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81
임무를 위해서라면 어떤 위증도 하는 여자가 로즈니까.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결국 케이지 B팀도 여전히 성공을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자신의 전투를 하면 되는 것이다.
“또 뭐가 남았지? 아까 파이널 플랜 어쩌구 하지 않았나?”
로즈도 난감했다.
여전히 유틸과 증폭, 저주와 방어 계열의 마법사는 보유하고 있으나 딜러의 손실이 상당하다.
‘이제부터 딜러 1명만 죽어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통솔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죽어야겠군.’
따라서 또 다른 전술적 시도를 할 기회는 아마도 한 번.
로즈는 확실한 플랜을 짜기 위해 시간을 벌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여, 무언가에 심취했을 때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하지요.”
시간이 필요한 건 가올드도 마찬가지였기에 로즈의 대화에 침묵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되돌려지는 것도 순식간. 이제 그만 놓아주는 게 어떤가요? 당신의 감정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어린아이의 유치한 짝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나아가야지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가올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왜 털어 버려야 하지?”
“그것은…….”
“로즈.”
가올드가 말을 끊었다.
“너도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했던 적이 있겠지.”
로즈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말해 봐라.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유치하지 않은 네가 말이야. 평생을 털어서, 그 감정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더냐?”
로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진심을 다하는 일에 유치한 것은 없다. 고통을 감당하는 자와,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친 자만 있을 뿐이지. 그리고 나는…….”
쿠쿠쿠쿠쿠쿵!
대기가 진동하면서 숲이 울리고 공기가 철근처럼 무거워졌다.
악귀의 얼굴로 변한 가올드가 세상을 노려보았다.
“내 고통에서 절대로 도망치지 않아.”
변화의 시작 (8)
미로에게 고백하고 차인 이후, 가올드는 학생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딱히 우스운 사람도 아니건만 학생들은 가올드를 볼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고 장난삼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가올드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요르 신을 받아들일 때 온전히 그것을 품었듯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왜곡하거나 합리화시키려 들지 않았다.
다만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토록 마음에 품은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과 친하게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어라? 쟤들 오늘도 붙어 다니네?”
“그러게. 졸업반 초기에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진짜 소문대로 사귀는 거 아냐?”
“그럼 가올드는? 진짜 불쌍하다.”
학생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올드는 공원을 나란히 거니는 미로와 세인을 바라보았다.
졸업반에서는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째서 세인과 어울리는 것인지.
‘아니, 어차피 다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겠지.’
가올드는 우울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쳇.”
세인과 미로, 누구하고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던 어느 날, 미로와 세인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가올드는 바쁜 졸업반 일정 속에서 연구회를 개설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라니?
신앙의 힘으로 사는 가올드라면 모를까 세인하고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연구회였다.
‘흥, 줏대도 없나? 여자 때문에 신념을 포기해?’
가올드는 모든 게 귀찮았다.
“난 안 들어가. 다른 사람 찾아봐.”
미로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좋아할 줄 알았는데? 네가 마법학교에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잖아.”
“몰라. 너하고는 말도 하기 싫어.”
가올드가 시선을 외면하며 돌아서려는 그때 미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설마 너,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남았니?”
가올드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못 하고 그저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러자 가올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안 그럴 것 같다가도, 막상 그녀가 결심을 철회하자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들어갈게, 연구회.”
가올드에게는 큰 용기였으나 미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자, 이제 드디어 회비를 받을 수 있게 됐네!”
“너, 설마 그것 때문에 나한테 들어오라고 한 거야?”
“응? 아니야. 사실 겸사겸사. 헤헤.”
미로는 혀를 내밀고는 신청서를 작성하러 발길을 돌렸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한다고 할걸.’
괜한 후회가 밀려드는 가올드였다.
연구회의 일원으로 가올드가 하는 일은 단순하고도 무식한 노동이었다.
‘젠장, 왜 내가…….’
마법 창고 이스타스의 모든 창고를 돌아다니며 좌표를 기록해 오는 것이었다.
그 좌표를 토대로 세인은 무언가를 계산했고 미로와 상의했다.
연구회에 모여 있어도 소외감은 언제나 가올드의 몫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학교에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
미로가 졸업반 수칙을 무시하고 밤마다 학교를 벗어나 어딘가로 간다는 것이었다.
어떤 학생은 제1급 귀족들도 구입하기 어려운 보석으로 치장한 마차를 타고 떠나는 걸 봤다고도 했다.
학생들이 내린 결론은 미로에게 조력자가 생겼다는 것.
그 대가로 미로가 주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가올드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미로는 천재다. 그리고 자유분방하다.
돈 많은 노인네와 재미로 어울렸으면 어울렸지 조력 따위를 바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문은 눈덩이처럼 커져 급기야 미로가 몸을 파는 여자로까지 전락하자 가올드는 참지 못하고 세인을 찾아갔다.
“야, 이 자식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연구회의 칠판에 빼곡하게 수식을 기록하고 있던 세인은 가올드의 흥분한 모습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뭐가?”
“미로 말이야!”
가올드가 소리쳤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소문을 진화해야 되는 거 아냐? 들어보면 완전 창녀나 다름없잖아!”
“그게 어때서?”
“뭐, 뭐야?”
가올드는 황당한 듯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도 가올드는 미로가 얼마나 큰 심적 갈등 속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너 인마! 지금 그게 할 소리야? 그러고도 네가 미로를 아낀다고 할 수 있어?”
세인은 그제야 분필을 내려놓았다.
“너야말로 미로를 믿지 못하고 있는 거 아냐? 아니, 마음속에서는 차라리 미로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면 너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올드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너, 정말로 미로랑 사귀는 거 맞아?”
“……내가 왜 너에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지?”
“이 자식이!”
가올드는 세인의 멱살을 붙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세인이 칠 테면 쳐 보라는 듯 한쪽 턱을 내밀며 말했다.
“저급하기 짝이 없군. 질투에 눈이 멀어 신념마저 저버리는 거냐?”
폭력을 반대하고 사랑을 추종하는 요르 교. 평생 요르 신을 믿었던 가올드로서는 차마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다.
“됐어. 너 같은 인간하고는 상종도 하지 않겠어.”
가올드는 매몰차게 멱살을 풀고 연구회를 나섰다.
그로부터 며칠 후, 가올드는 큰 결심을 했다.
자정이 넘은 무렵 학교 교문을 나서는 미로의 뒤를 따라가기로 한 것이었다.
“젠장. 역시 진짜였잖아? 뭐? 질투가 어째? 냉혈한 같은 자식.”
미로가 향하는 곳에 거대한 집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왕래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겠지만 그럼에도 당당한 자태였다.
“흥, 세상 두려울 거 없는 분이시라 이거지?”
그렇게 비꼬며 가올드는 마차의 뒤를 추적했다.
학교 밖에서 마법 시전은 금지지만 조만간 밝혀질 미로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다만 마음은 좋지 않았다.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아니라면, 자신은 남의 여자 친구 뒤나 캐고 다니는 치졸한 남자가 될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가올드는 마차를 추적했다.
마차가 멈춘 곳은 학교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평야 지대였다.
달이 밝은 덕분에 사위를 훤히 볼 수 있었다.
미로가 타고 온 것보다 더 고급스러운 마차가 서 있고, 그곳에서 100세가 가까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내렸다.
‘젠장! 완전 꼬부랑 할아버지잖아?’
미로에 대한 실망감이 배가되었으나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오늘이 약속했던 마지막 날이군. 그래, 결정을 내린 게냐?”
노인의 이름은 구스타프 하비츠 16세.
성전의 삼황계 중의 한 사람인, 구스타프 제국의 황제였다.
“…….”
미로는 대답이 없었다.
조만간 20인의 심판을 위한 위원회가 소집된다. 하비츠가 20인의 1명이 되리라는 것은 지당한 사실.
또한 삼황계의 권력은 위원회 안에서도 강력한 입김으로 작용할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아이여…….”
인류의 목숨을 어깨에 지고 영원한 외로움 속으로 갇혀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
단, 구스타프 하비츠의 사랑스러운 인형이 되어 준다는 전제 조건하에.
그럼에도 미로에게는 생각할 만한 문제였다.
전 인류의 목숨을 짊어지는 부담보다는 누군가의 인형이 낫지 않을까?
“오늘부터 너는 나만의 것이다. 미로…….”
하비츠는 독사처럼 긴 혀를 내밀고 미로의 목덜미 쪽으로 다가갔다.
평생 제국의 황제로 살면서 남은 욕망은 더 이상 없지만 미로는 다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 그리고 인류의 모든 것을 넘어선 유일한 희망.
그녀를 갖는 것이야말로 평생 세상을 지배했던 자의 마지막 유희로서 최적일 것이다.
“너는 살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수 있어. 너에게 모든 걸 다 줄 터이니…….”
독사의 숨결처럼 탁한 숨소리가 다가오는 와중에도 미로는 그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이!”
하비츠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그녀의 귓불을 깨물려는 그때,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얼굴이 돌아갔다.
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 하비츠는 황당한 듯 위를 올려다보았다.
순진한 인상의 청년이 씩씩대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삼황계의 1명인 자신의 얼굴을 치다니.
아니, 그보다도 호위 부대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다는 말인가?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딴 짓을 저지르느냐!”
“누구긴 누구야? 변태 영감이지! 그리고 미로, 정말 실망했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좋아도 어떻게 이런 놈과…….”
미로는 가올드를 돌아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네가 여기에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라니! 당연히 너를……!”
가올드는 차마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상한 소문이 퍼지니까 신경 쓰이잖아!”
하비츠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이런 하찮은 인간이!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이놈의 목을 베라! 아니, 산 채로 잡아라! 3년 동안 고문하다가 죽여 주마!”
하비츠의 목소리는 정적을 울리다가 스며들 뿐이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황제는 잔뜩 겁을 먹었다.
어느새 미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확실히 말씀드리죠.”
“으으으으…….”
갑자기 거대해 보이는 미로의 모습에 하비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평생을 살면서 이토록 두려운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저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가올드가 물었다.
“인류의 미래? 무슨 미래?”
미로는 가올드를 무시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오늘 일은 함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국의 황제라도 감당할 수 없는 건 있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