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63
00563 127. 인수 =========================
격렬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해진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격심한 지진이 그들이 딛고 선 공간을 휩쓸어 버린다.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기겁을 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함께 붙잡혔을 때만 해도 데면데면한 기색이더니, 이제는 아주 덥석덥석 잘도 안는다. 역시 위기는 사람들의 인연을 돈독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두 부녀와는 달리, 형진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다. 참 쓸데 없다는 듯한 기색으로 한숨마저 푹푹 쉬고 있다.
“앗! 위험합니다!”
“하압!”
격심한 지진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 주위를 살피고 있던 즈라탈의 음성과 함께 힐리에타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형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커다란 샹들리에가 그녀의 공격에 박살이 나며 옆으로 날아가 버린다.
“오! 대단해! 역시 내 딸이야!”
“그럼요. 저도 할 땐 한다고요. 크흠.”
“아, 미안.”
서로 자화자찬을 하던 두 부녀는 그제서야 서로 꼭 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격렬한 지진은 계속 그들이 있는 곳을 뒤흔들었고, 이제는 외복이나 천장의 구조물들도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다.
“위험합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함정일지도 모르니…”
즈라탈이 불안한 기색을 가득 담아 그렇게 말했지만,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품에서 짤막한 막대기 하나를 꺼내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화아악!
툭 건드리는 듯한 느낌으로 막대기가 닿은 허공으로부터, 파문이 일어난다. 잔잔한 수면 위에 물방울이 떨어졌을 때처럼 그때까지 보이던 모든 것들이 파문에 휩싸여 출렁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버린다.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방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입만 쩍 벌리고 다시금 바뀌어 버린 공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새롭게 드러난 공간은, 마치 영묘를 연상시키는 석실이었다. 사방으로 정성스럽게 마름질된 석벽이 에워싸고, 중앙에는 거대한 석관이 제단 같은 장소 위에 놓여져 있는 그런 장소.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미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격심하게 흔들리던 지진은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났던 저택의 내부 같은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기이한 느낌으로 타오르는 푸른 횃불 가운데 놓여진 제단과 석관 뿐이다.
“방금… 그건…”
즈라탈의 질문에 형진은 손에 쥐고 있던 망상구현의 단장을 다시 품에 집어 넣으며 짧게 답했다.
“환상이다.”
“환… 상…”
즈라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생생했던 지진의 환상은 물론이고, 그것을 단숨에 꿰뚫어 보고 파훼시킨 주인의 힘에 경도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였구나. 샹들리에가 떨어져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이유가. 즈라탈은 물론이고, 형진에게 떨어지던 샹들리에를 맞춰 날려 버린 것에 대해 은근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던 힐리에타 또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별 것 아닌 환상에 농락당해 법석을 떨었던 자신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라 버린 탓.
형진은 감각을 혼란시키던 환상을 걷어내고는 가만히 제단 위에 놓여진 석관을 노려보았다. 즈라탈이나 힐리에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형진은 이 제단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저벅.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넌 누구냐.]고압적인, 게다가 상당한 힘이 느껴지는 음성. 하지만 형진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리며 피식 웃어 버렸다.
“말하면 알 수는 있고?”
[그건…]
뻔뻔한 응대에 상대는 말문이 막혔다. 형진은 그 틈을 파고 들었다.
“난 가끔 참 궁금할 때가 있어. 왜 누군가가 기습을 하거나 쳐들어 왔을 때 너님들은 누구세요 하는 식으로 묻는 걸까.”
[어? 그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아니다 싶지? 신분이나 정체를 밝힐 것 같았으면, 처음에 난 누구다 하는 식으로 밝히고 들어왔을 거야. 안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결국 둘 중 하나지. 밝히고 싶지 않다거나,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자, 여기서 문제. 과연 나는 어느 쪽일까.”
[그건…]
괜히 말 한 마디 잘못 꺼냈다가 말려버려서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상대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형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석관을 향해 영혼포식자를 겨눈 뒤 다짜고짜 방아쇠를 당겼다.
구조물이라고 해도 인스턴트 킬의 힘은 어김없이 작렬했고, 고풍스러우면서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던 제단과 석관은 단숨에 허물어져 버렸다.
[아아아악! 안 돼에에에에! 무슨 짓을!]상대는 경악하며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지만, 형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간 초과. 정답은 후자.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네 이노오오오옴!]
마치 사극에 나오는, 거드름 잔뜩 부리다가 뒤통수 맞고 나서야 혈압 올라가는 연기를 하는 전형적인 악역과 같은 노호성을 터트리며 마침내 ‘가장 오래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 안이 검은 기운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휘몰아치기 시작한 어둠은 제단이 있던 장소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사물들 역시 휩쓸린다. 검은 힘이 회오리치며 한 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마치 블랙홀이 현실에 출현한 것을 만화 같은 것으로 표현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이번에도 혹시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던 두 부녀였지만, 형진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어떤 힘이 그와 자신들이 속한 일정한 영역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보았다. 환상이라면 이런 식의 보호는 필요 없는 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현실이라는 의미다.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아마도 제단과 석관은 무언가를 위한 장치였던 모양. 그냥 화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난 듯한 기색이었지만 형진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이 도달한 성전의 중심부가 파괴되며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갖춰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원래 악역이 변신할 때는 가급적 따뜻한 시선과 애정 어린 손길로 지켜봐 주는 것이 주인공의 도리라지만, 형진은 애초에 그런 식의 배려를 베푸는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손을 놓은 채 해볼 테면 해봐라 하는 식으로 놔두고 있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놈에게서 변화가 일어나며 모든 것이 휘말려 들어가는 그 와중에도 자신들 외에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영롱한 빛깔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은 다름 아닌 룻.
전투 와중에 일부러 하나 하나 집어 드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고, 그만큼 귀찮은 일이라 그냥 놔두고 있었는데, 지금 놈이 변화를 일으키며 성전이 붕괴되면서 그것들이 알아서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형이 파괴되며 그 지형에 속한 다른 배경들이 사라지자 알맹이만 남는 식이랄까. 일부러 힘들게 모을 필요 없이 알아서 모아주니 형진으로서는 절로 반색할 만한 일이다.
“오, 대단해. 훌륭해. 더 해봐. 겨우 그게 끝은 아니겠지?”
점점 거대한 형체를 갖춰가는 상대의 모습에 즈라탈과 힐리에타가 질린 표정을 짓는 와중에도, 형진은 오히려 그렇게 응원까지 할 정도다.
[네 놈… 네 놈이 가아아암히이이이이!]사실 상대로서도 이 정도면 되었다 싶어서 그만 멈추려 했다. 들어가는 힘의 소모도 만만치 않고 유지하는 건 그 몇 배나 힘이 소모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형진이 긴장한 기색조차 없이 그렇게 박수를 치며 응원하는 모습마저 보이자 놈으로서는 허세가 아닐까 싶으면서도 정말로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서 그러는 건가 싶은 불안한 기분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좀 더 힘을 쓰기로 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은 힘을 이런 일에 쏟아 붓는 것이 아깝긴 했지만, 이번에 닥친 위기만 돌파하면 다시 시간을 들여 모을 수 있으니까.
[보아라! 이것이 나의…]어쩐지 숨겨왔던 나의 비밀 어쩌구 하는 느낌의 대사가 생각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형진은 수북하게 쌓인 룻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요새는 딱히 전설급 이하의 아이템 같은 건 얻어도 별 감흥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잔뜩 늘어나 버린 상황임을 고려하면 열심히 벌어 둬야 한다. 형진도 이제는 어엿한 가장. 자신보다 식구들을 먼저 생각하는 아주 바람직한 가장이다.
[…]기껏 애써 만든 성전을 다 깨부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이 존재하던 산까지 부숴먹고 대기권을 뚫고 올라갈 듯한 기세의 거신으로 모습을 바꾸었음에도 상대는 발 근처에서 마치 밭에 무언가를 심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만 있다.
뭔가 의미가 있는 행동인가.
혹시 지면에 뭔가 함정 같은 것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자신은 세상 자체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거대한 몸을 갖췄지만, 상대는 자신을 그런 상태로 내몰 정도의 강자.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밟아 버릴까.
그래. 그게 좋겠다. 거대한 산 하나를 통째로 흡수해 버린 이 거체의 발이라면 저 정도 상대는 가볍게 밟아 뭉개는 것만으로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신발 뒷굽에 밟혀 으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창자를 쏟아내고 죽어버리는 곤충처럼, 그렇게 하잘 것 없는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자’는 발을 들어올렸다. 단순히 그 동작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딛고 있던 세계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한다. 한쪽 발로 집중되어 버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반이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질량과 부피를 가진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들어 올려지자 그것만으로도 공기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터트리며 수증기를 폭발시킨다.
단순히 발을 들어 올린 동작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소모했지만, 상대가 맞이할 처참하고도 하찮은 죽음을 떠올리며 ‘가장 오래된 자’는 발을 내리 찍었다. 무엇 때문에 나타난 건지도 모르고, 무엇을 노리고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모르며, 어디에서 나고 자라 어떻게 저런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존재지만, 자신의 이 엄청난 공격 앞에서는 그런 자라도 분명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콰아아아아!
들어올려진 다리가 떨어져 내린다. 그 질량과 속도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되어 주위의 공기를 달궈내고 밀어내며 폭발시킨다. 그렇게 한 점으로 집중된 파괴력은 이 세계에서 가장 존귀한 자의 심기와 대계를 거스른 죄를 처벌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승화될 것이다!
“히이이익!”
“아, 아빠!”
열심히 룻을 줍고 있는 형진의 옆에서, 너무 거대해진 탓에 고개를 들어 그 형체를 전부 시야에 넣는 것조차 어려워진 상대의 모습에 질려 있던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자신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무언가에 극한의 공포를 느끼며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서로를 부둥켜 안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형진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할 일을 하는데 그냥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버티고는 있었지만, 단지 내리 찍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대기가 부서지고 폭발하며 타오르는 말도 안 되는 거체의 강습을 두 눈 똑바로 지켜보는 건 아무리 강인한 심장과 정신을 가진 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야… 많아서 어쩌나 싶었는데, 덕분에… 응?”
형진은 마침내 룻 집는 일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자신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신경 쓰지도 않고 있던 무언가를 그제서야 비로소 시야 안에 넣었다.
손을 들어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굉음이 터져 나온다.
[응?]‘가장 오래된 자’는 순간 뭔가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미처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휘청이며 쓰러지고 있음을 알았다.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손을 허우적거리며 넘어지는 것을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인간일 때와 지금은 근본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크기도 무게도 부피도 그 어떤 것도 인간이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거신의 몸이 옆으로 넘어진다. 어느 틈엔가 잘려져 버린 왼쪽 무릎 아래만이 거대한 기둥처럼 우뚝 선 채, 남은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넘어지는 모습이 뭔가 희극적이다.
거대한 몸체는 그대로 근처의 산맥을 뒤덮으며 쓰러졌다. 보통의 사람이라도 잘못 넘어지면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을 다칠 수 있는데, 스스로 지탱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거신은 쓰러질 때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주위의 산과 함께 파괴되었다. 얼마나 그 파급효과가 컸는지, 성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기 때문에 가려져 있던 하늘마저 확 개어 버릴 정도다.
[끄아아아악!]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상황이 되었는데 내부에 자리잡고 있던 존재가 멀쩡할 수는 없는 법. 나름 언데드이니 죽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봐도 다시 일어나긴 어려울 테니 심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여러모로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무조건 크기만 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야. 그런 것조차 모르는 건가.”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공중으로 떠올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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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