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22
인간의 겨울 (2)
그곳은 만과 운하의 도시.
차가운 늪지 위에 세워진 웅대한 겨울의 고장.
광배 같은 후광을 두른 정교회의 성자들을 묘사한 모자이크와 그들을 기리는 성당들이 서 있고, 바위 위에서 떨쳐 일어난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운하를 내려다보는 곳.
황제의 겨울 궁전이었던 미술관과 그 앞에 세워진 높은 원주 위에 선 천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도시.
그 도시의 바닥을 기어 오는 ‘혹한’은 결코 상대하지도 맞서지도 말아야 하는 잔인한 물결이었다.
그 마수는 사람의 에테르를 앗아가고 세상의 모든 것을 얼렸다.
아이들은 클레이오가 말하는 예언을 모두 머리에 새겼다.
“그 공간은 주변이 전부 물이야. 바다든 강이든 운하든, 진입한 뒤 흩어져 떨어질 곳이 너무 많지. 그래도 이거 하나만 기억해. 이 궁전 앞 높은 기둥 아래서 만나자는 거. 마스터 클락이 있는 건물은 칸칸이 나뉜 구조라, 꼭 함께 진입해야 해.”
클레이오는 간략하게 그린 도시의 지도에서 강가와 멀지 않은 한 건물을 가리켰다.
ㅁ자형의 건물과 부속 건물들이 붙은 궁전이었다. 앞에는 반원형 광장도 있었다.
광장을 표시한 위치 옆엔, 높은 원주 위에서 십자가를 안고 선 천사상의 그림이 덧붙은 채였다.
정확히는, 비뚤비뚤 그린 원기둥 위에 졸라맨과 십자가를 붙여놓은 걸 클레이오가 천사상이라고 우겼다.
두 쌍둥이는 뭐라고 하고 싶어 입가가 실룩거렸지만, 상황이 심각한 터라 놀림을 자제했다.
“기둥에서 바로 앞이 궁의 입구야. 이 건물은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어.”
“마스터 클락이 건물의 어느 방에 있는지도 알 수 있나?”
이시엘의 질문을 들은 클레이오는 종이를 뒷장으로 넘겼다. 거기엔 각을 맞춰 잘 그린 미술관의 평면도가 나와 있었다.
평면도 작성에는 ‘약속’의 「기억」기능이 작동되어, 부끄럽지 않은 모양새로 그려낼 수 있었다.
서사 개입도가 60%를 넘게 되자 ‘약속’의 「기억」이 엮어내는 두루마리 역시 실체에 가까운 형태로 눈앞에 나타났다.
백지 위에 겹칠 수도 있고, 이리저리 감아 넘길 수도 있어서 머릿속에서만 떠오를 때보다 확실히 다루기가 쉬웠다.
“응. 미술관의 여기 측면 홀에 놓인, 황금 새가 춤추고 있는 조각이 마스터 클락이야. 그리고 그거의 보상인 ‘공작의 완드’는 절대 아슬란에게 넘어가선 안 돼. 놈에겐 헤스터 워드가 있으니까.
그건 마법사에게 쥐여 주면 기적을 일으키는 마도구야. 마법의 효율을 몇 배나 증폭시키지.”
‘공작의 완드’.
지난 원고에서는 아서가 제베디에게 주어 수많은 부상병을 치료하게 만든 마도구였다.
시일이 지나 제베디가 노령으로 활동이 어려워지고 에테르가 폐한 다음엔 장식품으로 남아, 아서의 대관식에서 그의 권위를 강화하는 귀물로 자리매김했다.
“아슬란의 마법사가 기적을 부릴 줄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 재밌는 얘긴 아니겠네.”
“그땐 재미 찾을 새가 없을걸. 자주 쓸 순 없는 기능이지만 ‘공작의 완드’는 이중 발진 없이도 서클의 면적을 확장시켜 줘.”
첼조차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농담으로도 틈을 벌릴 수 없는 견고한 침묵.
그 정적을 깨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클레이오 자신이 직접 설치했기에 헛갈릴 수 없는, 므네모시네의 문 개방 경보였다.
위이이이이잉―
클레이오는 경악했다.
‘어떻게 딱 지금….’
지나치게 극적이라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연출이었다.
갑작스레 기온이 내려갔다.
하늘은 어두워져 을씨년스러운 저녁나절처럼 잿빛으로 내리깔렸다.
초겨울의 추위는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기어 나온 혹한으로 변절돼 연구실의 얇은 창틀 사이까지 기어들었다.
기억된 세계의 냉기는 클레이오의 고지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떨쳐 나와 기세를 올려댔다.
아직 준비를 다 마치지도 못했는데 페이지들은 그의 걸음걸이에 앞서 앞장으로 넘어가 버린다.
당혹스러워하는 클레이오와 달리 옷을 여미고 덧신의 끈을 꽉 맨 아이들의 태도는 의연했다.
“열렸구나.”
“므네모시네의 문이.”
“레이가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면 큰일이었겠네.”
“가자.”
“검을.”
“건틀렛도 잊지 마십시오.”
“그거, 기억된 세계 들고 갈 가방 챙겨놓은 것도 여기 다 있으니까, 매자.”
“응.”
아이들이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다 공중에서 굳어졌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추위였다.
모닥불이 불타고 있는 장작 끝이 하얗게 얼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이 추위를 못 이겨 깨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침착했다. 기사로 훈련하며 몸에 익은 대로 전투 채비를 마쳤다.
오히려 클레이오가 가장 굼떴다. 그는 곱아지는 손을 마법으로 녹여가며 겨우 덧신 끈을 맸다. 그리곤 자신 몫으로 만들었던 방어구 뱅글까지 낀 뒤 일어났다.
모두의 단단한 눈빛이 각오처럼 서로에게 닿았다.
“가자.”
.
.
.
심적색으로 어두워진 므네모시네의 문에는 고대 문자로 6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사이렌이 그쳐 사방은 고요했다.
그 문안에서는 숨결조차 얼릴 듯한 차가운 겨울이 밖을 향해 기어 나왔다.
무정형의 추위가 땅을 덮었다.
사방에서 부서져 나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풀이 희게 얼어 꺾이고, 새로 조림했던 숲은 얼음조각처럼 날카롭게 깨진다.
기사 스웨인 템플은 제게 닥친 재해를 피하지 않았다.
우우우웅!
추위를 뚫고 일으킨 [강화]가 그의 검과 발치, 결계석을 감쌌다.
손발이 끊어질 듯 차가워지고, [강화]가 미처 막지 못한 냉기는 전신의 뼛골을 얼리는 것 같았다.
“하아압!”
스웨인은 냉기의 폭압에 굴하지 않고 다시금 [강화]를 북돋웠다.
그가 받은 명령은 한 가지였다.
결계를 지켜야 했다.
그때.
뒤편에서 진중한 걸음 소리가 감지됐다.
바시락. 저벅.
“비켜 서보게.”
“마법감님.”
“경계하지 않아도 되네. 이 안에서 마수는 나오지 않을 모양이야. 다만 이 혹한 자체가 마수나 마찬가지라 문제이지.”
“마수라면 검기로 벨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되네만 완전치 않지. 반으로 갈라도 여전히 추위는 추위이니. 자, 그렇게 계속 결계석을 감싸고 있게. 그러면 내가 이놈을 다시 주워 담아 봅세.”
“명 받들겠습니다.”
쿵.
제베디는 자신의 키만 한 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솨아아아아―
그 지점부터 1km 지름의 원을 그리며 찬란한 서클이 펼쳐졌다.
우우웅.
휘몰아치는 에테르의 폭풍 가운데 노인의 목소리가 장중하게 울렸다.
“[피워진 이래 파묻힌 적 없는 불이여, 잊히지 않은 문명의 시원이여, 밤과 어둠과 혹서에 대적할 양광을 비추어다오!]”
미리 설정해 놓은 결계의 마법식이 메이지 마스터의 에테르와 호응하여 지상의 태양처럼 떠올랐다.
치이이이이이익―
극한의 차가움과 마법의 열이 문 주변에서 맞부딪치며 새하얀 수증기를 하늘 끝까지 피워 올렸다.
에테르를 탐하는 ‘혹한’조차 감히 그 빛을 침범하지 못하고 기세를 주춤 물렸다.
.
.
.
위이이이이잉―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에 에즈라는 벌떡 일어나 분과 사무실의 창을 올려 열었다.
두 번 살필 것도 없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강 건너의 학교였다.
새로 설치한 수도방위대 학교 결계에서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저 소린, 그간 적성에 맞지 않게 얌전히 지내야 했던 에즈라 세르게프의 암흑기가 끝나는 팡파레였다.
수도방위대 마법단 기동 조사단장은 채신머리없이 날뛰며 옷에 달린 모든 주머니를 뒤집어 털었다.
출동 준비를 하던 다리아가 물었다.
“안 나가고 뭐 하는 거야.”
“레이가 사이렌 울리면 열어보라고 한 주머니가 있어~. 마석이 든 것 같은데, 출동 전에 속성에 맞는 새를 만들어 날리라고 했단 말야!”
“잘도 안 열어보고 버텼군.”
“이거 잘 해내면 레이가 디오네에게 편지 전해준다고 해서….”
다리아는 지극히 차가운 얼굴로 에즈라의 헛소리를 끊었다.
그 수완 좋은 영애가 자길 절대 만나 줄 리 없다는 걸, 에즈라 본인만 모른다.
“됐고. 안에 든 건 뭔데?”
부욱!
흥분을 못 이겨 주머니를 찢어버린 에즈라는 천 조각 사이에서 드러난 8캐럿 크기의 마석 루비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야! 비둘기 피처럼 새빨간 마석 루비네~! 그렇다면 불새를 만들어야지~! 엄청 예쁠 거야!”
에즈라는 재빨리 서클을 열어 마법식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긴 꼬리깃을 가진 아름다운 불새를 만들 거였다.
한숨을 내쉰 다리아는 무용한 에즈라를 대신해 수화기를 들었다.
“전 대원 장비 갖추어 연병장에 집합. 수도방위대 학교로 이동한다.”
다리아는 이번 이변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지난번 므네모시네의 문 폭주 때에는 단장이 근신 중이라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까지도 발만 구르며 사태를 지켜보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그녀 역시 수도를 지키는 마법사이지 않은가.
클레이오 아세르가 불을 필요로 한다면 그게 올바른 해결책일 터.
불이라면 그녀도 피워 올릴 수 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불을.
.
.
.
클레이오는 8교의 내용을 낱낱이 기억했다.
‘영원한 겨울의 도시’가 열렸을 때 처음 던전으로 진입했던 수도방위대 기사와 마법사들은 결국 공간의 파훼에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바깥세상에서는 이레가 지났다.
아서와 동료들이 두 번째 리셋 때 진입하여 던전을 파훼하던 당시엔, 이미 바깥세상의 마수 준동이 열나흘간 지속된 상태였다.
8교에서 ‘영원한 겨울의 도시’가 개방되었던 사건은, 알비온 건국 이래 최대의 고난이었다.
그때에는 학교 결계가 방비되어 있지 않았다.
‘혹한’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죽음이었다. 속도가 빠르지 않은 대신 지하마저 모두 얼리는 지독한 추위였다.
룬데인의 모든 상하수도가 얼어 깨지고 모든 우물이 극지의 빙하처럼 단단히 굳어졌다.
입을 벌리면 입 안이 얼어붙고 숨을 쉬면 코안이 동상을 입는 혹한 가운데선 피난도, 식수 공급도 쉽지가 않았다.
‘혹한’은 사람이 내뿜는 에테르에 이끌리는 성질까지 가졌다.
마수를 밀어낼 만큼 레벨이 높으면 일정 범위 안의 기온을 올리는 일도 가능했지만, 잘못하다간 도리어 에테르를 먹으려 달라붙는 추위에 잠식당해 죽을 수도 있었다.
소수의 에테르 감응자들이 분투하는 동안 템푸스 강을 타고 냉기가 퍼져나갔다.
추위는 강 밑바닥을 따라 멀리까지 움직였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는 모두 얼어붙었다.
그것은 ‘혹한’이라는 이름의 마수였다.
레벨도 범위도 규정되지 않은 규격 외의 존재.
그 엄청난 저주 아래 템푸스 수로가 무력화되고, 모든 증기선의 엔진이 멈췄다.
식량과 석탄을 실어 나르던 흐름이 끊기자 사람들은 추위 가운데 고립되었다.
마법사들이 분투하였으나, 그 지독한 냉기는 도통 이겨낼 방도가 없는 재앙이었다.
그 뒤에는 해안선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브룬넨의 어용 언론은 알비온의 국운이 쇠함을 점치며 상당한 즐거움을 누렸다.
대관일식의 기적이 남아 있는 알비온에 은근한 열등감을 느끼던 브룬넨인들은 이때까지 아주 흡족해했다. 자신들의 산과 들과 강에서 끝 모를 마수 떼가 기어 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이레가 더 지났다면 하트리아 내해와 메모리아 외해 모두 빙하가 되었을 것이다.
추위는 기억된 세계가 완전히 파훼될 때까지 몇 시간 간격으로 일었다 스러졌다를 반복하다가, 던전이 파훼되던 순간에야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서와 친구들이 기억된 세계를 돌파하는 동안, 밖에서 므네모시네의 문 주변을 지켰던 제베디는 에테르 고갈로 인해 크게 기력이 쇠했다.
그때에는.
단지 글로 읽었을 때에는 과감한 전개라고 감탄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문을 지키고 선 자들의 면면을 알고, 수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아는 클레이오에게 작금의 사태는 전혀 ‘과감한 전개’ 따위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 당도한 클레이오는, 마구잡이로 얽히며 광폭하게 흩날리는 제베디의 에테르를 뚫고 간신히 스승에게 다다랐다.
“스승님…!”
“왔느냐!”
“곧바로 2단계 조치, 를, 시행… 하겠… 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