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71
부드럽고 가벼운 밤, 인생의 멋진 시간 (5)
술을 쫄쫄 빨며 첼과 클레이오의 공방을 듣고만 있던 아서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끼어들었다.
“너희가 날 두고 이러는 거 너무 무의미한 논쟁인 것 같은데.”
엉겁결에 맥이 풀린 듯 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래. 어이쿠 보자, 우리 장래의 주군 머리 올리니까 신수가 훤하긴 하네. 궁성의 레오니드 초상화랑 얼추 비슷하잖아.
농담 아니라, 상처 괜찮지 않아? 제법 관록 있어 보이고 멋진데.
지방은 아슬란이지만 여기 수도에선 아서 네가 단연 인기가 좋다고. 이 모습 잊지 말고 사진이라도 찍어놨다가 엽서로 팔아도 좋겠어.”
“첼, 그건 농담이라고 해 줘.”
“내가 그런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니? 초콜릿 통에 끼워주는 유명인 카드에 네 것도 들어가게 힘 좀 써봐야겠는걸. 아서 레-오-니-드 리오그난, 왕자이자 기사이자 영웅. 운이 맞네.”
“으, 제발.”
아서는 술잔을 내려놓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서가 앉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첼은 집요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야, 이시엘네 아버지에게 다 들었어. 너 어릴 땐 자길 레오니드라고 소개하고 다녔다며. 이제 와서 왜 새삼 부끄러워하는 거야.”
“어머니는 나를 레오라고 불렀으니까 익숙해서 그랬지.”
“그 중간 이름은 역시 어머니가 지어준 거?”
“어.”
“아들에게 레오니드란 이름을 붙이다니, 담대하기 그지없으셔. 한 번쯤 만나 뵐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악우들의 투닥거림을 보며 클레이오는 공작을 스르르 회수했다.
아서는 어머니를 꼭 빼닮았다.
자라면 자랄수록, 직독으로 봤던 테오필라의 얼굴과 더 비슷해졌다. 그녀가 출아법으로 낳았대도 믿길 얼굴이었다.
‘정복왕의 재래니 뭐니 해도 사실 아서는 진짜 레오니드랑은 별로 안 닮았지.’
궁성에 걸린 레오니드와 이솔트 초상은 근세에 제작된 것이다.
왕의 홀 석관 뒤편에 남겨져 있는 중세의 모자이크화는 양식화된 형태인 데다 보존 상태도 좋지 못해서 인물의 사실적 생김새를 아는 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첸트룸에서 과거를 직접 본 클레이오로선 실물과 재현의 차이가 아주 잘 느껴졌다.
‘뭐 아서는 시조와 컬러칩이 같다는 점마저 이용해야 할 처지니까, 오해를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무엇이든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신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이용할 것이다.
‘그걸 위한 무도회이고.’
때맞추어 문밖에선 오보에의 A음이 길게 울렸다. 그에 맞추어 악단이 음정을 조율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졌다.
무대의 막이 오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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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튼 부인은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열쇠들이 소리 내지 않도록 잘 묶어 치마 안주머니에 넣었다.
무도회 준비는 모두 끝났다.
곧 마차들이 도착할 것이다.
아세르 타운하우스에서 열리는 20년 만의 무도회였다.
모두가 이곳의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도련님을 모시기 위해 수도로 간다고 했을 때 채트윈-탈봇 저택의 동료들은 정에 휩쓸려 헛고생을 하지 말라 만류했지만, 루이즈 캔튼은 도련님을 곁에서 위하는 게 헛고생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때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님의 말씀은 이제껏 이뤄지지 않은 게 없어.’
마지막이 머잖았던 순간, 쇠약한 텔마는 어울리지 않게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으로 등을 들썩이던 건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루이즈 자신이었다.
언젠가 다시 저택의 모든 창에 불을 밝히고, 벽장 속 은촛대가 전부 나와 늘어설 날이 있을 거라고 텔마는 말했었다.
‘모두들 나의 아이를 위해서 모여 줄 거란다, 루이즈.’
그리고 그 일은 이루어졌다.
2주에 걸쳐 엄밀하게 다듬은 정원.
얼굴이 비치도록 닦아놓은 난간.
일류 악단이 자리한 홀.
20년간 간직한 수반에 다알리아와 인동 꽃, 겨울 장미를 화려하게 꽂은 현관 장식.
정찬실에 늘어놓은 은식기의 반짝임.
주종에 따라 충분히 식히거나 온도를 올려 준비한 술.
입구에서 빈객을 응대할 풋맨들은 물론이요 임시로 고용해 훈련시킨 급사들조차 소매에 먼지 하나 없이 말쑥했다.
모든 것이 흡족했다.
캔튼 부인은 텔마 여사에게 배웠던 일의 방식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디오네가 거기에 현대적인 감각까지 더해주었다.
2층부터 홀, 정찬실, 식기실, 주방, 와인 셀러를 거쳐 마구간과 차고로 나왔다.
미라와 정원사 보조가 응접실만큼이나 깨끗이 치워둔 차고는 거의 다 들어찼다.
한때 수도에서 머무르며 텔마를 도왔던 그녀는 마차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들을 알아보았다.
그레이어, 세르게프, 탕페트 드 네쥬, 안젤리움, 이사이, 퓌시스, 젠틸레.
그 화려하고도 오래된 이름들에 마음이 울컥했다.
또한 새로운 이름도 있다.
클라인, 레비, 신문 사교란에 기고하는 기자들, 그레이어 공방의 마법사 장인들.
자동차나 네임카드를 넣은 전세 마차를 타고 온 이들 역시 많았다. 그들은 지금 시대의 실세들이다.
이것이 아세르 준남작님의 뜻인가?
그분께서 이루도록 한 일인가?
‘아니야. 모두 텔마 님의 예언처럼, 클레이오 도련님이 해낸 일이야.’
예언의 실현이 기뻐야 마땅한데 왜 주책없이 눈가가 시큰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련님이 모은 명성이 그 자신을 위한 게 아니란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서 님을 만나고서 도련님은 달라졌다. 루이즈 캔튼은 그 점이 감사하면서도 아주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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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에 이르자 홀이 가득 찼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카드리유를 출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몸을 던진 후, 제집처럼 홀을 휘젓고 다니던 첼은 볼이 불퉁하게 분 릴리안과 곤란한 기색의 기젤라를 뒤늦게 발견했다.
“안녕, 릴리안. 네가 입으니 고전적인 모슬린 드레스가 한 떨기 리시안셔스 같구나. 기젤라, 네 연미복도 근사한데?”
“고마워요, 첼 선배. 기젤라랑 자매처럼 입기로 한 건데 얘가 변덕을 부려서, 쳇.”
“키가 갑자기 커서 작년에 맞춰 놓은 드레스가 안 맞는다니까.”
“아이고 잘났어요, 기젤라 클라인. 난 땅꼬마라고 놀리는 거니?”
“하하, 너희도 나름 재미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네. 아, 율리아! 당신도 와 줬군요. 오! 실라, 당신을 여기서 보다니 영광이에요.”
첼이 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진 뒤, 기젤라는 술잔을 쥔 채 팔을 쭉 펼쳐 홀을 훑었다.
“거 봐. 솔직히 여기서 드레스 입어 봐야 댄스 카드에 이름 적어볼 만한 멋진 남자도 없잖아.”
기젤라를 따라 다시금 홀 안을 둘러본 릴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유. 그건 그렇지만.”
이를테면, 가장 가까운 자리.
릴리안 눈에는 아버지뻘로 보이는 바이제 레비와 그의 부인이 느릿느릿 춤추며 신혼처럼 새롱대고 있었다.
약간 먼 곳.
릴리안이 학교에서 맨날 보는 제베디와 마리아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예의상 한 곡, 가장 느린 왈츠를 춘 뒤 클레이오와 마법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여기 와서까지 마법이다!
학교에 입학한 릴리안은 마법 수업을 딱 세 번 듣고는 바로 검사반으로 지망을 바꿨다. 여학교에선 늘 우등생이었는데, 여기 와 보니 자신은 공부머리는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포지션을 바꿔가며 신명나게 플로어를 휘돌고 있는 안젤리움 쌍둥이들 뒤로, 웬 엄청난 미모의 귀공자가 있나 했는데 좀 더 보다 보니 아서여서 팍 식었다.
‘무지무지 분할 정도로 잘났긴 하지만, 오늘 하루 딱 잘 꾸며놨지 속은 어차피 아서 선배잖아.’
릴리안은 이제 아서의 다정한 청록색 눈이 좀 무서웠다.
언제나 고요하고 단단해서 거기에 파란이 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눈이었다.
게다가 불한당 같은 수염은 밀었다지만 저렇게 체격이 위협적인, 어딘가 위험한 육식 동물 같은 남자는 릴리안의 취향에 안 맞았다.
얼굴은 반반하지만 자신보다 체력이 없어 몸도 잘 못 가누는 클레이오 선배가 춤추고 싶지 않은 상대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보다 허리 가는 남자는 절대로 싫어. 으.’
전기로 밝힌 수정 샹들리에의 빛은 홀에다 햇빛 조각을 늘어놓은 듯 환했다.
릴리안은 조명과 좋은 시력을 십분 활용해 입구와 가장 먼 반대편 벽 쪽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저 푸른 머리 소위는 약간 괜찮은데?’
드디어 조금 멋진 남자가 포착돼 살짝 두근거렸다. 제복에는 계급장이 있어 지위도 알아냈다.
어깨에 걸친 로브만 아니었으면 수도방위대 마법단원이 아니라 기사단원이라고 생각했을 만치 단련된 사내였다.
키가 적당하고, 체격도 늘씬하게 단단하고, 자세도 딱 반듯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약간 금욕적인 듯 담백한 인상이 딱 릴리안의 취향이었다.
‘…근데 그러면 뭐해. 마법단의 미친놈 모시느라 춤이고 뭐고 말도 못 걸어 보겠는데! 쳇!’
릴리안은 홧김에 술만 연달아 원샷했다.
기젤라는 친구를 말리느라 실랑이를 벌였다.
릴리안이 관찰한 대로, 아레미스 한 소위는 아까부터 직속상관인 에즈라 세르게프 부단장을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수도방위대 제복을 갖춰 입고 정모까지 쓴 다리아와 아레미스는 오늘은 비무장 상태인 에즈라의 경호인으로 동행한 터였다.
정작 에즈라가 에스코트 해왔던 디오네는 사교 활동에 열중 중이었다.
에즈라는 손만 덜덜 떨었다. 기껏 준비한 토끼 가면도 쓰지 못해서, 부관인 아레미스가 가면을 대신 들고 있었다.
“어, 어, 어, 어떡하지. 디, 디, 디오네가아~ 기다리고 있으면 온대. 마지막 앞 곡 댄스 카드에 이름도 적어줬어.”
“진정 좀 하시죠, 부단장님.”
벽에 기대 둔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다 주변을 걸었다 멈췄다를 반복하는 에즈라는,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팔과 다리가 한 방향으로 같이 나갔다.
다리아는 에즈라 앞을 은근슬쩍 몸으로 가려 서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보니까 레이디 디오네는 여기서 제일 바쁜 사람이야. 네 차례는 한참 뒤니까 정신 좀 차리지 그래.”
이런 놈이지만 마법단의 부단장이고, 일단은 다리아 자신의 상사이다.
신문 사교란 칼럼을 쓰는 기자들까지 와 있는 자리에서 한심한 꼴을 보이는 건 부하들에게도 영향이 가는 위신의 문제였다.
‘중요한 건 무도회 뒤에 있는데 이놈이 소란을 피워도 곤란해.’
무도회는, 이 밤에 클레이오 아세르와 3왕자가 제 사람을 한데 모을 구실이었다.
“그, 그, 그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겠지~?”
다리아는 홍차와 주스에 브랜디를 조금 넣고 과일로 장식한 가벼운 펀치 잔을 에즈라에게 쥐어주었다.
“이거 마시면서 마음 좀 가라앉히고 있어.”
다리아의 유모는 애가 너무 울 때 물에 탄 약주 한 방울을 입술에 적셔주면 잠잠해진다고 했다.
과연 유모의 처방은 25살 먹은 어린애에게도 잘 들었다.
에즈라는 스르륵 벽에 기대 잠이 들었다.
밤은 깊어가고 악단은 점점 빠른 춤곡을 연주했다.
첼레스테스를 알은체하는 화려한 아가씨들이 쏟아져 들어오는가 하면, 수수한 울 정장을 입은 작가와 기자들도 어색하지 않게 무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지금 첼과 함께 플로어를 휘두르는 사람은 디오네였다. 사교계의 마법사는 전기로 밝힌 샹들리에의 빛이 무색하도록 화려한 웃음을 지었다.
“첼, 왜 그렇게 초대장을 많이 가져가나 했더니 본인의 화원을 꾸미려는 거였군요.”
“설마요, 오늘 제 마지막 춤은 소중한 친구에게 예약해 두었답니다.”
“키시온 영애요?”
“이처럼 사람이 많을 땐 아서를 지키느라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니까요.”
두런두런 속삭이면서도 두 사람은 그림처럼 멋지게 춤췄다.
마법사와 기사가 과감한 턴을 선보이며 스텝을 마무리하는 순간.
입구가 소란해졌다.
“외제니아 라니에리 공녀님께서 드십니다.”
외제니아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디오네와 몇몇 사람들뿐이었다.
초대장이 있든 없든, 공녀는 입구의 풋맨이 입장을 막을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은밀하게 눈빛을 나눈 이들은 아주 적었고, 자신들의 마음을 잘 갈무리할 줄 알았다.
좋은 술과 음악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을 담아 홀의 열린 문을 주목했다.
다른 누구도 없이 샤프롱 하나와 호위 둘만 대동한 공녀는 당당하고 태연한 태도로 주인이 자신을 맞이하길 기다렸다.
‘와, 그 소문의 공녀님이 다 행차하시다니. 굉장한데.’
‘정찬도 없는 가내 무도회인데 클레이오 경의 위세가 대단하네요.’
‘저 흑단 같은 머리며 신비한 눈동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