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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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즉위
“와…”
솔직히 말하자면, 제랄딘도 이렇게 형진이 흑요호의 형상을 소환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 역시 미엘과 계약을 한 몸이긴 해도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오직 희망과 생명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 형진만이 가능한 일인 것이다.
흑요호와 계약한 제랄딘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는데, 공작과 그 심복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공작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두 명의 상급 기사 그랙커스와 소그마 역시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에 본능적으로 손을 가져가긴 했어도 차마 그걸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뭉클거리는 연기 같은 느낌의 꼬리들이 다가와 자신의 몸을 휘감자 그들은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헉!”
“자, 잠깐!”
당황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른 그들이었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마치 검은 연기 같은 형태로 뭉클거리는 거대한 흑요호의 등 뒤에 자리 잡은 뒤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얼이 빠진 공작 일행을 보며 피식 웃어버린 형진은 이내 다시 힘을 운용하기 시작했고, 시커먼 먹구름과도 같은 형상을 지닌 흑요호의 형상은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으음…”
내색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공작은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지면을 바라보자 발끝으로 피가 몰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랄딘은 그런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상급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형진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위력 시위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신의 대리자라는 신분을 넘어 일신에 지닌 힘조차도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식의 퍼포먼스라고나 할까. 확실히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공작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이후로는 형진을 보통의 인간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렇게 공작 일행에게 흑요호의 힘을 드러내 보인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그럴 일이 있을 경우, 더 이상 제랄딘이 지닌 힘을 숨기지 않아도 되도록 밑밥을 까는 것이라고나 할까. 비록 제랄딘의 힘은 형진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지만, 이렇게 미리 드러내 보이면 이후에 제랄딘이 힘을 드러내더라도 형진의 반려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아, 참고로… 제가 이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건 비밀입니다. 공작님은 물론이고 함께 하신 분들 역시 가족이라고 생각하기에 스스럼없이 드러낸 것 뿐이니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 물론입니다.”
아래쪽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며, 그러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공작이 대답하자 유슬라 백작이나 다른 상급 기사들도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아, 벌써 거의 다 와가는 군요.”
“음…”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형진의 말에 따라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기 가문의 본성이 손바닥 크기로 보이는 그 광경이라니. 이쯤되면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을 정도다.
“이대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놀랄 테니 좀 실례하겠습니다.”
“네?”
뭘 어쩌려는 건가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발 아래 위치하고 있던 흑요호의 형상이 확 사라져 버린다.
“…”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공작과 그의 일행들은 갑자기 숨이 턱하고 막히는 듯한 느낌에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상상했다. 이 까마득한 고공으로부터 지면을 향해 추락해 버리는 광경을.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상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형진의 몸으로부터 뻗어 나온 꼬리가 그들의 몸을 감싸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형진은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지면으로 내려섰다. 형진만큼의 초월적인 힘을 발현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날지는 못해도, 제랄딘 역시 흑요호의 힘을 이용해 공중에 살짝 뜬 상태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했다. 지금 천천히 지면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 것은 그런 부양 능력의 응용인 셈이다.
“다 왔습니다.”
본성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무사히 내려앉자 공작과 그 일행은 그제서야 눈을 뜨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지금 그들의 심정은 지구 식으로 말하자면 부르즈 할리파 꼭대기에서 번지 점프를 한 듯한 느낌일 테니까. 이전에 비슷한 경험이라도 해봤으면 모르되, 예고조차 없는 상태에서 난데없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기사는커녕 기사 할아버지가 와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습니다.”
여느 때처럼 보호와 균형이라도 대동했다면 모르지만, 여신들은 지금 한창 황혼과 망각을 신도들에게 소개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라 함께 하지 못했다.
결국 공작과 그 일행들은 그대로 주저 앉아 식은땀을 한 사발이나 흘리고 나서야 겨우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물론 여기서 제 정신이라는 것은 엎어져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두 다리로 딛고 설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 와중에도 비틀거리거나 다리를 후들거리는 걸로 봐서는 은근히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제가 너무 무리한 일을 했나 보군요. 일단 이거라도 드시면서 안정을 취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곧바로 형진의 손이 한번 휘저어지자 풀밭 위에 돗자리와 담요가 깔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내저어 보이니 티세트와 디저트를 담은 손수레가 모습을 드러낸다.
“드세요.”
“고맙다.”
제랄딘이 손수 따라준 차를 마시고 간단한 핑거 푸드 몇 개를 집어 먹고 나서야 공작은 겨우 떨림이 멎었다. 놀라게 하는 건 놀라게 하는 거고, 괜히 공작이나 그의 심복들이 충격으로 몸져 눕거나 하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라 적당한 처방전을 내린 것이다. 따뜻한 차 한잔은 물론이고 형진이 직접 만든 핑거 푸드라면 보호와 균형의 권능 정도는 아니더라도 심신을 차분하게 안정시키는 건 가능한 일이니까.
본의 아니게 봄날의 피크닉을 마치고 나자, 공작은 그제서야 신전이 들어설 입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보이시는 이 언덕을 기점으로 신전을 건설할 계획입니다.”
“여기요?”
“네. 너무 먼 거리도 아니고,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니 문제가 생겼을 때 저희들이 지원을 하기도 편합니다. 필요한 부대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공간도 충분한 편이니까요.”
원래는 본성 옆에 새로운 시가지를 만드는 식으로 지을 생각이었다. 처음 심복들과 세운 계획도 그런 식이었지만 방금의 경험을 통해 그 계획은 전면적으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형진이나 제랄딘이 신전을 쥐고 있는 이상 엘 파르드에서 벌여졌던 것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만약 두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신전을 옮기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미리 미리 대비를 해 두는 편이 좋다.
형진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공작의 말에도 그냥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공작쯤 되는 대귀족이라면 이런 식으로 나중을 대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모처럼 왔으니 터 정도는 잡아 드리도록 하죠.”
“네?”
형진은 대충 언덕의 경관을 훑어 보더니, 다시금 꼬리를 확 펼쳐내고는 그것으로부터 힘을 쏘아냈다.
번쩍!
그냥 뭔가 빛이 한번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다음 순간이 되었을 때, 공작은 언덕 위가 평평하게 깎여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 번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당연하다. 방금 전 보여준 힘이라면, 성벽 같은 건 그냥 가볍게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음… 이쯤이 좋으려나.”
형진은 대충 위치를 가늠해 보고는 사방이 잘 내려다 보이는 위치로 가서 손을 뻗었다.
[현재 위치에 성소를 설치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Y/n)]“물론.”
그의 대답과 함께 지면으로부터 작은 진동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하얀 기둥이 땅위로 솟아나며 하나의 커다란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바로 성소가 만들어진 것이다.
“호오.”
그러나 이번에는 형진도 작게 감탄했다. 이전에 그가 만들었던 성소들은 크고 웅장하다는 느낌보다는 여신의 쉼터라는 느낌을 가진 작고 아담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성소는, 그 자체로 작은 신전이 되어도 무방할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대리자의 권한만을 가지고 있었을 때와는 달리, 여신이 지닌 힘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 힘의 속성에 의해 권한 역시 확대되어 버린 것이리라.
“딱 좋군.”
형진은 중앙에 솟아나는 샘을 바라보는 형태로 성소 주위에 서로 다른 세 가지 성물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아…”
사제는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작은 신전이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공작은 물론이고 그를 따라온 세 남자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신전 하나가 뚝딱 만들어지는 모습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성소가 만들어지고 서로 다른 세 개의 성물이 자리를 잡자, 방금 전의 일격으로 깎여 나간 지면으로부터 파릇한 새싹이 피어나더니, 이내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새로운 신전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여신들의 힘이 이 순간 아주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단… 하군요.”
공작은 그 모든 모습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단 그리칸으로 돌아갈까요. 남은 하나의 성물도 마저 설치를 해야 이곳과 오갈 수 있을 테니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감탄하고 있던 공작과 그의 심복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갈 때도 올 때와 같은 일을 경험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형진이 만들어 보인 것은 요정의 문이었다.
어차피 공작 일행의 속내 정도는 환하게 꿰뚫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진은 모르는 척 굳어 있는 그들에게 물었다.
“뭔가 본성에 급하게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거듭 부정하고는 형진이 이끄는 대로 요정의 나라를 경유해 다시 그리칸에 위치한 저택의 응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성물은 신전에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브라드로슈에 파견할 사제들의 인선도 마쳐 두겠습니다. 사제들이 머물 거처가 완성되면 신전을 통해 전갈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진과 제랄딘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환송을 받으며 저택을 빠져 나왔고, 이내 신전으로 가서 황혼과 망각의 성물을 설치하는 일까지 마치고 나서야 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빠앗!”
“오! 우리 공주님들, 잘 놀고 있었어요?”
“빠하아!”
“아빠가 없어서 심심했다고? 저런. 미안해서 어쩌지? 그런 의미에서 비행기를 태워주마!”
“빠하하하!”
비행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렇게 놀아주는 형진의 모습에 미엘과 제랄딘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녀석들이 정기를 배불리 먹고 잠이 들자, 형진은 쉴틈도 없이 엘리시온으로 넘어가 다시 한 번 대규모 퀘스트를 발주했다.
“응? 이게 뭐지?”
“헉. 또 퀘스트다!”
성물 제작을 통해 득을 톡톡히 본 생활러들은 그렇게 벌어들인 캐시를 통해 아주 흡족하고도 풍요로운 엘리시온 라이프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혹시 그런 의뢰가 또 나오지 않는지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던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또 한번 엄청난 규모의 퀘스트가 발동되어 버린 것이다.
“이건… 뭐지?”
“잠깐만… 헉? 설마?”
개별적인 퀘스트만 봐서는 그저 구조물이나 장식품 같은 것을 만드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유저들은 그 개개의 구조물과 장식품을 얼른 모아서 조합을 해보았고, 그 결과 이번 퀘스트가 무엇을 위해 발동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미친! 조립식 성이라고?”
그렇다. 형진이 발주한 퀘스트는, 거대한 하나의 성을 일정 크기로 분할한 것이다. 성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언제 일일이 만들고 있나. 마치 거대한 선박을 제조하는 것처럼 블록 단위로 제작해서 레고 쌓듯이 조립해 버리면 되는 일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