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83
이 배반은 고귀하지 않다 (1)
그러나 프란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도 편안한 마음으로 속을 내어놓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시선을 내리깐 프란은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의 신문 활자를 훑었다.
그의 눈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고상한 매체이건 천박한 매체이건 실린 내용 자체는 비슷했다.
이 전쟁은 알비온이 이긴 것이고, 침공했다가 얻은 것 없이 물러난 브룬넨인들은 비열한 적이라는 거다.
“쯧, 검열이 없어도 한 번 떨어진 일간지의 수준은 회복이 되질 않는군.”
프란이 화제를 돌려준 덕에 클레이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법이니까.”
또 클레이오 특유의 묘한 비유에 프란의 미간 골이 한층 깊어졌다.
하지만 그 말의 출처에 대해 물어도 제대로 된 해명을 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당장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프란은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이어서 했다.
“브룬넨은 강제 징집을 했을 뿐 아니라, 경범죄를 저지른 수형자나 정치적 이유로 유배당한 자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히드라의 독을 먹였지.
지배 계급의 강압으로 전선에 나서길 강요당한 이들은, 이렇게 단순히 ‘적’으로 뭉뚱그려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귀족과 왕족의 일방적인 결정에 고통받는 피지배계급일 뿐.”
“그런 이야기도 기사로 쓰면 좋을 텐데, 요즘엔 네 기고문이 안 보이더라. 취재 중이었어?”
프란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뭔가 사정이 있는 얼굴이었다.
“취재는 미리 했고 기사도 송고했다. 나는 알비온의 동남지방뿐 아니라 브룬넨의 황폐한 고을들 역시 발걸음이 닿는 한 돌아보았다.”
“그, 저, 새삼스럽지만, 지금 브룬넨은 입국 금지 국가 아냐?”
“일곱 공국으로 나뉘어 있는 브룬넨엔 중앙에서 파견한 군경이 없으므로, 기사단들이 궤멸한 지금 공국들의 치안 공백은 상당하다.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늘어났지. 하지만 그건 곧 길에서 검문하는 군인들도 드물다는 뜻이다.”
“그래도 오로지 취재를 하겠다고 위험한 길을 가다니.”
“그 정도는 위험도 아니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길 바랐고 나는 브룬넨인들이 겪은 징집과 수탈에 관한 기사를 썼다. 전장에 나가보기도 전에 독을 삼키고 죽어간 이들에 관해서. 브룬넨의 인민들은 지배 계급의 몰염치한 압제에 큰 고초를 겪었다. 그들에게야말로 전쟁은 재앙이었지. 원래는 오늘부터 실릴 3부작 기획 기사의 내용이 이거였다.”
클레이오의 입이 헤벌어졌다.
‘프란은 참언론인의 귀감이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만 딱 골라서 하는 점이, 정말로.
아직 휴전 협약도 전인데 교전 중인 ‘적국’의 시민들에 대한 온정적인 기사라면, 확실히 대중적으로 환영받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실으려고 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한데, 클레이오가 받아본 오늘 자 잡지에는 프란의 기사가 없었다.
“그럼 검열도 없는데 왜 기사가 안 실린 거야?”
안경 너머로 클레이오를 한참 응시하던 프란은 괴로운 기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데스크의 문제가 아니었다. 편집장 마로는 그 기사의 게재에 동의했다. 다만 인쇄소의 조판공들이 내 기사의 조판을 거부했다. 알비온의 병사들이 목숨 걸고 싸운 적인 브룬넨을 옹호하는 기사를 낼 거라면, 더 이상 루치올라의 인쇄를 맡지 않겠다고 하더군.
존 바틀비 대표는 인쇄공 노조의 조합장이며, 두려움을 이기고 소수의 목소리를 인쇄물로 제작해주는 몇 없는 이이지.
그리고 바로 그런 인물이기에 직공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기사는 인쇄되지 못했다. 그게, 나는 검열관들이 인쇄기를 멈추는 것보다 훨씬 더 절망적으로 여겨진다.”
“…음, 거기라면 어느 정도는 프리실라 바틀비 부인의 영향이 있기도 하겠지.”
인쇄소의 운영자 존 바틀비의 부인이자 초선 의원인 프리실라 바틀비는 그간 원내 진출을 타협이라 반대하던 깃발의 소수파와 노조의 지지를 모두 흡수했다.
전쟁 중 실시된 평민원 선거에서 프리실라 바틀비가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는 소식은 대단히 큰 화제였다.
첼은 몹시 흡족해하며 그 기사를 사령부 한쪽에 붙여두었다.
덧붙여 프리실라 바틀비 의원은 아서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그래. 바틀비 의원은 대단한 권위나 압도적인 연설 실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무기 없이도 소박한 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그녀는 모두가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알비온에서 왕을 없앨 수 없다면 오로지 아서 왕자를 왕으로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아아….”
클레이오는 또한 난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프리실라가 숙부의 유산을 상속받아 선거에 출마했을 때, 클레이오도 기부를 통해 그녀를 도왔다.
거래처이기도 하고 호의를 가진 상대여서기도 했지만, 이러한 결과를 전혀 바라지 않았냐고 한다면 그 역시 거짓이다.
어떤 호의는 가능성들의 집합이다.
클레이오는 자신이 가진 금력이 가능성을 가능으로 바꾸기에 적절한 도구임을 잘 알았다.
“여기에 이르니, 아세르 네가 전쟁을 통해 얻고자 한 게 무엇이었는지 똑똑히 알겠더군. 아서 리오그난은 그냥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자발적으로 통치되기를 원하는 왕이 될 거다. 그런 경악스러운 존재를 나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3왕자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멜키오르가 자아내는 권능에 의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뇌를 휘저어 이끌어 내는 노예적 숭배와는 달랐다.
클레이오가 생각하기에, 바로 그러한 사랑과 지지를 받는 자야말로 세계를 아홉 번 다시 쓴 여신이 원하는 왕이었다.
그녀가 왜 그런 것을 원하는지는 클레이오 역시 모른다.
그가 복무하는 원칙은 오로지 여신의 뜻뿐, 왕정의 지속도 왕조의 계승도 클레이오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다만 그 모든 진실을 프란에게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세상은 한 번 불타서 사라졌고, 서사의 여신은 이제 최후의 도정에 오른 세계가 멸실되도록 하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
그녀의 뜻 어딘가에 아서의 쓰임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너는 바로 그러한 아서 리오그난을 바랐던 듯 행동하고 있지 않나. 그러면서도 나를 돕고, 공화주의자 일파에게까지 금화를 뿌린다. 네 행동과 사상의 모순이, 너의 내면에서 어떻게 봉합 가능한 것인지 나는 도무지 추론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서를 돕고 싶어 했고 그의 힘이 되고자 했다.
아서의 존재는, 본래라면 충족될 수 없을 초인 통치자의 환상을 만족시켜 준다.
신적인 강력함과 인간의 연민을 동시에 지닌 아서는 망실되는 것이 순리였을 신화의 논리를 현실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영웅왕이라는 낡은 망념의 복원자로서, 3왕자는 프란이 결코 원치 않는 종류의 왕재였다.
스읏.
프란은 손도 대지 않은 레몬 스노우볼 접시 옆에 연구제자 실험보조인 신분증을 내려놓았다.
겨우 미소 비슷한 것을 유지하고 있는 클레이오의 턱이 약하게 경련했다.
선고: 너와 내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처음부터 일시적이라는 전제를 가진 동맹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끝나리라고도 예상치 못했다.
결벽하고 강경한 프란시스.
그는 이대로 연구제자 연구실을 걸어 나가 다시는 클레이오와 독대하지 않으려 들지도 몰랐다.
자신의 초상화를 불태우고 낳아준 부모와의 연을 살라버릴 수 있는 그가 아닌가.
클레이오는 최대한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기왕 내린 커피는 다 마시고 가. 아직 탕비실에 더 있거든.”
그의 말끝이 떨려 동요가 드러났다.
그렇다 해도 프란과 마지막 대면일 수도 있는 이때 「이격」을 한 겹 사이에 두고 대응하고 싶진 않았다.
긴장으로 손끝이 파르라니 식었다.
그 꼴을 보던 프란 역시 불편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달칵.
프란은 기존의 학교 출입증 옆에 ‘결계 충전 봉사원’ 증서를 새로 꺼내 나란히 놓았다.
퓌시스 학장의 서명이 들어간 조그만 증서에는, 그가 알버스 베인브리지에게 정식으로 결계 충전 봉사를 요청했다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봉사원 쪽은 연구 보조와 달리 에테르 감응력이 1레벨이라도 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자격이다. 이미 신청자가 수십 명이 넘는다더군. 이편이 다수에 섞여 신분을 숨기기엔 낫겠지.”
클레이오의 뺨에 흐릿하게 안색이 돌아왔다.
뻣뻣하던 목과 등이 살짝 풀어져 시선이 낮아졌다.
친구를 잃는다고 생각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자 허탈함에 가까운 안도가 몸의 힘을 쭉 빼놓았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아세르, 네 공적인 목표에 반대한다 해서 그 어긋남이 다년간 누적된 상호적 우정의 행동을 전면적으로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너는 다른가?”
“아니. 안 달라. 수도에 머무는 동안엔, 앞으로도 종종 간식에 커피 마시러 와.”
클레이오가 스노우볼 접시를 밀어놓자 프란은 별 사양 없이 과자를 하나 집어, 가루 설탕을 하나도 안 흘리고 요령 좋게 쏙 삼켰다.
“그렇지만 커피는 가능하면 내가 타는 편이 낫겠다.”
“커피 맛이 별로였나?”
“맛이야 상관없다만, 끓인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놓치지 않을 정도의 아귀힘이 돌아오면 네가 하고.”
뭐라 반박할 수가 없어서 클레이오는 난처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그때 사환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클레이오 님, 여기! 급하게 온 전언이 있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클레이오가 나가 확인해보니 궁성에서 온 소환장이었다.
사환이 물러나고 나서도 영 클레이오가 움직이지 않자, 무슨일인가 싶어 문간에 나와 보았던 프란이 우뚝 멈춰 섰다.
메시지 카드 앞장에 찍힌 건 왕의 인장이었다.
현재 리오그난 왕가에서 그 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정식 국왕 대리인 멜키오르 리오그난 한 사람뿐이었다.
오후의 빛이 비치는 복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기뻤다가, 긴장했다가, 안도했던 클레이오의 내심 역시 한순간에 단단하게 굳어졌다.
꺼두었던 「이격」과 「지각」이 반사적으로 발동되고, 여리게 풀어졌던 얼굴에는 전장에서와 같은 냉철함이 되돌아온다.
멜키오르는 클레이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음을 과시하듯, 정확히 프란이 학교에 들른 날에 이 카드를 보냈다.
프란이 딱딱하게 물었다.
“국왕 대리의 명령은 뭐지?”
“음, 명령일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네 표정을 봐라. 다른 내용일 수 없지.”
프란의 귀신 같은 추론에서 벗어나긴 어려웠다. 혹은, 누군가에게라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별건 아니고. 신년의 키시온 전투에서 붙잡은 브룬넨의 장교를 억류한 지도 제법 지났으니, 심문 결과가 있다면 정보 공개를 해 달라는 요청서를 높은 분들에게 몇 번 보냈는데….”
“보냈는데?”
“정보를 원한다면 직접 와서 놈들을 심문하라고 하네. 오는 김에 파손된 북문 지하 감옥도 보강해달라고 하고.”
클레이오가 팔락거리고 있는 카드에 쓰인 글자는 심지어 멜키오르의 친필이었다. 특징 없이 아름다워, 마치 필기체 교본처럼 보이는 기묘한 글씨체.
사실이든 아니든 기가 막힌 답변이었다.
키시온 전투에서 리피와 레티샤가 잡아온 브룬넨의 고위 장교는 수도로 이송된 후, 내무보안원 측에 인계되었다.
그 지독한 베스나 드리스콜이 심문을 해도 입을 안 여는 작자들이라면 클레이오가 간다 한들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반면 입을 다 열었는데도 쓸 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거나, 혹은 괜찮은 정보가 있더라도 그냥은 클레이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부름은 함정이었다.
“그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북문 지하엘 직접 가겠단 거냐? 제정신인가, 아세르?”
“안 가면 어떻게 실마리를 잡겠어. 일단 부딪쳐 봐야지.”
아슬란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데, 스텔라 방벽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에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아홉 번째의 알비온도 영원의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브룬넨의 향후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건 칩거하고 있는 국왕 대리가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는 두 배의 기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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