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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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준비
점심 식사가 끝나자 하마란은 자신의 방에서 두건을 꺼내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배교자가 된 자신이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를 뜻하는 두건을 쓰고 찾아가도 좋은 것일까. 하지만 이것을 입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은 그녀가 신뢰와 헌신에 속한 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입고 있는 메이드복을 입고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네.”
그녀가 대답하자 문이 열리며 형진과 미엘이 모습을 드러낸다.
“뭐해? 안 가?”
“그게…”
머뭇거리며 등 뒤로 감추는 두건을 보고 형진은 대략의 사정을 바로 알아챘다.
“그거 때문이었군. 입고 가. 내가 책임질 테니.”
“네?”
“배교자가 되었다 한들, 네 신앙이 변함없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아. 더구나 빛이 바래긴 했어도 헌신의 일격 역시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그거면 그 두건을 착용하기엔 충분하지 않겠어?”
“…”
이 집에 들어올 때 스스로 자격이 없다면서 벗어 두었던 두건이다. 만약 그녀가 그때와 생각이 같았다면 이렇게 두건을 놓고 고민하지도 않았을 터.
그렇게 망설인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등을 떠밀려서라도 그것을 다시 입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임을 형진은 단숨에 알아챈 것이다.
떠밀어 주길 원한다면 그것을 해주면 되는 일. 더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가 두건을 쓰고 안 쓰고가 아니라, 어서 수호자들을 찾아가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감사… 합니다.”
하지만 등을 떠밀어 주길 은연중에 바라고 있던 누군가로서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알았으면 옷도 대충 갈아 입고. 황궁에 가는데 그런 메이드복을 입고 갈 수는 없잖아. 미엘, 얼른 준비하고 출발할 수 있게 도와줘.”
“네.”
미엘은 두 말 없이 형진의 말에 따랐고, 거침없이 옷장을 뒤져 억지로 떠안기듯 옷가게에서 사둔 옷들 가운데 황궁에 입고 가도 격식에 부족함이 없으며 동시에 하마란이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을 만한 옷을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려가서 기다려요.”
“그냥 보면 안 돼?”
“안 돼요. 얼른 가요.”
“쳇.”
모처럼 좋은 구경하나 싶었던 형진은 투덜대며 문을 닫고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미엘은 혹시 밖에서 훔쳐 보려고 하지는 않나 살핀 뒤 문을 잠그고 결계까지 펼친 뒤에야 우두커니 서있는 하마란의 옷을 강제로 갈아입히는 작업에 돌입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밖에서 여자들이 산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유아와 제랄딘, 그리고 카트린이 크루그와 오귀스트에게 호위를 받으며 요정들과 함께 눈 쌓인 정원을 천천히 거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흐뭇해진다.
산책을 하던 도중 카트린이 휠체어에서 일어나더니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걷는 연습을 한다. 아직 다리 힘이 부족한지 비틀거리긴 하지만, 저 정도면 조만간 휠체어의 도움 없이도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을 듯 하다.
딱히 뭔가 특별한 약을 쓴 것도 아니다. 그저 항상 웃을 수 있도록 해주고, 맛있는 식사와 충분한 수면이 주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생각날 때마다 회합장으로 가서 어머니인 마들렌의 사념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효과적인 약은 역시 어머니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정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위층에서 미엘과 함께 하마란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장이 커서 그런지 여성용으로 살짝 디자인을 바꾼 남성용 정장이 제법 잘 어울린다. 머리 위에 뒤집어 쓴, KKK단을 연상시키는 두건만 아니면 걸크러시가 따로 없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저 악취미적인 두건 좀 어떻게 바꿀 수 없을까 싶어도 그들 나름의 전통이니 괜히 지금 상황에서 손을 대려고 해봐야 좋은 소리는 듣기 힘들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가자.”
“네.”
둘을 데리고 곧바로 요정의 문을 통해 라야바르트의 수도 라야로 직행했다.
하마란은 순식간에 라야에 도착하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정의 문을 처음 이용하는 것은 아니어도, 이런 식으로 빠른 도시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미처 몰랐던 걸까. 아니면, 마음에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곧바로 도착한 것 때문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 그들은 곧바로 수도 라야 안에 존재하는 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이 아닙니다. 이쪽으로.”
형진은 황궁의 정문으로 향하려 했지만, 하마란은 그런 그를 제지하고는 다른 쪽으로 인도했다. 아마도 수호자 전용으로 개방된 다른 문이 있는 모양이다.
황궁의 성벽을 조금 돌아가자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는 작은 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로 경비병이나 기사들이 사용하는 문인지, 비교적 작은 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수의 병사와 기사들이 보인다.
하마란이 문으로 다가가며 헌신의 일격을 발동하자, 문을 지키던 기사들은 얼른 그녀에게 예를 취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펼친 헌신의 일격이 다른 수호자들과 어쩐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또한 뒤에 수호자로는 보이지 않는 수상쩍은 인상착의의 인물이 둘이나 있다는 것도 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형진과 미엘은 심연의 눈가리개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동행이십니까?”
아무리 수호자라 해도 막무가내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일. 기사 하나가 나서며 그렇게 질문 하자, 하마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하마란 악타르. 아디슈 악타르님과 나눌 얘기가 있다. 기별을 해줬으면 하는데.”
기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디슈 악타르는 현재 황궁에 머무르고 있는 수호자들의 총 책임자 격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놀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름에 붙은 악타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인연으로 엮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이름 외의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그 정도는 기사들도 추측이 가능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기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면 이쪽의 위병소라도 들어와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괜찮다.”
뒤에서 지켜보는 형진으로서는 꽤나 흥미진진한 모습이다. 황궁을 지키는 기사라면 실력과 인품에서 인정받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자기 집에서 장작 패는 메이드에게 쩔쩔 매는 모습이란 건 어지간해서는 보기 드문 절경이 아닐 수 없다.
기사의 안내를 받아 위병소로 들어서자, 안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와 병사들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수호자라고 해서 아무한테나 대고 주먹부터 휘두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악명이 자자하니 그들로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심한데 차나 한 잔 해야겠군.”
“준비할게요.”
곧바로 미엘이 티세트를 꺼낸다. 찻잔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차주전자에 마법으로 물을 받은 다음, 역시나 마법을 이용해 그것을 끓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형진은 곁들이기 좋은 쿠키와 케이크를 꺼내 놓았다.
꼴깍.
뭘 하는 건가 싶었던 병사와 기사들은 갑자기 이 수호자 일행들이 위병소 안에서 티타임을 갖기 시작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막 구워서 내놓은 듯한 쿠키와 케이크의 달콤한 향기에 그대로 홀려버리고 말았다. 바로 코앞에다 놓고 희롱하는 듯한 그 달콤한 향기의 유혹이라니. 점심 때 먹었던 막 구운 빵이나 스튜 맛 같은 건 이미 기억나지도 않는다.
“우리끼리만 먹기는 좀 그런데, 좀 들어 보시겠습니까?”
“괘, 괘, 괜찮습니다. 근무 중이라. 흐릅!”
“그런가요. 아쉽군요.”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좀 닦고 말하던가. 하지만 형진은 두 번 권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눈가리개 아래로 드러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미엘이 따라주는 차와 함께 막 구운 쿠키와 케이크를 음미할 뿐이다.
“…”
하마란은 그렇게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위병소 안의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는 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적의 심장부에 들어선 것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병사와 기사들을 놀려먹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이래서야 오히려 자신이 더 긴장하고 있는 모양새 아닌가.
그렇게 위병소 안에 대기하고 있는 자들에게 고문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선사하며 기다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기사 하나가 역시나 악취미적인 두건을 뒤집어 쓴 장대한 체구의 수호자 세 명을 이끌고 위병소 안으로 들어왔다.
하마란은 그들의 모습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간단하게 예를 취했다. 주먹으로 머리와 왼쪽 어깨, 그리고 심장이 있는 곳을 차례로 툭툭 건드리는, 일종의 성호와 같은 인사법이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그렇게 예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병소 안에 들어선 수호자들은 마치 그녀가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며 곧바로 진과 미엘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하마란은 자신의 인사에 응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최대한 내색하려 하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용건은?”
세 수호자들 가운데 왼쪽에 앉은 자에게서 묵직한 저음의 말이 흘러나온다. 형진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일단 주위를 한번 훑어보며 대답했다.
“중대한 일이니, 일단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만.”
“…”
수호자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이끌고 왔던 기사들이 위병소 안에 대기하던 병력들에게 얼른 눈짓 손짓 발짓을 하며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순식간에 위병소 안이 썰렁하게 비어버리자, 미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몇 가지 결계를 그 안에 펼쳤다.
몇 개나 되는, 그것도 제법 강력한 위력의 서로 다른 효과를 지닌 결계 몇 개를 너무나도 수월하게 펼쳐 보이는 미엘의 모습에, 두건의 눈구멍으로 드러난 수호자들의 시선이 이채를 발한다.
“그래서, 용건은?”
다행히 이번에는 단어 하나가 더 늘었다. 여전히 단답형의 말투지만.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 놈들은 원래 이런 자들이다. 어떻게 보면 제대로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하마란이 수호자들 속에서는 별종이 아니었을까.
“신뢰와 헌신의 이름을 드높일 만한 얘기를 전하고자 이렇게…”
하지만 형진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세 수호자들의 몸에서 헌신의 일격이 폭발하는 듯한 기세로 터져 나온다.
“이크.”
수호자들이 앉아 있던 의자들이 그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나서 장작 더미로 변해 흩어진다. 하지만 막상 앞에 놓은 테이블이나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티세트와 쿠키, 그리고 케이크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그들의 몸에서 헌신의 일격이 터져나오는 순간 미엘이 적절하게 결계를 펼쳐 여파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거 참… 성격 급하신 분들이군요.”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수호자들은 이미 의자가 부서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오른쪽에 자리한 자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내 신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그러나 형진은 오히려 씩 미소를 지었다.
사실 대화에 있어서 가장 곤란한 것은 상대가 반발하는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 말을 걸어도 아무 반응이 없는 상대야 말로 대화를 이끌어가야만 하는 자에게 있어서 가장 곤란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 대화의 시작은 나름대로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군요.”
문제는 그런 부정적인 반응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원하는 결론으로 도출하는 것. 그것을 위해 형진은 입가에 웃음을 지은 채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반말인지. 사람이 좋게좋게 말하니까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응? 그런 거야?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해서 주먹부터 휘두르는 깡패 새끼들이. 너희 신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든?”
물론 그의 입가에 지어진 것은 일반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조소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미엘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것들을 인벤토리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위병소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