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15
참회의 기도를 올린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를 데려다줘.”
“응?”
“마스터 카드 말이야. 여기에 없어. 파기시켜야 하잖아?”
“아, 맞다. 어디에 있어?”
“너 혼자서는 못 가. 내가 위치를 알려 줄게.”
“그건 좀…….”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졌다.
“일단 옷부터 입고 출발하면 안 될까?”
“지금 나 놀리니? 옷이 거기에 있는데 어떻게 입어? 손가락도 못 움직이겠단 말이야.”
“그럼 차라리 내 옷을…….”
시로네가 상의를 벗으려 하자 에덴이 말렸다.
“그냥 가자. 그게 더 이상하니까.”
행동에 옮기고 나서야 깨달은 시로네는 황급히 상의를 내리고 에덴을 들었다.
“어디야?”
시로네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묻자 그녀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서쪽. 19훈련장 근처.”
***
“후우! 후우!”
에이미는 지친 걸음을 옮겼다.
갈빗대가 부러진 케이든이 그녀에게 뒷고대를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산이 불타서, 내버려 두면 질식해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화재 장소를 벗어난 에이미가 짜증스럽게 케이든을 바닥에 던졌다.
“아우!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너 진짜 재수 없는 인간이야.”
솔직한 심정이지만 적에게 보내는 찬사이기도 했다.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지. 하지만 카르미스에게 듣는 것은 사양이야.”
씩씩대던 에이미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말해 뭐하겠어? 너나 나나 남 부러워할 처지는 아니지.”
“왜 죽이지 않았지?”
“뭐?”
“어째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죽이고 싶지 않아? 나를 싫어하잖아?”
에이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글쎄, 왜 살렸을까?”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나일 수도 있으니까.”
케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마법학교에 들어와서 치열하게 싸웠어. 수많은 경쟁자들을 쓰러뜨리며 여기까지 왔지. 아마 너도 그랬을 거야.”
“…….”
“죽도록 밉다가도, 막상 이기면 승리의 기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전부지.”
에이미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두려운 거야. 오늘은 내가 너를 밟고 올라갔지만,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쓰러진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어.”
슬픈 표정을 감춘 에이미가 씩 웃었다.
“아마도 그런 이유일 거야.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은, 아무리 미워도 증오할 수는 없더라고.”
케이든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가 없군.”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마법학교에는 왜 들어온 거야?”
“별로. 처음에는 그냥 왔어. 걱정은 없었지. 여기서도 어차피 잘할 테니까.”
“한 대 더 맞을래?”
“마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잠시 머물다 떠날 생각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좀 달라. 편하다고 해야 할까?”
케이든은 에이미를 돌아보았다.
“마법사들은 동정하지 않으니까. 너처럼.”
에이미가 침묵하자 그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향했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희생의 적십자든 뭐든, 재수 없는 것을 재수 없다고 하는 것이 검술 학교하고는 달랐어.”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운명을 거부할 생각은 없는 거야?”
“정말로 주제넘군.”
“알아! 그냥 묻는 거야! 패배자 주제에 입만 살아서!”
케이든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적십자성의 운명을 거부할 방법은 없어. 하지만 외면하며 살 수는 있겠지. 검술을 다시 배워 볼까 싶기도 해.”
“아하, 나한테 박살이 나서?”
“그런 것도 있고.”
케이든이 검술을 다시 시작한다면 빠른 시간 내에 그는 최고가 될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검술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야도 잊어야겠지.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그게 내 삶이야.”
“외면할 수 있겠어?”
“무엇이든 최고가 된다면 나쁜 삶은 아닐지도 모르지.”
재밌는 생각을 떠올린 케이든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너에게 기사 서약을 하면 완벽하겠군.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지키며 좋아하지 않는 검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으니까.”
“하하! 야, 상상만 해도 진짜 끔찍하다!”
케이든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아픈 와중에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기사 서약이라.’
에이미의 머릿속에 리안이 떠올랐다.
케이든과 비교하면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검사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보여 주었던 의기를 떠올리면 한편으로는 시로네가 부럽기도 했다.
“화가가 꿈인 것을 알지만 나는 네가 검사가 됐으면 좋겠어.”
“이렇게 경쟁자 하나 보내는군.”
“웃기고 있네! 너는 내 상대가 안 되거든!”
버럭 소리를 지른 에이미의 얼굴이 다시 차분해졌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앞으로 큰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대.”
시로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랬다.
“전쟁은 늘 있는 일이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운명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네가 적십자성에 태어난 이유 또한 있을 것이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대가로 얻는 것은 최고의 재능.
“희생이라는 거군.”
문득 마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쟁이 일어나고 내가 도움이 된다면, 결국 그녀도 지켜 내는 것이겠지.”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사 서약은 안 할 거야.”
“호호! 누가 받아 주기나 한대? 내 앞에 칼만 꽂아 봐. 사람들 보는 앞에서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니까!”
“얼마든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호언장담하는 두 사람이었다.
흑막 (3)
***
스크럼블 로열 참가자들에게 에덴의 리타이어 소식이 전해졌다.
퀘이사가 폭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리타이어?”
헤르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방어막을 파괴했다고?’
금화륜 자체 시뮬레이션에서 에덴의 방어 능력은 졸업반 중에서 비교할 사람이 없는 단독 1위였다.
“이제 무한(○○○○○○)은 없어.”
이루키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은 건 에이미와 케이든뿐이지.”
정신을 차린 헤르시는 빠르게 패를 계산했다.
시로네 팀의 최강 패는 사비나의 ●●●●(마인).
‘케이든의 패는…….’
○●○●(민주주의)였다.
‘됐다!’
헤르시는 전율했다.
복잡한 패의 조합 싸움에서 시로네 팀의 최강 패가 무엇인지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이루키뿐일 테지만, 그에게는 최악의 최악을 대비한 또 하나의 전략이 남아 있었다.
“푸하하하!”
헤르시가 폭소를 터뜨리자 도로시가 눈썹을 들었다.
“왜 저래? 실성했나?”
“잘 싸웠다.“
웃음을 그친 헤르시가 말했다.
“정말로 대단했어. 솔직히 쉽게 이길 줄 알았거든. 여기까지 물고 늘어진 것에 칭찬을 해 주지.”
“케이든이 에이미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헤르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덴의 경우와는 달라서, 금화륜 자체 시뮬레이션에서도 두 사람의 전투력은 호각이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어.”
헤르시는 스크럼블 로열이 끝났음을 확신했다.
“다시 말하지만, 승자는 케이든이다.”
***
“마스터 카드 내놔.”
에이미는 케이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스터 카드? 아.”
케이든이 깨달은 듯 눈을 깜박였다.
“빨리. 설마 여기까지 와서도 고집을 부릴 생각은 아니지? 그럴 성격도 아니잖아?”
“그게…… 나한테 없어.”
“뭐?”
에이미가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구겼다.
“아침에 헤르시가 팀원들 모르게 내 마스터 카드를 가져갔어. 캉을 걸 수 없지만, 어차피 너도 나보다 패가 낮았으니까. 그게 너를 추격하는 대가로 헤르시가 제안한 조건이야.”
“잠깐만. 마스터 카드를 가져갔다고? 마스터 카드를?”
갑자기 머릿속에 혼선이 생긴 에이미가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참가자들의 카드 현황을 살폈다.
케이든의 민주주의가 최강이었다.
‘이대로 스크럼블 로열이 끝나면 연합 팀의 승리.’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에이미가 케이든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 멍청아!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우리가 지게 생겼잖아!”
황당한 건 케이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걸 왜 말해? 우리 서로 다른 편이잖아?”
“닥쳐! 얼빠진 자식!”
에이미가 케이든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자 부러진 갈빗대에 충격이 전해졌다.
“크윽! 뭐 하는 거야?”
“어휴! 내가 진짜 못 살아!”
에이미가 몸을 돌려 달려가자 케이든이 손을 내밀었다.
“자, 잠깐……!”
“시끄러! 너 경기 끝나면 보자!”
부들거리는 손이 부러진 갈빗대로 향하고, 이빨 사이로 침이 새어 나왔다.
“크으으!”
역시나 마법사에게 동정은 없었다.
***
“케이든에게는 마스터 카드가 없어.”
헤르시가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아침에 내가 받았거든. 결국 에이미가 케이든을 이긴다고 해도 카드는 개패시키지 못하지. 케이든이 이긴다면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잠시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이제 알았어? 스크럼블 로열은 연합 팀의 승리다.”
“이루키.”
도로시가 돌아보자 이루키가 말했다.
“마스터 카드는 어디 있지?”
“글쎄, 어디 있을까?”
헤르시의 몸이 섬광으로 빛났다.
소나는 이미 분석당해 사용할 수 없지만 공간 이동이라면 캔슬레이션을 걸 수 없을 터였다.
“그럼 경기 끝나고 보자.”
동시에 사비나가 등 뒤에서 다가가 그의 목을 조였다.
“움직이지 마.”
그녀의 손끝에서 날카로운 에어 커트의 기운이 맴돌았다.
“흥, 마지막 발악인가? 추하군.”
도로시가 히커리를 대동하고 다가왔다.
“마스터 카드 내놔. 안 그러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어.”
그때 사비나의 발밑에 있는 땅이 꾸물대더니 뱀처럼 긴 지네가 튀어 올라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이런!”
10미터 떨어진 곳의 나무에서 피쇼가 거미를 타고 거꾸로 내려왔다.
“헤르시를 풀어 줘. 맹독 지네다.”
“헛소리하지 마. 혼자 죽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