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55
모두가 돌아온 다음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30년이라니. 저와 레오나에게는 3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사실 그 3주도 지독하게 길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버티지 않았던가. 몸의 피로도 피로였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
만약 잘못되면 리나는 돌아올 수 없다.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바싹 마르며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이었다. 리나가 곁에 없는 날이 더 많은 저도 그러할진대 라트반은 어떤 기분이겠는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계속해서 혼자 리나를 찾고 또 찾아다녔을 라트반의 심정을 레온은 짐작하기를 포기했다.
돌아온 그가 지친 얼굴로 제 손에 쥐고 있던 조개껍질을 레오나에게 돌려주었을 때, 그것에 묻어 있던 피와 깨진 흔적들이 그가 보냈을 시간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레오나와 아슬란의 옥신각신을 보고 있던 리나는 스르르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라트반이 재빨리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근처에 있던 큰 쿠션을 그녀의 뒤에 대어 주었다.
“고마워요.”
리나가 그것에 몸을 기대자 라트반은 레오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나가 피곤하니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싫다고 손을 쳐 냈을 레오나였지만 리나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순순히 라트반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그러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라트반 경, 경이 보고 왔다는 그 마수들 이야기 좀 더 해 줘.”
이곳으로 돌아온 후 라트반이 제가 겪었던 일들을 잠시 이야기했을 때 그가 겪고 본 것들이 무척이나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저번에 들으셨던 마수 이야기부터 할까요?”
“응!”
레오나가 진지하게 들을 준비를 하자 레온이 어느새 다가와 레오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아슬란도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라트반의 이야기를 들었다. 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
이건 꿈일까. 서 있는 곳은 이벨리나의 집무실이었다. 이미 대신전이 무너졌기에 이제는 세상에 없는 풍경이기도 했다.
‘나’는 몸을 돌렸다. 책상 앞에는 이벨리나가 앉아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있을 제 스무 살 생일에 관련된 서류였지만 그 외에도 많은 성녀의 의무로 지친 그녀는 별다른 감흥 없는 얼굴로 그것을 읽고는 서명한 다음, 옆에 두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벨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요.”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긴장했다. 설마 카를이 들어오는 건가?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알릭이었다. 키가 크고 말수가 적은, 이제 막 서임을 받은 젊은 신관. 그는 품 안 가득히 서류를 든 채 이벨리나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피곤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얼굴에 상쾌한 웃음이 걸렸다.
“고마워요, 알릭.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네요.”
“고생이라니요. 성녀님에 비하면 전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은 다음 집무실 안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우물거렸지만 그 누구도 먼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살짝 홍조가 도는 뺨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목이 메어 왔다. 이 이후에 일어날 일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짓밟히는지를.
그렇게 침묵이 이어져 갈 때, 먼 곳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이 보였다. 대신전 밖에 있는 마을에서는 벌써부터 곧 다가올 성녀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리와 불빛에 이벨리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알릭, 저기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요? 함께 나가서 구경할래요?”
그 말에 나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삼켰다. 이벨리나의 기억을 보고 언제나 생각했었다.
너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너는 어떻게 해야….
성녀로서의 긍지를 갖고 있었기에 마지막에는 그 긍지마저 제 손으로 죽이려고 했던 이벨리나였다. 제가 당했던 일들, 그리고 제 앞의 누군가가 당했을지도 모르는 아픔을 이다음의 누군가는 겪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그녀.
모든 것은 이벨리나가 원하는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벨리나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다시 펼쳐질 비극에 절망하려던 나는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이벨리나가 알릭에게 함께 나가는 것을 제안했던 것은, 이미 카를이 그녀를 갉아먹기 시작한 이후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그녀는 카를의 검은손이 뻗어 오기 전에 알릭을 만나 그에게 함께 밖으로 나가 보지 않겠냐고 묻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다른 사실에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건 꿈일 것이다. 이벨리나를 안타까워하던 내가 꾸는 꿈.
그렇다면…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창밖 멀리 불꽃이 터졌다. 이벨리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녀라는 이름이 짊어지는 너무 거대한 것들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두가 보러 가는 불꽃놀이 한 번을 보러 가지 못하는 삶을 살았을 정도로.
그때, 알릭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나가 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안내하겠습니다.”
“……!”
그의 대답에 이벨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제나처럼 점잖은 말로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감히 성녀님을 저런 속된 자리에 모실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줄 알았다. 감히 제가 닿을 수 없는 존재와 함께하기 버거우니 농담처럼 흘려 넘기고 돌아간다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저, 정말 같이 갈 거예요?”
그 말에 알릭은 얼굴을 붉혔다.
“…제가 자주 가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성녀님께서 보시기에는 무척이나 초라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맛은 있….”
“갈래요! 지금 갈래요! 꼭 가고 싶어요!”
이벨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까 옷을… 잠행용 옷이 어디 있더라? 그냥 나가면 분명히 카를이나 대신관이 뭐라 할 테니까 비밀 통로로… 앗! 알릭 귀 막아요! 이건 대신전의 비밀이니… 아니, 어차피 당신도 같이 가는데 비밀이라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죠? 그보다 뭐가 필요하나요? 돈? 얼마나 필요하죠?”
흥분으로 들뜬 그녀는 평소의 점잖음은 전부 집어던진 채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기대되어 어쩔 줄 모르는, 열아홉 살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서고에서 이어지는 복도를 걸었다. 두 사람 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깊이 후드를 쓴 상태였다. 한참을 걸어 가장 끝에 있는 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이 단단하게 얽혔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푸른빛의 너머로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리의 안쪽에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카를이 남겨 놓았던 낙인이 있던 자리였다.
대신전이 무너지고 그가 영원히 불 속에서 고통받아도 이 낙인은 희미해졌을 뿐,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었다. 라트반이나 레온이나 그것을 무척이나 불쾌해했고 또한 마음 아파했다. 아마도 카를이 계속해서 제 흔적을 남겨 두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옷을 올려 다리를 확인했다.
“아….”
그토록 지우려고 해도 남아 있던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나는 고개를 들어 이제 빛의 너머로 사라지는 이벨리나와 알릭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꿈꾸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성녀의 처소는 주인을 기다리다 먼지가 쌓일 것이며 드높은 대신전의 이름과 기세는 서서히 몰락해 갈 것이다.
하지만… 이벨리나는 행복할 것이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서서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멀리서 들려오던 불꽃놀이의 소리가 점차 커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트반의, 레온의, 아슬란의, 레오나의.
나는 눈물을 닦고 하늘을 보았다. 큰 불꽃이 밤하늘 위에서 아름답게 터졌다. 누군가의 끝을, 또 누군가의 시작을 축복한다는 듯이.
나는 눈을 감았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녀가 행복해지는 것만큼, 나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모두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