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2
숙소로 돌아온 시로네는 침대에 쓰러졌고, 1초도 지나지 않아 잠에 빠졌다.
어차피 일주일 정학이라 내일부터 수업에 나갈 필요는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마음을 갖기에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너무 심했다.
하루가 그대로 넘어갔다.
아침을 깨우는 피아노 소리도, 중천에 떠 있는 태양도, 시로네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야, 시로네. 시로네.”
누군가 몸을 흔드는 기척에 시로네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흐릿한 2명의 인영이 아른거리더니 네이드와 이루키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으음, 뭐야?”
“너도 참 대단하다. 아직도 자고 있냐?”
“몰라. 피곤해. 나가 줘.”
“그러지 말고 일어나. 어차피 우리는 수업도 못 받잖아. 그러지 말고 놀러 가자.”
“……놀러 가다니?”
“이루키가 아는 카지노가 있는데, 거기 가면 술도 공짜로 주고 예쁜 여자들도 많대.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몫 제대로 챙겨서 오자고.”
시로네는 카지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너희들은 피곤하지도 않냐? 나는 죽겠는데.”
“우리도 하루 종일 잤어. 너, 지금 27시간째 자고 있는 거라고. 그러지 말고 3일만 있다가 오자. 이루키의 서번트 능력이라면 돈 버는 건 순식간이라니까!”
정상에서(2)
시로네는 소위 전문가라고 자신하는 자들이 그런 곳에 가서 속옷까지 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이루키의 서번트 능력이라면 확률 계산에 있어서는 당할 자가 없을 테지만, 도박을 도박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확률은 확률일 뿐, 도박에서 이기려면 승기를 느낄 줄 아는 승부사의 기질이 필요했다.
이루키가 야금야금 돈을 따다가 한 번에 털리는 광경이 빤히 그려졌다.
“안 가. 너희들이나 가. 난 도박 안 해.”
“도박은 안 해도 돼. 거기 가면 술도 공짜로 주고 예쁜 누나들도 엄청 많다니까. 정말 안 갈 거야?”
듣는 순간 멀쩡한 꼴로 돌아오기란 글렀다는 생각에 시로네는 돌아누웠다.
“어, 미안. 나 진짜로 너무 피곤해서 그래. 계속 자야겠어. 재밌게 놀다 와.”
시로네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생각을 돌리기란 어렵다는 걸 네이드와 이루키도 알고 있었다.
또한 따지고 보면 이번 발표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피로가 쌓인 사람은 시로네일 터였다.
“그래, 알았어. 그럼 푹 쉬어. 아무튼 우리는 갔다 올 테니까 그렇게 알고.”
“그래. 많이 따 가지고 와. 나 맛있는 거 사 줘.”
이루키가 말했다.
“걱정 말고 날 믿어.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게 될 테니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로네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돈도 많으면서 호들갑은…….’
메르코다인의 위세를 잠시 생각한 그였으나,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그날 밤.
“흐으으. 흐윽.”
시로네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설쳤다.
처음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때는 찾아오지 않았던 악몽이 또다시 의식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으으으으!”
시로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공허한 박탈감이 강렬한 충격으로 정신을 강타했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주는 점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진동하는 빛의 끈이 거품으로 변하고, 시로네를 이루는 모든 것이 빛으로 채워졌다.
“허어어억!”
상체가 튕기듯 올라왔다. 크게 뜨인 두 눈이 여전히 꿈속의 잔상을 주시하는 가운데, 시로네는 새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이었다.
“후우. 어쩐지 그냥 지나가는가 싶더니.”
여지없이 악몽이 찾아왔다. 이상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면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하지만 이제 딱히 두렵지는 않아.’
아르민을 통해 원인을 알았고, 무한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멈추는 것도 성공했다.
어느 정도 이모탈 펑션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탐구의 의지가 생겼다.
‘꿈속의 우주. 그건 분명 우주의 시작을 나타내는 거야. 그리고 게이지 대칭성.’
시로네는 턱을 괴었다.
‘태초에 우주가 생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힘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르민 씨는 현재의 우주가 비대칭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지. 즉, 태초에 탄생한 어떤 힘이 인간의 인지 바깥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라면…… 내 초상감은 그 힘을 포착한 것일 수도 있어.’
조금씩 가닥이 잡혀 가고 있었다.
‘악몽은 무의식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정보 정리 작업이 되겠군. 내가 그 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되풀이되는 거야. 이해하면 악몽은 사라진다. 하지만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국 발현될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거니까. 무의식과 의식이 교환되는 어느 지점에 자리를 잡게 될 거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상태일 뿐이라는 아르민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 순간 초상감이 사라졌다.
“엇차.”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시로네는 욕실로 들어갔다.
양치를 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루키와 네이드가 들렀다 간 듯했다.
‘꿈인가? 아니면 진짜로 간 건가?’
카지노에 가서 대박을 치고 오겠다던 두 사람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차라리 같이 갈걸. 이제 나 혼자 뭐 하지?’
샤워를 끝내고 욕실을 나온 시로네는 거울 앞에 서서 젖은 머리를 털었다. 그러다가 거울에 비친 침대를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어?”
작은 먼지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구심점을 가진 듯 천천히 공전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폈으나 대류 현상이 일어날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왜 이래, 이거?”
회전의 중심부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딱히 느낌이 없다고 생각한 그때, 엄청난 초상감이 밀려들었다.
“흐으으으!”
최초의 조우가 주는 충격.
마치 이빨이 뽑힌 자리의 신경을 건드린 것처럼 생소하면서도 불쾌한 자극이었다.
시로네는 번뜩 깨달았다.
‘이거다! 이름을 정할 수 없는 것. 그런데…… 정말로 대체 이거 왜 이러지?’
침대에 턱을 기대고 쳐다보던 시로네는 먼지가 가라앉자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벗어나서 대략 20분. 뭔지는 몰라도 유지력이 있는 힘인 것 같은데.’
그 후로 1시간을 궁리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자 시로네는 외출할 채비를 했다.
피로가 풀렸다고 해도 거의 48시간을 잤으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바람부터 쐬어야겠다.’
기숙사를 벗어났지만 수업이 한창인 시간이라 학생들은 1명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과 평온이 동시에 밀려드는 기분 속에서 시로네는 정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학을 받았으니 수업은 물론 학교의 어떤 시설도 이용할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이상, 차라리 특훈 뒤의 휴식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집이었다. 부모님의 얼굴만 떠올려도 벌써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차를 타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거리지만 명분이 없었다.
엄마 아빠, 나 정학 먹었어요, 하고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고 오젠트 가문으로 가자니, 리안이 없는 상황에서 어색하기만 할 것이다.
“아, 맞다!”
시로네는 퍼뜩 서점을 떠올렸다.
학교 도서관에도 차고 넘칠 정도로 책이 많지만 서점에서 책을 사는 건 오랜 꿈이었다.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다 주신 낡은 책 한 권에 기뻐하던 기억이 났다. 그 책을 닳아질 때까지 읽으면서 얼마나 새 책을 갈구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지.’
오젠트 가문에서 매달 보내 주는 후원금이 상당히 쌓인 덕분이었다. 만약 평민 구역에서 책을 구입한다면 바구니로 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구나, 나만의 책.’
결정을 내린 시로네는 곧바로 귀족 구역을 지나 평민 구역으로 들어갔다.
어릴 때 아버지의 수레를 타고 자주 왔던 거리는 지금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로네는 주머니 속의 금화를 확인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서점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알아보았다.
도시에 들어올 때마다 몇 시간이고 가게를 구경하던 아이라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어서 오세…… 어머, 시로네 아니니?”
“안녕하세요, 아줌마.”
“그래! 몰라보게 컸구나. 네 아빠도 요즘 통 안 보여서 다른 도시로 떠난 줄 알았는데. 올 때마다 항상 책을 한 권씩 사 가셨거든.”
“이제는 안 오실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직접 사려고요.”
“그래, 여전하구나. 골라 보렴.”
“네. 그럼 둘러볼게요.”
시로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서점을 돌아다녔다.
책이 쌓여 있는 곳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내용과는 무관하게 무조건 상태가 양호한 책이 비쌌다.
평민 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소수지만 크레아스 같은 대도시의 인구수로 따지자면 그래도 제법 장사는 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학술 서적보다는 판매량이 좋은 소설이 많았고, 간혹 보이는 학술서도 기초적인 분야만 다루고 있었다.
알페아스 마법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예상보다 훨씬 고급 서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전공 관련한 책은 없었지만 어차피 책이라면 다 좋은 시로네는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마법사가 주인공인 소설책 한 권을 들었다.
꽤나 인기 있는 서적이었는지 여러 권이 구비되어 있었고, 품질에 따라 상중하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돈에 여유가 있는 시로네는 가장 깨끗한 새 책을 고르고 금화를 건넸다.
평민들이 다니는 서점이라 가격은 싼 편이지만 책이라는 건 원래 비싼 물건이었다. 더군다나 신상품이었으니 가격은 최하품의 10배에 달했다.
“어머, 이렇게 비싼 걸 사? 누구 심부름 온 거니?”
“아뇨. 사실 처음 사는 책이거든요.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새 걸로 읽고 싶어서요.”
“그래, 기특하구나. 책에 돈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말이야. 아무튼 열심히 읽으렴. 그래야 똑똑해지지. 머리가 똑똑해야 나중에 장가가서 마누라 고생 안 시킨단다.”
시로네가 천재들의 요람인 마법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아줌마는 서점 주인의 자부심으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시로네는 그조차 기분이 좋은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나왔다.
‘이게 내 책이구나.’
빌리는 것도, 남이 보았던 것도 아닌 나만의 책.
묵직한 무게만 느껴도 가슴이 설레었다.
“어? 저거 시로네 아니야? 야, 시로네!”
부르는 소리에 시로네는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수레 근처에 모여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모습에 유심히 살펴본 시로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알토르? 마틴? 루미나까지?”
어릴 적에 어울렸던 화전민촌의 아이들이었다.
“이야! 진짜 시로네야?”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부분 동갑이었고 차이가 나 봐야 한두 살이었다.
하지만 안 본 사이에 덩치는 몰라보게 달라져서, 특히나 화전민 아이들의 리더인 알토르는 성인도 감당하기 힘든 거구로 성장해 있었다.
그나마 원래 왜소했던 마틴이 시로네와 비슷한 정도였다.
알토르는 시로네의 목부터 끌어안았다.
“너 이 녀석!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찾아오고 말이야. 빈센트 아저씨에게 물어봐도 도시에 있다는 말만 하시고.”
“하하! 미안해. 그렇게 됐어.”
오랜만에 당하는 화전민촌의 인사법에 머리가 얼얼했으나 시로네도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앞니가 토끼처럼 튀어나온 마틴이 시로네의 차림새를 보더니 감탄했다.
“우와, 너 출세했다. 누가 보면 귀족인 줄 알겠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귀족들만 다니는 학교에 있다 보니 들을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그 귀족들에게서조차 출신에 대해 말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애매하긴 한 모양이었다.
또래의 홍일점인 루미나가 말했다.
“시로네는 예전부터 귀족처럼 보였는데 뭐. 어쨌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응. 고마워, 루미나. 너도 예뻐졌네.”
루미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시로네가 기억하는 그녀는 주근깨가 있고 볼살이 통통한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피부가 조금 까무잡잡해졌을 뿐 주근깨도 사라지고 살도 빠져서 완연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알토르가 폭소를 터트렸다.
“거짓말이 더 늘었네, 시로네. 하긴, 예전에도 네 말발에는 당해 낼 애들이 없었지. 이런 왈가닥 계집애가 뭐가 예뻐졌다는 거야?”
“시끄러! 네가 뭔데 나더러 왈가닥이니 뭐니 평가하는 거야?”
루미나가 전에 없이 화를 내자 알토르는 머쓱해졌다.
“아니, 난 그냥 장난으로…….”
“됐어! 너랑 말하기 싫어.”
“그래! 말하지 마라! 나도 너 같은 계집애랑 다니는 거 창피해 죽겠으니까!”
시로네는 예전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크게 싸운 것처럼 보여도 화전민촌 아이들에게는 일상이었다. 쉽게 화를 내지만 절대로 선은 넘지 않는, 운명 공동체의 삶에서 터득한 지혜일 터였다.
정상에서(3)
마틴이 물었다.
“그나저나 시로네, 너는 요새 뭐 해? 도시에서 산다며. 가게에서 일이라도 하는 거야?”
“어? 그게…….”
몇 가지 변명거리를 생각하던 시로네는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아버지는 함구할 수 있어도, 당사자의 거짓말은 훗날 상처가 될 터였다.
“사실 마법학교에 다니고 있어.”
“무어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