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8
지금 시간 (5)
“그러면 이번에도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네. 그렇지만 가사가 틀렸다는 둥 하는 소리는 미시즈 모르간 앞에서 안 하는 게 좋을걸.”
이 초현실적인 이별의 때에 디오네의 조그만 툴툴거림이 더해졌다. 신으로서의 자각이 생겨났다 한들, 그녀의 의식이 자리 잡은 육신은 열렬한 극예술 애호가이자 후원자인 1868년생 디오네 그레이어였다.
“그러니까요. ‘불멸은 저주이오, 필멸이야말로 축복이니’를 그렇게 폄훼하다니! 은 가 나오기 전까지 미시즈 모르간의 최고 명작으로 취급될 텐데. 아마 어제의 당신이라면 그 가사가 맞다고 생각했겠죠!”
어제의, 혹은 천 년 전의 아서였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살아있으면 바뀌는 법이니까.”
아서는 그제야 겨우 미소를 짓는다. 옅고 어색하지만 미소다.
클레이오는 안다. 아서 리오그난은 아직은 끝나선 안 될 자신의 불멸성을 감당하기로 결정했다. 클레이오는 그런 아서를 존중한다.
클레이오 아세르는 아서에게, 그 언제보다도 진실되게 군다. 남아있는 시간은 진실에 할애하기만 해도 너무 짧다.
그리고 아서 역시 지금이 진실의 순간임을 안다.
잔을 내려놓고, 캐시미어 담요를 잘 접어 한편에 접어둔 아서가 대화에 집중한 사람답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레이, 사람에게는 결코 변치 않는 부분이 있지. 그러니까 레이, 반드시 돌아와서 나의 9장을 끝내고, 종장으로 만들 거라고 약속해 줘.”
아서의 생명과 연결되었던 세계사는 풀려나 새로운 세기를 향할 것이나, 아서 개인의 역사는 결코 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한 사람이 돌아와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아서가 재촉하는 약속은 실은 상호적인 것이고, 표면 이상의 의미를 더 내포한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반드시 네가 돌아올 장소를 존속시키리라는 다짐. 이 마지막 세계를 유지하고 지키리라는 결심. 자신의 불멸을, 역사의 여정을 수호하는 일에 소진하리라는 결의.
클레이오는 이 세상의 모든 푸르름을 다 담은 아서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신의를 다해 맹세한다.
“약속한다. 그러니 너도 나를 기억해.”
언약의 본래 기능은 세계의 보전이었다. 이미 시효를 잃고 영락한 언약은 필요 없었다. 그들에겐 약속이 있으므로. 조건을 걸지 않은, 오로지 신의만을 기반으로 가진 약속이.
“레이. 나는 널 절대로 잊지 않아. 다시 태어난 신들이 그러하듯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너 자신이 너를 모르더라도, 나는 너를 찾을 거야. 네가 누구이든, 어디에서 태어나든 반드시.”
한 세상이 끝나면 신은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여신들은 역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다음 세상에서 제 역할을 받아 왔다.
이제까지의 아홉 세계, 아홉 반복 모두가 종래엔 실패한 세속화로 인하여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곳에서, 신이 없는 세계를 지속할 수 있는 방도가 발명되었다. 그 기나긴 실패 끝에. 인간이 주권을 이양받고도 끝이 나지 않을 미래가.
비인격적인 것이 인격적인 것을 대체하는 근대의 도래는, 이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예언의 도구라는 직분을 벗겠지만 미려한 문장은 여전히 기적 같은 마법의 불씨이니, 세상은 문학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마법은 양자 역학에 의해 무력화되지 않고, 문학에 대한 과학의 최종적 승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신들에게 부여되었던 세계 지속의 목적이 완수되었다 한들, 다시 태어날 신의 아이는 스스로를 알지 못할 터였다.
신의 후손 중에서 저를 낳은 어머니 여신의 이름을 아는 자녀들이 생겨난 것은 세계의 억지력이 약해져서였다.
미리 보았던 미래가 와 세상이 온전히 재정비된다면, 기억의 의무는 아서 홀로 짊어지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클레이오는 두렵지 않다.
“그래. 눈을 크게 뜨고 찾아야 할 걸. 내가 다시 이곳에 올 때 나는 무력하고 무지한 어린아이의 모습이겠지. 대마법도 앞날에 대한 지혜도 없는 보통의 아이일 거야.”
클레이오가 하는 건 겸양의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아서는 클레이오가 바로 그런 보통의 삶을 살 수 있길 바라서 천 년을 견뎌냈다. 언젠가 맞이할 그날은 두 사람이 바라마지않던 미래다.
“시간은 많으니까, 괜찮아. 만일 불멸성이 이르게 가신다 하더라도, 그랜드 마스터는 절대 수명이 짧지 않거든. 소드마스터들도 쉽게 백 세를 넘기는데 나는 그보다 한 레벨이 더 높아.”
그때였다.
스스스슷. 스으으읏.
스르르르. 스르릇.
클레이오의 왼손에 끼인 반지가 반짝 빛을 냈다. 「지각」이 보내는 부드러운 경고였다. 마법사는 또다시 다가오는 과거로부터의 균열을 감지한다. 우리 세계를 지탱하는 지반이 침하되는 기척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연구실 안을 둘러본 클레이오는 라리마 한 짝을 제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고, 잔은 탁자에 돌려놓은 후 담담하게 일어섰다.
“이제 가야 해.”
뭐라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이는 아서 대신 프란이 벌떡 일어나 응접실 문을 열어주었다.
“짜는 소리들은 다 했나? 결정을 내린 건 스스로면서 리오그난은 패기가 없군. 알아 둬라, 클레이오 아세르. 기다리는 건 내 성미가 아니다. 너희들이 시간을 마련했으니, 나는 소위 여덟 번째 세계로 갈 방도를 찾아볼 거다. 인류에게 천 년의 기억이 있다면, 두 세계 간 기억의 전승 구조와 기억된 세계의 원리를 파헤치지 못할 것도 없겠지. 네가 쓰던, 거인의 어깨에 앉은 난쟁이라는 묘한 표현을 나라고 인용하지 못할 것 같나?”
그건 8세계로부터 기인한 인용구였다. 클레이오가 종종 인용하던 출처 모를 텍스트의 원전은 저기, 이전의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오가 ‘어디로부터’ 기인한 존재인지에 대한 해명은, 프란의 내면에 만들어진 A항목 최대 길이 문서의 남은 의문조차 해소시켰다. 그러나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업이 해명된 진실의 목록만큼이나 길게 남아 있다.
인생의 난제는 프란 앞에서 웃었다. 그 잊지 못할 미소.
“아, 좋아, 프란. 부디 힘내 줘. 므네모시네의 문은 앞으로도 내내 열릴 테니까, 네게 활용할 만한 관측 정보를 더해 줄지도 몰라.”
므네모시네의 문은 역사의 세계의 사건들을 이 세계의 신화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종종 열릴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연합과 또 수많은 에테르 감응자들이 있으니, 모두가 힘을 합치면 문을 넘어서 온 이야기들이 세상의 안위를 위협하진 못할 게 확실했다.
정복된 공포는 충분히 연구의 대상이 된다. 클레이오는 프란의 저 패기가 좋았다. 그리고 그 흡족한 얼굴은 끝까지 회색 머리 청년의 심기를 긁어놓았다.
“그래, 다시 만날 때에도 그렇게 미끌거리는 흉내를 내는지 두고 보자. 관직을 때려 치면 다른 업을 병행한대도 연구에 할애할 시간이 나지. 이젠 내가 산업부 장관직을 유지해야 할 이유도, 환멸 나는 작위를 가지고 있을 이유도 사라졌군. 리오그난, 너는 클레이오와 타협했고, 나는 신을 죽일 수 없었으니.”
그즈음, 포옹의 반구를 쥐고서 문간에서 안쪽을 살피던 제레미가 드디어 개입할 틈을 찾아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습관처럼 프란을 부르려다 잠시 멈칫했던 제레미는 상황의 심각성을 되새기고는, ‘아직 퇴직 인가가 나지 않았으니 이 호칭을 양해해 주십시오.’라는 비언어적 표현이 담긴 어조로 “장관님, 이 일까지만 의견을 주십시오. 브리스텔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프란이 정색했다.
“균열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 경이 스텔라 방벽 일부를 파손하고 항공기를 이륙시켰습니다. 균열은 관측되지 않지만 지난밤 대균열의 여파로 지반 침하가 이어져 시민들의 불안이 고조되는 중입니다. 방벽을 역방향으로 반전해 지반을 받치려면 스텔라 방벽의 수리가 시급합니다.”
서둘러 지반 침하의 각도를 체크한 프란은 그 정도는 건축물들이 견뎌낼 수 있는 부하 범위 내라며 물러섰다.
인명의 문제가 아니므로, 제레미의 청은 냉정하게 잘랐다.
“구두로라도 사의를 표했고 국왕이 여기 있으니 전 이제 알비온의 최고 명령권자가 아닙니다. 또 지금쯤이면 잘나신 977의 소드마스터 중에서 누군간 일어났겠죠. 복구 매뉴얼도 있잖습니까. 기량이 뛰어난 자들이니 아무나 대리를 하라죠. 그쪽에 일임하겠습니다.”
“위임은 곤란하게 됐습니다. 첼레스테스 경의 기체에 키시온 백작이 동승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동 방향은, 궤도로 예측해보건대 여기 룬데인 수도방위대 학교입니다.”
“뭐요?”
“게다가… 산업부 측 인력이 방벽을 보수하려 했지만, 통상적으로 하중이 가해지는 구간이 아닌, 상공의 감지기 앞으로 항공기가 지나친 바람에 부서진 수리 부품의 재고가 없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첼레스테스 경에겐 활주로 없이도 항공기를 이착륙시키는 게 가능한 성흔이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지금 당장 설계 변경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현재 그러한 인력은 장관님뿐입니다.”
이번에는 프란도 낯빛을 바꿨다. 다른 건 몰라도, 시 중심부에 고정시켜 둔 에테르 감지기를 고장 내는 건 곤란했다.
“젠장! 하필이면 이 시국에! 항공대를 불러도 내가 지금 당장 돌아갈 순 없습니다. ————!”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들은 제레미는 먼지투성이 안경 렌즈 너머로 눈썹을 치켜올리고, 디오네는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며 ‘오!’라는 감탄사만 내뱉었다.
그들은 프란이 보기보다 욕을 아주 차지게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뒷골목과 밑바닥을 훑으며 살아온 스물일곱 살 활동가의 연륜이었다.
난장판 속에서 디오네가 머쓱하게 손을 들었다.
“저어, 괜찮다면, 유니콘을 타 보지 않을래요? 제가 콜포스부터 타고 왔는데, 의외로 탑승감은 좋아요. 괜찮지, 에즈라? 프란은 가볍잖아. 뭐? 나랑 같이 안 타면 싫다고? 하. 이 새끼….”
“…시급한 사안이니 장관님께서는 신수를 이용하시고, 차량을 수배했으니 저는 후발대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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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2월 31일.
7분 전, 정오.
존재의 모든 진실이 그림자 없이 밝혀진 지금 시간.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 선 클레이오는 자신의 에테르를 살며시 펼쳐 잠이 든 레지나 이스토리아를 깨웠다. 앙상하게 마른 여신은 오래된 벽체에서 벗어나 클레이오의 품으로 쏟아졌다.
클레이오가 펼친 첫 서클로 인해 열린 므네모시네의 문은 푸르고 붉다가 곧 보랏빛으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호수 주변에 고인 나지막한 흰 모래더미가 세상을 쓰던 잉크와 비슷한 색의 광휘를 반사했다.
함께 휘청이던 클레이오에게 기대 비틀비틀 어려운 걸음을 옮기던 레지나는 조심스레 뻗어온 아서의 팔을 붙들고서야 겨우 멈추어 섰다.
아서를 보고 또 클레이오를 본 뒤 하늘을 올려다본 클리오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레지나일 적뿐 아니라 민산이던 시절에도 본 적 없던 순수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해는 희게 밝았다.
클레이오가 세계를 건너가는 데엔, 일식도 신의 조력도 더 이상은 필요치 않았다.
은총의 에테르 가운데 자수정빛 두 눈을 모두 뜬 레지나는 두 세계를 이을 권능을 저의 천사가 가진 걸 알아본다.
천사에게는 마법이 있다. 아홉 서클을 모두 채우고, 세상 전체의 에테르를 뒤흔들며, 한 세계를 구하고 또 멸할 수 있는 고강한 마법이.
레지나는 클레이오의 상처투성이 왼손에 끼인, 더 이상 말씀을 게시하지 않는 백금 반지를 쓰다듬었다.
“알고 있니? 네게 속한 수많은 자질을 일깨웠던 이 ‘약속’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기실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해독에 있었다는 걸. 마법은 언어에 복종하며, 언어의 다음에 오는 것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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