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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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시동
살았다.
날이 밝아 아침이 왔을 때, 형진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이 들고 말았다. 더 이상은 체력도, 정신력도, 지구력도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게 꿈조차도 꾸지 않고 그대로 곯아 떨어졌던 형진이 다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내려다보고 있는 유아의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어? 일단은… 윽!”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핑 하고 머리가 울리는 느낌과 함께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자 유아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그를 부축한다.
“어떡해. 어떡해. 아파요? 어지러워요?”
호들갑을 떠는 유아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치듯 딩딩 울리기 시작한다. 숙취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뭔 일인지.
“음… 잠깐만. 머리가 울려서 그러는데 잠깐만 조용히 해줄래.”
“아, 죄송해요.”
잠시 안정을 취하자 울리던 머리는 나아지기 시작했고, 어질어질한 기분이 조금 가시자 앞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
그렇다. 그것은 실로 장대한 전투였다. 이런 표현을 쓰면 과장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무려 열 명. 그것도 있는대로 발정해서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내몰린 열 명의 미엘이 상대였다. 어떻게 보면 그 엄청난 공세를 버텨낸 것만으로도 형진은 남들은 모르는 새로운 업적을 달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시 또 모르지. 그가 뻗어 있는 사이 공포와 죽음께서 그 장절한 전투를 기념하며 새로운 업적을 만들어 하사하셨을지 누가 알겠는가.
“끙…”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엄청난 속도로 스킬 레벨이 상승해 버린 라이언하트였다.
라이언하트는 활용도가 높은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늦게 습득한 탓에 스킬레벨이 조금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미엘과의 장대한 전투 끝에 이 스킬은 하룻밤 만에 무려 10레벨을 뛰어오르며 34레벨에 도달해 버렸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게다가 미엘이 아직 남자 경험이 없었던 것도 형진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월등한 힘과 체력, 그리고 지구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던 미엘이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라이언하트를 앞세워 철저하게 약점을 공략하고 전술적인 행동을 취하는 형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발정의 영향으로 약간의 치명적인 자극에도 바로 절정에 도달해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만약 미엘이 하다못해 유아 정도의 경험만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싸움의 향방은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많이… 안 좋아요?”
그제서야 유아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누군가에게서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전해진다. 돌아보니 어느새 다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미엘이었다.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시녀복이 아닌 그녀를 위해 맞춘 듯한 앙증맞은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고, 두툼한 꼬리들을 마치 외투처럼 몸에 두르고 있다는 정도다.
“죽을 뻔 했습니다.”
“…”
솔직한 심정을 담아 그렇게 대답하자, 미엘은 차마 뭐라 대답도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물론 형진의 도발이 있긴 했지만, 욕망에 못 이겨 첫날밤 신랑을 복상사시킬 뻔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입이 열 개라니. 형진은 일상적으로 쓰이던 말이 더 이상 관용어구가 되지 못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일단… 이것 좀 드세요. 전복 남은 걸로 죽을 좀 끓여 봤어요.”
“고마워.”
형진은 유아가 건네주는 쟁반을 받으려다가 여전히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미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그게… 떨어져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
“어떻게 되는데요?”
잠시 대답을 못하고 형진과 유아의 눈치를 보던 미엘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정되었던 상태가 무너져서 다시 어제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크흡! 쿨럭.”
“괘, 괘, 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크흠! 큼!”
어제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미엘에 침을 삼키다가 사래가 들리고 말았던 형진은 잠시 지난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이거 먹어야 하는데, 손은 좀 놔주시겠어요?”
“네…”
미엘은 잠시 우물쭈물 하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여우의 모습이 되어 얼른 그의 어깨 위에 올라앉았다.
림에게서 도움을 받았는지 죽은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한 그릇을 비우자 허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느낌이랄까. 신성력을 있는 대로 퍼부어서 만들었는지 입안에서 전복이 움찔거리는 듯한 괴기스러운 기분이 다소 느껴졌지만 그냥 산낙지 먹는다 셈치고 모른 척 꼭꼭 씹어 먹었다.
“후, 잘 먹었어.”
“여기, 물드세요.”
“고마워.”
다행히 유아도 어제 일을 가지고 형진을 나무란다거나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봐도 현재 상황에서 형진은 피해자에 불과하니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몇 시나 된 거지?”
“그게…”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유아가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저녁때에요. 아니, 밤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네요.”
“헐.”
거의 이틀 가까이 뻗어 있었다는 소리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런 식으로 시간을 홀라당 날려버리다니.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곰곰이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문이 열리며 앞서의 미엘보다 조금 성장한 외모의 또다른 미엘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형진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아 있던 미엘과 합쳐진다.
“뭔가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 말에 유아와 미엘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그게… 방음 결계 때문에 어제… 아니, 그제밤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소리가 다 울려퍼져서…”
“끙…”
형진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어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카트린이 그 소리를 들었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젠장. 크루그 녀석 또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 소리 하겠군.
“그래서 미엘님이 어제 오늘 저택 안의 모든 침실에 별도의 방음 결계를 만들었어요. 외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라도 자체적으로 차단할 수 있게 하려고요.”
“진작 해둘걸 그랬군.”
“그러게요.”
차라리 유아 때는 고작해야 크루그 정도만 잠을 좀 설치고 마는 수준이었겠지만, 이번에 벌어진 미엘 사태는 동료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전부가 상황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괜히 이일로 인해 그들과 서먹해지는 건 곤란한 일이라, 형진은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물었다.
“크흠. 다들 뭐라고 그래?”
그 말에 유아와 미엘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 번 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뭐… 오귀스트님은 그냥 좋게 웃으며 축하한다 그러시고, 제랄딘님은 도저히 여기선 못 자겠다 하시더니 자기 저택으로 돌아가셔서 오늘은 오지 않고 계세요. 크루그는 카트린을 데리고 사용인 숙소로 들어가 버렸고요. 림은 요정이라 그런지 별 느낌이 없는 모양이지만, 하마란님은 난감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제법 소상하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는 유아의 모습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둔탱이가 이 정도로 확실하게 인지할 정도라면, 모르긴 해도 실제 반응은 몇 배나 격렬했을 거라고 봐야 한다.
“끙…”
형진이 다시 앓는 소리를 내자, 미엘이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렇게까지 하려던 건…”
“됐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죠. 더구나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매일 밤이 그런 식이라면 며칠 못가서 전 말라죽고 말 겁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형진의 말에 미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저도 잘…”
“네? 아까는 괜찮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따져 묻는 형진의 말에 미엘은 부끄러운 모양이지 웅얼거리듯 속삭였다.
“그럴 것 같기는 한데, 배우자를 맞이하는 것이 처음이라 확실하게 이렇다 저렇다 단정할 수가 없어요.”
“흠…”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문득 이렇게 말했다.
“혹시… 많이 쌓여 있었나요?”
“네?”
“욕구요. 어제 모습을 보니까 상당히 쌓여 있었던 것 같던데.”
적나라한 형진의 질문에 미엘은 잠시 당황스러워 하더니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였다.
“아, 아마도요.”
“언제부터?”
어떻게 보면 이건 상당히 중요한 질문일 수도 있다. 언제부터 자신을 마음에 두었냐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 때문에 미엘은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람의 모습이었다면 아마도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붉게 물들어 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미친놈을 상대하고 난 뒤부터였을 거에요.”
정확히는 그날 도핑을 위해 특제요리를 먹고 난 뒤, 미친놈의 일을 해결하고 돌아와서 자다가 몽정이라는 사상초유의 일을 경험해 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특제 요리가 출현할 때마다 억눌러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시 떠올려 생각해 보니 참으로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형진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그게 문제였던 것 같군요.”
“네?”
“억눌러두고 꾹꾹 참다 보니 그게 쌓이고 쌓여서 폭발해 버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미엘은 물론이고 유아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형진의 말을 기다린다.
“유효한 방법일지는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습니다만, 문제가 되기 전에 그때 그때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런…”
원론적인 대답이었지만, 미엘과 유아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바로 이해했다. 특히 유아로서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괜히 미엘을 견제한다고 접촉을 막았다가는 앞서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용케 형진이 견뎌냈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자칫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 어쩔 수 없네요.”
자기 남자를 다른 여자와 공유하는 것이 기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미엘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여기서는 자신이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유아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미엘님도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아요.”
“…”
본의보다는 본능이겠지. 미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유아에게 다시금 감사의 뜻을 표할 수 밖에 없었다.
형진은 원만하게 서로의 관계를 인정하고 합의에 이른 둘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어제 일로 인해 미엘이 완전히 자신에게 약점이 잡힌 상태인 것은 분명한 사실. 얼핏 보기에는 피해자인 것 같아 보여도, 사실상 형진은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자였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형진은 피로에 찌든 현대인의 모습을 연기한 채 유아에게 말했다.
“후… 좀 씻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어?”
“아, 잠시만요. 바로 욕실에 준비를 할게요.”
“아니, 거기 말고.”
“그럼…”
“온천에 가고 싶어.”
“아… 그것도 좋겠네요. 잠시만요. 수건이랑 이것 저것 좀 챙길게요.”
유아가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꼬리 중 몇이 메이드 복을 입은 미엘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그녀를 돕기 위해 분주히 움지이기 시작한다. 실로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감당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하지만 그렇게 형진의 저택이 밤 늦게서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 조금 떨어진 다른 저택에서는 한 여성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제랄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