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44
‘미리 언질을 해 두는 게 낫겠군.’
아르민이 결정을 내리는 그때 네이드가 20피스짜리 화살통 2개를 들고 왔다. 다 해서 얼마냐고 물어보자 4골드라고 했다.
에이미가 아르민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활 세트 하나가 아르민 씨 신뢰도의 절반 값이잖아요.”
“비싸긴 하군요. 하지만 그런 만큼 최고급일 겁니다. 어쩌면 다른 능력이 추가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이 세계의 주인’이 남을 등쳐 먹을 성격은 아니니까요. 물론 네이드라는 소년이 평소에 사기를 치는 인간일 수도 있지만, 를 맡긴 걸로 봐서는 우호적인 투사체인 것 같군요.”
아르민이 시로네를 ‘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돌려 말한 이유는 네이드가 듣고 있기 때문이다.
여관에서 키워드가 투사체에게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지 경험했기에 에이미도 곧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이드도 질 낮은 물건을 함부로 넘길 아이는 아니에요.”
레이나는 4골드를 지불했다. 어차피 이 세계의 주인을 만나면 돈은 필요하지 않았다.
레이나는 화살통 하나를 등에 차고 하나는 허벅지에 채웠다. 그리고 화살 3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다음 활등에 얹은 채로 준비를 마쳤다.
에이미도 잭 오 랜턴을 둥둥 띄우며 아르민을 돌아보았다.
고작 2명이었지만 마음만큼은 진격을 앞둔 군대와 다르지 않았다.
“각오는 되셨습니까? 이제부터 ‘이 세계의 주인’을 만나러 갈 겁니다.”
레이나가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찾죠?”
“멀리 갈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그는 모든 곳에 있으니까요.”
아르민은 고개를 들어 네이드가 있는 곳을 보았다. 그러자 에이미와 레이나가 좌우로 비켜서서 길을 열어 주었다.
“시로네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에이미는 화들짝 놀랐다.
딱히 큰일은 나지 않았지만 여관에서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상황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예상대로 네이드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아르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복합적인 투사체이기 때문인지 여관 주인처럼 모르쇠로 일관하지는 않았다.
“시로네는 왜 찾고 있죠?”
아르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이 무기 상점은 시로네의 의식 중에서도 상당히 인상이 집중된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아르민은 키워드의 강도를 바짝 올렸다.
“시로네는 곧 죽을 겁니다. 그 전에 우리가 그를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에이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네이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과연 시로네의 의식은 아르민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네이드는 감정이 없는 얼굴로 아르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에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경고했다.
“나가라. 이곳은 너의 세계가 아니다.”
아리우스는 시로네의 화신과 접속했음을 깨닫고 다그쳤다.
“거절인가요? 시로네, 다시 생각해 보세요. 저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세요.”
침묵을 지키는 네이드의 몸에서 이상 징후가 일어났다. 눈동자가 사라지고 시커먼 동굴처럼 변하더니 온몸이 시커먼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쳇! 실패인가?”
아르민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뭐죠?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밖으로 나가세요!”
아르민이 어깨로 문을 밀자 레이나가 활을 장전한 채로 뒤를 따랐다. 에이미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알던 네이드는 사라지고 검은 그림자의 형체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심장이 떨어질듯 놀라며 가게를 나서자 사방에서 같은 것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에이미는 즉각 샤이닝 마법을 시전했다. 빛이 솟구치면서 쏟아지는 빗방울이 선명하게 보였다.
낙수의 장막 안쪽으로 그림자들이 서 있었다.
사람의 형상이었지만 허리가 길쭉했고 팔도 길었다.
가장 기괴한 것은 얼굴이었다. 마치 심연으로 빨려드는 소용돌이처럼 가느다란 빛의 선이 나선형으로 맴돌고 있었다.
“아르민 씨. 대체 저건…….”
“에고이스트입니다.”
에이미가 살짝 고개를 틀어 되물었다.
“에고이스트?”
“모습에 속지 마세요. 놈들의 형태는 변화무쌍합니다.”
“쉬오오오오!”
에고이스트가 덮치자 아르민은 플리커를 시전하여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더니 즉각 변화하여 그를 추적했다.
아르민은 플리커를 연속으로 시전했다. 그러자 형체는 사라지고 점멸하는 충격파만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그의 궤적을 드러냈다.
그러는 사이 전투 준비를 끝낸 레이나가 손가락에 3개의 화살을 끼우고 순식간에 쏘아댔다.
에고이스트의 몸이 펑 하고 터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확실히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한 개체가 당하자 에고이스트도 즉각 대응책을 모색했다. 레이나가 화살을 쏘면 허리를 실처럼 가늘게 꼬아서 피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이미의 파이어 스트라이크가 머리통을 불태웠다.
불에 타면서도 에고이스트는 끝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물리적으로는 연약할 거란 예상과 달리 완력이 상당했다. 현실의 몬스터와 비교해 봐도 3티어 이상은 될 듯했다.
레이나는 점차 활이 손에 익었다. 빗소리에 개의치 않고 상대의 소리를 추적하여 예측 사격을 하자 마치 화살이 휘어지는 듯 에고이스트에게 적중했다.
“쉬오오오오!”
아르민과 레이나 콤비가 활약을 하는 가운데 에이미는 따로 떨어진 곳에서 한 개체의 에고이스트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무리 중에서 가장 강한 개체였고 무기 상점의 네이드가 변한 에고이스트였다.
네이드의 에고이스트는 전술에 적합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며 에이미를 몰아세웠다. 팔이 네 개로 늘어나 송곳처럼 찌르는 가하면 연체동물처럼 허리를 길게 빼고 파이어 스트라이크의 속사포를 춤을 추듯 회피했다.
이곳으로 몰려드는 에고이스트의 숫자는 더욱 불어나서 사방이 그림자로 넘실거렸다. 아르민의 플리커 마법도 전장을 이탈하면 쓸모가 없기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에이미는 파이어 월을 시전하여 적군과 아군의 사이를 갈랐다. 정신을 집중하자 불의 벽이 두 배나 높게 치솟으면서 라인에 서 있는 에고이스트를 태웠다.
네이드의 에고이스트가 그곳을 돌아보더니 공격을 멈추고 에이미를 빤히 살폈다. 에이미는 상점에서 시로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을 떠올리고 소리쳤다.
“시로네! 나야! 에이미!”
에고이스트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말을 알아먹은 것은 분명했다. 그의 고개가 살며시 45도 정도 기울었다.
6. 거대한 비밀 (5)
“우리가 너를 구하러 왔어!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쉬오오오오오!”
네이드가 네 개의 팔을 잔뜩 구부리며 천공을 향해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모든 에고이스트들이 동작을 멈췄다.
에이미는 숨을 몰아쉬며 사태를 주시했다. 시로네에게 목소리가 닿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은 참담했다. 에고이스트들이 무언가에 빨려들듯 길쭉해지더니 빗물을 역행하여 솟구쳤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네이드의 에고이스트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동료를 흡수한 에고이스트의 형태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덩치는 3미터 이상 커졌고 어깨, 옆구리, 허리에서 곤충의 다리가 튀어나왔다.
꼬리는 벌의 엉덩이처럼 부풀었고, 얼굴은 기괴하게 앞뒤로 늘어져 휘어진 소시지처럼 보였다. 안면부가 칼로 쪼갠 듯 열리면서 톱니 같은 이빨이 생겼고 목구멍 속에서 긴 혀가 빠져나와 물결처럼 흔들렸다.
“키에에에에에!”
에이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저게 시로네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가근방의 모든 에고이스트들이 전부 모여 만들어낸 형태는 끔찍할 정도였다.
괴물체가 발을 내딛자 쿵 하고 땅이 울렸다. 저건 이길 수 없다. 그런 확신을 가지면서도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싸울 자세를 취했다.
고작 11단계에서 물러서면 시로네는 구할 수 없다. 설령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좋아, 간다!”
“잘했습니다! 이제 도망쳐요!”
아르민이 곁을 지나치며 말하자 에이미는 황당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마법을 취소하고 달음박질쳤다. 곧바로 레이나가 따라붙었다.
세 사람은 전력을 다해 뛰었다. 멀리서 에고이스트의 괴성이 빗소리를 뚫고 메아리쳤다.
아르민은 으슥한 골목으로 피신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에이미와 레이나도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빗방울이 샤워처럼 얼굴을 두드렸다.
에이미가 호흡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물었다.
“도대체 저게 뭐예요? 시로네의 의식인데 어떻게 저런 괴물이 나올 수가 있죠?”
“인간이 가진 이기적 방어기제입니다. 투사체에 섞여 있죠. 강력한 투사체일수록 에고이스트의 힘도 강해집니다.”
에이미는 네이드가 가장 강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쳐도 괜찮아요?”
“자아가 공격당했을 경우 에고이스트는 가근방의 투사체를 이용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포화가 되었을 시에는 에고이스트의 성질이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강하기는 정말 강하고, 제거해도 이득이 없으니 도망치는 게 낫죠.”
레이나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감쌌다. 얼마나 뛰었는지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후우, 우리가 키워드를 주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인가요?”
“우리가 실패한 게 아니라 시로네가 거부한 거죠. 경계심이 상당하군요. 물론 현실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에이미가 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저런 것과 싸워야 돼요?”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이죠. 시로네가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해서 키워드를 주입해야 합니다. 시로네의 안내를 받는 것 외에는 1단계로 내려갈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어쨌든 저것들도 시로네의 의식이잖아요.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리우스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고이스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방어기제입니다. 시로네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적으로 인식하죠.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입력된 순간 7골드와 10골드의 신뢰를 얻은 우리조차 예외가 없습니다. 서운할 일은 아니에요. 세상은 나와 타인으로 인식되지만 에고이스트는 오직 나, 나, 나입니다. 놈들에게는 타인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어요.”
에고이스트의 맹목적인 호전성을 뼈저리게 느꼈던 에이미는 치를 떨었다.
“앞으로 어떻게 싸우죠? 이렇게 강한데요.”
“아니, 이것도 약한 거예요. 심층에 가까울수록 에고이스트는 더욱 강해집니다. 우리가 반드시 표층에서 시로네의 화신을 찾아야 하는 이유죠. 1단계 본능의 영역까지 들어가면 에고이스트는 시로네를 지키기 위해 의식의 대부분을 장악해 버립니다. 즉 이 세계의 주인인 시로네와 맞먹는 위력을 낸다는 거죠. 그렇기에 다이버들은 절대로 심해까지 잠수하지 않습니다. 아리우스도 시로네의 무의식이 약화되지 않았다면 생각을 달리했을 거예요.”
에이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아리우스와 지온도 마찬가지 상황 아닌가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에고이스트가 더 강해진다고 했으니 어쩌면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몰라요.”
아르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는 아마도 시로네를 찾지 않고 우회할 겁니다. 도굴꾼이란 인간 정신의 전문가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흔한 세계지만 이곳의 사물에는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어요. 아리우스는 그 의미를 해석해서 직접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을 겁니다. 물론 렘 영역 이하부터는 걸릴 확률이 높지만 그때쯤이면 시로네의 무의식도 상당히 붕괴되어 있을 겁니다. 아리우스는 그걸 노리고 뛰어든 거예요.”
레이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리우스의 방식을 쓰는 건 어때요? 에이미는 시로네를 잘 알고 있으니 어쩌면 이곳의 사물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흐음, 의식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계단식도 있고, 광장식도 있습니다. 복도식도 있고 위상공간도 있어요. 하지만 보통 하층으로 내려가는 관문은 지하로 구성되어 있죠. 그게 의식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우니까요.”
에이미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이곳에서 지하실을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들은 인간의 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여기는 고작 11단계에 불과하니까.
“일반적인 이론을 말씀드린 겁니다. 인간의 정신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섬세합니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세계의 지하실을 전부 찾아다녀야 하고, 찾는다고 한들 그곳이 10단계의 입구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요. 어차피 그들보다 빨리 도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서 시로네를 만나면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죠. 우리는 계속 키워드를 주입해야 합니다.”
레이나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마다 에고이스트가 우리를 찾을 텐데요?”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오지 말라고 한 겁니다. 도움을 받아 놓고 이런 말 하는 건 우습지만.”
에이미는 거기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시로네가 자신을 공격한다는 게 껄끄러울 뿐이었다.
“하아. 기분이 묘하네요. 시로네의 정신과 싸워야한다니.”
아르민이 차갑게 노려보았다.
“에이미, 정신 차려요.”
“네?”
“감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봐서 알겠지만 타인의 정신은 극도로 위험한 곳이에요. 아리우스와 동급인 최고의 다이버들조차 숱하게 목숨을 잃은 곳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긴장하고 있고요.”
“정말로 그렇습니까?”
에이미는 아르민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정말로 긴장하고 있다. 아니, 심지어는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한 상태였다.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로네가 우리를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시로네의 영역에 들어와 난장판을 치고 있는 겁니다. 이곳은 시로네가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극히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에이미 양은 거기에 들어온 거예요. 그래 놓고 이 세계의 반응에 분노하거나 실망하는 건 비겁하고 저열한 행동입니다.”
“그건…….”
에이미는 말문이 막혔다.
아르민의 말대로 시로네의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정신에 들어와 모든 것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우리는 시로네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에요. 시로네의 화신을 만나는 겁니다. 화신은 겉으로 알고 있던 시로네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에이미 양은 인출을 하지 못했죠. 그래서 서운하겠지만 어쩌면 화신에게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에이미 양이 시로네의 화신을 본다면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분명 시로네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레이나가 덧붙였다.
“사실은 그것이 가장 정확한 시로네인데도 말이군요.”
“네. 인간이 타인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육체 바깥으로 드러난 모습뿐이죠. 하지만 화신은 다릅니다. 인간을 이루는 모든 감정이 전부 섞여 있기 때문이에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밝힐 수 없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부분까지도 통합되어 있다는 거죠. 우리는 그것을 보러 가는 겁니다.”
에이미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크게 숨을 내쉬고는 두 손바닥으로 뺨을 연거푸 때렸다. 얼굴이 얼얼했으나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아르민의 말대로 긴장은커녕 각오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알았어요. 절대로 판단하지 않을게요.”
아르민은 에이미의 눈에 냉철한 빛이 깃든 모습을 보고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 이 정도의 각오가 없이는 타인의 정신에서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
사랑을 고백한 남자의 속마음이 사실은 동물적인 욕구에 불과했다면?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속마음이 사실은 질투와 시기로 점철되어 있다면?
그런 진실을 알고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아리우스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아타락시아는 최소 심층 3단계 이하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은 절대로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모여 있는 장소죠.”
“네. 어떤 것에도 관심 갖지 않을게요. 저도 감추고 싶은 속마음이 있으니까요. 철없이 굴어서 죄송해요. 인출이 되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감정이 흔들렸나 봐요.”
레이나가 말했다.
“괜찮아. 나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나라도 인출이 안 됐다면 서운함을 느꼈을 거야.”
에이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시로네도 저에게 서운한 게 있겠죠. 생각을 잘못했어요. 아무리 금강태의 정신력이라도 남들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일 텐데 말이에요.”
아르민은 골목길 바깥을 주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네? 아, 시로네도 똑같은 감정을 지닌…….”
“아니, 그거 말고요. 금강태라고 했나요?”
에이미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아르민의 표정이 예상보다 심각하자 빠르게 말했다.
“네. 학교에 에텔라 선생님이라고 유명한 수도사분이 계신데 그분이 그렇게 말했어요. 아타락시아를 구사할 정도라면 금강태의 경지에는 들어가야 한다고.”
“이런, 멍청이……!”
아르민은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무리 본능에 새긴다고 해도 아타락시아는 인간이 담긴에는 너무 거대한 개념이다.
보통이라면 정신이 파괴될 정도의 용량이었다.
하지만 시로네는 그것을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에텔라라는 교사는 제대로 짚은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에이미 양. 여태까지 잘난 척을 했군요. 저야말로 멍청이였습니다. 제 머리를 몇 대라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군요.”
“네? 제가 뭘…….”
아르민은 에이미의 양어깨를 감싸 쥐고 힘을 불어 넣었다.
“당신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따라오세요. 시로네에게 갈 겁니다.”
레이나가 활을 정비하고 일어섰다.
“그럼 에고이스트와 싸우는 건가요?”
“아뇨. 우리도 우회할 겁니다. 아리우스처럼.”
아르민은 성공을 확신했다.
이 방법이라면 아리우스를 따라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시로네를 피해 다녀야 하는 지온 일행은 알고 있더라도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아르민은 두 여성을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에고이스트의 공포화는 멀리까지 떠났는지 근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발목까지 차오른 빗물을 가르며 도착한 곳은 대로변의 외곽이었다. 마차가 서 있고, 마부가 비를 맞으며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챙이 좁은 마술사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얼굴에만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인상을 살필 수가 없었다.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르민이 다가가자 마부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운행하지 않습니다.”
아르민은 남은 금화를 전부 꺼내 보여주었다.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소. 사정을 좀 봐주시오.”
아르민의 신뢰도를 상회하는 금액이었으니 마부도 단호하게 거절하지는 못할 터였다. 예상대로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역시나 꺼리는 투였다.
“오늘 같은 날은 운행이 어렵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요. 도대체 이런 날씨에 어디를 가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