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70
부드럽고 가벼운 밤, 인생의 멋진 시간 (4)
‘뭐 자아상에 군살이 없는 점도 좋은 자질이긴 한데… 이 세계의 신은 그렇게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줄 수도 없고. 내참, 평소엔 대범한 놈이 칭호가 안 나오는 거엔 왜 저렇게 신경을 쓰는지.’
클레이오는 아서의 옆으로 다가서며 가볍게 말했다.
“그럼 나도 칭호 없는 상급 마법사니까 비슷하게 덜떨어진 꼴이네.”
8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첼이나 이시엘, 심지어는 태서턴까지 지난 생애와 같은 칭호를 얻었다.
그들과 달리 아서의 칭호는 8교에서도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클레이오 자신에게도 역시 칭호가 부여되지 않은 것을 보면, 칭호라는 건 인물이 서사 안에서 신이 원하는 역할과 지점에 정확히 안착했을 때 확정되는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이 떠올랐다.
최초로 삽입된 인물인 자신, 그리고 개정의 중심인 주인공은 아직 원고 안에 완전히 자리 잡히지 않은 것뿐이다.
아서는 입을 비죽였다.
“그건… 아, 뭔가, 이게 아닌데. 비겁해, 레이. 그러면 내가 반박을 할 수가 없잖아.”
“비겁? 뭐가 비겁해. 짜는 소리 말고 걸음이나 재게 놀려라. 오늘 이 무도회가 다 너 때문에 열리는 건데, 투자자 앞에서 기운 빠지는 소리 할래? 가서 단장하고 정장 차려입으려면 여유부릴 시간 별로 없다고.”
“헉, 뭐? 나도 너처럼 때 빼고 광내야 해? 편하게 하는 무도회라며!”
정찬도 없는 가내 무도회라 안심하고 있던 아서가 대놓고 질색했다.
“자기가 기획한 파티에 한 명의 사내놈이라도 후줄근한 꼴로 어슬렁거렸다간 용서 안 할 거라는 레이디 디오네의 지엄한 명령이 내려왔단 말이다. 줄리는 디오네의 추종자야. 여기서 너와 내 발언권이 있을 거 같냐?”
아서는 검술 연습 후 비누로 벅벅 씻어서 마구 삐친 뒷머리를 긁었다.
“없겠지?”
말이 아세르 저택 파티이지 실권자는 디오네이고 실무자는 캔튼 부인이다.
“네가 치수만 재고 내빼서, 가봉도 제대로 못 한 맞춤복을 찾아와 길이랑 소매를 딱 맞춘 것도 줄리라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재단사였대.”
“네 저택엔 어째 갈수록 능력자가 늘어나냐.”
“아직은 내 저택 아니거든. 추가급료나 자동차 유지비 정돈 내 주머니에서 나가지만… 저택을 정말 내 걸로 만들어 주려면 네가 분발해야지.”
아서는 모르는 일이지만 수도의 아세르 저택은 토지 소유권까지 소유주에게 함께 귀속된, 룬데인 시에선 드문 물건이었다.
기디온은 클레이오가 상원의원이 되면 아세르 저택을 준다고 약속했다.
그건 처음부터 지금까지 클레이오가 아서에게 요구하고 있는 유일한 대가였다.
아서는 이제까지의 망설임을 버리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렇게 될 거야.”
클레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목표가 아니라 당위였다.
이전이었다면 농담밖에 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오늘부터 이 확언은 농담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 밤에 모든 것이 바뀔 것이므로.
무도회는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음악 소리가 그친 후 있을 결의야말로, 42대 알비온 국왕의 영점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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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홀에 부려놓은 아서는 디오네가 보낸 이발사에게 붙잡혀 자신 몫으로 주어진 2층 침실의 캐비닛 룸으로 끌려갔다.
그 뒤로 아서는 속성 꾸밈을 당했다.
우선은 수염을 목과 귀밑까지 꼼꼼히 깎였다. 손톱을 다듬고, 깨끗한 오른손과 달리 상처가 유독 많은 왼손은 마사지까지 받아야 했다.
클레이오 역시 아래층까지 내려와 기다리던 줄리의 성화 ― ‘기껏 크림 발라놨는데 피부가 또 부석해 졌잖아요!’ ―를 들으며 침실로 복귀했다.
야단법석은 파티를 1시간 남겨 놓았을 때에야 끝났다.
오늘 아세르가의 응접실에는 피로에 지친 마법사와 산도깨비 같은 검사 대신, 선이 몸에 붙어 흘러내리듯 재단된 테일 코트에 실크로 된 화이트 타이를 맨 훤칠한 청년들이 자리했다.
두 사람 모두 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차림새였다.
얼핏 수수해 보일 수 있는 남성 연회복이지만 디오네는 제한된 틀 안에서 멋을 한계까지 내도록 지시했다.
셔츠에 덧대는 빳빳한 앞판을 고정하는 스터드, 웨이스트 코트의 단추, 그리고 커프 링크스까지 모두 같은 디자인의 보석으로 맞춘 건 기본이었다.
그동안에도 여러 번 연회복을 입어 왔지만, 오늘은 정말 어쩌면 이렇게까지… 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캔튼 부인이 칵테일을 가져다주며 오늘 무도회의 주최자와 주빈에 대해 평했다.
“눈이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도련님, 왕자님.”
“그,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부인은 아련한 눈빛을 보내며 이어 말했다.
“이 저택에서 파티가 많이 열리던 무렵에는, 맞아요, 신사분들도 그렇게 리본을 맨 구두를 신는 게 유행이었죠.
요즘 다시 한 세대 전의 유행이 돌아온다더니, 과연 레이디 디오네는 누구보다도 소식이 빠른 것 같네요. 전에 안젤리움 영애들이 선물해준 은여우 목도리까지 두르니, 도련님께 너무도 우아하게 잘 어울려요.”
체격과 외모가 다르기 때문에, 아서와 클레이오 두 사람의 옷은 디테일도 상이했다.
타이를 묶는 법, 라펠의 너비와 각도뿐 아니라 부토니에와 신발, 장신구도 달랐다.
클레이오는 벗으려던 여우 목도리를 슬슬 다시 여몄다. 솔직히 목도리는 너무 과하다 싶었는데, 부인이 저렇게 좋아하니 빼놓기도 뭣했다.
에나멜 광택을 낸 옥스퍼드화를 신은 아서와 달리 신발끈으로 새틴 리본까지 꿰어 신게 된 클레이오는 감격에 젖은 캔튼 부인에게 차마 불평은 하지 못하고 발끝만 꼼지락댔다.
“아서 님은 금빛이 잘 어울리네요. 클레이오 도련님께 백금과 진주를 달아드린 것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련님이 이렇게 번듯이 장성하신 모습을 텔마 님도 보셨어야 했는데….
아니 제가 무슨 말을, 그럼 마무리 하러 나가 보겠습니다. 손님이 도착하면 다시 말씀드릴 테니 쉬고 계세요.”
부인은 정말로 기쁜 모양이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텔마 여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입에 담는 것을 보면.
눈물이 글썽해진 부인이 방을 나선 뒤 분위기가 묘해지고 말았다.
눈치 빠른 아서는 슬쩍 뚱딴짓소리를 해 주변을 환기했다.
“야 허리를 어찌나 졸라맸는지 답답해 죽겠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라도 주우려 하면 단추가 튿어질 것 같아. 이런 거 입고 춤추는 파티를 이틀이 멀다고 벌이는 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근성이야. 정말 대단하다.”
“너는 가만히 있고 남들이 다 거들어 주는데 불평은.”
“이거는 왕성 들어갈 때보다 더 빡세게 꾸민 거라고. 거울 봐도 내가 나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겠어.”
솜씨 좋은 이발사는 아서의 모습을 180도 바꿔놓긴 했다.
꼼꼼히 손질한 머리가 삐치지 않도록 한 가닥 한 가닥 넘겨 붙인 아서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냉정하고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턱이 단단하고 하관이 발달하여 젊은데도 도저히 얕볼 수 없는 강인하고 중후한 인상이 더해졌다.
워낙 근육질로 단련을 해 잘못하면 둔탁해 보일 수 있는 어깨와 팔도, 정장의 재단이 잘되어 길쭉하게 떨어졌다.
왕가의 예복 없이도 어느 자리에서건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존재감이 그의 주변에 후광처럼 둘려 있었다.
클레이오는 3왕자의 최대 투자자로서 다소 흡족한 마음이 됐다.
“익숙해져야지. 그게 너인데.”
“와―! 그거 왠지 좀 무섭게 들리는 말이다.”
“무섭고 자시고, 연설 더 연습할 필요 없으면 너 일로 와서 좀 앉아봐라.”
칵테일 잔을 든 아서는 움찔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왜, 왜 그건 더 무섭게 들리는데? 도대체 뭔 일인데.”
“잔말 말고 가만히 있어 봐. 이마의 그거 거슬려서 못 살겠다. 머리 올리니까 너무 잘 보이네.”
“뭐가? 어?”
파아앗―
문답무용 클레이오의 손이 뻗어오나 싶더니 빳빳한 커프스 아래까지 부리를 내밀고 있던 공작이 긴 지팡이로 화했다.
여섯 겹 불의 고리, [치유]와 [복원]의 식이 범람시킨 빛 가운데 공작이 긴 꼬리를 펼쳤다.
클레이오는 좀 충동적으로, 아서의 반듯한 이마에 난 유일한 흠집을 메우기 위해 무시무시한 양의 에테르를 들이부었다.
엄청난 광량에 눈이 시리도록 부셔, 아서는 눈을 감고 말았다.
낭랑한 진언이 스쳐 지나가고 에테르의 빛이 꺼진 뒤에야 아서는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팔짱을 낀 클레이오는 성난 표정이었다.
“야, 한 번만 더 해보자.”
“어차피 안 되는데 에테르 낭비하지 마. 검사 이마에 칼빵 하나 있는 게 뭐가 어떻다고.”
“아, 젠장.”
오늘 사람들 앞에 나설 아서의 이마가 흠 없이 깨끗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주의 도시’ 이후 클레이오의 에테르 그릇 역시 확장됐다. 물량을 믿고 무식하게 밀어붙여 봤지만 역시 상처는 안 지워졌다.
아마도 그것은 마법의 강도 문제가 아니라 인과의 문제일 것이다.
이마의 상처는 아서의 시간이 뒤엉킨 증거.
다시 쓸 수 있는 세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바꿀 수 없는 조건이 수없이 많은 세계의 불완전함이 클레이오는 아쉽고 안타까웠다.
황금 공작 지팡이를 팔에 낀 채 클레이오는 소파에 풀썩 기대앉았다.
아서는 자신의 왼쪽 이마 위를 쓸어 봤다. 우둘투둘한 상처는 그대로였다.
클레이오가 듣는다면 대경실색하겠지만 아서는 그 흔적이 싫지 않았다.
세상 전체에서 잊히고 오로지 아서의 기억 속에만 남은 돌이킴, 클레이오가 행한 구원의 증거이므로.
한동안 마티니만 마시던 중 아서가 다시 촐랑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너 근신하는 동안 나도 마법식 하나 외웠어.”
클레이오는 잔에 입을 댄 채 눈만 돌려 아서를 쳐다봤다. 별 기대 안 하는 표정이었다.
“뭐 외웠는데?”
“경감.”
“해 봐.”
만년필을 쥔 아서는 열심히 애를 써 마법식을 새겼다.
문자와도 다르면서 아무런 규칙성이 없는 형상이다 보니 마법식을 제대로 외우는 건 꽤 어려웠는데, 아서는 좀 뭉개진 형태이나마 그럭저럭 그려냈다.
문제는 완성된 마법식이 [경감]이 아니라 [보존]이라는 점이었다.
클레이오는 저 너른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쳐봐야 이쪽의 손만 아플 것이다.
대신 손바닥만 한 크기로 축소한 [경감] 마법 식을 띄웠다.
“눈이 있으면 잘 봐봐.”
마법식 외경에 둘러진 두 줄의 기호는 같았지만 중앙 부분 획과 도형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어, 어? 이게 왜 이렇지?”
“너 마법식 『마법전서』로 안 보고 혹시 해적판 축약본 본 거 아냐? 『한 권으로 보는 마법전서 포켓북』?”
“어떻게 알았어, 레이.”
『마리아 선생님이 들려주는 마법 이야기』의 대성공 이후 마법 교양서에 대한 일반 독자의 요구가 커졌다.
하지만 클레이오는 너무나도 바빠 신간을 쭉 이어 낼 기획을 하지 못했다.
바이제 레비 역시 이모조모 늘어난 클레이오의 사업을 관리하느라 출판 부문에선 기출간 도서를 증쇄하는 데 그쳤다. 마법 이야기 해적판을 단속하고 판권료를 징수하는 국제 저작권 관리만 해도 벅찼다.
그 틈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저질의 유사 도서가 발간됐다. 『한 권으로 보는 마법전서 포켓북』이 그 살아있는 예시였다.
“그것도 책이라고. 마법식은 8절판 인쇄로 봐도 획이 헷갈리는데, 축소 인쇄에다 분류가 틀리기까지 한 걸로 봤으니 될 일도 안 되겠다. 됐다. 네가 마법식 쓸 일이 뭐가 있겠냐. 안 되는 데 시간 들이지 말자.”
“야 나도 한다면 할 수 있어. 다시 외우면 되지!”
“그래그래. 그러면 포켓북 말고 마법전서로 제대로 해.”
“아니, 학교에선 그건 항상 대출 중이고 난 책 없어서….”
“이따 돌아갈 때 서재에서 가져가라.”
두 사람이 티격태격거리고 있는 동안, 라스트가 뾰족하게 마무리된 멋진 신사화의 가죽을 댄 바닥 면이 카펫 위를 가볍게 디디는 소리가 났다.
첼이었다.
“뭐하는데 이렇게 소란스러워?”
“어, 왔어? 이시엘은?”
“저택 외부의 경비 상황을 학인해보고 들어온대. 레이 넌 술 마시다 말고 웬 지팡이를 다 꺼내놓고.”
“쟤 이마의 상처 좀 지워볼까 했는데 역시 안 되네.”
‘전광의 밤’ 때 마수가 떨어뜨린 파편에 긁혀 상처가 났다고만 알고 있는 첼은, 클레이오더러 유난이라고 혀를 찼다.
“사내자식 얼굴에 상처 한두 개쯤 뭐가 어떻다고.”
클레이오가 코웃음을 쳤다.
“그 말 이시엘은 별로 안 좋아할걸.”
첼의 눈빛이 조금 사나워졌다.
“그렇게 나오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