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634
◈ 난세 (4)
* * *
투명한 햇살이 설원에 부딪혔다가 사방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농밀한 기파들 탓에 더욱 두드러지는 풍경. 온 팔방이 새하얬다.
은은한 광채의 일부는 자연스럽게 소천무적의 은가면까지도 올라갔고, 눈매와 하관을 드러낸 가면의 표면에서 작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얼굴인 듯, 혹은 그녀의 마음인 듯.
정연신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모습도 그랬다. 심상에 밤하늘을 펼친 채로 남제와 황금빛 논밭에서 이야기한 뒤이기 때문일까.
이제 정연신에겐 소천무적의 광기 어린 마성(魔性)이 삶의 질곡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했다.
[단란해서 보기 좋군. 진정한 의미로 일가를 꾸린 건가?]언젠가 칠사도를 정연신의 부인으로 칭했던 것처럼 농담부터 건넨다. 하지만 메아리처럼 울린 음성 탓에 전율스럽게만 다가왔다.
이처럼 술법무공의 수행자가 대기에 진동을 일으키며 이야기하는 것은, 검객이 칼을 뽑아둔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혈왕이 곧장 반응했다.
“흑도의 서천명왕?”
그는 혈귀인 동시에 반투신파의 마경 강호인이다. 당연히 남제와 손잡았던 강자에게 민감할 터였다.
심지어 이 순간 진지에서 만전인 절세고수는 혈왕뿐인 상황.
소천무적 같은 절세지경의 전투 귀재가 척후마냥 치고 빠지면, 이곳이 신검단 진지의 한복판이라도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전사자가 나올 터였다.
곧장 입황적가주 혈왕의 전음이 빛살처럼 정연신의 귓가에 꽂혔다.
―무공군세가 절대적으로 의미 있는 경우는 영토를 점령할 때와 정면 대결이 벌어질 때뿐일세. 하지만 저 마교의 수장은 지켜야 할 것이 전무한 형편이니, 금일의 운수는 아주 나쁘다고 할 수 있겠네.
이처럼 운수를 입에 담아야 할 상대인 것은 맞다. 일평생 구명절초를 엮은 절세고수들은 크건 작건 모두 천재지변인 까닭이다.
하지만 정연신의 말은 설원의 빛안개처럼 평온했다.
“공월무도 없는 자입니다.”
소천무적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간 것도 동시였다.
[그러고 보니, 남들의 삶으로 엮은 구명절초도 공월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 아우의 절초에 필적하는 수법이 내 수중에 없을 것 같나?]이 순간 소천무적은 흰빛으로 채워진 허공에서 절대자처럼 정연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정연신은 담담하기만 한 얼굴로 그녀와 눈을 맞췄다. 흉년에 굶주린 양민을 굽어보듯이.
“용무를 말해라.”
근래에 느끼기로, 기근은 땅에만 들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도 논밭처럼 갈라질 수 있었다.
―그대와 교주님이 다시 마주할 날은 반드시 올 거요. 그때, 잠시라도 한 번만 출수를 재고해 주시오.
명교의 태사와 약조한 것과 별개로 소천무적이 가련하게 보인다. 공월무가 없는 절세고수. 언젠가 남궁가주가 그랬듯이 제 삶에 자기 자신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각이 달라졌다.
관계도 조금씩 변해 갈 수밖에.
순간 그녀의 머리가 미미하게 갸웃 기울어졌다. 어째서인지 말투도 조금쯤 건조하게 바뀌었다.
[눈빛이 조금 거슬리는군. 널 볼 때 이런 적은 없었는데.]“나와 겸상한 것처럼 길게 이야기하려면, 공월무와 비슷한 것이라도 연성하고 와라.”
백미려의 행방을 문초하기 직전에 진심으로 조언했다. 소천무적이 타인의 삶을 깊숙이 받아들이길 바랐던 까닭이다.
혈왕적가의 막사가 있었던 주변에서 묘한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정연신은 손아귀를 살짝 오므리기만 했다.
화륵!
도가 삼청력(三清力)을 이음새로 삼아 법력과 마기가 무색의 빛깔로 부딪치기 시작한다.
별밤의 전조였다.
‘무리 없이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한 호흡 하고도 반 정도.
하지만 절세고수의 호흡은 영겁처럼 길게 이어지는 법이다.
어느새 정연신의 옆자리에 귀신처럼 선 칠사도는 물론 눈앞을 막아선 외팔의 진명조, 칠사도의 뒤에 선 입황적가주의 합공까지 염두에 둔다면 더욱 여유롭다.
소천무적도 알 것이다.
때문일까.
그녀는 새까만 마기(魔氣)가 일렁이는 눈으로 정연신의 손아귀를 힐끗했다. 동시에 이번에는 별다른 손장난을 시도하지도 않고 말했다.
[네게 천마총의 위치를 알려주러 왔다.]앞서 백미려를 보냈다고 말했던 중원의 어느 지점. 지금에 이르러 이름 모를 천마가 아니라 초대 천마의 무덤으로 밝혀진 곳이다.
혈왕적가의 일부 고수들이 미세하게 헛숨을 들이키는 가운데, 정연신은 담담히 입을 뗐다.
“속내를 말해라.”
“나와 겸상하려면….”
[고금제일에 가까운 상단전들이 한 곳에서 머리를 맞대면, 강호의 모든 신비가 범상해질 것이란 말이 있다. 본교의 초대 조사와 달마, 또 장삼봉과 ‘문’을 겪은 강호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격언이지. 무림사(武林事)를 통틀어 벌어진 적 없는 일인 만큼, 당연히 허황된 상상이라 할 수 있을 거다.]어느새 모든 신검단 무인이 진지에서 나와 정연신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소천무적은 그들의 폭포수 같은 기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은 헛된 상상이 아니다.]“…….”
[너와 내가 있다. 하나만 더 생기면 돼.]그 말은 기이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세상 바깥에 내뱉어진 것만으로도 설원이 대막(大漠)의 메마른 모래알처럼 건조해진 느낌.
상단전 예지일까. 정연신은 어째서인지 옛 신검단주, 신천화의 원영신을 입은 원로원주 신벽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소천무적은 자신이 생각하는 또 다른 ‘하나’가 무엇인지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다.
[뭐, 그게 내가 백미려를 회유함에 있어 거짓말까지 소모했던 이유다.]거짓을 소모한다. 사람 간의 관계마저 술법무공의 일종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정연신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확인차 묻기만 했다.
“백 선배의 안위는?”
[염려 마라. 사지근맥이 모두 온전하고, 심지어 삼화취정마저 이루었다. 백미려는 이제 네가 살아있음을 알고도 내 뜻에 따르는 중이야.]소천무적의 언행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면이 있다. 소천(笑天). 하늘마저 조롱하는 무적자. 하지만 정연신은 오히려 시종일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됐다. 백 선배는 그게 옳다고 판단한 거다.”
[뭐?]“너와 달리 단단한 사람이다. 천마총의 위치나 말해라. 네 궁극적인 목적까지 이야기해 주면 좋다.”
[…….]공월무가 없다는 말보다 큰 감흥이 일어난 걸까. 소천무적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동안 정연신을 물끄러미 내리깔아본 뒤에야 얘기했다.
[…우선, 옛 장안 땅이다.]“섬서성 서안?”
[그래, 화산과 종남조차 끝내 찾아내지 못한 산자락에 숨겨져 있다. 종남 대장로 여일신이 최근에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만… 어림도 없지.]동시에 소천무적은 구름을 한 발짝 박차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혹시 내 말이 거짓이라도, 마경에 비하면 양양에서 지척이나 다름없으니 천하 신검단주가 움직일 만하겠지. 아, 이제는 북제라 불러야 하나? 개인적으로 명 황실의 눈치가 보인다만.]거대한 시대의 흐름이 재미있는 듯 의뭉스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 동시에 그녀는 상공에서 천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형공허였다.
[서안에서 보자. 당장 의문이 있어 날 붙들고 싶다면 잡아봐라. 그 용조수(龍爪手) 같은 무공의 파훼법을 궁리하는 것도 제법 즐거웠지. 지금 실전에서 네게 통할지 궁금하기도… 음?]어느새 안개처럼 옅어진 그녀의 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연신이 비친다.
그는 설원에 내려앉은 눈더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소천무적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느릿하게 입을 떼는 정연신.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증오로 여생을 보내지 마라. 그건 의미 없고 슬픈 일이다.”
평온한 어조였다. 희미한 동정심마저 북새풍처럼 깃들어 있었다.
[너…!]소천무적은 스스로 제자리에서 사라지면서도 크게 놀란 듯했다. 정연신이 정말 끝까지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려한 은빛 반가면의 안쪽.
절세의 영역에서 느릿하게 비친다.
작게 벌어지는 입술과 치켜 올라가는 속눈썹, 대로한 듯 당혹스러운 듯 오뚝하게 주름지는 순백의 코끝. 완전히 처음 보는 표정이다. 이 순간 그녀의 모든 것들이 정연신에게는 퍽 우스운 모습이었다.
화악!
흡사 정연신이 소천무적을 떠나보낸 듯한 광경을 마지막으로, 명교주 현현은 거짓말처럼 끝나버렸다.
남은 것은 신검단과 입황적가였다.
* * *
흑도 대회전에서 전신 공력을 불태우지 않은 신검단 무인은 없다. 뒤늦게 참전한 입황적가를 제외하면, 모든 고수들에게 시간이 필요한 형편이었다.
일국(一國)을 상대로 저마다 크게 입어버린 내상과 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
소천무적이 사라지자마자 오백여 명의 본성 무인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까지 감아버린 이유다.
천하 명교주의 마기(魔氣) 파동은 재액과 같았다. 원래 멀쩡했다면 모르되, 이미 크고 작게 벌어져 있는 내외상을 자연스럽게 더욱 벌려 놓았다.
잠시 소강상태였다.
설원의 새하얀 태양이 반나절쯤 빠르게 구름 너머로 기울어졌고.
그러한 신검단 진지가 올려다보이는 협곡에 두 노인이 나타났다. 태평스러운 대화와 함께였다.
“그나저나 잘 내쫓았군. 흑도 대회전에 이어 곧바로 저 명교주와 격돌했다면…? 아찔해, 참으로 아찔하다.”
“그저 당연한 일이다. 가진 거라곤 제 몸뚱아리뿐인 마귀가 ‘천하 북제’에게 어찌 대적하겠느냐?”
“그쪽도 가진 것이라곤 회춘한 몸뚱이뿐….”
“쓸데없이 바닥에 퍼져 앉지 말고 진기의 다리나 다시 뽑아봐라.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데, 너 곰이 구르는 재주는 참으로 탁월해졌다. 만사가 하찮건만 무언가에 질리지 않는 것은 오랜만이다.”
“이 새파란 늙은이가 아직도 승복을 못 하고…?”
“네 경맥이 크게 녹슬었음을 안다. 그야 반로환동시켜 줄 손주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본좌가 감안할 테니 일각만 더 뛰어보자.”
“그만!”
그때였다.
주광신개를 내려다보던 마연적의 눈이 문득 가늘어진다.
곧이어 그는 신검단 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불현듯 용희명의 모습이 눈동자에 비쳤다. 빛바랜 문사풍의 소맷자락을 멋스럽게 펄럭이며 정연신의 면전으로 내려서는 모습.
“저놈은 갑자기 왜?”
“느끼지 못했나?”
저잣거리의 거지처럼 눈바닥에 퍼질러 누워있던 주광신개가 조금쯤 굳은 얼굴로 말을 잇는다.
“치명상을 입지 않은 것처럼 뛰어다니더니, 천하의 패협도 만전과는 거리가 먼 모양이로군. 하기야 북도 같은 괴물을 흔적도 없이 찢어 죽여 놓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뭐라?”
“큰 기파가 접근해 오는 중일세. 외조부의 눈에는 북제란 이름이 대견하게 비치겠지만, 섬예에게 붙은 제(帝) 자는 이제 강호 무부의 별호로 볼 수 없네. 실권과 상징성이 달라. 가만히 있어도 폭풍을 몰고 다닐 수밖에….”
주광신개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신검단주 ‘대리’, 노고가 컸다.
하얀 운해(雲海)의 지평선 너머에서 웬 기둥이 날아오듯 중후하게 꽂히는 목소리.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여 면목이 없다. 하필이면 이제야 움직일 만해져선, 참으로 빌어먹을 상황이야. 오늘의 일로 내 체면은 모두 구겨질 것이다.
음성이 구름 줄기를 타고 짓쳐들어온 것마냥 광활하게 물결친다. 어떤 전음이나 육합전성과도 달랐다. 근본적으로 바람과 동화되어 있는 기공(氣功). 고고한 명족의 기질이었다.
“양천.”
마연적의 눈매에 반로환동 이전과 같은 주름이 진다. 양천공(敭泉公). 명나라 황실삼대고수의 일좌. 사사롭게는 건릉제의 수제자로, 천하에서 가장 자유로운 주씨를 일컫는 이름이었다.
―여하간 이해해다오. 씨족으로서의 입장이 입장인데다, 이쪽도 나름대로 목숨을 내려놓고 왔다.
뒤이어 울린다.
[명 황실의 교지를 전한다.]똑같은 음성인데, 기질이 달랐다. 상단전 신(神)의 영성이 새하얀 구름의 바다를 거침없이 가로질러 온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해일처럼 거세게 물결치는 힘. 공월무의 전조였다.
신검단 진지에 대포의 포신을 겨누어두고 이야기하는 격.
[명나라의 누백년 사직(社稷:나라와 조정)이 걸린 황명이다. 그 첫 번째. 이 순간부터 누구도 움직여선 안 될 것이다.]이야기가 전해지는 순간에도 양천공의 음성은 거대해지고 있었다. 급속도로 접근 중이라는 의미다.
능공허도(凌空虛道)든 명족들 특유의 바람 공능이든, 경쾌하리만치 빠르게 하늘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불현듯 용희명이 신검단의 진지 한복판에 웬 잿빛의 신검(神劍)을 꽂아 넣은 것도 그때였다.
콰악!
바로 정연신의 면전이었다.
“약속은 약속이지. 섬예도 일어났고.”
목소리에 실린 진기가 투명한 엿가락마냥 설원에 흘러내린다.
어떤 용(龍)의 기운이 유희 거리를 맞닥뜨린 듯한 느낌. 곧장 황실의 전언을 놀리는 듯한 용희명의 육합전성이 이어졌다.
[입신검의 계승을 시작한다.]반응은 낭떠러지 아래의 협곡에서 일었다. 찰나지간 그의 옆자리에 마연적이 착지했던 것이다.
쿵!
푸확 솟구친 백설(白雪)의 파편들 위로 햇빛이 투명하게 아롱진다. 도합 세 명의 자색이 입신검을 둘러싼 광경.
용희명은 정연신의 평온한 얼굴을 힐끗 보고는 슬쩍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공증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라.]사락.
신검단 고수들이 가부좌를 푸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