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86
이 배반은 고귀하지 않다 (4)
물론 클레이오가 일정 정도 상대의 착각을 방조하긴 했다.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가려면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덕분에 궁내의 사정을 제법 속속들이 알아내는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클레이오가 감당해야 할 역겨움 역시 점점 커졌다.
요즈음의 베스나는 이전보다 훨씬 말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말은 귀에 부어진 납이고 심장에 스미는 독 같았다.
“참, 키시온 자작 살해범이 받았던 살해 교사 편지가 얼마 전에 이쪽의 보관실로 왔는데, 제가 수십 년간 들여다본 남의 편지 중에서도 수위에 꼽을 만한 걸작이더군요. ‘당신의 리젤로테’라니, 도대체 누가 그런 걸 기획했을까. 미리 알았다면 내 아래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의 인재이던걸요.”
베스나가 트로모스를 칭찬하는 말을 듣다니.
당장이라도 찬물로 귀 안을 빡빡 씻고 싶은 개소리였다.
“드리스콜 국장, 그거야말로 반역죄에 해당할 발언입니다.”
“내 이야길 들은 이는 클레이오 경뿐인데, 고발하려면 해도 좋아요. 하지만 이건 순수하게 인간을 다루는 기술에 대한 감탄인 점을 좀 감안해 주시죠. 여기엔 일종의 예술성이 있잖아요.”
클레이오는 상대에 대한 경멸을 대놓고 드러냈다. 사람이 죽는 일에 대해 예술을 운운하고, 트로모스가 세실에게 쓴 교묘한 술수에 대해 알고도 감상이 저따위라니.
“경의 생각은 알겠어요. 지금 이 사람이 경우 없이 군다고 생각했죠?”
불쾌감을 간신히 눌러 죽인 클레이오는 굳이 부정의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깔깔거리며 웃던 베스나는 손수 접견실과 연결된 문을 열어주었다. 놀리듯이 정중한 몸짓이었다.
“자, 로디언 후작의 사자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이 지하의 생물은 고귀하신 마법사님을 놓아 드려야겠군요. 올라가 보시죠.”
클레이오는 대답 없이 문을 뚝 닫아버렸다.
더 이상 내무보안국장을 유하게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페텐카의 사자를 궁으로 부른 의도는, 자신이 하는 일을 적어도 상원 의장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강조하는 거였다.
또한 만에 하나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에 관해선 페텐카가 해결 방안을 내볼 수 있단 의미기도 했다.
그 점을 알고서 베스나는 질척거리는 차가운 손을 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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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견실에 들어서자마자 클레이오의 표정은 한 번 더 구겨졌다.
오늘은 정말이지 운수가 사나운 날이다.
베스나가 기분 나쁘게 엉겨오는가 했더니, 페텐카가 보낸 마석 운송자는 또 이놈이다.
‘보낼 사람이 없어서 블라드 아세르를 보내나.’
마석 호안석은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보석으로, 명상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들 수집했다.
꽤나 희귀하기는 해도 비탄의 자수정 같은 대단한 효과는 없는 물건이라서, 혹여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간다 해도 무방했다.
페텐카는 그 점을 이용해서 마석을 운반하는 블라드가 헛짓을 하는지 안 하는지 시험해본 모양이었다.
그야 적과의 교전이 무기한 중지되었는데 한정 없이 블라드를 붙잡고 있기도 어렵지 싶었다.
블라드가 세르게프 영지로 배치된 뒤에는 행정병으로 일하며 계산과 사무 업무를 하고 있다고 듣기는 했다.
클레이오가 조명될 때면 아세르 가문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증거로써 블라드의 이름 역시 종종 들먹여졌으니까.
얌전히 지낸다 싶었는데 그냥 그건 표면상의 복종이었을 거다.
‘그리고 굳이 귀띔도 없이 저놈을 보낸 건, 나를 시험해보는 일이기도 하겠군.’
뻔히 클레이오가 들어오는 소릴 들었을 텐데도 문을 등지고 앉은 블라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행정병 제복과 모자에 가려있긴 하지만 저 튀는 스트로베리 블론드와 잘나신 뒤통수를 못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다.
넓은 어깨는 굳어져 딱딱했다. 목에도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클레이오를 원망하고, 그의 원한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한동안 아예 잊고 살았던 도메스틱 드라마의 시즌2를, 굳이 심란한 일 다 겪은 오늘 찍어야 하다니.
클레이오는 속으로만 울상을 지었다.
‘어쨌든 물건을 제대로 가져왔는지 확인을 해야겠지.’
페텐카는 물건을 받고 나면 수령 확인을 해 달라고 했다.
이러나저러나 부탁을 해서 받는 입장이니, 달갑잖은 배송원을 상대 안 할 수 없었다.
클레이오는 떨어지지 않는 두 다릴 옮겨 블라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물론 그의 차분한 얼굴에선 내면의 복잡한 심경이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온도 없는 냉담함만이 드러난 그 새하얀 낯빛이 블라드의 분노를 북돋웠다.
“오랜만이야. 생각보다는 잘 지낸 듯하고.”
“이제는 손위 형제를 대접하는 척하는 가장도 버리는 거냐?”
“네가 나를 먼저 형제로 대해 줄 마음이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굴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아서.”
“뻔뻔스럽군.”
블라드의 적의와 분노는 일시정지를 눌러놨다가 다시 재생한 것처럼 재작년과 똑같았다.
클레이오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힘이 풀린 듯 편안하게만 앉아 있었다.
그 지독한 전쟁을 치르고 난 뒤라서 그런지, 명목상 핏줄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심지어 이젠 더 이상 블라드를 상대할 때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편하기까지 했다. 이 작자와는 끝을 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누가 누굴 뻔뻔하다고 매도하는 거야. 히드라의 독으로 브룬넨과 알비온 동부가 황폐해진 지금, 1급 반역죄로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지 않은 상황에 감사나 하지 그래.”
“나는…!”
“네가 여기 온 목적에나 충실해.”
클레이오는 태연히 손을 내밀었다.
이길 수 있는 구석이 없으니 그저 분을 눌러 삭이던 블라드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던지듯이 클레이오에게 건넸다.
봉인된 상자를 열어보니 마석 호안석 자체는 문제없는 상등품이었다. 가지고 오며 별다른 장난을 친 것 같지도 않다.
저렇게 지랄 맞게 굴긴 해도, 블라드 또한 페텐카에게 거스르면 안 된다는 자각쯤은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권력 구도에 신경을 쓰는 걸 보니 세실처럼 완전히 엇나가진 않겠어. 완전히 돌아버리지도 못하면서, 온전하게 타협하지도 못하는 타입이었군.’
뭘 하든 어중간한 게 블라드 본인에겐 불행일지 몰라도, 그에게 세실 휴잇만큼의 맹목성은 없어서 차라리 다행이지 싶었다.
어쨌거나 그는 진짜로 기디온 아세르의 아들이 아닌가. 가능하면 멀쩡하게 살아 있어 주는 편이 클레이오로서는 마음이 편했다.
“잘 가져와 줬어. 오늘은 필요하면 아세르 타운하우스에 머물고, 아니면 콜포스로 연락을 할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럼 네 갈 길 가고.”
클레이오가 호안석만 챙겨 쓱 빠져나갈 태세이자, 블라드는 새되게 이죽거렸다.
“뭐가 그리도 급하지? 내무보안국의 개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이미 다 보였으면서, 몸을 사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아무래도 아직까지 하찮은 자존심이 남아서 더 날을 세우는 거였다.
육체의 연령은 한참 차이가 나지만 정신적 연령으로는 블라드가 클레이오의 연하였다.
전쟁 내내 후방에서 사무 업무나 했던 저 작자는, 지금의 클레이오가 보기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어린놈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막 감금에서 풀려난 데다 헤스터와 전투를 치른 뒤였다. 그런 힘없는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는지, 블라드는 되도 않게 클레이오를 이겨 먹으려 들었다.
실상 클레이오는 경외를 사는 동시대 최고의 마법사이고 자신은 상사의 후계자 자리에서도 밀려난, 고작 일개 병사란 사실을 마지막으로 부정해보려는 발버둥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네 자유지만, 네가 또다시 입을 함부로 놀려 네 인생을 더 나락으로 처박고 싶은 거라면, 그건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 정돈 만류해야지 싶네.”
클레이오는 빈정거리는 말을 하면서도 어조만은 담백하게 유지했다.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이는 오히려 시비를 건 쪽이었다.
“…이런 네가 은총의 마법사라 불리다니,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군.”
이토록 인간적이고 범상한 질시는 이제 클레이오를 괴롭게도 아프게도 하지 못했다.
클레이오는 건성으로 답했다.
“통칭은 스스로 붙이는 게 아니란 것 정돈 알 나이지 않아? 그건 주어지는 영광이지 얻어내는 게 아니라서.”
“뭐라 하든 변명이다. 한때 너는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태어나도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았기에 아무런 죄도 없었지. …하지만 봐, 이제 너는 학살자야.”
“그래, 난 학살자야. 그리고 너는 학살자를 부러워하지. 어느 쪽이 더 잘못된 거 같아?”
블라드는 도망치듯 접견실을 나섰다.
그 꼴을 보던 클레이오는 페텐카에게 블라드를 제대시켜도 된다고 편지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그의 주의는 이내 마석으로 옮아갔다. 마법사는 제 손안에 든, 미지근해진 호안석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이 마석으로 이중발진을 해 [경감]을 걸면, 정신이 나갔던 사람도 일시적으로 머리가 맑아진다는 사실을 국왕 서고의 서책을 통해 알아냈다.
멜키오르는 이제 국왕 서고의 문을 개방한 채로 고정해 두어, 클레이오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렇듯 궁 깊숙이 파고드는 게 허락되었는데도, 멜키오르를 직접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사실상 아서가 국가의 통치 임무를 위임하고 있는 현재, ‘요양 중인’ 멜키오르는 전설 속의 불길한 신수 따위처럼 취급되었다.
그는 모든 곳에 거하면서도, 아무 곳에도 거하지 않는다. 존재감은 그대로인데 실체는 홀연하다.
그의 고통과 광증에 대해서는 오로지 숨죽인 소문만이 돌았다.
때로는 밤중의 정원을 국왕 대리가 유령처럼 배회한다고도 했다.
물론 그 소문은 궁성의 높은 담을 넘지 못했다. 클레이오도 이곳에 드나들며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멜키오르의 수족들은 어떤 거대한 안배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아무런 계획 없이 저들끼리 행동하는 것 같기도 했다.
구금실 역시 브룬넨 포로 한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라기엔 영 석연치가 않았다.
이 거창한 감옥은 멜키오르가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세상이 사라지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파묻어둔 지뢰처럼 느껴졌다.
‘이게 그저 내 신경증이면 좋겠군.’
때문에 클레이오는, 구금실을 설계할 때 구조물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약점을 부러 만들어 놓았다.
혹시라도 멜키오르 일파가 구금실을 악용해 친구들이나 아군에게 위해를 가할까봐 만전을 기한 것이다.
세상의 파괴자가 남의 손을 써 지뢰를 만들려 든다면, 그 지뢰의 신관에 남이 손댈 것도 각오했어야지 않겠는가.
구금실은 지하의 감옥 한 칸을 모두 티플라움으로 감싼 육면체 형태였다. 면마다 여덟 개씩 새긴 마법식이 이어져, 안에서는 결코 열 수 없는 구조물이었다.
지하를 폭발시킨 브룬넨 장교들의 행각에 대해 들으니 이쯤 방비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을 듯싶었다.
‘자폭 폭사만 한 줄 알았다니 그게 다가 아니었단 말이지.’
원래 세 명이던 브룬넨 포로들에겐 모두 제베디가 만든 제압구를 채워두었다.
7레벨 이하의 에테르 감응자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마도구를 차고서도, 그들 중 한 명은 오로지 물리력만으로 제 목을 뜯어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든 채 에테르를 불러일으켜 철창을 부쉈다.
틈이 벌어진 철창 새로 감방을 탈출한 자는 옆 감방의 동료 역시 풀어놓았다.
그 뒤, 두 번째 포로가 폭사하며 지하가 무너졌다.
세 번째 포로가 살아남은 건 그저 다른 층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읽는 내내 클레이오의 동공이 지진 난 듯 떨리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쯤 오니 그저 아슬란 측의 계획을 알기 위해, 그의 다음 행보를 예측하기 위해 불안정한 상태의 포로를 구금하고 있는 게 맞는지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선 아슬란의 행보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 없으니….’
클레이오가 지금 멜키오르 측과 벌이는 일은 아서라면 찬성하지 않을 거래였다.
그 애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고, 그래서 여신의 선택을 받은 리오그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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