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002
1002
“으으······.”
에어백이 터졌지만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있었던 까닭에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다 받아야 했던 혁권은 순간 눈앞에 하얗게 변해 버리며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지독한 기름 냄새와 온몸에 있는 뼈가 바스러진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다.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니 찐득하게 배어 나온 핏물이 만져졌다.
아마 봉합해 놓은 상처가 다시 터진 모양이었다.
차 안을 둘러보며 부하들을 찾은 혁권은 하킴과 다른 부하들이 모두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긴 거인한테 붙잡혀 바위덩이에 세게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했다.
흔히 맥가이버 칼이라고 불리는 스위스 군용 칼을 주머니에서 꺼낸 혁권은 온몸을 압박하고 있는 에어백에 구멍을 뚫어 바람을 빼냈다.
그러고는 나무에 부딪칠 때 뭐가 잘못됐는지 잘 열리지 않는 차 문을 발로 억지로 밀어 내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안 쑤시는 곳이 없었는데 특히 피가 흠뻑 묻어 있는 옆구리는 누가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자꾸 찔러 대는 것처럼 통증이 심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이를 악문 채 한 손에 권총을 움켜쥐고는 보닛을 짚고 선 채 주위를 살폈다.
바깥으로 나오자 후끈한 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매캐한 냄새를 따라 눈을 돌려보니 10여 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김인철이 타고 있던 사륜구동차가 나무를 들이박은 채 보닛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을 번득인 혁권은 손에 든 권총 슬라이드를 뒤로 당겨 총알을 장전하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손으로 확실히 끝장을 내 지긋지긋하게 이어진 악연의 고리를 여기서 끊어 낼 작정이었다.
얼마쯤 다가가자 인영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차량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한쪽 발로 몸을 돌려서 얼굴을 확인하자 김인철이 아니라 필리핀 현지인이었는데 바로 로페즈였다.
크게 다쳤는지 살아는 있었지만 숨을 헐떡이며 힘없이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걸 본 혁권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권총을 아래로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탕!
날카로운 총성이 주변 공기를 흔들며 상대의 가슴팍에서 검붉은 피가 튀어 오르면서 몸이 들썩였다.
확인 사살을 한 혁권이 다시 사륜구동차 쪽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번쩍이는 화염과 함께 총성이 터졌다.
“크윽.”
왼편 어깨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며 신음을 내뱉은 혁권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흙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총탄이 연달아서 날아와 박히면서 흙이 위로 튀어 올랐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총탄에 맞아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한 거였다.
관통당한 부위에서 피가 흘러나와 상의를 다 적셨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얼른 몸을 일으킨 혁권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방금 전에 총구 섬광이 번쩍인 사륜구동차 뒷좌석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타탕! 탕! 탕!
몇 발이나 쐈을까. 탄창이 전부 비워질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고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새 걸 꺼내 갈아 끼웠다.
그러고는 언제든지 권총을 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 채 탄환이 박혀 벌집이 되어 버린 뒷좌석을 노려봤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그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핥은 혁권은 총구를 앞으로 한 상태로 천천히 사륜구동차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접근한 그는 한쪽 팔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는 차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총성이 터지면서 시트 아래에 누워 있던 김인철이 권총을 쐈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기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 문을 여는 것과 함께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몸을 옆으로 비켜 선 덕분에 총탄은 그를 맞히지 못하고 허공만 갈랐다.
“개자식!”
간발의 차이로 총탄을 피한 혁권은 지체 없이 김인철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퍼퍽!
“크윽.”
김인철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총을 맞은 반동으로 인해 차량 바닥에 널브러진 그는 경련하듯 몸을 꿈틀거리더니 울컥, 하고 입에서 핏물을 토해 내었다.
“하아, 하.”
혁권은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여전히 총구는 겨눈 채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가슴과 복부에 한 발씩 총에 맞은 김인철이 악문 잇새로 시뻘건 핏줄기를 떨어트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큭. 제기랄. 결국 네놈한테 이렇게 당할 줄이야.”
‘퉷.’ 하고 침을 뱉은 김인철은 집착과 오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서울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끝장을 봤어야 했는데······.”
그게 실수였어, 하며 중얼거리는 말에 혁권은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로군. 만약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진즉에 명줄을 끊어 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흥, 기껏 해 봤자 내 발뒤꿈치나 핥던 주제에. 사람한테는 격이란 게 있다고, 알아? 분수를 알아야지. 태어나길 하찮게 난 놈이 어딜 감히 위를 넘보려 들어.”
김인철의 경멸 어린 말에도 혁권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태연히 반박했다.
“여전히 헛소리는 잘 지껄이는군. 어디 팔다리가 다 병신이 되어도 계속 떠들어 댈 수 있는지 시험해 볼까.”
혁권이 예고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이 김인철의 허벅지를 그대로 관통했다.
“으아악!”
불타는 듯한 고통에 김인철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파? 그래, 아프겠지. 내가 여태껏 느껴 왔던 고통을 너도 한 번 그대로 느껴 봐.”
“아하악. 악.”
피범벅이 된 채 버러지처럼 꿈틀거리는 김인철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이제 끝이야. 지옥에 먼저 가 있으라고.”
“아, 안 돼.”
눈을 부릅뜬 김인철의 머리를 겨누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며칠 뒤. 제주 국제공항 활주로에 흰색 붐바디어 글로벌 6000 전용기 한 대가 가뿐히 내려앉았다.
계단이 내려지자 건장한 경호원들과 함께 짙은 색 선글라스를 낀 혁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친 어깨는 삼각건으로 감싸고 어깨 위로 짙은 먹색의 재킷을 걸친 채였다.
아스팔트로 포장이 된 바닥에 발을 딛자 마중을 나와 있던 백성균이 앞으로 다가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머리를 까딱인 혁권은 대기시켜 둔 롤스로이스 컬리넌 뒷좌석에 올라탔다.
항상 그림자처럼 경호를 하던 하킴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는데, 김인철을 막아선다고 자동차를 충돌시켰을 때 중상을 입고 다른 부하들과 함께 필리핀에 위치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갈비와 다리뼈가 골절되는 바람에 한동안은 병실에 누워 있어야 됐다.
그 역시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얼마 전에 당한 부상 부위가 벌어져 다시 봉합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몸이 엉망이었다.
의사가 한동안 입원해서 안정을 취할 걸 권유했지만 아직 못 다 한 일이 하나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커다란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혁권은 이내 마른 목소리로 조수석에 탄 백성균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소현이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힐끔 눈치를 살핀 백성균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스를 많이 기다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어쩐지 긴장된 표정을 지은 채 한쪽 손으로 안주머니에 넣어 둔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하얀 물거품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쓸어 내려가는 것을 반복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잔디밭에 서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소현은 문득 짠 내가 느껴지는 바람이 앞머리를 흔들고 지나가자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 모양을 정리했다.
혁권이 소유한 샹그릴라 리조트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투숙객들을 위한 바와 선베드가 비치되어 있는 평탄한 모양의 백사장을 볼 수 있지만, 소현은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나는 뒤쪽의 절벽도 나쁘지 않았다.
“너무 앞으로 몸을 기대시면 위험합니다.”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는지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여성 경호원이 주의를 주었다.
“미안해요.”
소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난간에서 떨어졌다.
바닷바람이 세게 부는 바람에 머리 위에서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스치며 흔들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아직 겨울이 되려면 멀었지만 약간 서늘한 듯하여 몸을 살짝 움츠리니 바로 경호원에게서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이 튀어나왔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방으로 돌아가시죠.”
“아뇨. 조금 더 걷고 싶어요.”
소현은 한창 모델 일을 하던 때보다 더 마른 듯한 손목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비록 병원은 아니지만 매일 영양제를 맞고 삼시 세끼 밥을 잘 챙겨 먹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살이 올라야 망정인데, 어떻게 더 몸무게가 빠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말라도 볼품없을 텐데.
소현은 혁권의 얼굴을 떠올리며 목걸이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혁권이 선물로 준 것 중에서 그나마 가장 수수한 것을 골라 목에 항상 걸고 있었다.
지금 옆에 없어도 마음은 항상 함께라는 의미를 담아 부적처럼 지니고 있으니, 가끔씩 불안해질 때나 밤에 악몽을 꾸고 깨어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도 가끔씩 하는 산책은 몸에 좋다고 했잖아요.”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언제든지 힘드시면 말하십시오.”
경호원은 어깨를 으쓱하고선 휠체어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언제까지 그거 밀고 다니실 거예요? 저 진짜 필요 없다니깐.”
“그래도 환자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환자 보셨어요.”
“예. 병원 가면 많이 봅니다.”
병원 근처에 있는 편의점이나 술집은 입원 환자들이 다 먹여 살리는 거 모르냐며 경호원이 오히려 정색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휴. 하여간 말이 안 통한다니까······.”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 진짜 심각한 병자라도 된 것 같아서 소현은 질색했지만,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사람을 무리시켰다가 탈이라도 나면 자기만 혼난다며 경호원도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한다고 고집을 부려 대니 항상 똑같은 대화의 반복이었다.
결국 소현은 휠체어를 밀면서 따라오는 경호원을 뒤에 달고 천천히 잔디밭을 걸었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지만 돌바닥보다는 부드러운 흙을 밟는 편이 더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계속 누워만 있었던 탓에 역시 다리 힘이 많이 줄기는 했는지 고작해야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몸이 벌써 지쳐 왔다.
그래도 재활 훈련을 하는 셈치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걷던 소현은 갑자기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휠체어를 밀던 경호원 역시 순식간에 경계태세로 전환해 소현을 몸으로 감싸며 갑자기 리조트 부지 내로 들어오는 차량 행렬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끽, 소리를 내며 맨 앞에 있던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서자 뒤에 있던 차량들도 일제히 간격을 두고 그 자리에 섰다.
이윽고 누군가가 열어 주는 차 문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이 다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소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빠!”
반가움에 소리치니 혁권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소현에게로 다가왔다.
“다녀왔어.”
소현은 대답 대신 그를 껴안고 항상 그리웠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만날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내 심장 떨어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요?”
응석 부리듯이 약간 물기 서린 목소리로 말하자 혁권이 소현의 동그란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였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온 거야. 용서해 주라.”
“이제······ 다 끝난 거죠.”
고개를 든 소현이 혁권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물었다.
“그래.”
잠시간의 침묵 끝에 묵직한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린 소현은 그제야 어깨와 팔을 연결한 붕대를 발견하곤 울상이 되었다.
“또 어디 다쳤어요?”
“별거 아니야.”
“그 말도 이제 여러 번 들어서 지겨워요.”
“진짜 별거 아니래도.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환자 봤어.”
방금 전 자신이 경호원에게 한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혁권을 보고 소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혁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왠진 몰라도 기분이 풀린 것 같으니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그래도 이렇게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약속했었잖아.”
“응. 믿고 있었어요.”
소현은 혁권의 손을 잡고 따스한 미소를 건넸다.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혁권은 아까부터 줄곧 망설이던 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선물이 하나 있어.”
“뭔데요?”
“훨씬 전부터 준비했던 건데······ 언제 건네줘야 할지 몰라서 계속 가지고 있었거든.”
혁권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손바닥에 쏙 올라가는 푸른색 케이스에 작은 금색 리본이 묶여 있었다.
문득 무언가를 예감한 듯 소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혁권은 천천히 케이스의 뚜껑을 열고 반지를 꺼냈다.
“널 위해서 만든 거야.”
가는 손목을 붙잡고 약지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자 원래 제 자리였던 것처럼 반지가 딱 들어맞았다.
“받아 줄래?”
그 어떤 싸움터에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 심장이 두근거리는 때는 없었다.
혹시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머금고 소현을 바라본 혁권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우는 모습에 심각하게 당황했다.
“왜,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보석을 더 큰 걸로 바꿔 줄까?”
허둥거리는 혁권을 소현이 주먹으로 밀어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바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응?”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할 것 같은 혁권의 행동에 소현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건 너무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라고요.”
“정말?”
응응, 하면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인 소현은 그의 품에 왈칵 뛰어들었다.
“그리고 대답은 무조건 예스예요.”
가녀린 소현을 꼭 껴안은 채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말했다.
“사랑해.”
《대망》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