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64
00564 128. 정리 =========================
아무래도 ‘가장 오래된 자’는 자신과 동등 또는 그 이상의 적과 싸워본 일이 없는 모양이다. 물론 지닌 바 힘은 대단하다. 조석 고정이라는 이름의 천재지변으로 인구가 반토막 나긴 했어도 어쨌든 하나의 행성을 지배하는 존재인데다, 언데드의 영역까지 손을 댔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존재는 단순히 지니고 있는 힘 만으로도 압살할 수 있었겠으나, 하필 반신의 위계에 오른 형진이 상대였다는 것이 놈에게는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었다.
다른 오래된 자들은 죄질이 극악해서 도저히 가만 놔둘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포섭으로 가닥을 잡은 상태이지만, 가장 오래된 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별의 반을 언데드의 세계로 만든 장본인이므로 화근의 불씨를 남겨둘 수 없다는 점이 하나의 이유.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런 자리에 오르고자 행한 연구의 단면들이 그의 죄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오래된 자들을 만들어낸 능력은 대단한 바가 있다. 불사의 존재라는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데다 후손까지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언데드의 장점만 뽑아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그래서 위험하다. 언데드는 신들에게 있어 타협 불가능한 악. 그런 걸 어떤 식으로든 용인하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가는 형진마저 금기를 어긴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크으으윽…]부서진 잔해로부터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력한 사기로 몸을 감싼 모습이 과연 이 행성의 지배자라고 할 만 했으나, 방금의 일로 힘을 크게 낭비하고 육체와 정신 양쪽으로 타격을 받은 상태라 이미 이전의 강력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넌 누구냐.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주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아직 이루고자 하는 바가 남았는지 가장 오래된 자는 형진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형진은 그런 상대의 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형진이 대화에 응할 듯한 태도를 보이자, ‘가장 오래된 자’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래. 말해라. 차야 메사에는 아직 많은 힘이 잠들어 있다. 그것을 온전히 뽑아내기만 한다면, 나는 전능한 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너나 나나 그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 “호오, 그래?”[그렇다. 게다가 나는 조만간 더 강력한 신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라도 그의 조언을 받으면 완전한 신이 될 수 있다. 그래.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소개를 시켜 주마. 너라면 그분께서도 환대하실 테니, 이건 좋은 기회다. 완전한 신이 될 수 있는. 어떤가. 솔깃하지 않은가.]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한 상대의 말에 형진은 씨익 웃었다.
“그거 정말 솔깃하군. 하지만 믿기 어려워. 진짜 신이라니,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어디에?”
[위치는 나도 몰라. 하지만 연락은 충분히 가능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연락을 취해서 파괴와 재생의 이름을 가진 그분과의 대화를 주선할 수도 있다. 그래, 지금 당장. 잠시만 기다려 줘. 바로 연결을 해줄…]
‘가장 오래된 자’는 반색하며 무언가를 하려는 행동을 보였지만, 그 순간 형진의 손이 그를 가리켰고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이 이어졌다.
퍽!
신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인스턴트 킬의 힘이 놈의 가슴을 꿰뚫는다. 서서히 타들어가는 종이처럼, 가슴으로부터 불꽃이 피어올라 놈의 육체를 태워 없애기 시작한다.
[어, 어째서…] “이것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그런…]
놈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애초에 파괴와 재생은 스스로조차 완전해질 수 없는 상태. 그런 자가 다른 이에게 완전한 신의 위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건 결국 이 덜떨어진 놈의 힘을 쪽쪽 빨아먹기 위해 머리 위에 대고 흔들어대는 미끼에 불과할 뿐.
아마도 이 놈 역시 뭔가 미심쩍은 점이 있다 싶어서 아직까지 그가 주겠다는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 터. 만약 파괴와 재생이 이곳을 발견했다면, 놈이 지닌 힘은 이미 맛있는 먹이가 되어 파괴와 재생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살찌우는 양식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연락을 취하겠다니. 곤란한 일이다. 그런 일 따위 벌어져서는 모처럼 찾아낸, 자신의 밑천이 될 수도 있는 장소가 전장으로 변해버릴 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형진은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바로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놈은 결국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 갔다.
“…”
즈라탈과 힐리에타, 그리고 정신 줄을 놓고 있다가 성전이 붕괴되는 상황에 기겁해서 도망쳐 나왔던 최초의 노스페라투 렐그낙은 얼마 전까지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던 존재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봐야만 했다.
형진은 자연스럽게 놈이 떨군 룻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존재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오래된 자들을 불러 모아라. 얼마나 걸리겠나.”
“여기에… 말입니까?”
즈라탈의 말에 형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오래된 자’의 행동으로 인해 이미 성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긴 좀 그렇군.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즈라탈, 너의 집은 어떤가.”
“영광입니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다만 연락을 위해서라도 일단 저택으로 가시는 것이.”
“알겠다.”
아까처럼 위성 궤도에서 추락하는 식의 일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허겁지겁 자신들의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려고 했으나, 그 모습을 본 형진은 그들을 불러세웠다.
“잠깐만.”
“네?”
“이걸 받아.”
형진이 건네준 것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사양의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였다.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비행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체력만으로 그 먼 거리를 비행하는 건 별로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두 부녀는 형진이 무언가를 건네주자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런 식으로 착용하는 거다. 써봐.”
“감사합니다. 가문의 보물로 삼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고. 얼른 하라는 거나 해.”
“네.”
즈라탈과 힐리에타는 허겁지겁 그것을 발목에 찼다. 혹시 족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그들의 몸을 이루는 근원이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이제 와서 그런 걸 차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오…”
“와아…”
착용과 동시에 시야에 메뉴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골라 구현한다. 즈라탈이 고른 것은 붉은 빛의 망토. 힐리에타가 고른 것은 빨간 구두이다.
형진은 그들이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를 시험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멀찍이서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렐그낙을 손짓해 불렀다.
“너도 받아.”
“…”
형진이 던져준 발찌를 보고 렐그낙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앞서 자신의 근원이 뒤바뀌어 버린 것은 강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다 해도, 이것을 착용하는 것은 그의 지배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잠시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발찌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형진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싫어? 싫으면 말고.”
렐그낙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싫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자신의 발목에 그것을 착용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검의 형상을 한 호보 보드를 선택했다.
“즈라탈. 앞장 서.”
모두가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를 착용하자 그제서야 형진은 다시 지시를 내렸고, 즈라탈은 용기백배한 표정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샤라스델 방백 즈라탈의 저택은 성전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한계 속도와 고도 제한이 없는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의 성능 덕에 그들은 오래지 않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즈라탈은 우선 형진에게 저택의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고, 힐리에타로 하여금 그의 시중을 들게 한 다음, 아직도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렐그낙과 함께 다른 노스페라투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연락을 시작했다.
“목이 마르군. 음료수를 가져 오도록.”
“으, 음료수요?”
아버지가 자신에게 형진의 시중을 맡긴 시점에서, 그가 어떤 요구를 하든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힐리에타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다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비록 약혼자가 있는 몸이긴 했지만, 딱히 정이 깊었던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새로운 지배자이자 신으로서 군림하게 될 형진의 첫 번째 여자가 된다면 그것 역시 가문으로서는 대단한 영예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이 그의 마음에 들어 반려의 자리를 낚아채기라도 하면 아버지인 즈라탈 또한 낮은 신분의 노스페라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이런 기회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막상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그녀에게 돌아온 첫 번째 지시는 음료수를 달라는 것이었다.
“왜? 뭔가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예상이 빗나간 건 둘째 치고, 힐리에타는 바로 얼마 전까지 언데드였다. 비록 후손을 볼 수 있는 조금 변질된 형태라고는 해도 섭취라는 행동 패턴을 가지는 것은 언데드 중에서도 이성이 날아가고 살아있을 당시의 본능만 남은 최하급 언데드 정도가 고작이다. 당연히 힐리에타는 음료수 같은 건 마셔본 적도 없다.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힐리에타는 일단 의식 저 밑바닥에 처박혀 있던 인간들에 대한 상식을 간신히 끄집어 내고는 급히 시종들을 닦달해서 차갑고 시원한 물 한 잔을 형진에게 대령할 수 있었다.
“…”
하지만 형진이 보기에 그녀가 마시라고 가져온 물은 영 뭔가 미심쩍기 이를 데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뭔가 거무튀튀한 가루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질 않나. 기이한 냄새마저 풍기지 않나. 놀리는 건가 싶어 바라봤지만, 정작 힐리에타는 자신이 내려준 지시를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만족감을 얼굴 가득 내비치고 있었다.
그제서야 형진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이 아가씨가 바로 얼마 전까지 언데드 상태였음을 이해했다.
“후… 이건 치워. 음료수는 알아서 할 테니.”
“네? 아… 알겠습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잔을 받아 치우는 힐리에타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보이고는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던 빈손에서 무언가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테이블을 채워가는 모습은 마치 마술과도 같았다.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던 힐리에타는 그 놀라운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형진이 손짓하며 자신의 앞에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이자 머뭇거리며 그의 말대로 자리에 앉았다.
“일단… 조명이 필요하겠군.”
형진은 다시 손을 뒤집어 보이더니 무언가 둥실 떠오르는 광원 하나를 꺼내 허공에 띄웠다. 휴대용 위성과 기본 구조는 비슷하지만, 이쪽은 조명과 함께 홈시어터 기능이 부여된 가전제품이다.
“조명.”
그의 말이 울려 퍼지자, 허공에 떠오른 둥근 물체는 눈이 아프지 않은 은은하고도 밝은 빛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형진은 그렇게 밝아진 방 안에서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던 것들을 이용해 간단한 티타임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숙련된 솜씨로 향긋한 차를 우려내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만들어진 차 한 잔을 힐리에타에게 건넸다.
“마셔.”
“가, 감사합니다.”
홀린 듯이 형진이 차를 우려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힐리에타는 그가 건네주는 따뜻한 차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형진의 동작을 흉내내 잔 안에 담겨진 액체를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그녀의 잠들어 있던 감각이 일제히 피어났다.
지금까지 사용될 일이 없었던 감각이라서 그랬을까. 그녀는 입안을 맴도는 따뜻한 차의 감미로운 향기와, 혀를 통해 전해지는 실로 뭐라 표현할 길이 없는 황홀한 맛에 그대로 꿈결 속을 헤매는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때?”
형진의 말이 귓가에 들려오고 나서야 힐리에타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처음 미각이 개발되는 시점에서, 달인이 타주는 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파괴력을 지닌 무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슬그머니 올리고 도망중. (후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