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62
562====================
127. 인수
통로에 일렁이던 그림자들은 들켰다는 사실을 깨닫자 일제히 검은 파도처럼 덮쳐 왔다. 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현재에는 의미 없는 마지막 발악일 뿐이다.
그림자들의 정리가 끝나고 나서야 형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돌바닥에 부딪히는 단단한 구두 굽의 소리가 울려 퍼지다가, 어느 순간 뚝 멈추어 버린다. 그리고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바닥이 무너지며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형진은 물론이고 두 부녀 또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갑자기 바닥이 쑥 하고 꺼지는 바람에 힐리에타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귀여운 비명 소리를 냈지만, 그건 갑작스런 상황에 깜짝 놀라서일 뿐이다.
힐리에타는 비명을 지른 자신을 스윽 돌아보는 형진의 모습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명에 달리 뭔가 감정이 일어나서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다. 그냥 소리가 들리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리로 움직인 것일 뿐.
다만 계속해서 접하게 되는 이런 저런 함정 같은 것을 보면서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수뇌부가 자리 잡은 곳이라 해도 이 정도의 방어 설비를 갖춰놓고 있는 것은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애초에 방어설비라는 것은 누군가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 하지만 ‘가장 오래된 자’는 이 행성 안에서라면 가히 신에 버금가는 권세를 지닌 존재다. 초인적인 능력과 불사의 신체를 가진 오래된 자들을 통해 강고한 지배 체제를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과연 이런 방어 체계가 필요할까. 특히나 무너지는 통로처럼 만들기도 어렵고 한번 발동하고 나면 다시 수복하는 것이 꽤 귀찮아질 수밖에 없는 그런 방어 설비라니.
자신도 왕의 지위에 있고 왕성 라이언하트라는 근거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런 식의 함정 같은 건 갖추어 두지 않았다. 함정은커녕 리조트 같은 느낌으로 각국의 왕족이나 지부장급 집행자들에게 숙소를 빌려주기까지 할 정도다.
애초에 황혼의 결계와 보호의 성역이라는, 일반적인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절대적인 방어 체계가 있는 이상 굳이 내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자칫 실수로라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함정 같은 걸 설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신의 권능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가 않다. 수많은 인형들은 물론이고, 만들기조차 번거로울 것 같은 함정들은 일견 던전을 연상케 할 정도다.
“‘가장 오래된 자’는 어떤 인물이지?”
그제서야 형진의 입에서 자신이 상대하고자 하는 인물에 대해 묻는 질문이 다시 나왔다. 남의 집에 들어와 다 때려부수고 잡아 죽인 다음에 나오는 질문 치고는 너무 늦어 버린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직접 뵌 적이, 아니 만난 적이 없노라 말씀드렸습니다만.”
즈라탈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저으며 한 번 더 물었다.
“보지는 못했어도 들은 바는 있을 것 아닌가.”
“그것이… 아주 오래전, 고명한 학자였다는 풍문은 얼핏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제 위계가 워낙 낮은 터라… 하지만 앞서 주인께서 굴복시킨 렐그낙이라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는 이곳 성전을 수호하는 자이기도 하니까요.”
“흠… 알았다.”
즈라탈은 렐그낙을 불러오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형진은 굳이 그런 식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다시 불러오는 것도, 그것을 기다리는 것도, 그리고 그렇게 불러온 렐그낙을 심문하는 것도 귀찮았던 탓이다.
허공을 걷는 느낌으로 통로를 빠져 나가자, 다시 한 번 봉인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문은 본래의 용도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스며들어 있던 악령의 비명과 함께 역시나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새롭게 드러난 구역은, 이를테면 박물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리인지, 아니면 달리 무언가로 만들어낸 격벽인지 모를 것들 안에 이 행성에서 살고 있던 모든 생명체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표본들이 격리되어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그냥 박제라든가, 포르말린에 담겨진 상태였어도 충분히 기괴하고 끔찍했을 모습. 그러나 이 박물관 안의 모든 표본들은 언데드로 변해 있는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언데드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뼈가 드러나고 살이 뭉개진 채 우워어어어 내지는 그아아악 같은 소리를 내지르는 그런 언데드들 말이다.
“이, 이건…”
“세상에…”
자신들도 바로 얼마 전까지 언데드였던 주제에,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그 기괴한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기야 그들이 접했던 언데드들은 이런 저급한 수준의 것들과는 비교하기 힘든 그런 것들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싶지만.
형진도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이 언데드들을 파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것들은 이 행성의 생물체가 총 망라된 귀중한 자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탓이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데드는 언데드일 뿐.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다시금 형진의 손에 영혼포식자가 쥐어졌다. 영혼포식자는 가차 없이 격벽을 파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생명력을 인식하며 아우성치던 언데드들을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정리는 순식간에 끝났다. 자유로운 상태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형진의 일격을 작은 우리 같은 곳에 갇혀 있는 언데드들이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즈라탈과 힐리에타의 표정이 숙연해 졌다. 달리 누군가의 설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들은 알아채 버렸다. 여기 모여 있던 언데드들이, 오래된 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실험의 용도로서 채집되어 보관된 것임을 알아버린 것이다.
형진은 부서진 박물관을 가로지르며, 앞서 즈라탈이 ‘가장 오래된 자’를 학자 운운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이제는 사실상 확정적이다.
이곳의 주인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모두에게 복잡한 생각을 던져준 박물관을 지나자 다시 통로가 나타났다. 앞서 지나온 무너지는 통로와 비슷한 형태였지만, 이번에는 딱히 그런 식의 함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통로를 빠져 나가자, 이번에는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방금 전에 보았던 끔찍한 풍경들과는 명백하게 대비되는 풍경에 힐리에타가 작은 탄성을 터트린다. 하지만 형진의 표정은 더욱 굳어 버렸다. 얼핏 보기에는 아름답고 신비한 기회요초들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이 또한 무언가의 힘에 조작된 언데드임을 단숨에 알아본 것이다.
신경질 적으로 그의 손에 들려있던 영혼포식자가 힘을 발휘한다. 힐리에타는 다짜고짜 아름다운 나무와 풀들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는 그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가 감탄했던 아름다운 모습의 식물들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런. 이런. 이 귀여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때 정원 반대편의 출구로부터 한 명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있는 백발의 노파가 지팡이를 짚은 채 혀를 차며 한줌 재로 변하는 식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다른 말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형진의 손가락이 곧장 노파에게로 향했고 어김없이 영혼포식자의 공격이 이어졌다.
퍽!
노파는 순간 머리가 훌떡 뒤로 넘어가 버렸다. 즈라탈도 힐리에타도 거침없는 형진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노파는 이내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어느 틈엔가 그녀의 이마에는 희미한 연기를 내뿜는 시커먼 구멍이 나 있었다.
“너무하는군. 아무리 그래도 힘없는 노인을 다짜고짜 공격하다니.”
말을 걸어온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약점을 피해 공격을 가했건만, 자신이 그의 공격을 견뎌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형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영혼포식자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권총보다 훨씬 큰, 앞쪽에 원뿔형의 탄두가 달린 긴 원통형의 무기. 바로 알라의 요술봉이라 일컬어지는 RPG-7이다.
영혼포식자의 변형이 끝나자 형진은 그것을 어깨 위에 견착하고는 노파를 향해 발사했다. 그러자 반동조차 없이 탄두가 발사되어 날아가더니 폭발과 함께 노파를 단숨에 날려버린다.
“…”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진짜 RPG-7이었다면 형진의 뒤에 서 있던 그들은 꼼짝없이 후폭풍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이야 어찌 되든 간에, 형진이 쏜 무기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영혼포식자. 그가 연상한 이미지에 맞는 형태와 효과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어디서 장난질 따위를.”
방금 모습을 드러냈던 노파는 ‘가장 오래된 자’가 아니다.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봐서는, 앞서 쓰러뜨렸던 무수한 ‘인형’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느낌. 다만 근원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상당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대화를 시도하는 척하며 접근하여 자폭하는 종류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형진에게는 실제로 자폭을 시도하더라도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었겠지만, 즈라탈이나 힐리에타의 경우엔 큰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실상을 알지 못하는 즈라탈이나 힐리에타는 그저 거침없는 형진의 손속에 놀라며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를 뿐이었지만, 뒤이어 일어난 상황에서는 그들도 상대의 의도를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이번엔 아이들이다. 가운 같은 것을 입은 아이들이 울며불며 통로 저편에서 몰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박물관 같은 것을 본 상황이기에 즈라탈이나 힐리에타는 이 아이들이 ‘가장 오래된 자’의 실험에 쓰일 희생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형진의 손가락이 그들을 향했다. 그리고 즈라탈과 힐리에타가 놀랄 틈도 없이 아이들마저 단숨에 쓸어버리기 시작한다.
꽝! 푸쉬시시!
공격이 적중하는 순간 아이들은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다. 폭발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고, 뭔가 몸에 굉장히 좋지 않을 것 같은 가스나 연기 같은 것을 뿜어내며 녹아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거침없이 공격을 가하는 형진의 모습에 놀랐던 즈라탈이나 힐리에타도 이쯤 되자 얼굴이 더욱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장 오래된 자’의 술수가 그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몰려나오는 아이들 형상의 ‘인형’들마저 쓸어버리고 나자, 그들은 마침내 널따란 응접실 같은 공간에 도달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저택의 거실처럼 계단과 함께 여러 개의 문이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진은 물론이고 즈라탈과 힐리에타 역시, 비로소 자신들이 ‘가장 오래된 자’가 머무는 장소에 도착했음을 이해했다.
또각또각.
정성스럽게 마감된 대리석 바닥을 통해 누군가의 구두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붉은 빛의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미녀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새빨간 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붉은 입술. 창백하지만 투명한 흰 빛의 피부까지.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요요로운 미소까지 머금은 그녀의 모습은, 실로 요부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신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실로 매혹적이라, 즈라탈은 물론이고 같은 여성인 힐리에타 마저 홀린듯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자신들이 극히 위험한 장소에 와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이나마 그런 식의 생각마저 날려버릴 정도로 그녀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어서오세요. 저는…”
형진의 표정은 심연의 눈가리개라든가 착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장비로 인해 드러나지 않았지만, 즈라탈과 힐리에타가 그같은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색기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러나.
형진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자는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들어올렸던 손을 다시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이런 시시껄렁한 장난질을 할 셈인가.”
그러자, 형진의 말에 호응하듯 그들이 서있던 공간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