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One Target RAW novel - Chapter 27
준희는 허름한 건물 앞에 있는 긴 나무의자에 앉아 이제 막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버스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는 아니었지만 어떤 버스든 들어오는 소리만 나면 자연히 눈이 그리로 갔다. 이러니 당연히 책속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골이라 시외버스 터미널이라고 해봤자 허름한 단층 건물 하나에 큰 마당 같은 크기의 작은 주차장이 전부였다. 겨우 버스 대여섯대가 주차할 수 있는 크기의 작은 주차장이었다. 방금 들어온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강원도 산골로 늦은 휴가를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너무나 허름한 터미널에 놀라는 눈치였고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람들은 별로 깨끗하지 않은 낡은 화장실에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그녀가 생각해도 터미널의 화장실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시골이라 운영되는 시외버스도 드물어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터미널에서 화장실까지 꾸미고 가꿀 여력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휴가철에는 사람을 써 청소라도 깨끗이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희는 사람들을 피해 대합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창가의 의자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풍기의 윙윙 거리는 소리와 돌아가는 차편을 알아보려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지만 밖으로 다시 나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눈길을 돌리다 매표소로 향하는 어린 딸과 그 아버지로 보이는 부녀를 보았다. 행여나 사람 많은 곳에서 잃어버릴까 고사리 같은 어린 손을 꼭 잡고 매표소로 향하는 남자를 보던 준희는 자신도 모르게 허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얼마 전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던 이모의 모습이 떠올랐다.
뭔가가 아주 난처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평소의 이모 같지 않았었다. 무언가 아주 껄끄러운 말이라도 하려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이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않았다.
‘서남일 대령, 네 아버지 말이다. 제주도의 작은 어촌부대로 전출명령이 떨어졌다는구나. 해군본부에서 지방의 작은 부대로 전출명령이라니…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 보기에도 썩 좋은 일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너 퇴원하고 할머니께 전화가 왔었다는데…널 보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괜찮은지 안부전화라더라. 저도 낯짝이 있으면 널 보겠다는 소리는 못하지. 어떠니? 떠나기 전에 한번 만나볼래?’
머뭇거리며 마지막 말을 내뱉는 이모의 질문에 그녀는 살풋 웃음을 머금었다. 하기 싫은 말이지만 억지로 하는 것이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아마도 그래도 아버지니 말은 해야겠다 싶은 생각에 정말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것일 것이다.
‘이모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전에 윤원철 대령인가 하는 사람이 그러더라. 내가 서남일 대령 잘 사냐고 물었거든.’
풋.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잔뜩 비꼬며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 인간은 잘 먹고 잘 산답니까’하는 식의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그저 아버지라는 단어만으로도 설레고, 아프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슴이 아릿했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총 한발 맞고 흘린 피에 버려야 할 미련이 완전히 씻겨 내려간 것인지,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해 증오도 미련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안 볼래. 그냥 살던 대로 살지 뭐. 그 분은 그 분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살아도 잘 살았잖아. 새삼스레 서로가 만나 쌓을 정도 없고 버릴 미련도 없는데 만나서 뭐해. 그냥 이대로 살래. 그냥 이렇게 평온하게 살래.’
그녀의 덤덤한 말에 이모가 약간은 이상한 듯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의 다른 말은 없었다. 차라리 다행스럽다는 듯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있을까, 또다시 만나서 상처받을까 그런 것이 염려되었을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몰려들었던 것처럼 다시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대합실은 또다시 평온함을 되찾고 있었다. 준희는 대합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가 온다. 준희는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며칠 전 그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나오지 마.]“싫어.”
[준희야.]“몇 시 버슨지 말 안 해주면 아침부터 터미널에 나가서 기다릴 거야.”
[몇 시 버슨지 말해도 도착시간은 정확하지 않아. 그러니 그냥 집에서 기다려.]“싫어. 나갈 거야.”
[후……고집쟁이.]“몇 시 차야?”
[……아마 오후 2시쯤이면 버스를 탈 것 같다. 그럼 6시쯤이면 도착하겠지.]피. 누굴 속이려고. 오후 2시쯤에 출발하면 5시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그녀가 기다리지 않도록 일부러 늦은 시간을 말하는 그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알았어.”
2시. 난 2시부터 나가 있을 거야.
준희는 그와의 통화내용을 떠올리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을 위해 도착시간을 한 시간 늦춰서 말하고 자신은 그를 위해 몇 시간이나 앞당겨서 나왔다. 이러다 서로의 시간을 못 맞춰 엇갈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준희는 다시 대합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들어서는 버스가 한대 보였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막 4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아직 멀었다. 그가 도착하려면 1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하리라……
준희는 다시 보고 있던 책으로 눈길을 떨어뜨리려는 찰나 이상한 예감에 이제 막 주차를 시키고 앞문이 열리는 버스를 쳐다보았다. 몇 명의 낯선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준희는 책을 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명, 두명 내리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녀는 순간 책을 쥔 손에 꼭 힘을 주었다. 그였다. 짧은 머리칼과 얼룩덜룩한 전투복을 입은 채 커다란 군용배낭을 메고 내리는 남자는……강욱이었다.
그녀는 뿌연 창밖으로 보이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또다시 차오르는 눈물이 그렇지 않아도 닦은지 오래돼 뿌옇게 흐린 창밖의 그를 더욱 흐려보이게 하고 있었다.
강욱이 몇 걸음 걸어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일찍 나왔을까 한번 둘러보는 것이리라. 그러다 문득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준희도 그를 따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이제 곧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준희는 다시 눈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가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5년만에 다시 보는 고향의 하늘을 그가 어떤 심정으로 느끼는지 그녀는 알 것 같았다.
그가 태어난 곳이 어디든, 그녀가 태어난 곳이 어디든 그들에게 고향은 여기 이곳 강원도의 작은 시골 마을 한 곳 뿐이었다. 많은 시간을 돌아, 힘들고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해 줄 곳도 이곳뿐일 것이다.
준희는 들고 있던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합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늦은 오후라 그런지 한낮의 열기는 훨씬 가시고 조금은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합실로 다가오는 그가 보였다. 준희는 걸음을 멈춘 채 그가 자신을 발견하기를 기다렸다.
몇 걸음 옮기던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춘 것은 그녀가 걸음을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겨우 한 달하고도 보름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지난 5년도 견뎠는데 그깟 한 달하고 보름이 무에 대수라고……그런데도, 그런데도 그를 오랜 시간동안 보지 못한 듯 그렇게 그리웠다. 보고 있어도 그가 그리웠다. 단 몇 발자국만 옮기면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는데도 그래도 그가 그리웠다. 눈물이 날만큼 그리웠다.
글썽이는 눈물 사이로 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그녀의 볼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흐느끼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그가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기며 소리 내어 눈물을 흘렸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자꾸만 흐르는 눈물에 그녀는 그의 옷깃을 움켜쥐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고향 하늘 아래서 그를 만나 그런 것일까……? 이제는 미움도 원망도 없이 순수한 사랑으로 그를 대할 수 있어 그런 것일까…? 지금 이곳에서 그를 만난 것은 스리랑카의 낯선 하늘 아래서 만났던 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야 그녀가 그리워하던 최강욱을 보는 듯 했다. 이제야…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야 그녀가 사랑하던 강욱을 다시 만난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그들을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여긴 별로 변한 것이 없구나.”
준희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어깨에는 커다란 군용배낭을 멘 채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단 한시도 놓지 않는 그가 보였다. 그가 말한 마을버스 정류소는 5년 전이나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자신들의 어린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기에 딱 한 번 페인트칠을 다시 한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시골이라 뭐 변할 게 있어야지.”
“훗. 변하지 않아서 좋은 것이 또 있군.”
그의 말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있지. 우리 고향마을이 그렇고 우리 사랑이 그래.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우리 사랑이 그래.
“우리 걸어갈까?”
그녀의 말에 강욱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집까지?”
“아니. 가다가 버스 오면 타지 뭐.”
그가 웃음 짓는다.
“괜찮겠어?”
“응. 다 나았는데 뭐. 곧 군으로 복귀도 할 텐데 너무 운동 부족이야.”
“훗. 그래. 그럼 힘들면 말 해.”
준희는 그의 말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왜? 업어주려고?”
강욱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래.”
둘은 손을 마주 잡은 채 초저녁 시골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산들산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길가로 늘어선 이름 모를 풀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말없이 길을 걷던 그들의 뒤로 멀리서 마을버스가 툴툴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포장된 도로를 울퉁불퉁거리며 달려오는 버스의 움직임이 그들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준희는 달려오는 버스를 밉다는 듯 흘겨보았다. 조금 더 걷고 싶은데……아니, 조금 더 걷다보면 강욱이 힘드냐고 물을 테고 그러면 자신은 조금 힘들다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강욱이 자신을 업어줄 테고……준희는 강욱의 등에 업히고 싶었다.
드디어 얄미운 버스가 그들의 옆에 멈춰 섰다. 버스의 앞문이 열리고 운전사 아저씨가 그들을 쳐다보았다. 버스에 탄 몇몇 승객들과 함께.
“안 탈거요?”
준희는 강욱을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눈빛이 오고가고 강욱이 고개를 돌려 운전사 아저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다음 버스 타겠습니다.”
“40분 후에나 올 텐데?”
“네.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리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버스가 먼지를 날리며 멀어졌다.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던 준희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다 버스 안 오는 거 아냐?”
“그럼 집까지 걸어가야지.”
“좋아. 까짓 집까지 걸어가는 것쯤이야. 대한민국 해군 특수대원들이 이까짓 거 못 걷겠어? 행군 축에도 못 끼는 걸.”
그녀의 자신만만한 말에 강욱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의 손을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또 한참을 말없이 걷다 얼마 후 준희는 강욱을 흘깃 거리며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힘드냐고 안 물어?”
그녀의 말에 강욱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왜? 힘들어?”
준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강욱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고 슬쩍 미소를 띠우더니 그녀의 앞에 등을 대고 앉았다.
“업혀.”
“그럼 배낭은 내가 들게”
그의 배낭을 뺏어 든 준희는 냉큼 그의 등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움직이는 그의 걸음에 흔들거리며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할아버지 만났어?”
“할아버지? 아. 네 할아버지. 응. 병원에 오셨었어.”
“그래?”
“아직 못 만났지?”
“아니.”
“봤어? 언제?”
“오늘 공항에 나오셨어.”
“그래?”
그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준희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재밌는 분이셨다. 자신에게 한없이 고마워하시며 이모 앞에서는 눈물까지 글썽이던 모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부상을 당했다는 이유로 여병순 중장을 몰아치시는 모습에서 보통 분은 아니다 생각했었다. 어찌나 엄한 모습을 보이시는지 그분 앞에서 쩔쩔 매는 여병순 중장이 가여울 정도였다.
“좋으신 분인 것 같아.”
“그래.”
그리고 또 둘은 말이 없었다. 만나면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그와 함께 있으니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서로가 상대를 느끼는 그 느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다.
“욱아.”
“음?”
“강욱아.”
“……?”
“최강욱.”
“……그래.”
“……사랑해.”
준희는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며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업고 있던 그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신을 마주보며 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허공에서 만난 두 사람의 눈길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서로를 가슴 깊이 인식시키고 있었다.
인적 없는 시골 들판 한 가운데에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뒤로 서서히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강욱은 준희의 얼굴을 부여잡고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닿기 직전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한다. 서준희. 영원히.”
그리고 강욱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박선생. 덕구 밥 줬냐?”
“지금 줘요. 어머니.”
이모부에게 묻는 사돈할머니의 질문에 이모가 대답을 하며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준희는 마루위에 앉아 고개만 쭉 내밀고 이미 날이 저문 어두운 마당 구석진 곳에 있는 개 덕구를 쳐다보았다. 이 집에 변화된 새로운 한 가지였다. 아니 새로운 식구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덕구가 두 할머니와 이모, 이모부까지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분명했다. 심지어 집으로 돌아온 지 3일밖에 안 된 강욱마저 덕구에게 정을 담뿍 주고 있었다. 덕구에게 괜스레 심술을 부리는 사람은 준희 그녀밖에 없었다.
이유 없이 미웠다. 본래 강아지를 좋아하는데 왜 유독 덕구만 미운지 알 수 없었다.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데 덩치는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홍도만큼 컸다. 홍도는 준희가 사는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개였다. 홍도는 주인인 김씨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노래에서 따온 이름 홍도를 개에게 붙인 이름이라 했다. 홍도는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 마을에서는 꽤 유명한 개였다. 하지만 주인을 잘 따르고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항상 점잖은 개라 마을사람들도 모두 홍도를 좋아했다.
준희도 홍도가 좋았다. 개가 그리 많지 않은 마을이라 그런 점도 있었지만 준희는 홍도의 그 깨끗하고 맑은 눈이 좋았다. 가만 보면 덕구도 꽤 홍도를 닮아있었다. 하긴 이모 말로는 덕구의 생김으로 볼 때 홍도의 새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마을 아주머니들은 홍도가 새끼를 낳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말도 했다. 수놈인 홍도가 배불러 낳은 것이 아니니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이모는 확신하는 것 같았다. 덩치도 그렇고 생김도 그렇고 거기다 하는 짓이 점잖은 것이 딱 홍도의 새끼라는 것이다.
준희는 다시 한 번 덕구를 유심히 보았다. 어찌 보면 이모의 말이 맞는 듯싶었다. 생김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는 짓이 딱 홍도였다. 긴 속눈썹에 쌓인 새까만 눈동자와 진중한 걸음걸이, 여느 집 개처럼 무턱대고 짖지도 않았고 준희네 가족을 제 주인으로 알고 따르는 것을 보면 분명 홍도와 무관하지 않게 보였다. 어린 것이 기특하기는 했다. 하지만 준희는 그럼에도 은근히 덕구가 미웠다. 항상 준희가 집에 오면 할머니들이나 이모와 이모부에게 자신이 제일 우선이었는데 이번에 집으로 왔을 때는 그녀보다 덕구가 더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강욱, 그조차 아침에 일어나면 덕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고 틈만 나면 덕구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등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을만큼 덕구가 강욱에게 사랑받고 있음이 확연했다.
“제가 주겠습니다. 선생님.”
저 봐. 저 봐. 준희는 그가 자신의 방에서 나오며 이모의 손에 들린 개밥그릇을 넘겨받자 그런 강욱을 노려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 3일짼데 단둘이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강욱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덕구에게만 관심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준희는 ‘풋’하고 웃음이 났다. 그리고 한번 터진 웃음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조금씩 새어나오더니 급기야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푸, 푸하하하 깔깔깔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움켜잡는 그녀를 보고 마루에 앉아 TV를 보시던 두 할머니와 마당 수돗가에서 물을 받고 있던 이모, 막 대문을 들어서던 이모부, 게다가 덕구에게 개밥그릇을 내밀던 강욱까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쟤가 뭘 잘 못 먹었나? 야. 서준희. 너 왜 그래? 야. 너 허파가 잘 못 된 거 아냐? 병원에서는 다른 장기들 모두 괜찮다고 했는데…”
준희는 이모의 말에 더 큰 웃음을 터트리며 급기야 눈가에 맺힌 물기까지 닦아내고 있었다.
“아가. 괜찮냐?”
준희는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말에 그제서야 웃음을 서서히 멈추었다.
“네. 네. 할머니. 괜찮아. 큭큭큭. 좀 웃긴 일이 생각나서.”
“뭔데? 우리도 좀 알자.”
준희는 마당에 서 있는 이모를 돌아보았다.
“이모는 몰라도 돼. 나만 아는 얘기야.”
“기집애. 싱겁기는.”
준희는 아직도 입에 걸려있는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우스웠다. 그녀는 덕구를 향해 샘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옛날 처음 강욱이 준희의 집으로 왔을 때 어린 그녀의 관심을 강욱에게 뺏기고 그 화풀이를 강욱에게 하며 못되게 굴었던 짓을 지금 강욱의 관심을 받는 덕구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어이없게도 그녀는 덕구에게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유 없이 미웠나보다. 하지만 미우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 이상하다 했었다. 그녀도 덕구가 좋았지만 덕구가 모든 사람들, 특히 강욱의 관심을 받으니 그것이 싫어 덕구를 미워했었나 보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곳에서는 영원히 어린 준희로 남으려나 보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관심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니.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사랑받고 싶은 대상이 할머니와 이모에서 이제는 강욱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랑을 줄 수 있는 강욱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준희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TV화면에 눈을 고정시키고 가끔 TV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는 할머니와 사돈 할머니, 마당 수돗가에 앉아 한 사람은 물을 퍼주고, 또 한 사람은 그 물로 세수를 하는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덕구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앉아있는 강욱까지.
행복했다. 이런 것이 행복이었다. 평범한……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며 그저 그런 일상을 사는 그런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희는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일을 겪든, 무슨 일이 있었던,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든 그녀에게는 그녀를 기다려주는 가족이 있었고 그녀를 품어줄 집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한없이 소중히 여기는 강욱이 있었다.
나만큼 행복한 여자가 있을까? 나보다 행복한 여자가 있을까? 준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을 하는 이 세상 모든 여자들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지금이 행복했다.
준희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섰다. 할머니가 일어서는 그녀를 보며 한 마디 하신다.
“왜? 벌써 자려고?”
“아뇨.”
준희는 여전히 자신들이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음……강가에나 가려고요. 더워서 강가에 가서 텐트치고 자고 올래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시고 마당에 있던 이모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강욱은……강욱은 자신의 귀를 의심이라도 하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야. 서준희. 그 대사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역시 이모였다. 준희는 이모를 쳐다보았다. 이모는 모두 기억한다는 듯, 언젠가 준희가 강욱과 단 둘이 있기 위해 강으로 가려다 실패했던 그 일을 기억한다는 듯, 입가에 즐거운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라. 모기 많으니까 모기향 꼭 피우고 자거라.”
말씀하시고 다시 TV로 고개를 돌리시는 할머니의 입가에도 잔잔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야. 말만한 기집애가 무슨 강가냐? 강가가!”
내 저럴 줄 알았지. 이 시점에서 이모의 저 대사가 나와야지. 그래야 우리 이모지. 준희는 웃으며 이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분명 ‘그럼 나도 같이 가자.’라는 대사가 나올 차례였다. 자. 그럼 어쩐다? 뭐라고 해서 이모를 한방에 보내버리지? 준희는 즐거운 마음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 시점에서는 나올 것이라는 예상조차 못했던 뜻밖의 대사가 나온 것은.
“내가 텐트 가지고 나올 테니 넌 긴팔 옷 챙겨서 나와.”
모두의 눈이 강욱을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가 자신의 방으로 가더니 텐트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생님.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자고 오겠습니다.”
오……최강욱! 제대로 하고 있었다. 예전엔 그렇게 하라고 눈치를 줘도 안하던 대사를 완벽히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이모는 그런 강욱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반대 한마디 못하고 자신의 대사도 잊어버린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준희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위에 걸칠 가디건과 긴 바지를 하나 챙겨들고 나왔다. 그리고 신을 신고 강욱의 옆으로 가 섰다.
“다녀오겠습니다.”
강욱의 인사에 준희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덩달아 인사를 하고 강욱이 나간 대문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던 선영은 그들이 대문 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한참을 웃던 선영은 옆에서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을 보고 한번 웃어주고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쟤들 짝 지워줍시다.”
선영의 황당한 말에 그 뜻을 알아챈 준희 할머니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여기 누구 반대하는 사람 있니? 그러자구나.”
그리고 선영과 준희 할머니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 둘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박선생과 그 어머니는 그들의 웃음에 이유는 모르지만 그 기분 좋은 웃음에 자신들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준희는 강욱이 피운 모닥불 앞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팔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세찬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별 좀 봐. 정말 많다. 쏟아져 내릴 것 같아.”
강욱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준희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했다. 강욱은 자신의 상의 주머니 안에 든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여전히 밤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들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결혼하자.”
!
준희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앞뒤로 건들거리던 움직임도 멈추고 흥얼거리던 콧소리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 위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
“열어봐.”
준희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이미 짐작했다. 누가 보기에도 그 작은 상자는 반지가 든 상자였다. 그와 결혼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그것이 문제였지 둘이 결혼하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기정사실이었다. 그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할 줄은……
그녀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행복감으로 떨리는 손을 내밀어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와 천천히 상자를 열어보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그에게 대답도 하지 않았고, 반지를 손가락에 껴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눈물을 흘리며 상황을 흐리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아무 장식도 없는 그저 단순한 황금빛 링이었다. 하지만 준희에게는 그보다 더한 보석은 없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의 사랑이 담긴, 그의 약속이 새겨진 반지였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긴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긴장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그를 놀려주고 싶어졌다.
“흠. 너무 인색한 것 아니야?”
“뭐?”
강욱의 갑자기 황당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준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 할아버지가 그렇게 부잔데 겨우 이거야?”
강욱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강욱을 보는 준희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했다.
“……그럼?”
“흠……글쎄. 커다란 다이아몬드 하나는 박혀있어야 하지 않나?”
“……”
준희는 슬쩍 강욱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미소를 짓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있다는 듯……그러다 문득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자가 준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웃어?”
“훗. 아니.”
“왜 웃어? 왜? 빨리 말해.”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가 미소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잡고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그의 혀의 감촉에 준희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입술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로 휘감아오는 그의 팔을 느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더욱 깊어지는 키스에 그녀는 다른 생각들은 모두 날려버리고 그의 키스에만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이 앉아있던 바위위로 몸을 눕힌 그녀의 위로 강욱의 묵직한 몸이 느껴졌다. 그들이 친 텐트 주변으로 나뭇가지가 우거져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준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을 쳐다보았다.
“내가 너 놀리는 거 안거야?”
그녀의 질문에 그가 다시 깊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음.”
“피이. 좀 속아주면 안 돼?”
그가 다시 그녀의 귓불을 살며시 머금었다.
“음.”
“아…내가……무슨 대답을 할지도 알아?”
이번엔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호흡이 헝클어지고 있었다.
“음.”
“하아……”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선을 훑고 있었다. 다시 그녀의 입술로 돌아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았다.
“결혼하자.”
그의 손이 그녀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밀어올리고 곧장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가슴의 돌기를 살짝 비틀며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으음…”
준희는 몸을 비틀었다. 전신으로 퍼져가는 짜릿한 전율로 그녀의 몸이 저도 모르게 비틀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그의 손길에 부풀어 올랐고 그녀의 저 깊은 곳에서는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순간 몸을 일으킨 강욱이 그녀를 이끌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에 두 겹으로 펼쳐둔 모포 위로 그녀를 눕히고 곧장 그의 몸이 겹쳐왔다. 그리고 그의 눈이 그녀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결혼하자.”
그녀는 그의 눈에 깃든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녀에 대한 욕망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도.
“그래.”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욱의 입술이 곧장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의 성급한 손길이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도 모두 벗어버렸다. 다시 겹쳐진 그들의 몸은 서로를 갈구하며 정열적으로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준희는 그의 입술에 자신을 내어주고 그의 손길에 반응하며 문득 신혼여행은 프랑스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여동생 서희수, 아직은 낯설지만 서희준, 그 또한 궁금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작별 인사도 미처 나누지 못했던 임성환을 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준희는 그를 자신의 몸속 깊이 받아들이며 고개를 힘껏 뒤로 젖혔다. 열린 텐트 문 사이로 밤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빛이 그들의 사랑을 비춰주었고, 흐르는 강물소리가 그들의 환희에 찬 신음소리를 삼켜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