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05
105. 사냥대회(6)
따각. 딱.
체스 말이 오간다. 시원스럽게 뻗은 뼈마디 굵은 손가락이 양측의 말을 잡고 번갈아 옮겼다.
공작이 적극적으로 나선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일이다. 신경 쓰지 말자.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기도 하니.
‘그보다, 혁명군 수장의 어머니의 각혈 빈도가 늘었다고 했었나.’
딱.
흑의 킹이 호위 몇만 둔 채 적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수장은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상태고.’
따각.
백의 진영이 검은 왕을 주목했다.
‘조만간 알게 되겠군. 감시를 더 촘촘히 하라고 해야 하나.’
딱. 그사이, 흑의 진영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보다, 각혈. 각혈이라…….’
내 동생, 데온 하르트도 각혈을 종종 했지.
말을 옮기던 손이 우뚝 멈췄다. 영 집중이 되지 않는 듯, 손가락 사이에 검은 비숍을 낀 크루엘이 생각에 잠기듯 녹안을 내리깔았다.
‘공작은 데온 하르트를 잘 안다.’
잘 알고, 철저히 준비하여 사냥의 준비를 마쳤다.
‘반면에 데온 하르트는 공작을 모른다.’
공작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조차 모른 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냥대회에 나섰다.
철저한 준비를 마친 사냥꾼과, 아무것도 모르는 사냥감.
결과는 자연스레 떠올랐다.
[저주에 걸려 약해진 사람 하나 어찌하지 못해 이렇게까지 하나?]감독한다는 명목으로 나와 석궁을 설치하는 자들에게 빈정대기도 했지만 그저 미간만 꿈틀할 뿐, 숙련된 암살자답게 그들은 동요 없이 석궁을 설치했다.
그것들에 맞게 된다면 그야말로 고슴도치가 되겠지.
천막에 앉아 사냥대회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크루엘이 조용히 손가락을 까닥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낀 체스 말이 일정 간격으로 책상에 부딪혀 충돌음을 낸다. 녹안이 짙게 가라앉았다.
‘사냥대회에는 공작의 사람이 많다. 그들을 이용한다면 그 아이의 동선 하나쯤은 손쉽게 유도할 수 있겠지.’
암살자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굳이 석궁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으며, 설령 데온이 거기서 살아남더라도 그들의 유도에 이끌려 석궁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딱. 손가락이 멈췄다.
‘…….’
데구르르. 체스 말이 형편없이 책상 위를 구른다.
크루엘은 검을 쥐고 일어나 로브를 걸쳤다. 줄곧 그를 지켜보던 수하 센제르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사냥대회. 내 가치는 내가 증명해야지.”
“…….”
“공작님께 승리를 바칠 테니, 넌 가서 내가 참가한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
말에서 내려 부러 인적 드문 곳을 걸었다. 내 나름의 배려였다.
나와 마주친 사람들이 하나같이 헛숨을 들이켜고 힐긋힐긋 쳐다보는데 그게 어찌나 불편하던지. 어차피 사냥에 열을 올릴 생각도 아니라 서로 마음 편하도록 친절하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리고 시발 습격을 당했다.
“백작님!”
“아…… 미친.”
단의 품에서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엿 같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그래. ‘진짜’ 하르트 백작을 만났다. 그 새끼가 시비를 털었고, 친절하게 자리를 피해 주는 날 끈질기게 쫓아왔고, 그리고…….
단을 밀치고 반대편으로 굴렀다. 내가 있던 자리에 단검이 꽂혀 부르르 떨렸다.
“헉.”
단이 놀라 숨을 멈추든 말든 눈을 굴려 주위를 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다 내가 손수건 한 장 못 받아서 그런 거야. 아무도 내 무사 귀환을 빌어 주지 않았잖아?
“……빌어먹을.”
시야 한쪽에 놓친 가방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분 깨진 건 아니겠지……? 적어도 흙은 쏟아졌을 것 같은데, 죽었으려나? 아니지, 그렇게 쉽게 죽었으면 내가 이곳까지 갖고 올 생각도 안 했다.
‘가방이 들썩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 무시하도록 하자.
억지로 가방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왼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또다시 날붙이가 소리 없이 바닥에 꽂혔다.
그보다…….
“넌 왜 나한테 붙어 있습니까?”
“마, 말투가 건방지다!”
내 옆구리에 ‘진짜’ 하르트 백작이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무섭다고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면 지원이 올 때까지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나한테 붙어서는.
아, 짜증 나.
“제 한 몸 지키지 못할 거였으면 사냥대회에 참가하지 말았어야지요.”
“이건 사냥이 아니잖아!”
“벌레 따위에 사색이 되는 주제에.”
“너…너……!”
어쨌든 너 때문에 나까지 죽을 위기잖아! 책임지고 나를 지켜라! 녀석이 꽥꽥 소리쳤다.
한심한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목덜미를 잡아 밀치듯 던지며 두어 걸음 더 이동했다.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마치 몰이사냥을 당하는 듯한…….’
우욱.
상황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팽팽하게 돌아가야 할 머리가 하얗게 굳었다.
“우웨엑…… 콜록……!”
처음 단에 의해 바닥을 굴렀을 때의 여파가 솟구쳤다.
어떻게든 눌러 삼키려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목구멍을 역류하여 입 밖으로 나온다.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얼핏 초라하게 나뒹굴고 있던 가방의 꿈틀거림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쪽에 잠깐 닿았던 내 시선은 다시 거둬졌다. 빌어먹을 습격자들이 아예 모습을 드러내고 몰아붙이기 시작했으니까.
검격이 정신없이 오갔다. 아니, 일방적으로 나를 향했다.
누가 사람 죽이는 놈들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공격이 급소만을 노린다. 살기 위해서는 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사하게도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다. 들어오는 공격 하나를 쳐 낼 때마다 목숨이 간당간당했음을 실감한다.
‘시발 살려 줘.’
졸라 무섭다.
목으로 짓쳐 들어오는 암기를 기겁하며 쳐 내고 다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달칵─
작은 소음이 들렸다.
“!”
“끝이군.”
일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소음이 들린 곳에서 수많은 화살이 쇄도하는 것이 보인다. 다시 눈을 굴리자 암살자가 아래서부터 턱 밑을 노리고 검을 찔러 올리는 것이 보였다.
피하기엔 늦었다. 어느 한쪽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 어느쪽을 포기하든 그 끝은 내 죽음일 테지.
턱 밑에서부터 뇌까지 한 번에 뚫려 꼬챙이가 되느냐, 고슴도치가 되느냐.
쉬이 내릴 수 없는 결정에 잠시 망설이던 그때.
푸욱!
“……!?”
“…….”
“으, 으으… 콜록, 아니 잠깐만…….”
시발 이게 뭔일이래.
또다시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을 구르며 상황 파악을 위해 핑핑 도는 시야를 다잡으려 애썼다.
절체절명의 그 순간, 암살자의 가슴을 뚫고 웬 식물 줄기가 튀어나왔다. 그것에 경악하기도 전에, 누군가 내 몸을 낚아채고 바닥을 굴러 화살의 범위로부터 벗어났다.
식물은…… 뭐, 그래. 일단 아닐 거라고 믿고. 날 구해 준 이 사람은 누구지? 단인가?
‘좀 전엔 거칠게 굴러서 내 속을 진탕으로 만들어 놓더니, 이번엔 꽤 세심하게 충격 없이 낚아챘…?!’
단이 아니다.
고개를 들자 로브 밑, 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숨긴답시고 곧장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잠깐을 그냥 넘길 내가 아니었다.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다.
“너.”
“…….”
“무슨 꿍꿍이야.”
말없이 나를 놓고 물러가려는 놈의 멱살을 잡아챘다.
얼굴을 바싹 붙이고, 한껏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그딴 같잖은 로브 하나 썼다고 못 알아볼 줄 알아?”
크루엘 하르트.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해.
“…….”
“…….”
침묵이 흘렀다. 꿋꿋이 입을 다문 크루엘이 하염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에 나 역시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영원할 것 같던 침묵은 재차 들려오는 파육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급박한 발소리에 깨졌다.
“위험 신호를 받고 왔습니다! 무사하십니히이이이익! 저게 뭐야?!”
“몬스터? 몬스터인가?! 식물형 몬스터는 처음 보는데?!”
식물형… 몬스터……?
등골을 스치는 불길함에 급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말한 식물형 몬스터를 찾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저게 뭐야아?!’
저거 히엔이 준 그 식물 맞지? 뿌리로도 걸어다닐 수 있었어?!
검은 장미를 닮은 생명체가 뿌리를 꾸물거리며 땅 위를 걸어다닌다! 줄기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으며 그 끝에는 습격자들이 꿰여 있었다.
피를 먹어서인지 녀석은 무시무시하게 커져 있었다.
‘쟤가 습격자들을 다 처리했구나…… 응… 고마운데…….’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끝난게 맞는데…… 왜 다른 의미로 위험해진 것 같을까.
제발 나랑 아는 척하지 말아 주라. 속으로 빌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크루엘을 추궁하려 했는데…….
‘없네?’
그새 튀었다! 빌어먹을 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 나는데, 내 혈압을 더 솟구치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몬스터는 데온 하르트의 것이다! 내가 봤어! 저 괴물이 데온 하르트의 가방에서 나오는 것을!”
“…….”
나는 조용히 뒷목을 잡았다.
의심스러운 시선들이 나를 향한다. 그래, 그렇겠지. 이해한다. 나는 ‘살인귀들의 주인’이니까.
사실 난 정상인이고 밑에 있는 놈들이 미친놈들인 거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주인인 나도 똑같은 놈으로 보이겠지.
“저 괴물이 습격자들로부터 데온 하르트를 구했다고! 데온 하르트가 조종한 것이 분명해!”
그런데 이 병신 새끼는 뭘 믿고 나대는 거지.
내가 무섭지도 않나. 진실이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명성은 무시무시할 텐데.
상상을 뛰어넘는 등신스러운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빠르게 현실을 자각했다.
어찌 되었건 현재 분위기는 내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야 하는데…….
‘저 괴물을 죽여야 하나.’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죽인다 해도 꼬리 자르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끙끙거리던 그때, 녀석이 움직였다.
‘왜…… 왜 다가오는 건데.’
오지 마!
뿌리를 꾸물거리며 녀석이 다가온다. 주춤 물러서려는 내 발목을 줄기로 감아 저지하더니 그 탓에 넘어질 뻔한 등을 슬쩍 잡아 주고는 그대로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극심한 공포가 나를 덮쳤다.
‘히이익 시발.’
살려 주세요 히이익 무서워 히이이익!
이래서 머리 검은 식물은 데려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생존본능을 한껏 담아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제압당했다. 아 제발.
“긔에에엑.”
어…어어 그래…… 착하지? 제발 나 좀 놓아줄래? 아니 목은 잡지 말고… 히이익!
줄기가 목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숨통을 조여 죽일 것 같은 모양새였으나 목적은 고정하는 것에 있는 듯 다행히 힘을 가하진 않았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커흑!”
복부에서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프다. 뭐지? 나도 습격자들처럼 배가 뚫린 건가? 하지만 그런 느낌의 고통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누군가 주먹으로 한 대 친 듯한…….
그 순간 또 다른 줄기가 턱을 살짝 눌러 내렸다. 의문이 머릿속을 채울 때, 배 속에서 피비린내가 솟구쳤다.
“쿨럭.”
시이발… 붉은 옷을 보내 준 황제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표한다. 입 밖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생각하고 보니 나 조금 전에 한 번 각혈했었지. 그렇지 않아도 한 차례 피를 토해 쓰린 속에 충격이 가해지니 이 꼴이 안 날 수가 있나.
속에서 다시 뜨거운 게 솟구쳤다. 이번엔 피가 아니다.
이… 이…….
“이 새끼가!!”
서걱!
“……어?”
분노에 차 제압당한 상태라는 것도 잊고 되는대로 손을 휘둘렀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얘가 무너지는 걸까. 내 손은 언제 풀린 거고?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죽어 가는 듯 괴식물이 서서히 무너지며 잎사귀를 말아 치켜올린다. 사람으로 따지면 엄지를 치켜올리는 행동에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의도했다 이거지.’
내가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위해서.
일부러 목까지 감아 쥐어 가며 공격하는 척했다. 복부에 충격을 주어 피를 토하게 만들어 보는 이들의 눈을 속였다. 약한 내 몸뚱이는 작은 충격에도 피를 뱉어 내니 어렵지 않았겠지.
그리하여 생존 본능에 의해서든 분노해서든, 내가 되는 대로 팔을 휘두르는 순간 손을 풀어 주고 제 급소를 갖다 댔다.
그리고 죽었다.
“하…….”
“괘…괜찮으십니까?”
“…….”
“하르트 백… 며, 명예 백작님?”
“…….”
머리는 좋네.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