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58
158====================
34. 명성
“음…”
형진은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오기 시작하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눈을 떴다. 오늘따라 유난히 강렬한 아침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던 그는 자신의 양팔이 무언가에 의해 단단히 구속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먼저 오른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마치 팬더곰이 대나무에 바동거리며 오르는 듯한 자세로 유아가 자신의 오른팔을 꽉 껴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이번엔 왼쪽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왼팔을 꼭 껴안은 채 뭔가를 먹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지 음냐거리며 쩝쩝 입맛을 다시는 미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도망이라도 갈까봐 그러나. 아니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이런 자세로 잠이 들어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이들을 깨우지 않고서는 일어나기 힘들 것 같다.
형진은 씩 웃고는 둘에게 잡혀있는 양손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침 두 손이 위치한 부위가 절묘했던 탓에 바로 반응이 전해져 온다.
“으응…”
“흐으우…”
다리를 오므리며 몸을 움찔거리던 유아와 미엘은 이내 자신들을 음흉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형진의 존재를 깨달았다.
“후아아암. 아, 벌써 아침이네.”
“그러게요.”
하지만 뭔가 반응이 영 시원찮다. 아침 댓바람부터 남자의 손이 몸을 조물딱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좀 놀라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오히려 만지작거리고 있는 형진이 무안할 정도로 둘은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듯이 더욱 형진의 팔을 꽉 끌어안는다.
“안 일어 날거야?”
어이가 없어서 결국 형진이 그렇게 묻자, 유아가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요. 그냥 좀 더 자면 안 될까요?”
그러자 미엘이 그의 팔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덧붙인다.
“김밥 마느라 늦게 잠들었잖아요. 그냥 더 자요, 우리.”
“끙.”
고작 김밥 이백 개 가지고 뭐 그리 피곤해 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형진이 원한 것은 그냥 대충 형태만 잡은 정도가 아니라 누가 봐도 먹음직스럽게 잘 말아진 김밥 이백 개였기 때문이다. 말고 말고 또 말아도 형진이 원하는 기준에는 쉽게 도달하기 어려웠고, 요리 강좌에 참석한 사제들은 물론이고 유아와 미엘까지도 밤늦게까지 김밥을 말다가 겨우 합격점을 받고 귀가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자다가 이불이 김으로 변해 자신들을 덮쳐오는 꿈까지 꿨을 정도다.
유아만이라면 잠든 그녀를 덮치든 필살의 이불 뒤집기를 하든 해서 깨웠겠지만, 미엘이 가세하자 그것도 쉽지 않게 되어 버렸다. 스킬을 써서 빠져 나올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렇게 했다가 미엘과의 접촉이 떨어져서 그녀가 광분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그야말로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형진은 아침 늦게나 되어서야 겨우 여체의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 게으름뱅이들 같으니.”
투덜거리는 형진의 머리를 감겨주던 유아가 그 말을 듣고는 미엘을 향해 빙긋 웃었다.
“언니랑은 마음이 꽤 잘 맞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지내봐요.”
“어쩜. 저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참이에요. 원래 악의 무리에 대항할 때는 힘을 합쳐야 하는 법이죠. 우리 힘내요.”
“네!”
이런 데서 의기투합하지 말고 좀 생산적인 일에 힘을 합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이등병이 일치단결하게 만드는 악덕 고참이 되어 버린 느낌이랄까. 서로 아웅다웅하는 것보다야 이편이 낫긴 하지만, 누가 악의 무리라는 거냐.
어쨌든 그렇게 씻김을 당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이미 주방에 내려와 분주하게 아침 준비를 하던 림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한다.
-스승님! 그리고 사모님들!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림도 좋은 아침.”
림은 현재 유아와 미엘을 거리낌 없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존재다. 스승의 부인이니 사모님이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형진으로서는 아직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둘에게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안녕하세요!”
“늦은 것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딱 맞춰 온 모양이군.”
“그러게요.”
곧바로 카트린을 앞세운 채 크루그와 오귀스트가 주방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크고 작은 이 남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대련을 한 모양이다.
“음? 한 명이 비는데?”
“그러고 보니… 하마란님은?”
유아의 물음에 형진 대신 바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평소라면 벌써 일어나서 장작도 패고 물도 길어다 놓고 했을 텐데. 오늘은 아직 안 내려온 것 같아요.
“그래?”
“어디 몸이라도 아픈가?”
아니면 도망이라도 쳤던가.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팔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미엘이 얼른 작은 여우의 모습으로 그의 어깨 위에 자리 잡는다.
“내가 올라가보도록 할 테니 먼저들 식사하고 있어.”
“네.”
이층으로 올라가 하마란의 방으로 향한다. 문 앞에 도착한 형진은 노크를 할까 하다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터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헐?”
“와…”
안으로 들어간 형진과 미엘은 베개를 꼭 껴안은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하마란의 모습에 놀랐다. 평소 엄격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그녀이고 보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누가 방안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물다.
“흠…”
형진은 잠시 하마란을 내려다 보았다. 숨소리도 고르고 혈색도 문제가 없는 것을 보아하니 몸살 같은 것이 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 판단이 내려지자, 형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씨익 웃었다.
이 남자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나. 설마 자신이 뻔히 보고 있는데 하마란에게 파렴치한 짓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형진의 어깨 위에 작은 여우의 모습으로 목도리처럼 올라 앉아 있던 미엘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형진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미엘이 보고 있든 말든, 형진은 조심스럽게 자세를 낮추더니 곤히 잠들어 있는 하마란의 침대 모서리의 시트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아랫배에 힘을 꽉 주더니 시트를 힘껏 들어올리며 크게 외친다.
“언능 못 일어나!”
아, 정말 얼마 만에 해보는 일인가. 유아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 뒤로도 가끔 시전하기는 했지만, 최근 미엘이 가세하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은근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뭔가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고는 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시트 뒤집기를 시전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하마란은 곰탱이 유아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유아라면 그대로 비명과 함께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는 울상을 지으며 일어났겠지만, 하마란은 형진이 시트를 잡고 그것을 확 들어 올리는 순간 휘리릭 하고 허공에서 한바퀴 반 몸을 회전시키더니 완전한 전투 자세를 잡은 채 바닥에 내려선다.
“와아… 대단해요.”
그 모습이 어찌나 화려한지 지켜보던 미엘이 감탄하며 찬사를 보낼 정도다.
“이게 무슨 짓… 후아암… 입니까.”
말을 하다 말고 밀려오는 하품에 잠시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라니. 저런 상황에서도 그런 황당한 곡예를 펼쳤단 말인가.
하여튼 귀여운 맛이 없어. 좀 꺅꺅거리며 울상도 짓고 그래야지. 이래서야 모처럼 시트 뒤집기를 한 보람이 없지 않느냐 말이다!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투덜투덜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이긴. 해가 중천에 떠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 게으름뱅이 메이드를 깨우러 주인님이 친히 왕림하셨다. 왜? 불만 있어?”
“그건…”
그제서야 하마란은 밝은 방 안의 모습을 깨달았는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늦잠이라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신뢰와 헌신을 모시는 수호자의 신분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해가 밝게 떴음에도 늘어져서 쿨쿨 잠이 들어 있었다니!
“알았으면 얼른 씻고 내려와.”
“알겠… 습니다.”
형진이 미엘과 함께 방을 나서자 하마란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고 있다가 이내 양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짝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
나태해졌다. 정신이 해이해졌다. 그것 외에는 현재의 상황을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위험하다. 그렇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신뢰와 헌신께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어쨌거나 그렇게 조금은 북적거리고 또 한 편으로는 조금 나태한 아침 시간이 지나자, 형진은 오랜만에 아틀리에에 들어섰다.
“…”
아침 식사가 끝나자 그곳에서는 형진의 어깨 위에 여우의 모습으로 올라앉은 미엘의 다른 꼬리들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룬을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부터 완숙한 성인 여성에 이르기까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미엘의 가족이 총출동해서 인형 눈깔이라도 붙이고 있는 줄 알겠다.
“아직 다 못 끝낸 거야?”
“거의 다 끝났어요. 그런데 여긴 왜 내려온 거에요?”
“좀 만들 게 있어서.”
그렇다. 형진이 오랜 만에 아틀리에를 찾은 것은 급히 만들어야 할 물건이 있어서였다.
“뭘 만들려고요?”
미엘의 물음에 형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침대.”
“…”
너무나도 태연한 그 대답에 미엘은 잠시 말문을 잃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형진의 침대는 일인용이라기엔 조금 큰 편이긴 했지만, 세 명이 쓰기엔 여러모로 비좁았다. 유아와 미엘이 형진의 팔을 그렇게 꽉 끌어안고 잠이 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가 너무 좋다는 마음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잠결에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나 할까.
특히 미엘은 자칫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서 형진과 접촉이 끊기기라도 하면 더욱더 커다란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제랄딘에게 미안해서라도 이전과 같은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
미엘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형진은 아틀리에 안을 돌아보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일단 목재가 있어야겠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가 없다. 재료도 없이 침대 같은 가구를 뚝딱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시장에 가서 사야하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형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의뢰창을 열었다.
[물자 조달] -형제에게 의뢰 수행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의뢰합니다.-필요한 물자: 최고급 목재.
-수량: 10개.
-제한계급: 하급성도
-보수: 이넬 은화 2개, 팩션 공헌도 15.
(주의) 가구를 제작하고자 합니다. 잘 건조되고 향기가 있는 최고급 목재여야 합니다. 필요한 규격을 첨부하니 참고하십시오.
그리칸 시내에서 힘들게 목재상을 찾느니, 이런 식으로 의뢰를 넣는 것이 더 간편하다. 이전 같았으면 의뢰가 바로바로 진행되지 않아서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호구신의 식솔들에게 의뢰가 넘어가니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다.
“됐다.”
“의뢰를 넣은 거에요?”
“응.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러면 최소한 며칠 안으로 최고급 목재가 도착할 테니 이젠 그냥 편안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돼.”
“확실히 유용하겠네요.”
아닌게 아니라 미엘은 속으로 살짝 감탄하고 있었다. 김밥을 마는 와중에 최근 물자 조달 의뢰가 활성화된 것이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을 끌어들인 덕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크게 놀랐었다. 그동안 이런 좋은 수단이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공포와 죽음께서 형진으로 하여금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도록 흔쾌히 허락하신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그럼 일단…”
침대는 잠시 뒤로 미루고 다른 일을 할까 하며 아틀리에를 벗어나려던 형진은 문득 눈앞에 알림이 뜨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벌써?”
의뢰를 넣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메시지가 나타난 것이다. 이 정도 속도라면, 이미 누군가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의뢰를 수락하고 완료시켜버렸다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형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최고급 목재는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결이 곱고 향기가 있는 목재를 잘 말려서 규격에 맞춰 잘라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벤에 이런 식으로 넣고 다니는 집행자가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미 채집이나 가공이라는 분야에 있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집행자가 존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살짝 궁금해졌지만, 아쉽게도 그 의문을 풀 방법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의뢰를 수행했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형진 외에도 이런 식으로 가공이나 채집 같은 것에 공을 들이는 자가 있다는 것 뿐이다.
“뭐… 상관은 없지만.”
채집과 가공에 노력을 기울인다 한들, 갖가지 부스터와 도핑 세트로 무장한 자신과 그 성취를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인벤토리 안에 담겨진 최고급 목재를 아틀리에 한쪽에 쌓아두고는 곧바로 소매를 걷어 붙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