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23
영원한 겨울의 도시 (1)
마구 꺾어지려는 클레이오의 갈대 같은 몸을 아서와 이시엘이 꽉 잡아주었다.
그 뒤편에서 [강화]를 최대치로 펼친 쌍둥이도 클레이오의 등을 파고드는 칼바람을 막는 데 힘을 보탰다.
첼은 결계석에 [강화]를 전도시키고 있는 스웨인 쪽으로 가, 또 한 겹의 [강화]를 펼쳤다.
쿵!
기세를 북돋아 다시 한번 지팡이를 바닥에 부닥친 제베디는 이미 펼쳐져 있던 결계-마법식에 엄청난 양의 에테르를 밀어 넣었다.
솨아아아아아—
역방향으로 돌아가는 외부 결계는 스콜라 지구를 벗어나 더 멀리로 흩어지려는 ‘혹한’을 붙들어 맸다.
그림자 같은 ‘혹한’은 에테르의 빛에 이끌리는 성질을 가졌기에, 외부 결계를 새까맣게 뒤덮으며 몰려들었다.
클레이오는 「지각」을 한껏 펼쳐 온 수도를 제 시야 안에 넣었다.
주르르.
이마 안쪽이 불에 달군 쇠공이 구르듯 뜨겁고, 코피가 흘러 옷깃을 적셨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조망하는 시선이다.
학교와 궁성 사이 템푸스 강은 깊숙이 얼었다가 다시 얼음이 깨지고, 다시금 아지랑이가 이는 따스한 물결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끼이이이이!
파지지직!
검게 얼룩진 서안의 강가를 녹이며 불의 새가 높게 날았다. 들릴 거리가 아닌데도 에즈라의 호들갑스런 환호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터져 나온 ‘혹한’은 제베디의 마법에 들러붙어, 비등비등 겨루는 상황이었다.
클레이오는 파리하게 웃음 지었다. 자축하기는 이르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대비책은 모두 제대로 먹혔어.’
제베디가 사용하고 있는 마법식 슬롯은 아직 여섯 개. 나머지 두 개는 제자가 이중 발진시킬 기후 마법을 증폭시키기 위해 비워둔 것이었다.
두 사제는 이 상황에 대해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다.
이제 그들의 분투가 결실을 맺을 차례였다.
클레이오 역시 완드를 높이 뻗어 제 서클을 열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두 레벨의 차이가 있으나, 클레이오가 가진 비상식적인 크기의 에테르 그릇은 레벨의 차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스승의 에테르 권역 가운데서 서클을 개진했다.
심적색으로 경고를 보내던 므네모시네의 문조차 한 찰나 클레이오의 에테르에 밀려 찬 공기를 퍼뜨리지 못했다.
젊은 마법사의 앙상한 손가락 사이에서 벚의 로즈쿼츠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여왕의 정원’에서 아서가 수천의 벚꽃 잎에 몸을 베이며 힘겹게 얻어냈던 그 마석.
과거에는 제베디 홀로 이것을 쥔 채 분투했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고, 마석은 최대한의 효율로 소비될 것이다.
‘까짓거, 시말서를 쓰든 법정에 서든 하면 되지. 기후 마법 한 번 쓴 거 두 번을 못 쓸까.’
수도방위대 학교 학장이자 왕실 마법감으로서 경거망동할 수 없는 입장의 제베디와 달리, 클레이오에겐 잃을 명예라는 게 없었다.
또 금지 마법 썼다고 제제가 내려오면 행정 소송이라도 하면 그만 아닌가. 변호사 수임료 따위 기후 마법의 위력을 생각하면 푼돈이었다.
마침내 클레이오의 손바닥 위에서 솟은 여섯 개의 마법식이 휘황한 빛을 뿌렸다.
[현현]과 [속성증폭].그리고 [발열][건조][바람][순화].
이중발진을 위해 극도로 축소된 여섯 마법식은 그 자체가 왕의 홀이나 왕관의 보석처럼 영롱했다.
클레이오는 친구들과 스승이 바람을 막아준 얕은 무풍지대에 서 가까스로 진언을 외쳤다.
“[가장 깊은 겨울 가운데 찾았나니, 내 안에는 불굴의 여름이 도사리고 있었도다!1)]”
솨아아아아아아앗!
미약한 힘으로 던져진 로즈쿼츠는 에테르의 폭풍을 타고서 창공으로 떠올라 따스한 빛을 은총처럼 퍼트렸다.
깨어져 나간 마석의 조각조각마다 웅장한 에테르의 불길이 타오르며 천지사방의 기후를 뒤집어 놓았다.
숨을 들이쉬면, 마치 여름날 오후의 대기처럼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통상 세 배의 에테르를 소모하는 이중 발진을 여섯 개 서클로 이뤄낸 클레이오는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은 채 위로, 더 위로 완드를 뻗었다.
클레이오의 마법을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경탄하는, 거의 전능한 ‘조정’의 기술이었다.
아서와 친구들도, 제베디도, 스웨인도 이때만은 마수나 추위, 이변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다.
여섯 쌍의 눈동자는 로즈쿼츠가 흩날리는 파편 속에 선 마법사에게 고정되었다.
클레이오의 마법 가운데에 속해 있을 때에는 지금 벌어지는 일 이외의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 강력한 힘의 흐름이 자아내는 기적은, 사람의 주의를 송두리째 탈취해가는 이적이기도 하다.
클레이오가 부리는 에테르는 한 가닥도 마법사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고, 그의 뜻은 언제나 기적적으로 명확하게 실현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가 불러낸 여름이 하늘의 끝까지 퍼져나갔다.
쿠쿵!
동시에, 또 한 번 바닥을 지팡이로 찍은 제베디가 자신의 마법식 슬롯을 모두 채웠다.
그의 낙낙한 로브 소매에서 퓌시스 가문의 인장이 조각된 마석 수정 하나가 집혀 나왔다.
노인은 일평생 쌓아온 지혜와 기예를 모두 펼쳐 고절한 마법을 완성시켰다. 나직한 진언 영창으로 구현된 마법은 간결한 만큼 강력했다.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는 의지가 닿고, 의지가 닿지 않는 곳으로는 기도가 닿네. 그르지 않고 옳기를. 빗나감 없이 바르기를. 바라고 바라노니, 이루어지도다.]”
제베디는 클레이오가 걸어둔 이중발진 마법에 반사와 증폭의 마법식을 덧씌우는, 기적에 가까운 고난도 마법 ― [중첩 마법]을 펼쳐 보였다.
메이지 마스터가 일으킨 [바람]과 [속성증폭]의 이중발진은 클레이오가 도래시킨 여름을 광활하게 펼쳐놓았다.
수도를 넘어, 저 지평선의 끝까지.
「지각」은 클레이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알려왔다.
얼었던 강물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방금까지 빙판이었던 도로에서 더 이상 마차 바퀴가 미끄러지지 않았다.
철문에 손이 붙어버렸던 파수병은 갑작스레 녹아내린 피부에 비명을 질렀다. 수도방위대 마법사가 파수병의 손에 다급히 치유 마법을 걸었다.
지독한 마수의 겨울은 마법과 엎치락뒤치락 뒤엉키며 기세를 늦추었다. 제압당한 냉기는 날카로운 발톱을 감아 넣으며 그늘 아래에 웅크렸다.
에즈라의 불새는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먼 공중을 나는 우아한 새는 바닥에 깔린 마수 ‘혹한’에 붙들리지 않고 사방에 불꽃을 피워냈다.
200미터 범위 서클 안쪽만을 주유할 수 있는 환상 생물이지만 에즈라가 학교와 궁성을 잇는 안타리오 다리 한중간에서 일을 벌인 덕분에 수로가 다시 얼어붙을 걱정은 덜어도 됐다.
‘저 짓 하라고 그 귀한 마석 루비를 놈에게 준 거니까.’
비싼 핵을 박아 놓으면 환상 생물이란 놈은 꽤 오래 유지됐다.
조정 방법이 괴상해서, 이미 몸 안에 사람 아닌 불순물이 많이 섞인 에즈라 정도나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이란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에즈라보다 통솔력이 나은 다리아는 발이 묶인 상관을 대신해 마법사 소대를 이끌고, 그늘에서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냉기를 태워버리며 수도방위대 학교로 접근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오면 외부 결계는 제베디를 대신해서 재시동해 줄 수도 있을 테니, 부하가 덜어지겠지.’
계획은 올바르게 실행되었다.
「지각」으로 상황을 조망한 클레이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르륵.
톡.
스웨인 템플의 투구 아래로 땀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다가, 얼음 방울로 굳어졌다.
극심한 혹한과 혹서기의 기후를 동시에 겪으며 감각기관이 요동쳤다. 그럼에도 우직한 기사는 물러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 므네모시네의 문은 열려있지 않은가.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신체에 가해지는 변화가 아니라 저 마법사들의 마법 자체였다.
인간의 행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적.
스으읏.
쨍하게 맑아진 공기 가운데, 어느새 므네모시네의 문이 드러났다. 처음의 심적색은 이제 옅은 수국 색으로 변해 있었다.
방금 역사적인 대마법을 공동으로 수행해낸 사제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제베디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진 수염이 흔들리고, 믿음직한 지팡이가 다부지게 땅을 짚었다.
파아아아앗―
[바람]과 [속성증폭]의 마법식 위에 찬란한 금빛, 메이지 마스터가 되고도 색이 바뀌지 않은 정순한 에테르가 또다시 고였다.제베디는 기억된 세계가 파훼될 때까지 겨울을 억누르는 마법을 계속해서 반사시킬 작정이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대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은 눈빛으로 뜻을 전했다.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얼른 다녀 오거라.’
클레이오는 스승에게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문을 돌아보았다.
적색이 사그라진 문 위에 적힌 고대 숫자는 6.
8교에서 저 숫자는 5였다. 하지만 최종고에선 마치 클레이오가 올 것을 예정하고 고친 듯, 숫자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클레이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라고 준비해 놨으니 가야만 하겠지.’
젊은 마법사는 주르륵 흐른 코피를 재빠르게 손등으로 훔친 뒤 소리쳤다.
“이제 들어가자! 아서 너부터, 빨리!”
지난번처럼 이 밖에서 아서를 붙잡을 요소는 없었다. 이번엔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아서가 경쾌하게 문으로 달음질쳐 갔다.
“알겠어! 먼저 갈게.”
“어디서 만날지 안 까먹었지?”
“나 지리 성적은 좋거든? 걱정 붙들어 매, 레이!”
요란스럽게 구는 아서가 문으로 쑥 사라지자, 이시엘 역시 망설이지 않고 그를 뒤따랐다.
클레이오는 두 쌍둥이와 첼에게도 손짓을 했다.
그때.
퍼어억!
자연스럽게 벌어졌던 클레이오의 입 안으로 얼었다 데워져 파사삭 흩어지는 흙이 한 줌 들어와 씹혔다.
너무 갑작스러워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레이!”
“젠장!”
달려온 쌍둥이들이 얼른 클레이오를 일으켜 세웠다.
마법사를 지키듯 양측에 선 두 검사는 검을 빼 들었다가, 이 일의 원흉을 확인하고 나선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 아이들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목격자 하나 없는 한밤의 산중도 아니고, 수도 한복판에서 적통의 왕자에게 직접 검을 들이댈 순 없었다.
퉷.
입안의 흙을 뱉으며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언젠간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막 문으로 들어가려던 클레이오의 덜미를 잡아채 바닥으로 처박은 자는 아슬란의 기사 중 하나였다.
이쯤 오면 클레이오는 찬스마다 아서에게 기회를 빼앗긴 아슬란의 심정을 역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간략화하자면 ‘이 새끼 존나게 족치고 싶네.’ 정도로 요약될 감정이었다.
척.
저벅저벅.
저벅저벅.
위협적으로 절도 있는 발소리를 내며 아슬란의 뒤로 세 명의 기사가 도열했다. 클레이오를 메쳤던 기사도 곧 그들 곁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검은 띠를 둘러멘 크뤼엘 기사들은 동남에서부터 아슬란을 수행해 수도로 온 이들 중 일부였다.
아슬란의 거처인 테오발드 궁에 머무르는 기사들은 모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투구의 그늘이 눈가를 가려 개개인이 식별되지 않았다.
마법의 여운에 감싸여 공기는 봄처럼 훈훈한데, 정서적으로 냉막한 분위기가 주변을 싸하게 얼렸다.
마법감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왕자는 항의하려는 제베디를 완전히 무시하고 문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안정화된 입구를 확인한 아슬란의 표정이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미, 놈이 들어갔군.”
그는 ‘아서’가 문으로 들어갔음을 확신하는 거였다.
클레이오는 2왕자의 혼잣말에서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그가 대동한 기사는 네 명. 아슬란 본인까지 포함하여 다섯이다.
‘저번의 전광의 밤에 어리바리하게 한 명만 달고 와서 낭패 본 것과 달리, 이번엔 던전 입장 인원을 아슬란도 알고 왔단 뜻이지.’
고문서이든 전생이 기억난 것이든, 클레이오 입장에서는 하등 좋을 것 없는 일이었다.
아슬란도 클레이오도 서로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 팽팽한 긴장 가운데 제베디가 끼어들었다.
“아슬란 전하, 므네모시네의 문의 개문에 대응하시는 일이 중한 줄은 알겠사오나 제 유일한 제자를 그리 막대하심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마법감.”
“네, 전하.”
“한 번 더 경망스레 입을 놀리면 이다음 내가 그대를 불렀을 땐 그대의 지위가 마법감이 아니게 될 걸세.”
지팡이를 쥔 제베디의 손등에서 핏줄이 퍼렇게 불거졌다. 대마법사조차도 지상의 권력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서였다.
스웨인 템플은 어느새 제베디 곁으로 이동하여 왕자와 마법감 사이를 막아서듯 자리 잡았다.
클레이오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쿨럭이며 흙을 뱉어냈다. 모래흙이 잇새에서 뽀각뽀각 달각이는 걸 생생히 느끼고 있자니 구질구질하기까지 했다.
‘이 자식은 적통의 왕자라면서 하는 짓은 늘 시정잡배만도 못하네.’
불퉁하게 고개를 드니 경멸과 분노가 뒤섞인 아슬란의 시선이 일행에게 와 닿는 게 보였다.
클레이오는 조금 놀랐다.
스웨인은 바로 직전 던전에서 아슬란과 더럽게 엮인 역사가 있었고, 클레이오 본인 역시 3왕자의 마법사로서 적대시당하는 건 알았다.
‘하지만 저 눈빛은, 좀 더 뭐랄까—.’
그 순간 ‘약속’이 제멋대로 달아올랐다.
급작스레 켜진 「직독」기능은 아슬란의 표정을 문자처럼 읽어낸다.
데르니에 서쪽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이은 자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의연하게 굴고자 하나, 언제나 상황은 그를 배신한다.
이런 어린아이와 노인을 상대로 속악하게 굴어야 하는 상황에 자신이 놓이는 게 아슬란은 부당하다고 여긴다.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로 파헤쳐진 깊은 구렁텅이가 왕자의 준수한 얼굴 가운데 푹 파여 있었다.
검고, 어둡게.
클레이오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러나 아슬란은 그 눈빛의 불손함조차도 따져 물을 가치가 없다는 듯, 지체 없이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1) Albert Camus, 「Return to Tipasa」, 『in The Myth of Sisyphus And Other Ess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