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1
31. 제국으로(2)
포근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진다. 길가에 늘어선 꽃들이 그런 바람을 반기듯 잎을 흔들고, 햇살은 축복이라도 내리듯 따사로운 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봄이다.
그것도 여름에 가까운 늦은 봄.
어느 거대한 저택의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밀려오는 졸음에 나른히 하품을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한쪽 눈썹을 까닥였다.
저 멀리, 여행자용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봐.”
“응?”
“저 사람, 수상하지 않냐?”
“뭐가 수상…… 아, 그러네.”
이래 보여도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순식간에 칼 같은 기도를 드러낸 동료가 창을 고쳐 잡았다.
문지기 역시 제 무기를 단단히 쥐고 이리로 다가오는 낯선 이를 향해 숨김없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가 코앞에 다가온 순간, 창을 내밀어 정지 신호를 보내고 말했다.
“이곳은 하르트 백작저입니다. 백작님은 현재 출타 중이시며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정 중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전언을 남겨 주십시오.”
몇 번이고 손님들에게 반복적으로 읊었던 말.
보통 하르트 백작을 적으로 돌려서 얻을 이익이 없기에 대부분은 그냥 돌아갔으나, 이 손님은 아무래도 다른 모양이다.
그는 아예 그 말을 못 들은 양,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문 열어.”
“……하?”
문을 열라니. 어쩜 이리도 뻔뻔할 수가.
황당함에 한마디 하려는 순간, 그가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 드러난 흰 머리칼에 문지기는 순간 멍해졌고, 이어서 마주한 붉은 눈동자에 기겁하며 창을 치웠다.
“내 저택에 내가 못 들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배, 백작님!”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몬스터 토벌을 목적으로 저택을 나섰던 그가, 장장 6개월 만에 돌아왔다.
***
“데온 하르트가 돌아왔다고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남자가 상체를 세웠다. 보라색 눈동자가 흥미로 빛났다.
보라색 눈과 보라색 머리. 황금색이 황가의 상징이듯 제국에서 보라색은 한 가문의 상징이다.
일루스터 공작가.
제국 유일의 공작이자 귀족파의 수장이라는 황제의 대척점에 선 스타베 일루스터는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데온 하르트가 누구인가. 명백한 황제의 개가 아니던가. 귀족파의 수장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하는 바로 그 ‘영웅’.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가 갑작스럽게 돌아왔다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슬슬 돌아올 때가 되긴 했더랬지.
“자아, 그럼.”
시선을 돌려 줄곧 옆에 서 있던 이를 바라봤다.
동요 한 점 내비치지 않는 녹색 눈과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
제 수하를 자처한 크루엘 하르트를 보는 스타베의 눈에 묘한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을 감추려는 듯 휘어진다.
이어서 지독하리만치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할까요?”
네 동생이 돌아왔다는데.
아직 이 소식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작가가 구축하고 있는 정보망이 유독 촘촘한 것뿐이니까.
자신 외에 알고 있는 이라고는 기껏 해 봐야 황제뿐이겠지.
그러한 상황에서 귀족파 수장의 수하인 크루엘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살인 의뢰를 넣겠습니다.”
“틀렸습니다. 더 가성비 좋은 패가 있을 텐데요.”
마치 아이를 가르치듯 손가락을 흔들며 공작이 시선을 옮겼다.
그에 부응하듯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에서 서류를 들고 자신이 보고할 차례를 기다리던 한 여자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사에린, 당신이 대답해 보세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혹, 혁명군을 말씀하시는지.”
“맞습니다.”
황제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인 그들이 황제의 개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다.
돈을 받고 살인을 하는 이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 일에 가담하겠지.
그렇기에 공작은 싱긋 웃으며 크루엘에게 명령했다.
“혁명군에 연락하세요.”
***
후다닥. 후다다닥.
뭔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바빠 보인다.
뭔가 내가 엄청난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 아무래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하지만 마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괜히 눈치가 보여 머리만 긁적이고 있자니, 이윽고 분주한 사용인들 사이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남자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아, 네. 오랜만입니다, 레멤베르.”
내가 이 저택을 받았을 때부터 함께한 집사, 레멤베르가 인자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변함없이 차분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새삼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서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데, 진즉 끝난 줄 알았던 인사가 이어졌다.
“몬스터 토벌은 무사히 끝마치셨는지요.”
“……네?”
몬스터 토벌?
……맞다, 대외적으로 나는 황제의 명을 받아 몬스터 토벌을 하러 자리를 비운 거였지.
“아, 아아, 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레멤베르가 얼굴 가득 중후한 미소를 띠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치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고 말하는 듯한 행동에, 나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뒤따라오는 그에게 말했다.
“폐하를 알현하러 갈 겁니다. 준비해 주세요.”
“먼 길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좀 쉬고 가시는 것이…….”
“아뇨, 씻고 옷 갈아입고 바로 갈 겁니다.”
나라고 쉬고 싶지 않겠는가.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더 큰 문제라 어쩔 수 없는 거지.
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검으로써 군주의 자리에 오른 피의 황제다.
9왕자였던 그가 자신의 형님과 누님들을 모조리 죽이고 검을 질질 끌며 궁을 가로질러가 피 묻은 손으로 왕관을 집어 들어 직접 썼을 때의 그 장면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신하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런 그의 눈 밖에 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고작 바로 보고하러 오지 않은 것 정도로 사람을 죽일 정도의 폭군은 아니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눈 밖에 날 만한 짓은 아예 안 하는 편이 가장 안전할 테니…….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이전이었다면 즉각 움직였을 이들이 어째 통 움직이지 않는다.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만 숙이고 있는 사용인들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레멤베르가 자연스럽게 나서 말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은 에드가 생각날 정도로 빠르고 신속했다.
사용인들 중 몇몇이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른 몇몇은 수건을 들고 대기한다.
그리고 또 다른 몇몇의 손에 질질 끌려간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따뜻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오랜만이라 정신이 없긴 하지만, 처음도 아니니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다.
금세 익숙하게 노곤해진 몸을 축 늘어뜨리는데, 문이 열리더니 시종들이 들어와 내 몸을 깨끗이 닦아 주고는 가운까지 입혀 주더니 어딘가로 안내했다.
‘자, 잠깐…… 잠깐만.’
이쯤 되니까 정말 정신없는데? 오랜만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정신이 없다.
너희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시녀들이 날 소파에 앉혀놓고 제복을 주르륵 꺼내 들더니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황궁으로 가신다면 이 제복이 좋지 않을까요? 적당한 장식이 달려 있어서 백작님의 미모를 돋보이게 할 것 같은데.”
“아니지, 대세는 금욕적인 분위기라고! 그런 의미에서 잡다한 장식 없이 수만 놓인 이 제복이 좋을 것 같지 않아?”
“세간에 알려진 백작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쪽이 나을 것 같지 않아요? 뭔가 유려한 느낌이잖아. 이거면 백작님의 이미지도 조금 부드럽게 변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참에 병약한 귀공자 컨셉으로 가는 건 어때요?”
대체 왜 하얀 제복과 하얀 제복과 하얀 제복을 두고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다.
죄다 제복에다가 흰색이잖아. 심지어 나머지 옷걸이에 걸린 제복도 전부 흰색이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내 눈엔 다 똑같은데.
젠장 어쩌다 보니 내 상징이 흰 제복이 되어 가지고.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반쯤 눈을 감은 뒤 대충 아무거나 손으로 가리키자 두 개의 혀 차는 소리와 한 개의 기쁨이 담긴 작은 비명이 들린다.
‘혀 차는 소리 다 들린다. 얘들아…….’
황당함에 눈이 떠지기도 했고, 내가 뭘 골랐는지 확인할 겸 슬쩍 시선을 올리자, ‘병약한 귀공자’를 외치던 시녀가 제복을 들고 눈앞에 서 있었다.
‘어…… 병약?’
뭔가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아니,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든다는 의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콧김을 훅훅 내뿜는 저 시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심히 불안해진다.
지금이라도 물러야 하나?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상체를 세우자, 시녀가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제복을 넘기고는 빠르게 물러갔다.
‘아니, 저기……!’
나 그냥 다른 거 선택할…….
탁. 문이 닫혔다.
“…….”
“…….”
“……저…… 백작님……. 가운을…….”
“아.”
내가 마왕성에서 생활하며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 이럴 때 쓰기 아주 좋은 유용한 것.
체념.
그래, 뭐 입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제복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진 않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겠지.
그 시녀의 눈빛이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무시하자.’
나는 순순히 가운을 벗어 시종에게 내밀었다.
팔목부터 손끝까지 붕대를 감고 흰 장갑을 꼈다. 제복을 갖춰 입자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나갔던 시녀들이 다시 우르르 들어와 멀쩡해 보이는 옷매무새를 재차 가다듬어 주고,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칼을 빗어 넘겼다.
‘그래 봤자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흐트러질 텐데.’
그 생각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눈까지 충혈된 채 잔뜩 집중하고 있는데, 괜히 초 치는 말을 했다간 무슨 욕을 먹을지 상상도 안 가니까.
전쟁 때 특별 지급받았던 흰 망토까지 걸치고, 마지막으로 햇빛을 막기 위한 하얀 복면을 착용하자 시녀들이 아쉬운 듯한 탄성을 뱉으면서도 저들끼리 손바닥을 마주친다.
저건 뭐 하는 행태지? 아, 날 보며 입을 틀어막는 녀석도 있는걸 보니 딱히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입을 틀어막는다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는 뜻 아닌가!
내 모습이 그렇게 별로인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시 갈아입는 게…….”
“안 돼요!”
“절대 안 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깜짝이야! 그냥 혼잣말한 건데 뭘 그렇게 민감하게…….
……설마, 얘네 짜고 날 엿 먹이려는 거 아니야?
의심의 눈초리로 씩씩대는 시녀들을 살피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레멤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대기 중입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즉시 출발 가능합니다.”
보아하니 더 이상 준비할 것은 없을 것 같아 대충 휴대용 단검만 하나 챙겨 들고 문을 열었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듯, 깔끔한 연미복을 입은 레멤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문이 열린 것일 텐데도, 레멤베르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옆으로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분명 내 옷차림을 봤을 텐데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면 이렇다 할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아, 출발하기 전에 잠시만…….”
1층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내 방으로 향했다.
레멤베르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한 뒤, 방 안을 둘러보자 책상 위에 왔을 때 들고 왔던 소지품들이 보였다.
‘다행히 그대로 있네.’
씻으러 끌려…… 그냥 들어가기 전,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건들지 말라고 간신히 남겨 놓았던 말을 어찌어찌 듣기는 한 모양이다.
아예 손을 대지도 않은 듯 처음 올려놓았던 그대로 놓여 있는 것들 중 식량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마법은 마족의 전유물이니까.’
이걸 그냥 둘 수는 없다.
마법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드물다지만, 한 번이라도 열어 보는 순간 어느 멍청이라도 이것이 마법이 걸린 주머니라는 것을 즉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태워 버려야지.
늦봄이라 벽난로는 꺼져 있어 대충 촛불을 켜고 주머니를 태웠다.
안에 있는 식량들도 같이 타겠지만 미련은 없다. 이제 맛있는 음식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재가 되어 허공에 날리는 그것들을 대충 손을 휘저어 날려 버리고, 또 다른 주머니를 집었다.
‘이건 그냥 태우면 큰일 나지.’
금화가 잔뜩 담긴 주머니.
방 안을 뒤져 대충 일반 가죽 주머니를 여러 개 꺼내 내용물을 옮겨 담은 뒤에야 미련 없이 태워 버릴 수 있었다.
나는 금화 주머니를 잘 정리한 뒤, 그중 두 개를 집어 들고 문을 열었다.
“이번 여행에서 번 돈인데, 백작저 재정에 보태 쓰세요.”
사실 백작가에 돈은 이미 차고도 넘치니 굳이 보탤 필요는 없겠지만서도.
주머니를 받아 든 레멤베르가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든다.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은청색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을 띤 채 나를 담고 있었다.
“요즘 몬스터들은 잡으면 금화도 뱉는 모양입니다.”
“……아.”
맞다, 난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갔던 거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