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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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환상향
탁 트인 테라스에 자리 잡은 풀장에서 수영복이라는 것을 입고 물놀이를 즐기고자 했던 레나리스의 야망은 이렇게 좌절이 되고 말았다. 결국 레나리스는 시녀들이 엄중하게 감시하는 가운데 발만 담근 채 찰방거리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냥 확 물속으로 뛰어들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 드레스가 골치다. 어른들의 드레스 정도는 아니더라도 물에 젖으면 제대로 무거울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헤엄이라는 것을 쳐본 적이 없다보니 겁이 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풀장 모서리에 앉아서 종아리까지 담그고 있었지만, 잘 살펴보니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서도 족욕을 할 수 있도록 도랑 같은 것이 졸졸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와아!”
천재다. 이 궁전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천재다. 레나리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얼른 소파에 앉았다.
풀장에 자리 잡은 소파는 무언가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전까지 레나리스가 앉아 봤던 소파들과는 달리 몸 전체가 완전히 푹 잠기는 느낌으로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냥 등을 기대고 앉았을 뿐인데도 마치 물속에 빠져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로 물이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정도로 푹신한 느낌이라는 뜻이다.
“음…”
그렇게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자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포근한 햇살과 살살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발끝을 간질이는 물줄기 때문인지 솔솔 잠이 오기 시작한다.
“볕가리개를.”
“네.”
하지만 모처럼 내리쬐는 햇빛을 맞으며 낮잠을 잘까 하던 레나리스의 야망은 이번에도 좌절되고 말았다. 지켜보고 있던 유모가 시녀들을 시켜 볕가리개를 드리우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
레나리스는 불만스럽다는 의사 표시로 볼을 부풀렸지만 유모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괜히 볕을 쬐는 걸 가만히 놔뒀다가 살결이 검게 그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어쩔 수 없다. 즉위식이 끝난 뒤라면 몰라도, 새로운 엘 파르드의 국왕과 마주하기도 전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다른 나라의 왕족들 앞에게 라야바르트의 왕녀는 밭일이라도 하는 거냐는 식으로 놀림감이 되기 딱 좋다.
레나리스가 그렇게 만족과 불만을 오가는 휴식 시간을 취하고 있는 동안, 시녀들은 궁전 안에 비치된 여러 가지 집기들을 보며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상에… 이것 좀 봐.”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그녀들을 사로잡은 건 영롱한 크리스털 식기들이다.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하면서도 마치 빵틀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크기를 지닌 수많은 유리잔과 식기들은 시녀들로 하여금 보는 것만으로도 빠져 드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고 있었다. 뿐인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순백색의 얇은 색을 지닌 도자기들은 그 우아한 빛깔과 겉면에 새겨진 아름다운 그림들의 조화가 마치 다소곳한 귀부인을 연상케 만들 정도다.
시녀들을 넋이 나가도록 만든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면… 와… 정말 나오네.”
“나도 해볼래!”
일부러 물을 뜨러 갈 필요도 없이 수도꼭지만 위아래로 내리면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알아서 나온다. 뿐인가. 일부러 조리대로 옮길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것을 한두 걸음 안에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키친은 또 어떤가. 여기에 손잡이만 돌리면 파란 불꽃이 활활 피어오르는 화덕과 오븐, 그리고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인 듯 보이는 냉장고까지 더해지면 이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천재다. 이 부엌을 만든 사람은 천재다! 시녀들 또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시험 삼아 간단하게 차를 끓여 보기로 했다.
“근데 이건 뭐지?”
“응?”
한 무리의 시녀들이 차를 끓이려고 주전자에 물을 담고 화덕에 그것을 올리는 동안, 또 한 무리의 시녀들은 부엌 한켠에 자리 잡은 기묘한 도구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것은 믹서기라는 도구로서, 재료를 잘게 분쇄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리에 쓸 재료를 다지거나 간단하게 재료를 갈아 즙을 낼 때도 유용합니다…”
“…”
한 시녀가 비치되어 있는 안내서를 읽자 시녀들의 눈은 장난꾸러기들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시험해 보자!”
그녀들은 얼른 냉장고에 마련된 과일을 정성껏 물에 씩은 다음 안내서에 나와있는 주스 만들기 항목대로 작게 썰어서 약간의 물과 함께 믹서기에 넣고 작동을 시켰다.
“와!”
“정말로 되잖아!”
재료들이 투명한 믹서기 안에서 잠시 회전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즙이 만들어지는 모습에 시녀들은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궁전 안에는 믹서기를 능가할 정도의 대단한 물건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편의성이라는 것은 중독되기 마련이다. 시스템키친이든 에어컨이든 믹서기든 냉장고든, 그런 것이 없었어도 지금까지 이 세계의 사람들은 별 문제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일단 그 편의성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것이 없는 생활이 불편하게 느껴지게 된다.
형진은 이번에 즉위식에 여러 나라의 고위층들이 참석하는 것을 하나의 기회로 보았다. 기왕 불러내어 공짜로 먹이고 재우는 것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고로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 왕족쯤 되면 그런 유행의 흐름을 선도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황녀님. 시원한 과일즙입니다.”
“응?”
소파에 누워서 맨발로 찰박찰박 물장난을 하며 살짝 잠이 들뻔했던 레나리스는 유모의 말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맛이 좋네요. 드세요.”
“응!”
유모가 먼저 기미를 마친 다음 잔을 건네준다. 레나리스는 영롱한 빛을 자랑하는 크리스털 잔 안에 담긴 아름다운 빛깔의 과일즙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살짝 잔을 기울여 맛을 보았다.
“맛있어! 게다가 시원해!”
“…”
유모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그녀는 형진이 이렇게 기물들을 마구 풀어놓는 이유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지 않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레나리스가 이곳 왕실과 가까워질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하나라도 더 체험하고 겪을수록 막상 얼굴을 마주했을 때 대화거리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레나리스 본인은 그런 식의 정략적인 판단은 전혀 떠올리지 못한 채 아름다운 풍경과 안락한 소파와 맛있는 주스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주스를 마시며 바깥의 풍경을 살피고 있던 레나리스는, 잔이 비자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밖에 나가보고 싶어!”
“밖에요?”
“응. 숙소가 이 정도면 바깥에도 대단한 것이 많을 것 같아. 유모 생각은 어때?”
“그야…”
확실히 숙소 안에만 처박혀 있어서는 알 수 없는 것도 많다. 게다가 기왕 방침을 결정했다면,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도 있다.
“알겠습니다. 플로 후작에게 말해 보도록 하죠.”
“고마워!”
“별 말씀을.”
자작부인이 레나리스의 뜻을 전하자 플로 후작은 좋은 생각이라며 찬동했고, 곧바로 종을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정 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나리스 왕녀님이 숙소 밖으로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하시는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탈것이 필요하십니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보기에는 작은 요정들에 불과했지만, 자작부인은 그들에게 함부로 말을 낮출 수가 없었다. 앞서 자신들을 맞이하러 왔던 요정의 일이 떠오른 탓이다. 요정이 왕의 제자라고 스스로를 칭할 정도라면, 다른 요정들도 단순한 사용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기묘한 왕성에 도착한 이후로 자작부인은 달리 사람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를 보지도 못했다.
잠시 기다리자 요정 근위대가 짊어진 가마가 호위 병력으로 보이는 토끼들과 함께 도착했다. 그렇게 준비가 갖춰지자, 레나리스는 요정 근위대가 짊어진 가마를 타고 토끼들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를 나섰다.
-간단하게 성 주위를 돌아보시겠습니까?
안내인으로 따라붙은 롬이라는 이름의 요정이 그렇게 묻자, 자작부인이 레나리스의 의사를 물었다. 말없이 레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작부인은 그제서야 롬에게 대답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롬의 인도에 따라 가마는 길을 따라 움직이더니 성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로 올라가는 건가요?”
-네. 주위 경관을 살펴보기엔 그만한 장소도 없죠.
“…”
좀 당황스럽다. 보통 왕성을 구경하고 싶다고 정말로 성벽 위에 올라가게 만드는 경우가 있던가. 기껏해야 산책로라든가 다른 궁전들을 보여준다든가 하는 정도지, 이런 식으로 아예 성 자체를 보여주는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완만하게 조성된 길을 따라 올라가 성벽 위에 올라서자, 어째서 이 요정이 이리로 안내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와아…”
성벽 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바닷바람이다. 보호의 권능 때문에 많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진짜 바다라는 것을 느끼도록 만들기에는…
“어?”
“이, 이건…”
“헉!”
레나리스는 물론이고 그녀를 따라오던 네이스 자작부인, 그리고 뒤따르던 시녀나 호위 기사들 역시 기겁을 하고 놀랐다.
처음에는 그냥 성벽 밖에 바다가 펼쳐진 걸로 보였다. 하지만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뒤이어 자신들이 딛고 선 성벽 너머의 바다 너머 광경을 인식했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가까운 바다 너머와 수평선이 서로 구분되어 있는 그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 규모가 큰 탓에 가까운 곳의 바다와 먼 곳의 바다가 층이 진 것처럼 나뉘어져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이내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고, 그것이 단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그대로 경악해 버리고 말았다.
“떠 있어…”
“창공의 섬… 이라고?”
그렇다. 이 섬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바다와 확연하게 구분되어 하늘 위에 떠 있었다. 적어도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멋지죠?
“…”
자랑 섞인 롬의 말이 들려왔지만 레나리스는 물론이고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이건 사기다.
이 섬은 처음 형진과 식구들이 자리를 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망망대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을 뿐, 하늘 위에 떠 있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허세와 망상의 힘에 의해.
형진은 각국의 사절단에게 이 왕성이 바다 한복판에 위치한 섬임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미친척하고 섬의 위치를 탐문하려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비록 보호의 권능이 펼쳐져 있다고는 해도, 어떻게 보면 지리적으로 본토에서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니 그것을 확인하려 드는 자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때문에 허세와 망상의 단장의 힘으로 망상 필드를 펼쳐 섬이 공중에 떠있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그는 희망과 생명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상태였고, 덕분에 극단적으로 넓어진 망상 필드의 효과는 섬 전체를 하늘 위에 떠있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로서는, 눈앞에 펼쳐진 그 모든 일들이 단순한 눈속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신조차 속여 버리는 허세와 망상의 힘을, 추종자조차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무슨 수로 꿰뚫어 보겠는가.
-저 쪽에 보이는 것은 대관람차입니다.
“…”
롬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소개한 것은, 일전에 형진이 만들었던 거대한 풍차를 개조한 대관람차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의 풍차에 불과했지만, 성을 개축하면서 풍차 역시 대대적인 개조를 거쳐 지금 눈에 보이는 것곽 같은 거대한 랜드마크로 거듭나게 되었다.
“대관람차가 뭐죠?”
유모가 전할 것도 없이 레나리스가 불쑥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롬은 씩 웃으며 자랑스럽게 소개를 했다.
-왕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놀이기구입니다.
“놀이기구요?”
레나리스는 다시 한 번 대관람차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돌아가는 커다란 바퀴에 바구니라고 해야 할지 마차라고 해야 할지 모를 것들이 매달려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보니 어떤 식으로 운행되는 건지 감이 잡힌다.
“저도 탈 수 있나요?”
“와, 왕녀님!”
기겁을 한 유모가 그렇게 외쳤지만, 롬은 그런 유모나 다른 수행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타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