘들 걸로 보이던데 백만금이 무슨 소용이겠소이까. 이런 상황에서 혼례를 진행할 수도 없으니 뭐, 운성방도 난감해졌소. 아무튼 그리 되었소이다.”
“그랬군요.”
짧게 몇 마디를 더 나눈 네 사람은 곧 작별을 고했다. 세 가주는 마치 도망치듯 종종 걸음으로 떠나갔다.
원호는 잠시간 그들의 뒷모습을 보더니 다시 절룩이며 산문을 올랐다. 절룩인다 해도 워낙 내공이 탄탄한 무인이니 그 속도는 일반 사람보다 훨씬 빠르다.
하지만 원호는 이내 다시 일주문이 멀리 보이는 아래에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문원이 계단 중간에 앉아 원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원은 쿨럭거리며 몇 번의 짧은 기침을 했다.
원호가 말없이 문원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죽간을 건넸다.
“건이에 대한 얘깁니다.”
죽간을 받아든 문원이 달그락거리며 죽간을 열었다가 처음 보이는 글귀를 보고 흠칫 놀랐다.
영구격리(永久隔離).
단 네 글자였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이도 문원은 충분히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호가 길게 숨을 토해내며 죽간의 내용을 말했다.
“절대 먼저 접촉하지 말 것. 접촉하더라도 무림의 일에 대상을 끌어들이지 말 것.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림의 일에 대상을 끌어들인 개인과 문파는 무림 공적으로 간주하여 문(門), 관(官) 공동의 추살령이 내려짐.”
원호는 말을 덧붙였다.
“더불어 본사는 십 년 간 매해 양곡 삼백 석, 삼베 오십 필을 제공받고, 태감의 배려로 황실의 호국법회도 다시 주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원은 원호의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자네가 원한대로 되었구먼. 아니, 그 이상인가.”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냐. 자네는 잘했어. 건이와 소림을 위해 최선을 다했네. 누구라도 지금 방장처럼 좋은 결과를 내긴 힘들었을 게야.”
문원이 끌끌거리고 웃었다.
“결국은 저들을 자극한 방장의 계책이 성공하지 않았는가. 황궁이란 대어까지 걸려들었으니.”
원호는 못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 전 건이와 혼담이 오갔던 세 가문이 황급히 돌아가는 걸 보았습니다. 아마 저 때문에 건이가 많이 상처받았을 겁니다.”
“사돈이 되면 어떻게든 건이가 관계될 일이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 그것만큼은 그들도 피하고 싶었겠지. 무가의 여식들과 만나면서는 건이도 무림을 떠나기 어려웠을 걸세. 녀석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소림도 안전해졌고 건이도 원하는 대로 된 거니, 모든 게 다 좋아졌네. 그럼 된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원호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자조하듯 말했다.
“그 아이가 머뭇거리는 걸 본 순간 욕심이 났습니다. 다소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소림사의 안전도, 건이의 은퇴 보장도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전 이전에 본사의 제자를 지키겠다 맹세했습니다. 단 한 명도 버리지 않겠다고요. 그런데도 저는 결국 제가 맹세한 말과 달리 건이를 팔아 소림사의 안위를 보장받았습니다.”
“이보게, 방장…….”
“이미 은퇴해 더 이상 무림에 있지 말아야 할 아이를 구차한 명분을 대가며 억지로 세웠지요. 그건 분명 강호의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원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의 소림에 저처럼 비윤리적인 승려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방장으로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 어떻게 소림의 방장이 그런 말을 입 밖에 낸단 말인가? 소림의 방장이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마는 그런 자리인가?”
문원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젖은 눈으로 가만히 원호를 쳐다보았다. 원호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고 있는 걸 알아챈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작정을 했구먼.”
그제야 원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호는 말없이 문원의 옆에 앉은 채 달무리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문원은 어이없는 얼굴로 원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뭐, 누군가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세상도 괜찮겠지. 그게 소림의 방장이라 문제지만.”
소림 방장이란 말을 연이어 강조하며 조금 삐친 투로 있던 문원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원호에게 물었다.
“근데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있잖나, 방장 그만두면 도대체 뭐하게?”
“아직 모르겠습니다.”
원호는 묵묵히 하늘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숙조.”
“응?”
“그래서 여쭙는 말씀입니다만.”
“뭔데?”
“그 은노라는 거…… 절름발이도 됩니까?”
뚱한 얼굴로 있던 문원은 갑자기 푸헛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곧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다 되는데 방장처럼 생각 많고 복잡한 사람은 안 돼.”
원호가 억울한 얼굴로 문원을 보고 항의했다.
“그럼 앞으로 전 뭐하고 삽니까?”
문원은 거짓말처럼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러니까 한 삼 년 세상 돌아보고 그러면서 마음 비우고, 그리고 돌아오게. 그때까지는 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원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숨을 내뱉었다. 어딘가 모르게 후련한 얼굴이 된 원호가 밤이 깊어가는 멀리의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올 때는 소림 말고 다른 건 다 버리고…… 그리고 돌아오렵니다. 평생 제 영달(榮達)만을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남은 세월 정도는 소림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문원은 코가 찡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괜히 가슴이 뜨끈해져서 목이 메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영달이 아닐세. 자네는 아주 옛날부터 소림만 알고 살아왔다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소림을 아낀 사람이 바로 자네야…….’
☆ ☆ ☆
날이 밝았다.
소림사의 산문에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소림사의 속가 제자들, 무 자 배와 원 자 배,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굉 자 배의 승려들. 그리고 소림사에 남아 있던 최고수들도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왔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보기 어렵다는 걸 알아서다.
장건은 자신을 배웅 나온 사람들을 보며 미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소림사에 온 지 십 년 하고도 보름 정도가 더 지났다. 예전에는 정말로 이날이 올까 싶기도 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찾아왔다.
옷도 장도윤이 준비한 새 옷을 입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고 옥이 박힌 건까지 두르고 나니, 그래도 제법 귀티가 나 보였다. 누가 봐도 부잣집 자제다.
소왕무가 과장되게 말했다.
“캬아, 인물 산다. 인물 살아. 이제 진짜 실감이 나겠구나.”
하나 정작 장건은 매일 깔깔하고 거친 무명 승복을 입다가 부드러운 옷으로 바꿔 입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리저리 팔을 움직여보며 대답했다.
“응. 아까까진 몰랐는데 옷을 입으니까 이제 정말 집에 가는구나 싶어.”
“기분은 어때?”
“어, 글쎄…….”
장건은 주체할 수 없어 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듬뿍 머금었다.
“좋아.”
대팔이 짐짓 투덜거렸다.
“야야, 섭섭하게. 우리랑 헤어지는데 뭐가 그리 좋냐.”
장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안해. 근데 가슴이 막 뛰고 기대되고 그래.”
“진짜 내가 너처럼 천하제일 고수가 됐으면 어휴, 그냥 이러고 살진 않았을 건데.”
대팔의 말에 곁에 있던 대사형 무진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하제일 고수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대팔이 너처럼 요령 피우면서 된 사람은 없단다. 네 꿈이 천하제일 고수란 걸 알았으니 내일부터는 이 사형이 좀 더 엄하게 수련을 시켜야겠구나.”
“에엑! 아니에요, 사형. 저 아직도 맞은 데가 안 나아서 삭신이 쑤셔가지고…… 아이고.”
대팔이 엄살을 피우면서 슬슬 물러나자 장내에 가벼운 웃음이 지나갔다.
무진은 장건을 보며 말없이 반장하는 것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장건도 몸에 익은 습관대로 합장을 꾸벅했다.
이어 장건은 최고수들에게 인사를 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히 저 때문에 여기까지 나오셔서…….”
자파에서 보내온 영약을 취하고 상세는 조금 나아졌으나 아직은 요양이 필요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억지로 여기까지 나와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벽력도가 답했다.
“괜찮다. 죽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만도 어디냐. 네 덕분에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저어기 어딘가에 뼈만 남아 묻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무영문의 화룡소도 한마디를 했다.
“너와 함께해서 즐거웠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을 거다.”
다른 최고수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그럼.”
운일도장은 자기 차례가 오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옛말에 가정유개진불 일용유종진도(家庭有個眞佛 日用有種眞道)라, 참 부처는 집안에 있고 참다운 도는 우리 사는 생활 속에 있다 했다. 네가 비록 소림사에서 떠난다 해도 매일을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게 곧 수행이니, 게을리 살지 말고…….”
운일도장의 말이 길게 늘어지자 최고수들이 타박했다.
“혼자서도 잘하고 있는 애한테 무슨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고 있나.”
“하여튼 누가 도사 아니랄까봐 꼬장꼬장해가지고, 쯧쯧.”
운일도장이 왈칵 화를 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럼 밋밋하게 그냥 인사만 하나? 어른이 되어가지고 뭐 기억에 남을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아냐!”
장건은 웃었다.
“아녜요. 잘 새겨들을게요.”
산산노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 이왕 이리 되었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힘껏 네 갈 길을 가거라. 언제고 다시 볼 날이 있을까는 모르겠다만, 살아 있다면…….”
최고수들이 다시 타박했다.
“아,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먼 길 가야 하는 애 붙들고 대체 왜들 그러는고?”
산산노사도 화를 냈다.
“헤어지기 싫어서 그런다, 왜!”
사람들이 왁 하고 웃었다.
산산노사가 투덜거렸다.
“에이이, 감정 메마른 놈들.”
최고수들이 아웅다웅하는 그 틈에 굉료가 장건에게 댓잎으로 싼 작은 꾸러미 하나를 건네주었다.
“자,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다. 가면서 출출하면 먹으려무나.”
장건은 그게 뭔가 싶었는데 퍼뜩 떠올랐다.
“제가…… 아! 월병!”
“휴. 요즘 공양간 녀석들 보면 하는 게 영 시원찮아서 맛이나 제대로 냈을지 모르겠다.”
월병을 보니 오래전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처음으로 암자에서 소림사의 경내까지 내려왔던 날이었다.
장건은 그때를 기억하며 인사했다.
“맛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굉료가 흐뭇한 얼굴로 장건을 보며 반장했다.
“그래. 잘 가거라.”
장건은 마지막으로 원호를 보았다. 다른 모든 이들이 잡담을 멈추고 원호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원호가 살짝 다리를 절며 앞으로 나왔다.
“굉운 사백께서는 몸이 좋지 않아 보지 않는 게 낫겠다고 하시더구나. 내게 대신 인사를 전하셨다.”
장건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원호가 빙긋 웃었다.
“이 녀석아,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남자애가 그리 마음이 약해서 힘겨운 세상 잘 살 수 있겠느냐?”
장건은 멋쩍게 웃었다.
“원호 사백님…….”
“그래.”
원호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기 위해서였으나, 결국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장건은 갑자기 가슴이 울컥 뜨거워져서 원호를 바라보았다. 원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눈으로, 하지만 어딘가에 미안한 감정을 안고 장건을 보고 있었다.
“사백님도…… 건강하세요.”
장건이 천천히 합장했다.
여전히 어색하고 뻣뻣한 동작이지만 거기에 담긴 장건의 진심을, 원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원호는 가벼운 고갯짓과 함께 반장하고는 금세 장건의 등을 떠밀었다.
“자, 그럼 부친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가거라!”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도윤이 허리를 굽히며 길게 읍을 했다.
“그간 부족한 자식 놈을 맡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호가 대표로 나서서 진중한 모습의 반장으로 응대했다.
장건은 장도윤에게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쉬움의 눈물이 살짝 맺혔다.
하지만 장건은 기쁘게 외쳤다.
“모두― 안녕히 계세요!”
검성 윤언강과 목숨을 건 일수를 던질 때조차 내지 않았던 장건의 큰 목소리였다.
☆ ☆ ☆
장건은 어색한 옷을 입고 어색하게 마차에 타고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잠깐만요.”
“왜 그러느냐?”
“들를 데가 있어요.”
장도윤이 마부를 불러 달리는 마차를 세우려 했으나 장건이 말렸다.
“괜찮아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혼자 잠시 들렀다가 집까지 갈게요.”
“혼자?”
“네.”
“집까지 가는 길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 기억할 수 있겠느냐?”
장건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도윤은 장건이 어딜 가려는지 알 것 같아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러려무나.”
장건이 약간 볼이 빨개져서는 몸을 일으켰다.
“네. 그럼 먼저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어쩐지 부끄러웠는지 장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분명히 위험한 행동인데 전혀 그런 느낌도 없이 어느샌가 장건은 마차보다 저 앞에 달려가고 있었다.
장도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아들은 무림에선 전(前)자를 붙여야 할 천하제일인일지 몰라도 실력만큼은 여전히 천하제일 고수였다.
☆ ☆ ☆
장건은 온 길을 조금 되돌아가 소림사 아래 작은 마을을 향했다.
장건이 들리려던 곳은 하분동이 사는 집이었다. 어제 의원에 갔다가 왔는지 집 근처에선 벌써 진하게 약을 달이는 냄새가 났다.
장건이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편에서 담요로 몸을 감싼 채 기둥에 기대 앉아 있는 운려와 약을 달이고 있는 하분동이 보였고, 물을 긷고 있는 하연홍이 보였다.
“아……!”
장건을 발견한 하연홍이 놀란 눈을 했다가 조금 기쁘게 웃었다.
“옷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멋있네.”
“어ㅡ 음. 고마워.”
장건은 하연홍의 앞까지 순식간에 걸어가 손에 쥔 꾸러미를 건넸다.
“이건 뭐야?”
“굉료 대사님께서 주신 월병이야. 나눠먹으려고.”
하분동과 운려도 장건을 보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냐?”
“예. 가기 전에 잠깐 들렀어요.”
하분동이 탕약을 달이느라 쉴 새 없이 부채질을 하며 예의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어제 인사했으니 오늘 올 필요 없다고 했는데 뭐하러 왔느냐.”
안색이 많이 나빠졌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운려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우릴 보러 온 거겠어요?”
장건은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휘저었다.
“아녜요, 아녜요. 몸은 좀 어떠신가 궁금하기도 하고…… 또 그래도 인사는 드리고 가고 싶고 그래서 온 거예요.”
운려가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어제 중요한 자리를 나 때문에 망쳐서 참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아버지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하연홍이 한숨을 쉬었다.
“아냐, 할머니. 미안한 일 맞아요.”
하연홍은 운려를 끌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 할머니 두고는 어디 안 갈 거예요. 돈도 다 돌려드리고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할머니 두고는 못 간다고 했어요.”
운려가 하연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연홍이는 다정하기도 하지……. 그렇지만 얘야, 이 할미는 살아있을 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시집가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그렇게 해준다면 난 더 행복할 게야. 네 어미도 그걸 바랄 거고.”
하연홍이 도리질을 쳤다.
“안 돼요, 할머니. 그러지 마세요. 지금 엄마 얘기 하는 건 너무 비겁해요.”
“하지만 네가 없어야 나도 네 할아버지와 더 오붓하게 지낼 수 있잖겠니?”
“할머니이!”
운려가 하분동을 바라보자 하분동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흠흠.”
하분동은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쪼그리고 앉아 부채질을 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제 그만 가라.”
갑작스러운 축객령이었지만 늘 그랬듯 그러려니 하는 장건이었다.
운려가 말했다.
“조만간 월하노인(月下老人)을 통해 소식을 전할 테니 아버님께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주겠니.”
“예. 그럴게요.”
하연홍이 칭얼댔다.
“아이 참, 할머니도? 나 진짜 시집 안 갈 거라니까요.”
“됐다. 내가 네 맘 모르니? 빼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너무 빼면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법이란다. 조금 전엔 왔다고 그렇게 좋아해놓고. 어서 인사나 하거라.”
운려는 칭얼대는 하연홍을 붙들고 장건에게 인사를 시켰다. 하연홍이 민망해하며 인사하려고 손을 들다가 문득 얼굴이 빨개져서는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뭐가?”
“다른 소저들…….”
장건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어딘가 모르게 계속 허전한데 그게 다른 소저들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건이 대답을 못하자 하연홍이 손을 흔들었다.
“아냐, 됐어. 잘가…….”
장건도 하연홍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응, 안녕.”
하연홍이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피이.”
그때 하분동이 잠시 방을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분동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조금만 바래다주고 오겠소.”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하분동의 속을 모르는 운려가 아니었다. 운려는 눈웃음을 하분동에게 전했다.
“그러세요.”
하분동은 쑥스러워하며 말없이 장건을 따라 집 밖으로 십여 걸음을 걸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장건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오래된 보따리라 낡고 색이 바래있었다.
“받거라.”
하분동의 눈에 살짝 감회어린 느낌이 스쳐갔다.
“네가 처음 암자에 왔을 때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이다.”
“이걸 아직까지 갖고 계셨어요? 와아…….”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가져간단 말이냐? 어차피 이젠 맞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네 물건이니, 챙겨주어야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던 하분동은 잠깐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주먹밥과 건량 조금 넣었다. 부친을 만났으니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겠지만, 사람은 늘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준비를…….”
구구절절 말을 하던 하분동은 자기가 왜 그러고 있나 싶었는지 그냥 장건에게 보따리를 안겼다.
“에잉! 내가 무슨 소리를. 어서 가라.”
하지만 장건은 그냥 갈 수 없었다. 자기가 올지 안 올지 모르면서도 미리 준비를 해놓은 하분동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노사님…….”
당연히 하분동은 화를 냈다.
“나는 이제 승려도 아닌데 왜 자꾸 노사님이라 부르는 거냐?”
“노사님은 뭘 하시든 저한테는 계속 노사님이니까요.”
“허어,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장건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제가 사형일 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노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싫다고 하셨으면 사제라고 불렀을 텐데요.”
“이 녀석이?”
말투는 성을 내는 듯했지만 하분동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생겨나 있었다. 다만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새 조금은 웃을 줄 알게 된 하분동이다…….
하분동은 아련한 눈으로 장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정말로 가거라. 너희 모친께서도 너를 오래 기다리셨을 게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 그렇게 되는 걸까? 장건은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하분동이 훨씬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그럼 진짜로 갈게요. 노사님, 안녕히 계세요.”
“오냐.”
하분동은 그냥 휙하니 돌아서 가버렸지만 장건은 한동안 하분동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장건은 벌써 집으로 들어가 보이지도 않는 하분동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합장했다.
“그동안 보살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꼭 다시 찾아뵐게요, 노사님.”
정중히 인사를 마친 장건은 허리를 펴고 보따리를 묶어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나선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자아, 그럼 이제 집에 가 볼까!”
☆ ☆ ☆
소림사에서 장건이 살고 있는 운성(運城)까지는 도합 구백 리 길이다.
낙양을 지나 신안을 거쳐서, 황하 중류에 있는 유명한 삼문협을 지나 사하(沙河)를 따라 올라가면 운성이었다.
매일같이 왕복 이백 리를 출퇴근하던 장건이니 구백리 길은 그리 부담스러운 거리도 아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왜 그동안 와보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장건은 널찍한 들판과 좁은 협곡과 각종 바위가 솟아난 강변을 마음껏 달렸다. 어떤 지형도 장건을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기운을 절제하고 아껴서 달려야 한다는 생각도 지금만큼은 들지 않았다. 바람을 타거나 혹은 바람을 맞부딪쳐서 거슬러 가며 장건은 쉬지 않고 달렸다.
때로 지나가는 행인들이나 소달구지를 몰고 가던 촌민들은 장건이 순식간에 지나가면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점심때가 되니 알아서 배 속 신호가 울렸다. 장건은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흘러가는 강물과 산새소리를 들으며 하분동이 넣어준 주먹밥을 꺼냈다. 꼼꼼하게 묶은 대나무 잎 안에 기름기 도는 찹쌀밥이 들어 있었다. 모양이 예쁘장해서 하분동의 솜씨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왠지 더 즐거워졌다.
주먹밥을 먹고 장건은 다시 달렸다.
주위 풍경이 서서히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바람결에 짠 내가 밀려들어왔다.
해주의 소금 호수인 염지(鹽池)에서 생산되는 하동염(河東鹽)의 냄새다.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건의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 빨리 달렸다. 어느덧 시내 중심가가 나타났다.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어렸을 때 자주 가서 놀던 풍동사(風洞祠)라 적힌 커다란 사당도 지났다.
반가운 풍경이 장건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오래전 울며 떠났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꿈에서 늘 그리던 그 모습 그대로의 커다란 장원이 장건의 눈에 들어왔다.
장원의 앞에는 한 명의 시비와 함께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으로 중년의 미부(美婦)가 서 있었다.
장건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차를 타고 제대로 도착하려면 아직 사흘은 더 기다려야 할 텐데…….
장건은 속도를 천천히 줄일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중년 미부의 앞에 나타나버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먼지와 흙 구름이 일어 장건이 달리던 방향으로 멀리까지 날아갔다.
중년 미부는 바람과 함께 갑자기 자신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 때문에 깜짝 놀랐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다.
미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지났어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자나 깨나 매일같이 염불을 드리며 무사귀환을 빌던 아들이었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얼굴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몇 개나 그어져 있고, 목이며 손이며 드러난 부분마다 끔찍한 상처의 흔적이 보였다.
손씨 부인이 기억하고 있던 고운 손과 통통한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어도 그래도 눈앞에 있는 건 분명 자신의 아들이었다.
손씨 부인은 다른 이들이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면 늘 하는 말처럼 ‘우리 아들 맞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장건의 얼굴을 더듬었고, 훌쩍 세월을 뛰어넘어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장건을 와락 안았다.
장건도 꿈에 그리던 모친의 품에 한껏 안겼다. 아니, 반대로 장건이 모친을 안았다. 어느덧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버렸다.
어렸을 때의 기억보다는 많이 좁아진 품이었지만 그래도 엄마의 품은 여전히 포근하고 따스했다. 그리웠던 엄마 냄새도.
손씨 부인은 엉엉 눈물을 흘리면서도 뭐라고 먼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건의 얼굴에도 한참이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었지만 얼마나 눈물이 많이 흐르는지 장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이제껏 버틸 수 있었으니까.
장건은 울음을 꾹 참고 대신 모친을 꼭 안았다.
그리고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조그맣게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손씨 부인은 다시금 확 터져 나온 울음을 참으며 그녀가 오랜 동안 기다려왔던, 입에서만 맴돌았던 그 말을 마침내 토해냈다.
“그래, 우리 아들. 집에 잘 왔어.”
최종장 내일의 삶
“으아악! 마님, 제발.”
“저희들 좀 살려 주십쇼!”
손씨 부인은 마구 달려와 발아래 엎드리는 상단의 식솔들을 보며 난감해 했다. 장원의 시비들부터 행주, 점주들까지 난리가 났다.
상단의 회계를 맡은 양 노대가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소개(小開) 좀 말려 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희가 말라 죽습니다.”
“일어나세요, 용두(龍頭)가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손씨 부인은 옆 점포의 구 노대를 보고도 말했다.
“호손(猢猻)도 일어나세요.”
“소개가 저러고 계신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러면 저희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용두는 회계담당이고 호손은 지배인이다. 둘 다 낮은 지위가 아닌데 살려 달라고 저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개는 상인 간의 은어로 작은 주인[小主]을 뜻한다.
즉, 장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손씨 부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함께 가 봅시다.”
하지만 손씨 부인은 자신이 가 봐야 별 도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안주인이 되어서 상단 식솔들의 불만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손씨 부인은 장건이 있다는 접객당으로 갔다. 몇 개의 수화문을 거쳐 접객당에 도착하자 손씨 부인은 심호흡을 했다.
접객당의 문을 여는 순간 숨 막히는 공기와 부담스러운 광경이 손씨 부인을 덮쳤다.
벽에 걸린 족자와 몇몇 귀한 자기가 올려진 선반들, 고급 의자와 탁자, 격자로 장식된 둥그런 창문.
모든 것이 다 정렬되어 있는 듯 보였다. 하나…… 그게 너무 심해서 문제였다. 바닥에 깔린 융단은 실밥 하나 튀어나와 있지 않고 네모반듯하며, 서가에 놓인 책들은 분명 모두 구하기 힘든 고서(古書)인데도 새것마냥 반짝거린다.
심지어 실내에는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해서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앙에 장건이 서 있었다. 장건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걸어 다닐 뿐인데 빗자루가 허공을 떠다니고, 발아래에서는 먼지덩어리들이 둥글게 모아져 다소곳이 장건을 뒤따르고 있었다.
“아……!”
손씨 부인은 머리가 핑 돌아 비틀거렸다. 시비들이 손씨 부인을 부축하려 했는데, 어느샌가 손씨 부인과 자신들의 사이에 장건이 끼어 있었다. 손씨 부인은 보이지 않는 뭔가에 기대어서 허공에 사선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오셨어요?”
한숨을 내쉰 손씨 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장건에게 말했다.
“청소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하였잖니.”
장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물론 뒷머리만 움찔거리며 움직이고 장건은 손도 안 댔다.
“공부도 다 했으니까 잠깐 몸도 풀 겸 하는 거예요.”
“네가 너무 깨끗하게 해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한단다.”
“어지르면 또 치우면 되는 걸요.”
“아랫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깨끗해도 보통 깨끗해야 어지럽힐 생각이나 들지, 어딘가 꺼림칙해서 아예 기피하게 되는 게 보통 사람들이었다. 손님들조차도 방문을 꺼릴 정도라니…….
손씨 부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장건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상하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배길 수가 없어요.”
손씨 부인은 아들의 눈에 어린 공허함을 보았다.
장건은 방황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석 달째가 되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이다.
손씨 부인도 처음엔 장건이 워낙 험한 데 있다가 돌아와 조금 심심해서 이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더구나 집에는 온통 상인뿐인지라 무림에 관계된 사람이 없으니 장건이 그간 겪은 경험이나 대화를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장건이 방에 가 있겠다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손씨 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찍었다.
‘불쌍한 우리 아들. 하루빨리 혼사를 진행해야 좀 나아질 텐데…….’
장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멍하니 서 있었다.
몸에 걸친 비단옷은 여전히 어색하고 최대한 검소하게 꾸민 방 안도 불편했다.
내내 자신이 있어야 할 데는 여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여기가 집인데 집에 있지 않으면 어딜 가야 할까?
마음을 둘 데가 없어서일까?
그렇게 원하고 바라던 집에 왔는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하아.”
장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죽하면 백 장 거리 밖에 있는 무림인들을 찾아가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그러면 기분이라도 좀 풀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장건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장건도 그들이 자신의 근처에서 얼쩡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가촌에서처럼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장건과 놀아주기 위해 대기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제 그곳, 무림은 더 이상 장건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장건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장원에서 일하는 일꾼이 무슨 일인지 급하게 장건을 찾아왔다.
“도련님.”
일꾼의 표정이 좋지 않아 장건은 불안해졌다.
☆ ☆ ☆
화르륵.
빨간 불티가 연기와 함께 이리저리 흩날렸다.
하분동이 지전(紙錢)을 불사르자 하연홍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할머니……, 할머니!”
소림사에서 나온 무진이 운려의 명복을 빌며 경을 읊는 내내 하연홍은 엉엉 울었다.
사십구재의 칠 일째 장례식순이 끝날 때까지 하연홍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전을 모두 불사르고 난 하분동이 잠깐 제단을 보고 있다가 장건을 보고 말했다.
“바람 좀 쐬자꾸나.”
장건은 자꾸만 솟던 눈물을 훔치고는 조용히 하분동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청명한 밤하늘의 공기가 답답한 마음을 조금 개운하게 했다.
하분동은 뒷짐을 지고 해가 진 남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했다.
“와 줘서 고맙다.”
“고맙긴요, 부모님은 아마 사십구재가 끝날 단칠(斷七)날에 오실 것 같아요……, 네?”
장건은 말을 하다말고 놀라서 하분동을 쳐다보았다. 하분동이 고맙다는 인사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다니?
그런데 장건이 본 하분동의 표정은 조금 이상했다. 하연홍과 다르게 슬퍼하는 빛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구 기뻐하는 것도 아니지만 담담한 가운데 오히려 약간의 미소까지 짓고 있어서 의아하기까지 했다.
“노사님……?”
하분동이 왜 그러냐는 듯 돌아보았다. 장건은 조금 화가 나기도 해서 따지듯 물었다.
“노사님은 슬프지 않으세요?”
하분동은 입가에 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장건이 본 하분동의 표정 중 가장 부드러운 미소였다.
“연홍이도 며칠 전에 너처럼 똑같이 묻더구나.”
“전혀 상중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요. 혹시 어디가 아프시다던가…….”
“나라고 왜 슬프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웃고 계세요?”
하분동은 다시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감정을 되새기는 듯, 한참이나 그대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때문에 행복…… 해서라고 하면 네가 이해하겠느냐?”
“네?”
장건은 더 이상해졌다. 전혀 하분동답지 않은 말투였다.
“하지만 두 분이 함께 계셨던 건 잠시였잖아요.”
“그래. 잠시였지. 그래도 어쩌면…… 내 생애 다시 보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너를 처음 만났던 그 산중에서 평생을 쓸쓸히 살다가 그렇게 죽어갈 수도 있었다.”
잠시 묵묵히 있던 장건이 물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도, 그래도 행복하세요?”
“그래.”
“어째서요?”
“추억 때문이다.”
장건이 소리쳤다.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사람이 돌아가셨는데 추억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실 수 있어요?”
“추억 때문에 행복한 게 아니라, 그 추억이 상상도 못할 만큼 내게 소중한 선물이었다는 걸 깨달아서 행복한 게다.”
하분동은 잠깐 장건을 쳐다보았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내 사부를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덕분에 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하분동은 지그시 장건을 응시하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에 그리 어색하던 미소가 이제는 완전히 하분동의 것이 되어 있었다…….
장건은 그걸 깨닫고는 알 수 있었다.
정말로 행복해하고 있다는걸.
그렇다고 하분동이 슬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웃고 있는 하분동의 눈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슬프지만 그 슬픔보다도 둘이 함께한 추억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울면서도 행복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장건은 조금이나마 하분동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분동이 크게 숨을 내쉬더니 장건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어떠냐?”
하분동의 물음에 장건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모르겠어요.”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 했잖으냐.”
“막상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엄마도 아빠도…… 모두 잘해 주시지만요, 어색해요. 제가 어울리지 못하고 떠도는 것같이 느껴져요.”
장건은 언젠가의 검성 윤언강을 기억했다. 윤언강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있다가 장건에게 검무를 보여준 날이다.
풍진의 말에 의하면 윤언강은 홍오를 쓰러뜨리고 며칠 동안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고 했다. 홍오를 쓰러뜨리겠다던 평생의 꿈을 이룬 후에…….
“그때 풍진 할아버지가 그랬었거든요. 목표만 향해 달려간 삶은 목표를 잃었을 때 허망해지는 법이라고요. 인생의 반 이상을 차지해왔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공허한 기분…… 몸에서 커다란 게 빠져나간 듯 허탈한 기분…… 뭔지 모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알쏭달쏭한 기분이래요.”
지금 장건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장건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하분동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말이다.”
“네.”
“어렸을 땐 추억을 쌓아가며 살다가 어느 순간 때가 되면 그때까지의 추억을 되새기며 살아간다 하더구나. 함께한 추억을 하나씩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수 없어.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지.”
“네…….”
“그런데 목표만 바라보고 산 사람은 나중에 곱씹을 게 없다. 길을 가는 데만 집중해서, 막상 도착하고 나면 도착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장건은 하분동의 말에 빠져들었다.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주변을 보며 걸었다면,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많은 걸 떠올릴 수 있을 게다. 길옆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야생화나 산과 들을 찾아온 계절의 풍경들, 작물을 심고 있는 농사꾼들의 땀 어린 얼굴 표정들……. 그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고 걸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지. 예전의 나처럼 말이다.”
장건이 하분동의 말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제일 하고 싶은 건 집에 가는 거였지만…… 생각해 보면 노사님과 함께 있을 때도, 소림사에 있을 때도 매일 즐겁지 않았던 건 아니었어요.”
하분동은 장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앞으로 네가 할 일은 가족들과의 추억을 천천히 쌓아가는 게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뚜렷한 목적이 없더라도 당분간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하분동이 표정을 살짝 굳히면서 엄하게 말했다.
“물론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어두웠던 장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제가 무엇을 해야 할 지도요. 고맙습니다, 노사님.”
“그래.”
하분동도 장건도 기분 좋게 웃으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때 하연홍이 퉁퉁 부은 눈으로 다가왔다.
“내게도 고마워해줬으면 좋겠어.”
“응?”
“내가 생각해봤는데……, 지금 이런 얘기를 해야 할 때는 아닌 것 같긴 하지만…….”
하연홍이 우물쭈물하면서 하분동을 보자, 하분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할머니의 유언이기도 하니.”
하연홍은 살짝 입술을 모았다가 한 번에 털어내듯이 쭉 말했다.
“이번 시험. 본래 조건은 정실을 두고 한 거였지만…… 난, 괜찮으니까 그냥 다 받아들여도 될 거 같아.”
장건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박거리고 있으니 하연홍이 짐짓 삐친 얼굴을 했다.
“바보야, 꼭 본처가 나 하나가 아니어도 된다고!”
“어?”
“어쩔 수 없잖아. 영웅은 삼처사첩이라니까. 꼭 측실 없이 사처(四妻)가 된다고 해서……, 거기다 유명 세가의 여식들인데 첩이라고 하면 그쪽 가문들의 체면도 좀 그럴 테고……. 물론 할머니가 그러라고 한 말이야! 진짜로 더 이상은 안 돼!”
장건이 얼떨떨해서 머리만 긁고 있으니 하연홍이 하분동을 살짝 돌아보았다가 말했다.
“나보다도 더 오래 추억을 쌓아왔던 언니동생들이잖아, 그 세 소저. 할아버지 말처럼 그런 소중한 추억을, 그 추억을 더 쌓아갈 수 있는 기회를 내가 갑자기 막아버리는 건 옳지 못한 것 같아서.”
하연홍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려웠던 말을 잘했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장건을 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상을 치를 동안, 기다려 줘야해. 알았지?”
장건은 하연홍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가슴속에 허전했던 마음들이 밝아지는 걸 느꼈다.
제갈영과 백리연, 양소은들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자 그때의 즐거웠던 감정까지 되새겨졌다.
‘그래서 그랬구나…….’
하분동의 말처럼 소중하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왜 그동안 힘들었는지 이제야 스스로를 알게 된 장건은 이내 하연홍과 시선을 마주하며 힘차게 끄덕였다.
“응.”
하분동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흘러가는 밤하늘을 따라 무진의 낭랑한 독경 소리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 ☆ ☆
장건의 무용담은 아직도 종종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얘깃거리였으나, 장건이 강호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중심 화젯거리는 아니었다.
강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매일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나간 천하제일인을 그리워하며 살기엔 강호는 너무나 바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건을 매일 되새기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장건이 ‘강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도록’만들어야 하는 이들이었다.
“뭣이?”
장건을 감시하는 감시조의 조장으로 남궁가에서 차출된 남궁고는 방금 전해들은 소식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산적 놈들이 운성방의 표물을 건드렸다고?”
“네. 이번엔 하북에서 산동으로 넘어가는 안령산의 산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멍청한 산적 놈들은 소문도 안 듣고 사나! 무슨 배짱으로 자꾸 운성방을 건드려!”
“산속에서 지들끼리만 사는 놈들이라 정보공유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부조장의 보고에 남궁고는 오만상을 쓰며 고민했다.
부조장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남궁고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게 아니라, 장건이 어떻게 나올지 물은 것이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리가…….”
그때 다른 감시조원이 급한 소식을 전해왔다.
“‘그’가 표물을 찾기 위해 움직일 예정이랍니다!”
남궁고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장건이 산적들을 찾아가 다 때려눕히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강호의 은원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 일이 또 어떤 경우의 사건으로 촉발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가장 좋은 건 장건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발생할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남궁고가 휘갈기듯 전서를 써서 조원에게 건넸다.
“황보가에 연락해라! 당장 안령산으로 달려가라고 해!”
전서구를 받은 황보가의 무인들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 안령산의 산적들을 소탕했다.
소탕이라고 해서 모조리 몰살시키는 게 아니었다. 장건의 의심을 사거나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살수도 거의 쓰지 않고 제압해야 했다.
그리하여 장건이 운산에 도착했을 때…….
장건은 표물을 고스란히 실은 마차와 함께 땅바닥에 오체투지하여 엎드린 산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희가 대인의 표물임을 몰라 뵙고……!”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목적지까지 책임지고 호송해 드리겠습니다!”
산적들이 통곡하며 장건에게 애원했다.
장건은 조금 머쓱해했지만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렸다.
“이럴 땐 편하네.”
덕분에 운성방의 신용은 전 중원에서도 내로라할 정도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 ☆ ☆
멀찍이서 주변을 맴도는 무인들의 존재는 장건에게 사실 별다른 부담이 아니었다.
그들은 장건과 무림을 가로막는 벽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 무림과 떨어지고 싶던 장건으로서는 그들의 존재가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장건은 약간의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직접 세 소저들을 찾아가 하연홍의 얘기를 해보려 했는데 잘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상단의 일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장건도 자유롭게 시간을 내긴 어려웠다. 그런데 힘들게 시간을 내어도 찾아갈 때마다 왠지 다들 어디론가 나가 있어서 도무지 만날 수가 없었다.
혹시나 거짓말로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해서 기감을 최대한 느껴봤지만 정말로 없었다.
그렇게 양가장과 제갈가, 백리가에 번갈아 찾아갔지만 그냥 돌아와야 했던 게 벌써 여섯 번, 두 달이 훌쩍 지났다.
결국 장건은 참지 못하고 움직였다.
장건을 감시하는 감시조는 평범한 서점으로 위장한 전각을 이용하고 있었다.
남궁고는 서점 주인의 행색으로 서점 안을 거닐고 있다가 또다시 장건과 관련된 보고를 받았다. 평범한 복장을 한 감시조원이 안채 쪽의 비밀 통로를 통해 급하게 뛰쳐나왔다.
“‘그’가 움직였습니다! 오늘은 백리가를 방문할 거라고 모친에게 말한 뒤에 곧장 장원을 나갔다 합니다!”
이미 몇 번이나 있던 일이기에 남궁고도 차분하게 대응했다.
“예상 시간은?”
“일각 전에 출발했다 하니 호북의 백리가까지 두 시진 후, 신시(申時)면 도착할 겁니다.”
“그래, 그럼 여유가 있으니 삼 번 전서구로 백리가에 알리도록. 백리가가 얽히지 않도록 돕는 것도 우리 일…….”
휘익!
갑자기 거센 돌개바람이 일었다.
남궁고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너무 놀라서 머리칼이 다 바짝 서버렸을 정도였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장건이 서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곁눈질로 힐끗 보니 감시조원은 다리까지 덜덜 떨었다.
이 순간만큼은 남궁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막막해졌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게다가 장건은 남궁고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다 알고 왔다는 듯.
남궁고는 장건에게서 아무런 무위도 느낄 수 없어서 더욱 두려웠다.
남궁가에서는 제법 한 가락 한다는 말을 듣지만, 그런 그로서도 장건의 무위는커녕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조차 알아챌 수 없었다. 장건은 자신의 까마득히 높은 저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남궁고는 장건이 알아채지 못하게 애써 두근거림을 감추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거짓 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어서 오시오, 공자. 찾는 서책이라도 있으시오?”
장건은 잠시 더 말없이 남궁고를 쳐다보기만 했다. 남궁고는 ‘허허’웃으면서 억지로 긴장을 버텨냈다. 잠깐의 침묵이 그에겐 길고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장건이 입을 열었다.
“지나가다가 서점이 있기에 들러봤어요.”
“아, 그…… 그러셨소? 마음껏 둘러보시구려.”
“네.”
장건은 그제야 서점 안을 가볍게 돌아보았다.
“…….”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장건이 서반에 놓인 서책들을 조금 둘러보더니, 다시 남궁고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궁고와 감시조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장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꼭 가볼 데가 있어서요.”
“허허허, 그러시오. 언제든 환영이오. 허허.”
장건은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순간 경공을 썼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감시조원이 ‘푸헉!’하고 숨을 크게 내쉬면서 물었다.
“우, 우릴 알아챈 걸까요?”
남궁고가 생각해보았으나 아무래도 애매하다.
“글쎄, 정확하게 알아보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정말로 그냥 들른 것일 수도 있고 우릴 수상히 여겼을 수도 있겠지.”
“허면 백리가에는 어떻게…….”
“끄응.”
남궁고는 골치가 아파왔다.
감시조원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제 귀에는 마지막에 ‘그’가 한 말이 경고처럼 들렸습니다. 만약 그게 정말 경고였다면, 백리가에 알리는 건…….”
한참을 생각하던 남궁고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백리가에 전갈을 보내지 않는다.”
“예? 하지만 만일 다시 인연이 이어지게 되면…….”
“제아무리 추룡검 백리상이라도 거부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가문에서 딸을 쫓아내든, 아니면 딸에게 절대로 강호의 일에 개입하지 않게 단속을 시키든 오늘은 백리가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남궁고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조만간 이곳에서 철수한다. 다른 곳으로 거점을 옮길 준비를 해라.”
백리가의 인물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감시조로부터 아무런 전갈도 받지 못했는데 장건이 백리가의 장원에 도착한 것이다. 더구나 이미 장건과 백리연은 문 앞에서 마주친 채였다.
백리상이 뒤늦게 뛰어나왔으나 말릴 수가 없었다.
당금의 강호에서 누가 장건을 말릴 수 있겠는가!
백리상은 크게 한탄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백리연은 장건을 보며 활짝 웃었다.
장건은 처음 집으로 돌아온 예전의 모습하고는 조금 달라졌다. 먹는 것이 다르니 살도 좀 붙었고 키도 컸다. 약간 사내다운 티도 났다.
그렇대도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하진 않았다.
“기다렸어요.”
백리연의 말에 장건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좀 늦었어요.”
백리연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니 장건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가슴 속에서 뚫려 있던 허전한 구멍 하나가 채워졌다.
장건은 행복해서 웃었다.
백리연이 장건의 웃음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함께 웃었다.
☆ ☆ ☆
어느새 장건이 소림사를 떠난 지도 일 년이 지났다.
강호를 주유하던 원호는 산서지방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이 나 장건이 있는 운성방을 찾았다.
늘 사람이 많은 운성방이지만 오늘은 유독 어딘가 모르게 번잡해 보였다.
원호가 탁발승의 행색으로 깊이 삿갓을 눌러쓴 채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나이가 굉장히 들어 보이는 노승이 장원의 대문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허리가 굽었고 불장을 지팡이 삼아 겨우 걸음을 걷는데 곁에서 부축하고 있는 젊은 승려가 없다면 그나마도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원호는 어쩐지 노승의 낯이 익숙해 가만히 보고 있다가 반가움에 소리쳤다.
“아니? 금오 스님이 아니십니까?”
“응? 누구여?”
금오는 눈썹으로 하얗게 뒤덮인 눈꺼풀을 겨우 들어서 원호를 보았지만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원호가 삿갓을 들고 얼굴을 보여도 마찬가지였다.
곁의 젊은 승려가 합장하며 말했다.
“나이가 많이 드셔서 요즘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허어…… 그러셨구려.”
나이가 들면 하루가 일 년 같다더니 마지막으로 본 지 이 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는데 훌쩍 노쇠해진 금오였다.
“그런데 스님께선…….”
젊은 승려가 원호를 유심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앗! 설마 워, 원호 대사님……! 몇 년 전에 선사님을 모시고 소림사에 갔다가 뵈었습니다.”
원호는 허허 하고 웃었다.
“이제는 그저 파계승의 몸으로 탁발이나 하고 다니는 가짜 중이라네.”
“아, 나무아미타불…… 어쩌다가 그런 일이…….”
원호가 소림사에서 파계당한 건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림사의 주지이자 방장이었던 원호였는지라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하나 어차피 소림사가 강호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호는 금세 원호의 일을 잊었고 원호는 편히 강호유람을 할 수 있었다.
“한데 여기는 어인 일이신가?”
원호가 묻자 젊은 승려가 공손히 대답했다.
“여기 큰스님께서 장 대인께 연락을 받고 사주를 짚으시더니 꼭 오셔야겠다고 해서요.”
“사주라니? 한데 왜…….”
왜 돌아가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갑자기 대문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애애애애―!
그러더니 하인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대문에 붉은 천을 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원호가 크게 기뻐하며 하인에게 물었다.
“이 집에 경사가 있소이까?”
하인이 황급히 합장을 하면서 대답했다.
“예, 주인마님께서…….”
주인마님?
갈수록 이상해지는 얘기에 원호는 알쏭달쏭해져서 다시 물었다.
“이 집의 장건이란 시주를 말하는 거요?”
하인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련님이 아니라 주인어른의 아이입니다. 도련님의 동생분이 태어나셨습니다.”
“어허?”
원호가 뜻밖의 대답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금오가 뒤에서 크게 탄식하듯 말했다.
“다시 일만 배를 올리러 가야겠구나! 부처님께서는 내 한 몸뚱이가 편한 걸 못 보시겠는가보다!”
이어 하인이 대문에 이것저것 금줄을 걸고 비단 글씨를 붙이기 시작했다.
금오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대문에 붙인 글씨를 읽더니, 크게 휘적이며 불장을 치켜들었다.
“농와지희(弄瓦之喜)란다. 가자, 이놈아!”
“아이고, 큰스님. 아니 되십니다. 나이를 생각하셔야지요.”
“아니다! 조금이라도 기운이 남아 있을 때 불덕을 쌓아야지!”
젊은 승려가 원호에게 급하게 합장을 하고는 다시 금오를 부축하고 길을 떠났다.
“이번엔 어디로 가시려고요?”
“아미파로!”
원호가 멍하게 있다가 ‘아미파?’하고 중얼거리는데 대문 안쪽에서 환호와도 같은 기쁨에 찬 목소리들이 줄줄이 들려왔다.
“우와아! 내 동생이에요?”
“축하해요! 동생이 어머님을 닮아서 너무 예뻐요.”
“가가! 우리는 언제 귀여운 애기 낳을 거야?”
“어어, 그건 좀…….”
“우리도 부모님께 밀리지 말자구요!”
“으아앗! 우린요, 아직 혼인도 안 올렸다고!”
“아이 참, 난 아명(兒名)도 다 지어놨는데. 그것도 네 개나.”
난리법석이었지만 그만큼 흥겹고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였다.
원호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인이 대문 장식을 마치고 그제서야 원호를 돌아보았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스님!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금세 안에서 공양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스님…… 어라?”
하지만 하인의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호는 이미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멀찌감치 걸어가고 있었다.
원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미파라!”
☆ ☆ ☆
중군도독 우이첨은 요즘 살맛이 났다.
도둑맞았던 돈도 찾았고, 그 돈을 자신이 책임지고 사비로 충당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오히려 황제로부터 신임도 두터워졌다.
때문에 도독부에는 우이첨의 환심을 사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었고, 사람이 늘수록 우이첨의 창고에도 재물이 늘어갔다.
“허 참.”
우이첨은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문득 옛날 생각이 나 다리를 꼬았다.
“예전엔 대체 왜 그랬지?”
부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또 그 얘기십니까?”
“참 희한하지 않나. 작년엔 하마터면 망할 뻔할 정도로 돈 나갈 일들뿐이더니, 요즘은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지 않는가.”
“이게 정상이지요. 그땐 제가 보기에도 마치 마가 낀 듯이…….”
“그랬지?”
우이첨은 차를 마시곤 다시 ‘허’하고 감탄성을 냈다.
“그래도 지나고 나니까 참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게, 덕분에 내 덕망이 꽤 오르지 않았는가. 백성들이 요즘도 그렇게 나를 칭송한다면서?”
“도독께서 잊지 않고 아직까지 그들에게 베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서도…….”
우이첨은 갑자기 생각이 나 물었다.
“맞다. 그 소림사는 어떻게 됐지? 방장 대사가 쫓겨났다더니.”
“한동안 강호 일을 접고 나서 재정도 회복하고 호국법회도 주관하며, 별 문제없이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그럼 그 교두했던 장건이란 친구는?”
“가업을 잇겠다고 운성방에서 상단 일을 하고 있다 합니다.”
“혼인은?”
“몇몇 가문과 혼담이 오가는 중이긴 한데, 내정된 여아가 상을 당해 조금 늦춰진 것 같습니다.”
말을 하던 부관이 되물었다.
“저, 혹시…….”
우이첨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내가 욕심 부리면 안 될 거 같아?”
“그게…… 무림도 그렇고 동창까지 연관되어 있어서……, 한때 금의위에서 부마 얘기도 꺼냈다가 동창의 반발로 지금은 쏙 들어간 모양입니다. 이후로도 여기저기 동창에서 경고하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만.”
“허허, 금의위와 우리가 같나? 요즘이라면 정 독주도 내게 고개를 조아리고 다닌다네. 황궁에서 투닥거리나 하는 그네들과 황상의 신임을 받으며 사십 만 정예병을 이끄는 병권을 쥐고 있는 나는 다르지. 생각해 보게나. 최고의 상단을 물려받을 장자이자 천하제일 고수인 사위가 내 옆에 있어준다면 아주 든든하지 않겠는가.”
“하기야…… 막말로 강호 무림을 은퇴한 자이니 군부에 있기는 더욱 좋은 셈이지요.”
우이첨이 은밀히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자네가 직접 한 번 잘 알아보게. 우리 우희가 또 어디 가서 떨어지는 편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장 방주를 만나 혼담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거절은 신중하게 해야 할 거라고 잘 알아듣게 설명해주고.”
우이첨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도 산전수전을 겪은 이인지라 자신이 원하는 게 아무런 대가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았다. 강호 무림이나 동창과의 갈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원래 더 필요한 게 있고 더 갖고 싶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이용해서라도 쟁취하고 얻어내야 하는 법.
가진 게 많은 자신에게 유리한 싸움이지만, 어쨌거나 원래 세상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 ☆ ☆
눈 덮인 대지는 녹을 줄 모르고, 사시사철 차가운 바람과 한기가 맴도는 곳.
일 년 중 한 달만 자태를 보인다는 얼어붙은 호수 또한 북해의 익숙한 풍경이다.
그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다섯 명의 노무인들이 얇은 옷만 걸친 채 호수에 구멍을 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우내십존이었다.
검왕 남궁호가 낚싯대를 잡고서 표정을 찡그렸다. 얼어붙은 수염에서 하얀 서리가 우수수 떨어진다.
“오늘은 입질이 시원찮네.”
환야 허량은 춥지도 않은지 얼어붙은 바닥을 뒹굴거렸다.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겐가?”
남궁호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누가 윤가 놈의 생각에 맞장구를 친 건가? 윤가 놈은 왜 생각도 없이 소림사에서 그런 짓을 해가지고.”
풍진이 클클 대고 웃었다.
“있기 싫으면 돌아가던지?”
한쪽에서 눈 내린 설화(雪花)를 구경하고 있던 연화사태가 혀를 찼다.
“윤가가 옴팡지게 일을 저지른 바람에 강호에선 우리를 아예 역적으로 안다던데, 돌아가긴 대체 어디로 돌아간단 말이요?”
오황이 기지개를 켰다.
“마해 그 친구처럼 가면 되지. 언강이가 잡히고 북해 애들이 돌아오니까 미련 없이 떠나던데?”
“그야 천문서원이 강호에 드러난 곳이 아니니 그렇지. 우리와는 경우가 다르잖소, 경우가. 당장에 우리가 돌아가면 우리 애들이 곤란해 할 게 뻔한데 어찌 돌아간다 말이요?”
“왜? 나는 여기가 더 좋은데.”
오황이 피식피식 웃자 연화사태가 삐친 투로 말했다.
“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심심하잖소. 안 심심해?”
그 말에는 네 우내십존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심심하지.”
허량이 뒹굴거리다가 손짓하자 멀찍이 호숫가에 대기하고 있던 북해빙궁의 시비들이 음식을 들고 와 바쳤다. 허량은 북해에서만 나는 참외처럼 생긴 과일을 들고 한 입 베어 먹으며 말했다.
“이렇게 한가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심심한 건 도무지 못 참겠군.”
오황이 꾀를 짜냈다.
“그럼 심심하지 않게 해 볼까? 우리가 가기 좀 그러면 오라고 하지, 뭐.”
“뭘 말인가?”
“까짓 강호에 몇 마디 흘리면 되는걸. 우리들의 비급이 북해빙궁에 묻혀있다더라……, 어때?”
“오호, 그럼 다들 앞장서서 달려들 오겠구려.”
풍진이 물었다.
“그런데 비급이라니? 비급은 어딨는데?”
오황이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우리가 살아있는 비급이지. 없으면 쓰면 되고.”
“허이구.”
연화사태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오황을 째려보았지만, 입가에는 흥미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풍진도 한쪽 입을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애초에 우리가 윤가 놈에게 검에서 패배해 따른 것도 있지만, 강호에 자극이 필요하다는 뜻에 동조해서가 아니었겠나?”
오황이 북해빙궁의 시비들에게 소리쳤다.
“어이, 너희들! 당장 붓과 종이를 가져오너라!”
오황은 붓과 종이를 들고 이것저것 휘휘 쓰고 그렸다. 맨 앞에는 풍연경의 비급이라고 적었다.
그러다가는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오황은 고개를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안 되겠지?”
우내십존들이 허무한 실소를 지었다.
“에라이, 역적으로 족하자. 자라새끼라고 욕까지 먹을라.”
오황은 붓과 종이를 던져버리고 허량처럼 뒹굴거렸다.
“어, 심시이이임하다. 뭐 재미난 일 좀 없나?”
☆ ☆ ☆
온통 바위로 만들어진 곤유산.
그 중간에 옥빛 물결이 잔잔히 헤엄치는 구룡지(九龍池).
종암은 전진파의 도사복을 입고 구룡지에 지어진 정자에 올라 앉아있었다.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 그의 앞에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양장탕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가파른 바위를 밟고 깃털처럼 가볍게 산을 오르는 한 인영이 있었다.
가벼운 경장차림인데 손에는 묵직한 언월도를 들었고 허리에는 황상이 하사한 보검을 매달았다.
금월사자 유장경이다.
유장경은 정자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종암은 그런 유장경을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두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얼굴에도 시퍼런 핏줄이 돋아나 있어 끔찍한 몰골이었다.
종암이 말없이 앞자리를 권했다.
유장경은 고개를 저었다.
종암이 양장탕에 나무젓가락을 꽂아 유장경에게 던졌다. 양장탕은 국물 한 방울도 넘치지 않고 곧장 유장경에게 날아갔다.
유장경이 언월도의 옆면으로 양장탕 그릇을 받았다. 양장탕 그릇이 언월도의 옆면에서 핑그르르 돌다가 멈추었다. 하지만 유장경은 양장탕을 먹지 않고 언월도를 뒤집어 양장탕을 바닥에 쏟아버렸다.
땡그랑.
그릇이 바닥에 엎어져 굴렀다.
그 모습을 보고도 종암은 웃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단지 짧게 양해를 구했을 따름이었다.
“잠시 기다려주겠나?”
종암은 양장탕과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후룩 소리를 내며 양장탕을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유장경이 정자를 올랐다. 종암은 아무런 대응이나 반항도 하지 않았다.
유장경이 언월도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언월도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언월도의 날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종암은 계속해서 양장탕을 먹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유장경이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잘 가시오.”
그 말에 국물을 마시는 종암의 표정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져갔다.
그는, 이제야 해방되었다.
☆ ☆ ☆
마해 곽모수는 심산유곡에 자리 잡은 천문서원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유생들이 조용히 곽모수를 마중했다.
천문서원의 유생들은 다들 강호를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몇 년씩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곽모수도 평소와 다름없이 강호에 나갔다가 아무 일 없이 돌아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생들의 마중을 받으며 곽모수가 물었다.
“잃어버린 비록은 회수했느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유생 한유가 장건에게 받은 곽모수의 천문비록을 건네주었다.
“삼황선원에서의 기록은?”
뒤쪽에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유생이 읍을 하며 나왔다.
“제가 참관하였습니다.”
“그래. 다른 문제는 없었느냐?”
“북해빙궁과 황도팔위의 기록을 추가할 수 있었으며 화산파의 검성 윤 대협의 기록 또한 갱신하였습니다.”
유생이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소림사의 속가 제자 장 대협의 무공 원류를 여전히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금강권과 백보신권 등 소림사의 무공이 근간이 된 것은 확실합니다만, 도중에 온갖 문파의 무학이 추가되어…….”
한유가 말했다.
“소생, 비록을 회수하며 주변을 탐문하다가 제갈가의 한 소저를 통해 한 가지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갈가의 소저?”
“예?”
한유는 자신이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한유의 말을 들은 다른 유생들이 적이 감탄했다.
곽모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첫 등장에서부터 최근의 삼황선원 사태에 이르기까지.
장건의 무공 특성과 양식을 그것만큼 적절히 설명할 말은 없는 것 같았다.
곽모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천문비록을 펼쳤다. 그리고 작은 붓으로 장건의 이름 옆에 네 글자를 적어 넣었다.
―일보신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