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82
공통된 앎 (2)
프란은 아직도 클레이오가 전에 만들어준 연구제자 실험보조인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일주일에 한 번 스텔라 방벽의 보강을 위해 학교에 출입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학교 연구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프란은 막 동부에서 돌아왔다.
이런 차분한 자리는 개전 후 처음이었다.
전선에서는 종종 마주쳐도 늘 주변에 다른 병사들이 있었다.
게다가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랐을 클레이오와 취재거리가 늘 한가득이었던 프란은 편지로도 자주 사담을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커피가 가득 담긴 머그를 양손에 들고 연구실로 들어오던 클레이오는 괜히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의자에 앉지도 않고서 뾰족한 소리부터 던지는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그래서 안심이 됐다.
“대체로, 지금 시점에서 패색이 완연한 나라의 높은 분들이 벌이는 짓은 대동소이하지 않나? 발악이라도 해볼 시기잖아.”
“그런 짓을 하기 전에 휴전 협정에 응하는 게 먼저란 생각을 하는 위정자가 없으니 브룬넨은 흔들리는 거지.”
“아하하.”
브룬넨 측은 휴전 협정에 응할 협상단이 뽑히지 않을 수준으로 내정이 파탄난 듯했다.
오히려 협상의 진전이 빠른 건 새로이 대표를 선출한 카롤링거와 테르게스티-알비온의 삼자 회담 쪽이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실시된 카롤링거 중앙위원회의 결선 투표에서 라자르 탈리앵이 한 표 차이로 떨어지고, 폴 베르나도트가 국가를 이끌 자로 선출됐다.
그건 결코 평화로운 투표가 아니었다.
선출이 진행되는 내내 중앙위원회 본관 바깥으로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계를 서야 했다.
과거 왕의 궁전이던 중앙위원회 본관은 이렇게 새로운 역사의 중심에 섰다.
빅투아르 모로에 의해 축출당했던 옛 혁명가들은, 온건파인 폴의 집권 소식을 듣고는 유형지에서 상복을 입었다.
왕의 유령이 돌아올 거라고.
어쩌면 왕실을 복권시키거나, 왕실 재산의 일부를 되돌려줄지 모른다는 기대는 폴의 임기 첫날에 깨졌다.
그는 2대 통령이 되는 대신 중앙위원장이라는 직위만을 가졌고, 오히려 자신의 권한을 축소했다.
거기에 과거 라자르 탈리앵의 일파였던 중앙위원 여럿이 가담했다.
폴은 제 권한의 미비를 핑계로 왕정주의자들의 불만을 흘려보내고, 실리만을 챙겼다.
온후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던 장년의 남자는 수십 년간 정계에서 썼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긴 회담 끝에 카롤링거는 부서진 진입 도로를 복구할 비용과 인력을 테르게스티에 제공하기로 약조했다.
브룬넨군이 테르게스티를 침공할 때 길을 내어주었던 카롤링거의 북부 주지사들은 파면당해 유배를 갔다. 그중 하나는 유배를 떠나는 길에 암살됐다.
빅투아르의 독선적인 통치 말기, 주변국들로부터 고립되어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카롤링거로선 그렇게라도 면피를 해야 했다.
전쟁배상금 전액을 테르게스티에 물어줘야 하는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카롤링거의 베르나도트는 배상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와 그 리오그난의 개입까지도 내정 간섭이라 주장했다던데.”
“그 점은 문제가 안 됐어. 나나 그놈이나 테르게스티 명예시민이라서. 기억나? 전에, 이젠스 갈 때 우리가 거기서 마수 옥타보를 잡았잖아.”
“그런 요식 행위가 효력이 있었던 건가?”
“우리가 시민증을 수령하지는 않았지만, 증서 자체는 시청에서 계속 보관하고 있었대. 테르게스티 부시장이 그걸 증거로 제출했고, 이미 몇 년 전부터 테르게스티에 공헌했던 사람들을 모함하지 말라며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고 아서가 그러더라.”
알비온-테르게스티-카롤링거 삼자 회담은 외무성 관료들과 함께 아서가 진행했다.
아서의 지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전쟁과 전후 처리를 지켜보던 이웃 나라들은 슬그머니 알비온 측에 붙어 브룬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클레이오는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반사 이익을 누렸다.
신문의 지면은 한정되어 있기에, 두문불출하는 대마법사에 대해 다루는 기사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알비온-브룬넨 간의 명확한 휴전 협정 없이 대륙은 서서히 전쟁의 영향을 벗어나고 있었다.
유예의 시기였다.
“3왕자는 과거로부터 비롯된 모든 요소를 알뜰하게도 이용해 먹는군.”
“달리 말하자면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
클레이오는 뚱한 얼굴로 의자를 끌어내던 프란에게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를 건네주었다.
그런 뒤 자신 몫의 커피를 쭉 들이켜니 온몸에 고강도 카페인이 스미는 저릿저릿한 감각이 들었다.
저택에서는 위장이 상한다고 진한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데다, 977기 친구들은 모두 홍차파이고, 또 혼자 마시려고 굳이 커피를 내리기도 귀찮던 터라 프란의 방문이 두 배로 기뻤다.
프란은 다들 기피하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반듯이 앉았다. 벗은 모자는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두었다.
“과거가 스러지는 곳에서부터 미래가 시작될 거다. 그러면 너도 경제적 합리성의 논리가 최고이자 최선의 진리가 아님을 알게 되겠지.”
변화의 바람은 알비온에만 부는 것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공국 기사단들이 와해되고 귀족 계급의 젊은이들 상당수가 죽거나 불구가 된 브룬넨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출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나마 봉합 가능한 혼란만을 남기고 전쟁을 치러낸 알비온과 달리 브룬넨은 사회 전 계층에 걸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니네베 연대가 디에르 시에서 동쪽으로 더 진군하지 않은 건 그러한 부분까지 고려한 결정이었다.
고대의 전쟁처럼 성벽을 허물고 보화를 약탈할 것도 아닌데, 사회적 혼란에 휩싸인 적국의 영토를 점령해 봤자 공권력만 낭비하고 통치의 비용이 상승할 뿐이라는 계산이었다.
아서가 일부 주전파의 의견을 묵살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브룬넨은 자본의 측면에서도 인력의 측면에서도 발전의 역량을 상실했다. 히드라의 독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이 너무 많아. 사람을 아끼지 않은 결과, 그들은 한 세대만으로는 결코 알비온을 따라잡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하나 틀린 점 없는 프란의 말에 클레이오는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역시 커피에 설탕을 좀 넣을 걸 그랬다.
뜨거운 블랙커피를 냉수처럼 마셔버린 프란이 다소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프란은 이성적이지만, 그만큼 격정적이기도 한 성미라 이야기를 하며 점점 더 감정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네가 잠자코 이 전쟁에 뛰어들었던 궁극적 목적이 아닌가? 3왕자가 물려받을 나라에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위협이 없기를 원한다면, 전쟁은 단번에 두 가지 모두를 소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
“아직 국왕 대리는 멜키오르인데 너무 멀리 나간 발언이네.”
“멜키오르 리오그난이 기능 부전의 국왕 대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알비온인이 있나?”
“뭐.”
판별의 안경 너머에서 프란의 잿빛 눈이 강철처럼 날카로워졌다.
“내가 스무 살 때이니 이미 삼 년 전 이야기군. 히드라의 독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 이젠스 성에 잠입했다 돌아온 뒤의 일이다.
그때의 너는 독의 군사적 가능성을 단번에 알아봤으나, 바로 그렇기에 가능하면 전쟁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너를 포함하여 너의 학우들이 모두 전선으로 나서야 하는 처지이므로.”
“그랬지.”
클레이오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자신의 말을 기억했다. ‘약속’에 힘입지 않아도 잊기 어려운 대화이긴 했다.
프란이 자료가 가득한 낡은 여행 가방을 끌고 룬데인 동역에 내려섰던 날.
두 사람은 삼월 토끼 펍에서 에일을 마신 뒤, 후에 몇 년간 프란이 살게 되는 ― 아직은 비가 새기 전이었던 다락방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또한 그날은 클레이오가 연구제자 실험보조인 신분증을 프란에게 건넨 날이기도 했다.
“당시 너는 내게, ‘아무리 돈에 연연하는 속물이라 한들 친구들을 전장에 내몰면서 이득을 얻고 싶진 않다.’고 했다.
실제로도 3왕자 일파는 모두 최전선에 붙박이게 되었으니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네 뜻 자체는 진실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반쯤 비운 커피잔을 내려놓은 클레이오는 굳이 「이격」을 켜지는 않았다. 대신 떨림을 가리기 위해 제 양손을 테이블 아래로 슬그머니 내렸다.
“음, 그리고 프란 너는, 그 뜻 외엔 내가 진실되게 굴지 않았다고 여기는구나. 뭐, 화를 내고 싶은 건가?”
“나는 너를 믿었고 그건 나의 판단이었으니 그 점에 대해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세르, 지금 돌아보면 너의 말과 행동에는 괴리가 있었다는 걸 너 자신이 가장 잘 알 거다.
물론 마석 매매나, 군수 용품 생산으로 네가 대단한 이득을 취하지 않은 것은 맞다. 그건 너무 피상적인 예상이었지.
애초에 너는 그 전쟁을 결국 결코 피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최대치로 취했다. 지금 데르니에 대륙의 어느 왕족도 가지지 못한 무형의 자산을 아서 리오그난이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게 다 내 계획대로라고? 날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미래를 읽고, 세상의 에테르 흐름을 뒤집는 인간에 대해서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건 과소한 표현이긴 하군.”
“프란, 으악, 제발.”
클레이오의 어르는 듯한 대꾸에도 프란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왜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지? 아슬란 카스틸리엔의 목적이 저 자신의 선전 포고처럼 두 개의 관을 쓰고 황제이자 왕이 되려는 것이었다면, 그의 목표는 알비온의 왕성을 습격하는 순간부터 달성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알비온인들은 대개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지. 여신이 축복을 내리고, 왕의 대관을 일식이 기리는 나라를. 그러니 이솔트가 세운 천 년의 왕성을 무너뜨리려 한 자가, 어떻게 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오히려 순박한 보수주의자일수록 결코 아슬란을 용납할 수 없을 거다. 동시에 그 순박한 보수주의자들이야말로 ‘적자’인 왕자의 혈통을 인정해 줄 주류 세력이었음을, 2왕자는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했지.
그는 본질적으로 멜키오르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지독했던 소모전은 처음부터 이 영토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아는 자가 일으키는 파열이다.
제가 다스리고 거느릴 땅과 인간을 계산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자는 최악의 통치자조차 아니야. 그저 파괴하려는 욕망만을 가진 재난이지.”
지금 프란이 제기하는 의문은 기실 클레이오 역시 품었던 있던 의심이었다.
바로 그 아슬란에 의해 구금된 상태에서, 어뉴어린의 서재에 꽂힌 책을 읽으며 클레이오는 생각했었다.
여신은 인류가 궁극적인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악의 형상을 축출해 미리 대립시키고는 그들이 자멸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세상의 끝에 가라앉은 대함대처럼, 에테르를 오용하고 은총을 더럽힌 자들이 아슬란 아래에 모여 모두 도태되도록 한 것이다.
추론의 증거는 얼마든 있었다.
이를테면 멜키오르는 모든 생애 내내 아서와 대립하지 않았다. 잦은 부닥침과 직독은 클레이오에게 멜키오르의 이전 생애에 대한 단서를 주었다.
그 작자는, 어떤 때에는 아서와 협력하기도, 어떤 때에는 달아나 신의 눈을 피하려 들기도 했다. 그는 통제되지 않는 요소이다.
하지만 아슬란에게 멜키오르 같은 시도가 가능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성격, 성향, 배경이 그의 행동에 제약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아서에게 정당한 왕관을 씌워주기 위한 반동 인물의 역할로는, 아슬란 쪽이 걸맞다.
‘거칠고 조악한 방법이지. 천 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는. 심지어는 아슬란조차도 반복의 영향을 받아서 더 과격하고 잔인해졌어. 고통의 총량을 줄인다는 측면에서조차 결격이다.’
그러나 여기는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고, 판면은 붕괴하고 있으며, 므네모시네의 문은 온 세상에 단 하나만 남았다.
신이 조급하게 구는 것은, 그녀의 영향력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칼리오페는 이 세상의 멸망을 미리 보았고, 자신 없이 남은 인간들이 자멸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본래도 창백했던 클레이오의 뺨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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