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43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죠.”
카운터의 여자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지붕값은 내고 가.”
죽기 직전에도 받을 건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이 또한 100퍼센트 효율을 추구하는 마법사의 정신이었다.
‘후후, 철두철미한 성격이군.’
숙식을 하지 않고 비를 피하기 위해 여관에 들어온 사람들은 지붕값이라고 해서 얼마를 지불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에이미는 돈이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현실의 돈이 거래가 될지는 의문이었다.
그때 아르민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선뜻 금화를 꺼내서 지불했다.
“여기 있습니다.”
“응?”
에이미는 그가 건넨 금화를 살폈다. 역시나 현실에서 쓰이지 않는 톱니바퀴 모양의 금화였다.
카운터의 여자가 금화를 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너무 비싼데.”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그럴 순 없지. 됐으니까 그냥 가져가.”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르민이 웃으며 거절하자 여자는 쿨하게 수긍했다.
“그래, 그럼. 복 받을 거야.”
에이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관 주인은 말투도 생김새도 성별도 달랐지만 왠지 평소 시로네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우선 나가죠.”
아르민은 어느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관을 나섰으나 처마지붕 바깥으로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홍수처럼 바닥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다시 한기를 느낀 에이미가 으스스 몸을 떨었다.
“이러다가는 세상 전부가 잠기겠어요.”
아르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전에 세상이 사라지겠죠.”
에이미는 고개를 돌려 여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단된 온기는 그녀를 더욱 춥게 만들었지만 안락하게 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졌다.
시로네가 죽으면 저들 모두가 사라진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저들이 이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기를 바랐다.
“우선 시로네라는 키워드는 주입했으니 시로네의 화신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겁니다. 다이버들은 이 과정을 그물이라고 부르죠.”
“그렇군요.”
“하지만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일단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설명하죠. 물이 더 차오르면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질 테니까요.”
아르민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우 속을 내달렸다. 에이미가 그의 옆을 따라잡으며 물었다.
“어딜 가는 거죠? 시로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선은…… 무기를 사야 할 겁니다. 아마도요.”
2층 건물에 앞에서 걸음을 멈춘 아르민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끼와 검이 교차로 세워진 간판이 보였다.
세 사람은 다시 무기 상점의 처마기둥에서 비를 피했다. 이번에는 처마가 좁아서 벽에 달라붙어야 했다.
아르민이 나란히 서 있는 두 여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다룰 줄 아는 게 있나요?”
레이나가 먼저 말했다.
“저는 어릴 때 검술을 조금…….”
“저는 마법사예요.”
에이미가 민망한 듯 말하자 아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핀잔을 받은 터라 마법사라 당당히 말하기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렇군요. 쓸 만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
아르민이 무기 상점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에이미가 황급히 불러 세웠다.
“저기, 그런데 돈은 어떻게 한 거예요?”
좋은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게다가 여관에서 지불한 돈은 현실의 돈이 아니었다.
아르민도 시로네의 의식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자신도 돈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그건 인출한 겁니다.”
“인출요? 어디서요?”
아르민이 하늘을 가리켰다.
“물론 시로네죠. 여기는 시로네의 의식이니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시로네가 여러분에게 느끼는 신뢰도만큼 돈이 들어와 있을 겁니다. 어디 보자…….”
아르민은 주머니를 뒤져서 금화를 꺼냈다.
“현재 9개가 있으니 저는 총 10골드를 받았군요. 물론 이것도 골드라면 말이죠, 하하.”
아르민의 손바닥에 놓인 톱니 모양의 금화를 본 두 여자는 마음속으로 돈이 필요하다고 떠올렸다.
주머니를 뒤진 레이나가 화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어라? 정말이네. 7개, 7골드네요.”
에이미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태까지 시로네와 알고 지내면서 아르민이라는 사람은 들어 보지 못했기에 레이나라면 최소한 10개보다 많은 금화를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깨고 아르민의 승.
사실은 시로네가 레이나를 하찮게 여겼던 것일까? 아니, 오히려 아르민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누굴까, 이 사람? 시로네하고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거지?’
어쨌거나 에이미도 조금 기대감이 들었다. 어차피 현실에서는 쓸 수 없는 물건이지만 정신세계에서는 이것만이 화폐였다.
‘흐음, 아르민 씨가 10개, 레이나 언니가 7개. 그러면 나는 한 20개 정도 주려나?’
에이미는 혀를 빼물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바꾸어 반대편 주머니를 살폈다.
점차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어라?”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잠시만요.”
에이미는 허겁지겁 옷에 있는 주머니를 전부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인출은 되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진 에이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금화가 들어와 있지 않은데요?”
아르민은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렇군요. 시로네가 인출을 거부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에이미는 충격을 받았다.
금화의 개수는 시로네가 그 사람을 얼마만큼 신뢰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하나도 못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 아니, 다시 해 볼게요.”
아르민이 소용없다는 듯 말했다.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시간이 없으니 일단 우리가 가진 돈으로 무엇이든 구해 보죠.”
금화 인출은 굉장히 쉬운 작업이다. 한 번 금화가 나오지 않았다면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나가 에이미를 위로하며 무기 상점으로 이끌었다.
“그래, 에이미, 그렇게 하자. 16골드 정도면 충분할 거야.”
레이나의 팔을 뿌리친 에이미가 자리에 멈춰서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에이미의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레이나가 받은 7골드는 그녀를 생각하는 시로네의 마음이다. 그런 것으로 자신의 무기를 사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무언가를 사야 한다면 그것은 시로네가 자신에게 준 돈이어야 한다.
아르민은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또한, 그렇기에 세계적으로 도굴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알게 되면 원래 알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성임에도.
“에이미 양, 배신감 느낄 필요 없습니다. 시로네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에요. 어떤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면 그럴 수 있습니다. 혹시 이곳에 오기 전에 뭔가 안 좋은 감정을 그에게 전했거나…….”
에이미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에이미는 말을 줄였다.
솔직히 어찌 알겠는가? 시로네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해도 그의 속마음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제노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이그나이트로 거미줄을 녹여서 구해 주기를 바랐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아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시로네의 의식 속에서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었고 딱히 정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다.
“일단 들어가죠.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아르민이 단호하게 맥을 끊자 에이미도 할 수 없이 뒤를 따랐다. 풀이 죽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레이나는 안쓰러웠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위로도 불가능했다.
“어서 오세요.”
상점의 주인이 신문을 덮고 인사했다.
에이미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나이는 조금 들어 보였지만 분명 네이드였다.
“네이드? 네가 어떻게?”
“응? 나를 아시오? 나는 그쪽을 처음 보는데?”
에이미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아르민을 돌아보았다. 아르민도 네이드하고는 구면이었다. 일전에 자신의 집으로 숨어든 시로네의 친구 중의 1명이었다.
“시로네의 투사체입니다. 무기 상점이라는 사물과 네이드라는 사물이 결합된 거죠. 아마도 네이드라는 소년이 이런 쪽으로 관심이 있는 모양이군요.”
레이나가 말했다.
“꿈에서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죠. 악당인 줄 알고 싸웠는데 꿈에서 깨어 보니 사실은 그 사람이 어젯밤 다투었던 가족이었다거나.”
“네. 당연한 정신적 작용입니다. 그리고 복합적인 투사체가 있다는 것은 다른 곳보다 인상적인 개념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죠. 일단 좀 돌아볼까요?”
네이드는 에이미를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난 정말 모르겠는데.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니오?”
“아, 그런가 봐요. 제가 아는 사람은 훨씬 어리거든요. 죄송해요.”
“하하하! 내가 어디 가서 동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기는 하지.”
에이미는 괜한 말로 시로네의 정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모르는 체했다. 인간의 의식이란 너무나 복잡해서 사소한 부분만 건드려도 곧바로 나비효과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6. 거대한 비밀 (4)
시로네가 금화를 주지 않은 일로 상처를 받았던 에이미는 뜬금없이 학교의 친구를 보게 되자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말했다.
“무기를 좀 보고 싶은데요. 둘러봐도 괜찮죠?”
네이드가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쇼핑을 권했다.
“그래, 뭐. 이것저것 있으니 살펴봐. 그나저나 이런 날씨에도 잘들 돌아다니네. 기분이 안 좋아서 일찍 문을 닫으려고 했거든. 비가 와서 그런지 갑자기 우울해지네.”
에이미는 뒷짐을 지고 이것저것 무기들을 구경했다.
기본 장비들은 얼추 갖추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마법사 장비가 없다는 점이었다.
마법용품이 있었다면 남의 돈으로 사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도 우스운 일인지라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대충 진열된 물품을 돌아본 에이미는 유리 케이스에 담긴 상태로 벽에 걸린 무기를 발견했다.
“응? 이건?”
케이스 아래의 종이에 라고 쓰여 있었다.
네이드가 화색을 띠며 말했다.
“아, 그건 우리 가게의 자랑이지. 휘두르면 천둥소리가 터지는 무기야. 신기하지? 내가 전에 실험해 봤는데 박력이 어마어마하다고. 어떤 몬스터도 놀라서 도망쳐 버릴걸!”
갈리앙트로 출발하는 마차에서 리안에게 시로네의 어릴 적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열두 살에 천둥패기를 성공시켰다더니, 그게 이렇게나 소중한 기억인 모양이었다.
에이미는 가격표를 보았다. 그리고 황당한 듯 눈을 치켜떴다.
“59억 골드?”
“하하하! 당연하지. 우리 가게의 자랑이라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구할 수 있다고.”
에이미의 등 뒤로 아르민이 다가왔다.
“아마도 이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누구도 못 살 겁니다. 이 세계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저와 레이나 씨의 돈을 전부 합쳐도 고작 17골드예요. 59억이라는 돈을 인출하는 건 부모님조차 불가능할 테니까요.”
에이미는 이해했다. 하지만 왠지 미련이 남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흐음, 만약 도굴꾼이 이것을 도굴하려고 한다면?”
“아마 가능할 겁니다. 시로네의 강렬한 사념이 모여 있는 사물이기 때문에 오브제로 변환하기에 편할 테니까요. 돈이야 뭐 불법적인 방법으로 모으거나 훔치거나 하겠죠. 하지만 만약 제가 도굴꾼이라면 이것은 훔치지 않을 겁니다.”
“딱히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르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네. 오브제란 상식을 깨는 물건일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단순히 도끼에서 천둥소리가 들린다는 건 그다지 특이하지 않죠. 그냥 천둥패기를 성공시키면 되는 문제니까요. 아마도 11단계는 이런 물건이 대부분일 겁니다. 이곳은 표층이라 인간의 내밀한 욕망은 드러날 여지가 없죠. 따라서 는 욕망이라기보다는 소중한 추억 정도로 해석하는 게 맞습니다.”
에이미는 오브제의 생리를 이해했다. 그리고 아리우스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깨달았다.
이 세계는 시로네의 것이다.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정신인 것이다. 그것을 도굴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아리우스는 반드시 체포되어야 했다.
아르민이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살피며 말했다.
“어쨌거나 준법 시민인 우리는 굳이 욕심낼 필요 없습니다. 도굴하지 않을 거라면 어차피 꿈속의 물건일 뿐이에요. 까다롭게 고를 필요 없습니다. 최소한의 호신이 가능한 정도로만 무장하세요.”
에이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호신용요? 지온과 아리우스를 상대하기 위해 고르는 게 아니에요? 그러려면 완벽한 무장을 해도 모자랄 텐데.”
아리우스는 창가에서 떠나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건 나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고르세요.”
레이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오젠트 가문은 검을 숭상하는 가문. 또한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기도 검이었다.
“혹시, 이곳에 활도 파나요?”
아르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좋은 선택입니다.”
현재 바깥은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다. 그렇다면 근접 무기보다는 원거리 무기가 유용하다. 특히나 그녀의 청각이라면 활의 적중률도 높아질 터였다.
레이나는 네이드가 골라 준 활을 들고 살펴보았다. 장력도 짱짱했고 활등의 곡선도 비틀리지 않았다.
무도를 익힐 때 활은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기라고 배웠다. 또한 무가 집안답게 사냥을 자주 다녔기에 기본기도 탄탄했다.
“마음에 드네. 이걸로 주세요. 화살통하고 화살도 살게요.”
“좋아. 품질 좋은 걸로 주지. 기다리게.”
네이드가 카운터 뒤편의 창고에서 물건을 찾는 동안 레이나가 에이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법 무기는 없네. 다른 곳에 가 볼까?”
“괜찮아요. 마법사는 딱히 도구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에이미는 잭 오 랜턴을 얼굴 옆에 소환시켰다.
“그리고 저에게는 시로네가 사 준 무기도 있고요.”
에이미는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시로네가 사 줬다는 걸 강조해봤자 비참함만 더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모르는 체 몸을 돌렸다.
아르민은 창가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잭 오 랜턴. 저건 고대 마법인데. 상당히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얻었군.’
아르민도 모종의 임무로 천국에 다녀온 적이 있기에 커뮤니티의 대략적인 시세는 알았다.
고대 마법은 엘릭서로 구할 수 있고, 잭 오 랜턴 정도라면 화이트 엘릭서 정도는 줘야 한다.
시로네와 에이미는 상당히 친한 관계일 것이다.
그런데도 인출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로네에게 서운함을 드러내는 마지막 발언.
‘흐음, 그런 거였군.’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다. 아니, 정신세계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난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