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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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확대
모처럼 남자로서 무척이나 뿌듯한 나날을 보냈다.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하는 유아와 제랄딘의 수발을 드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그까짓거 남자의 자존심을 찾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입맛이 좀 까탈스러워진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무렴. 그런 사소한 부분보다야 남자의 자존심이 먼저다. 당연한 일 아닌가.
“짐승.”
“변태.”
“크흠…”
물론 유아와 제랄딘은 겨우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게 되기가 무섭게 그렇게 형진에게 짐승의 낙인을 씌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아니 떳떳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솔직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누구씨 덕분에 사흘이나 일이 미뤄졌어요. 우선 이것부터 봐줘요.”
“알았어.”
사흘간 잘 먹고 잘 쉰 덕분인지 제랄딘의 볼이 어쩐지 빵빵해진 것 같다.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싶지만 괜히 한 마디 더 들을 것 같아서 애써 참는다.
그녀가 내놓은 것은 추가적으로 채권 추심에 들어갈 영지들의 목록이었다.
어차피 이건 신뢰와 헌신 쪽에 맡겨 놓은 일이니 그는 사인만 해주면 끝난다. 어떻게 보면 제랄딘이 사흘간 뻗어 있었던 덕분에 그쪽 영지들로서는 숨 돌릴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봐야 별 차이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도 확인해 주세요.”
빠르게 서류들을 살피고 나자 제랄딘이 한 가지 안건을 더 전한다.
“이건…”
형진에게 건네진 것은 산드린 영지라는 곳의 영주 대리가 신전 측의 대표자를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산드린. 산드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카트린의 이름이랑 비슷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형진이 머리를 갸웃거리자,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건지 제랄딘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들어 본 적이 있으실 거에요. 쓸데없이 욕심을 부리던 다른 영지들과는 달리 정말 최소한의 식량만 요청했던 곳.”
“응? 아아아… 맞다. 그런 곳이 있었지.”
기억이 난다. 다른 영지들처럼 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정말로 착한 건지 아니면 착한 척을 하는 건지 모르는 대응으로 형진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곳.
“그곳의 영주가 왜?”
“정확히는 영주 대리에요. 영주가 지금 앓아누워서 일을 볼 수가 없다더라고요.”
“아파서? 그거 참 신기하군.”
다른 건 몰라도 이 세계는 의료 부분만큼은 지구보다 우월한 면이 있다. 어지간한 상처나 병은 가볍게 치료할 수 있는 포션의 존재도 있고, 그런 포션을 만들어내며 또한 누구에게나 자신의 능력을 베푸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호구스런 사제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지역의 영주 씩이나 되는 인물이 아파서 누워있다? 이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노환 같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건 아무리 뛰어난 신관이라도 고치기 어려워요.”
“하긴. 어쨌든 그래서? 그 영주 대리가 날 왜 보자고 하는 건데?”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형진의 말에 제랄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영지를 넘기고 싶다고 그러는데, 자세한 건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은 삼일 전에도 이 문제 때문에 급히 찾았던 건데 누구 때문에 이렇게 늦어져 버렸죠.”
“자기도 좋았으면서.”
“뭐라고요?”
“크흠. 아무튼, 그런 거라면 그냥 신전의 최고 사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야?”
제랄딘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는 형진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게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가 않은가 봐요. 넘겨짚은 건지, 아니면 다른 수단으로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는 몰라도 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모양새였어요.”
“제법이군.”
형진은 턱을 쓰다듬으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채권 추심으로는 어려운 건가?”
“영지 접수요? 그게… 계산해 봤는데 다소 부족한 것 같아요.”
“어느 정도나?”
“영지는 다 접수를 해도 성은 남겨 줘야 할 것 같더라구요.”
“쯧.”
진작 신경을 써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후회를 해봐야 늦은 일이다. 사실 여러 가지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작은 영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일이 좀 귀찮아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살짝 호기심이 느껴진다.
엘 파르드 전역에 대한 채권 추심은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들어선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영지를 넘기겠다며 나섰다는 것은 로우너 자작령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었다는 뜻. 거리라도 가까우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은 걸 고려하면 이 산드린이란 곳의 영주인지 영주 대리인지 하는 자는 상당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함정을 피해간 것도 모자라서, 그 정도 정보력까지 가지고 있는 작은 영지. 역시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좋아. 그럼 바로 연락을 보내. 오늘 만나겠다고.”
“네? 오늘요? 당장?”
“시간 끌 거 뭐 있나. 오후 티타임에 맞춰서 신전에 오라고 연락을 보내.”
어차피 공을 쥐고 있는 것은 이쪽이다. 게다가 먼저 굽히고 들어온 것 역시 저쪽. 굳이 사정 봐줄 이유가 없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조치할게요.”
제랄딘은 그렇게 말하고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형진은 여신에게 약속했던 마차를 만들어 주기 위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다시 엘리시온을 방문했다.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엘리시온은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사람은 북적거리고, 거래소도 북적거리고. 겉으로 보기엔 별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형진은 가만히 주위의 유저들이 하는 말에 정신을 집중하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거 봤어?”
“응. 봤어. 죽여주더라.”
“크흐.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역시나 유저들 가운데 가장 큰 이슈는 그가 벌였던 누드 패치 사건이었다. 그 일이 워낙 임팩트가 컸던 나머지 보스의 돌연사조차도 어쩐지 좀 묻혀버린 느낌이 들 정도다.
“거기는 아직도 동결 중이라면서?”
“점검중이라는 것 같아. 유저들은 일단 바깥으로 옮겼다는 것 같지만. 하긴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얘기는 들었어?”
“뭘?”
“성인 모드가 도입될지도 모른다는 얘기.”
“아하, 그거? 근데 그거 루머 아닌가?”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너도 봤다니까 알겠지만 그 디테일… 일부러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아직 구체적인 원인이 밝혀지거나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원인이 밝혀졌다면 그가 다시 접속하는 순간 부리나케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든 메시지를 날리든 했을 것이다.
형진은 그렇게 주위의 얘기를 들으며 거래소에 들어간 뒤, 곧바로 각종 금속의 주괴를 사들였다.
사실 금속 가공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고달프며 또한 귀찮은 것이 바로 제련 또는 정련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순수한 원소를 뽑아내어 덩어리로 만드는 이 과정은 그 순도를 높이는데 무척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떻게 보면 형진이 금속 가공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선뜻 특화를 선택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제련이 되어 주괴가 만들어져 있는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완전히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해서 주괴로 만드는 과정에 비하면, 이러한 주괴의 형태를 변화시켜서 물품을 만드는 건 오히려 간단한 일. 지금이라면 이전에는 생각만 하고 실현을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거래소에서 필요한 재료와 장비들을 충분히 사가지고 온 형진은 아틀리에의 한켠에 금속 가공에 필요한 설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충 아틀리에 한쪽에 대장간 비슷한 것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산드린 영지의 영주 대리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사냥 가는 거에요?”
어떻게 알았는지 하엘의 등에 탄 채 배낭을 짊어진 여신이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 설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아닙니다. 그냥 좀 볼일이 있어서요.”
“아…”
형진의 말에 여신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근 사흘 동안 마눌들의 수발을 드느라 여신에게 별로 신경 쓰지 못했다. 원래부터도 공포와 죽음이 의존증이 있다고 할 정도의 여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며칠이나 방치되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어쩐지 강아지 같다. 한쪽 구석에서 꾸벅거리며 졸고 있다가, 주인이 밖으로 나가려는 기척을 보이기가 무섭게 산책 가는 줄 알고 꼬리를 치며 엉겨 붙는 강아지.
“여신님. 그럼 같이 가시겠어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형진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여신은 조금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의 손 위에 사뿐하게 올라선다. 형진은 그런 여신을 미엘의 꼬리로 뒤덮인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 주었고, 여신은 수줍은 표정을 지은 채 푹신한 꼬리 속에 파묻힌 듯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사냥이 아니라길래 그냥 푹 쉬게 되나 싶었는데, 또다시 형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아, 파괴와 재생이시여. 저는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겁니까.
하지만 형진은 하엘이 그렇게 풀죽은 모습을 보이거나 말거나 마눌들에게 메신저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 요정의 문을 열고 산드린 영지에 위치한 신전으로 이동했다.
“대리자님을 뵙습니다. 최고 사제님과 영주 대리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요정의 문을 넘어가자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푸근한 미소가 인상적인 사제 하나가 그를 맞이한다. 형진은 사제의 안내를 받아 최고 사제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최고 사제와 웬 소박한 인상의 귀족 아가씨 한 명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를 맞이한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최고 사제와 함께 차를 나누고 있던 귀족 아가씨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산드린 영지의 영주 대리를 맡고 있는 엔델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하지만 형진은 최고 사제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앉자마자 바로 이렇게 말했다.
“날 보자고 한 이유는?”
“…”
다짜고짜 하대. 엔델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전에… 제 앞에 계신 분께서 어떤 위치에 계신 분인지 알고 싶습니다만.”
“어째서?”
“저와 제 가족, 그리고 이 영지의 미래를 논하는 중차대한 상황입니다. 최소한 누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인지는 알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격?”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웃기는 소리가 하고 있네.”
“네? 그게 무슨…”
“순진한 척 하기는. 아직 이해가 안 돼? 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척 하는 거야? 아아, 대답할 필요 없어. 문자 그대로 필요 없어. 애초에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보를 하기 위해서니까.”
“…”
엔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다. 아직 자신은 조건을 꺼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 조건을 듣기도 전에 이미 결정 사항을 통보하려 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최소한 협상 비슷한 상태로라도 넘어가야만 한다.
“우선 제 얘기를 좀 들어보시고…”
상대의 무례함에 대해 화가 끓어오르려 하는 것을 참으며 엔델은 그렇게 말했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영지를 넘기고 싶으면 그냥 넘겨. 조건 달지 말고. 그게 싫으면, 그냥 버텨 봐. 그래봐야 성 하나 달랑 남을 테니까. 영지도 영민도 없이 성 하나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기사들이며 병사들을 먹일 수단조차 남지 않은 상태에서 성만 움켜쥐고 있어봐야 뭘 할 수 있을까. 버텨보고 싶으면 버텨봐. 스스로 성 안에서 밭 갈고 가축을 먹이면 밥이야 먹고 살 수 있겠네. 그렇지?”
“…”
형진은 입술을 깨문 채 몸을 떠는 엔델을 향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얘기는 끝났다. 그러니 이만 물러가도록.”
“이… 이이…”
엔델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나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아버지의 명에 의해 영주 대리라는 얼토당토 않은 자격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산드린 영주는 작은 영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일찍부터 엘 파르드 각지에 사람을 풀어 정보를 모으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와 같은 작은 영지의 영주는 무력이 없다면 정보라도 확실하게 움켜 쥐고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로우너 자작령에서 벌어진 일이 전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한 정보를 확인한 그는 형진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서로 다른 세 개의 종파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 하고 있는 강력한 권력자의 존재를.
와병중이라는 이유를 걸고 이렇게 엔델을 신전으로 보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바로 그 권력자의 옆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딸을 우겨 넣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이 새로운 권력자의 옆에 자신의 딸이 자리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영지의 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 새로 열릴 나라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리라는 판단 하에.
하지만 그러한 의도는 처음부터 틀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형진은 이런 식으로 기존 영주들과 정략으로 맺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엔델이 그의 곁에 자리할 수 있는 기회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하나를 받아주면 둘을 받아줘야 할 빌미가 된다. 그렇게 하나둘씩 예외가 늘어가면 그것은 이후 커다란 암 덩어리로 자라게 마련. 형진이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가 있을까.
살려달라고 울며 빌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잔머리를 쓰려고 들다니.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할 정도로 형진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다.
“안들려? 그럼 다시 말해둘 테니 똑바로 들어.”
형진은 얼굴에 짓고 있던 비웃음을 지운 채 천천히 살기를 퍼뜨리며 말했다.
“꺼져.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