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84
이 배반은 고귀하지 않다 (2)
클라렌던 하우스와 왕의 홀을 비롯한 궁성의 심처는 클레이오의 확장된 감각으로도 탐색이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짙은 안개가 둘러싼 것처럼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는 곳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내막을 파헤쳐 볼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복잡한 계산을 하느라 차가워진 클레이오의 얼굴은 석고로 뜬 생명 없는 복제품처럼 보인다.
친우의 냉막한 눈을 들여다보던 프란은, 슬픔과 분노가 순서 없이 뒤얽힌 비이성적인 덩어리가 부풀어 명치 안을 꽉 누르는 것만 같다.
“네 동료들과 3왕자도 이 명령에 대해 아나?”
“방금 받은 메시지인데 전할 틈이 어디 있었다고.”
“그건 답이 아니다.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이 전언을 그들과 공유할 의지가 있냐는 뜻이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신의 금제로 인하여 언제나 참될 수 없는 클레이오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신실하게 진실할 수 있는 국면에는 언제나 그리하고자 한다.
그는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을 프란에게 드러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기만의 고백이었다.
“아니. 알게 하고 싶지 않아.”
판별의 안경이 진실과 거짓을 판별해주지는 않지만, 감정에 조응되는 인간의 신체 반응에 대한 관찰 정도를 예민하게는 만들어 준다.
프란시스는 그러한 정보를 조합하여 사람의 심리를 추측해내는 데 상당히 ― 지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법이라 착각할 만큼 ― 능숙했다.
클레이오는 진심이었다.
“지독한 헌신이로군. 도대체 무엇이 너로 하여금 그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까지 너 자신을 깎고 부러뜨려 디딤돌로써 처신하게 만드는 거지?”
“여신의 뜻이지.”
“그런 신이라면 필시 악신이로군.”
“하하,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선과 악을 논하는 건 좀 역설적이지 않아?”
“사후의 안식과 평안을 도덕적 실행의 조건으로 걸어두는 것은 납득이 가능한 원시적 상벌 구조이긴 하다. 나는 그런 믿음에 동의하지 않으나, 대규모의 인간이 장기간에 걸쳐 이룩해 온 믿음의 유산까지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판단할 때, 그 유산은 적어도 네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듯이 보이는군.
고통스럽게 죽어간 브룬넨의 인민들에게 여신이 자비를 보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있다면 그러한 참상을 어떻게 허용했겠나?”
신은 존재한다. 존재하나 전능하지를 못했다.
신에겐 자비심이 있다. 있으나 자비를 펼칠 권능이 모자랐다.
아슬란이나 멜키오르의 돌출 행동도, 최종고의 브룬넨이 이루어낸 잔인한 방식의 기술 발전도 모두 칼리오페가 뜻하거나 원한 바는 아니었다.
멜키오르가 말했듯, 신은 인간이 할 일을 모두 미리 알 수 없다.
인간의 행위가 실행된 뒤에야 사건의 맥락을 재배치하고 새로이 편집할 뿐이다. 완전한 돌이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치고 피로하고 절대적 신성을 잃었지. 자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조력자를 구해야 할 만큼 절박했고.’
칼리오페의 영향력은 오로지 므네모시네의 문 주변으로만 한정된 것이다.
알비온의 경계를 넘어서면 영물 한 마리도 제대로 건사할 수 없는 신의 힘으로는 세계의 규칙을 세우지 못한다.
신은 이 세상의 한구석에만 옹색한 영토를 남겨놓은 옛 지배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의 마지막 영지를 수호하고 영지를 품은 도시가 오래가도록 해야 할 사명을 지닌 자신은, 역시 역사의 진보나 평등의 확대에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저기 잠들어 있는 마지막 신성력의 구현자와 마찬가지로,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클레이오 자신 역시 낡은 가치의 상징으로 격하되리라 예상한다.
그날은 온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를 뿐이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맥없이 웃기만 했다.
말은 무력하고, 네게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신의 이 불완전한 통치가 영원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너는 인간의 가능성과 주체성을 믿었으면 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움직거리던 프란은, 한참 만에야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이 세상의 신은 오로지 므네모시네 여신과 그녀의 아홉 자녀들뿐이지. 이곳 알비온에서도, 북방의 크라테르도, 동쪽의 브룬넨도, 어쨌거나 그들 열 명의 여신들만을 신으로 여긴다. 알려진 인간 세상 전체는 같은 신을 믿는다. 그 믿음의 양태와 형식이 다를 뿐.”
클레이오의 미소가 더욱 흐릿해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인해 벌어진 8세계의 잔혹사를 아는 칼리오페의 안배였다.
적어도 이 세계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신을 믿지는 않는다. 신들 사이에 더욱 사랑받고 덜 사랑받는 신은 있을지언정,
“세리카에서는 여신들을 천녀라 부르고, 폐문된 므네모시네의 문 유적을 천녀문 영지(靈地)라 한다.”
“그건 미처 몰랐네.”
“비스쿰 고원 너머 라주 군도와 세리카 사람들 역시 고원 이편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는 다섯 강을 지나 죄를 승화하고서 여섯 번째 강을 지나 안식을 얻으리라 여긴다. 그러지 못한 이들은 여섯 번째 강물에 영혼을 싣고 무한히 흘러가게 된다고 믿지.”
저승을 흐르는 다섯 강은 비통의 강, 슬픔의 강, 불의 강, 망각의 강 그리고 증오의 강이다.
이 전승까지는 클레이오가 익히 알던 여덟 번째 세계의 신화와 그리 다르지 않으나, 아홉 번째 세계에서는 한 줄기의 강이 더 더해졌다.
여섯 번째, 시간과 기억의 강이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산 자가 위로와 평안을 위하여 만들어낸 구조물이다. 사후에 아무것도 없든, 차갑고 뜨거운 강물들이 영혼을 맞이하든,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삶이다. 전후가 뒤바뀐다면 허다한 이론 따위 모두 헛되다. 나는 네가 사명이라 여기는 그 맹목을, 네 생명보다 우선시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란 너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열일곱 살의 겨울 왕의 숲에서, 너는 깃발의 옛 동료들이 너를 배신하고 살해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던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살아 달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자란 것이 클레이오는 기쁘고도 감격스럽다.
“클레이오 아세르.”
또 그, 징그럽게 어버이나 삼촌같이 구는 짓은 그만두라는 질책이 스며 있는 호명이었다.
맥없이 굴던 클레이오는 조금 빠릿하게 힘을 냈다.
“노력해 볼게. 사실 내 소원은 말야, 네게 불로소득을 누리는 악덕 자본가란 비난을 들으면서 노동 없이 부유한 은퇴자의 삶을 사는 거라고.”
“아세르, 네놈은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프란시스, 너도 건강하게 지내.”
프란은 찌르듯이 아픈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존재의 많은 부분이 불확실한 클레이오에게도 확실한 구석이 하나는 있다. 바로 프란, 자신의 두통 유발자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딴 식으로 행동하는 게 네게서 가장 화나는 점이다, 클레이오 아세르.”
***
며칠 후, 룬데인 왕성.
클레이오는 단신으로 걸어서 궁성에 도착했다. 그는 곧 기다리고 있던 시종에게 안내를 받아 궁성 외성의 수수한 접견실로 갔다. 궁에 드나드는 상인이나 하급 외교관을 위해 준비된 여러 접견실 중 하나였다.
거개가 비슷비슷한 꾸밈새인 접견실의 내부는 무미건조했는데, 그 특징 없는 공간이 클레이오에게는 묘하게 낯이 익었다.
‘아, 여기.’
몇 년 전 북문 지하로 끌려갔다 부친이 보석금을 내주어 풀려났을 때, 부자가 마주했던 장소였다.
또한 아서가 지상으로 내보내졌을 때 그의 팔에 남은 고문의 흔적을 지웠던 곳이기도 했다.
‘그냥 평범한 접견실인 줄만 알았는데 북문 지하와 연결된 통로가 가까운 모양이지.’
이전에는 눈을 가린 채 끌려와서 몰랐으나 그 추측이 맞을 것 같았다.
달칵.
벽난로 앞에 꼿꼿이 선 채 기다리던 클레이오를 보고, 접견실로 들어서던 베스나가 활짝 웃었다.
평소와 같이 화관처럼 땋아 고정한 머리에 남색 제복, 굽이 낮은 구두를 신은 베스나였다.
다만 그 안색이 평소보다 밝았고, 입술과 뺨이 붉었다. 열은 피부 안쪽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것이었다.
“아니, 이리 조급하게 서서 기다리기까지 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어느 정도는 클레이오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날 끌고 오면서 태서턴이 아니라 굳이 베스나를 보낸 점이 말이지.’
보통은 태서턴이 운송자 역할을 했다. 그야 무력으로 클레이오를 제압할 수 있으며, 흔적 없이 궁성 안팎을 드나들 인재는 여럿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므네모시네의 문을 닫기 위한 주요 도구인 태서턴은 저 마석들과 마찬가지로 궁성 안쪽에 놓여 있고, 지금 그를 맞이하는 건 베스나였다.
내무보안원의 국장은 지하를 호령하는 암흑의 실세이지만, 클레이오에 비하자면 무력은 무력(無力)에 가까운 마법사였다.
“느긋하게 기다릴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기는 하네요.”
촤라락.
베스나는 창에 쳐져 있던 커튼을 경쾌하게 걷었다.
창밖으로는 내무보안국 제복을 입은 두 병사가, 잘 걷지 못하는 한 사내를 양측에서 붙들고서 성문을 향해가고 있었다.
베스나가 자그마한 손가락을 뻗어 사내를 가리켰다.
“자아, 저기, 협상의 전리품을 이렇게 내어놓으니 수령 확인을 제대로 해 주세요.”
“건장한 병사 둘이 양옆에서 팔을 붙든 채 걷는데, 그가 온전한 상태인지 아닌지를 여기서 어떻게 판별합니까.”
“이 경우에는 그냥 믿어 줘야죠. 잠시나마 한배를 탄 입장인데 톱밥 섞인 빵을 먹으라 나누어 줬겠어요?”
당신은 상대에게 톱밥이 아니라 면도날 섞인 빵을 먹이고도 남을 인간 아닌가, 하는 말이 클레이오의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가 간신히 잦아들었다.
클레이오는 한껏 돋운 「지각」을 통해, 궁성 밖으로 향하며 비칠비칠 흔들리는 사내를 훑었다.
긴 억류 동안 안경은 어디론가 사라져 근시인 눈을 심하게 찡그린 채였다. 늘 말끔하던 얼굴은 덜 민 수염으로 얼룩덜룩한 데다 피로하고 탈력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근골이 상했거나 피 냄새가 나는 구석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방도는 있는가, 마차를 불러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쉰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신체도 정신도, 현재 상태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은 것 같다.
‘한동안은 제대로 정양을 해야겠지만.’
낡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맨발에 치수가 안 맞는 신발을 신은 남자는 한때 멜키오르의 비서관이었던 제레미 툴민이었다.
그는 니네베 연대를 테르게스티로 보낸 일등 공신이었다.
그 때문에 제레미는 4급 반역죄인 기밀 유출죄를 죄목으로 걸고 지하 감옥에 구금되었다.
아서가 정치력을 발휘해 테르게스티 전투 자체를 합법적인 명령을 통한 작전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럼에도 제레미는 풀려나지 못했다.
멜키오르의 집무실에서 통신 보안 해제 열쇠를 훔쳐낸 일은, 전후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사면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라고 국왕 대리 측은 주장했다.
‘그렇다 한들 중형을 선고할 죄목도 아니었지. 법정에 세웠다면 대법관들 역시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테르게스티의 승리를 알비온의 승리로 치장하는 것이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었는데, 아서를 부르기 위해 통신 보안 원칙을 어긴 관료에게 중형을 선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멜키오르와 베스나는 고전적인 방법을 썼다.
애초에 제레미에게 법정에 설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지난 세 달간 제레미 툴민이 갇힌 미로는 과연 카프카식 관료제의 악몽이라 할 법했다.
제레미 툴민에 대한 처분 권한이 이 부처에서 저 부처로 옮겨지는 동안, 그는 지하 감옥으로부터 시작해 폐쇄된 시종용 징벌방까지 궁성 이곳저곳으로 이송되며 도통 풀려나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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