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쿠구구구구구-!
마모트의 몸이 마치 가뭄이 온 대지처럼 쩍쩍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그 금은 점점 더 많아지더니 이내 눈이 멀 듯한 강렬한 빛이 가브의 세상을 덮었다.
가브는 그 빛무리가 눈을 멀게 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성스러워 보이는 빛과 함께 자신의 육체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지만 기분이 매우 더럽다.
그때 가브의 가슴에서 일곱 개의 환상성이 붉게 빛나며 신비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봉인된 기억이 해제됩니다.
‘봉인된, 기억?’
그 말을 인지함과 동시에 눈앞에 어떤 장면이 수없이 많이 펼쳐졌다.
각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는 건물이 빼곡한 도시, 강철을 두르고 있는 이동 수단, 모두가 손에 쥐고 있는 작고 네모난 그것.
잃어버렸던 기억이다. 잊고 살았던 ‘진짜’ 자신의 기억이다.
가브, 아니 김강우가 본래 살던 곳은 판테르 대륙이 아닌 다른 세상이었다.
바다를 건너거나 설산을 건넌다고 한들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
말보다 수배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있는 그런 세상.
그 세상에서 강우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골방에 틀어박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공시생이었다.
어쩌다가 차원을 넘어 가브의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던 그때, 눈앞이 다시 하얗게 변하더니 머리 위로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천천히 내려왔다.
가브는 이제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법한 소녀를 보고 본능적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임을 깨달았다.
“네비아?”
가브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알고 있었나요?
그녀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저 소녀는 자신의 인생을 개고생 끝에 결국 스스로 희생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힘이 있었다면 당신의 얼굴을 찢어 버렸을 것이야.”
소녀, 네비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브는 원래 도적에게 가족이 몰살당하던 때에 같이 죽을 운명이었어요.
도적들에게 가족이 당한 때는 열세 살, 환상을 처음 보았던 때다.
그때 이후로 김강우의 영혼이 뒤집어씌워진 것이다.
“왜 하필 나지?”
네비아가 만약 당대 최고의 기사 디마에게 힘을 실어 줬다면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하게 마모트를 추종하는 무리를 없앴을 것이다.
-판테르의 영혼은 제가 관여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무 영혼이나 육신을 씌울 수도 없어요. 그대와 가브의 운명이 차원을 넘어 이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네비아는 갑자기 가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돌연 두 손으로 가브의 가슴을 밀었다.
-육신을 잃은 영혼은 오래 머물 수 없어요. 돌아가세요.
가브는 뭐라 할 새도 없이 네비아와 거리가 급격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멀어지는 가브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수고했어요.
마지막 말을 들은 가브는 순간 욱하여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갑자기 깨질 듯이 아파 온다.
“헙!”
갑자기 머리에 번개가 정통으로 내리친 것 같은 통증과 함께 가브는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새하얀 천장과 홀로 빛을 내고 있는 형광등이 보였다.
머릿속으로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정리되지 않던 때,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깨, 깨어났어요! 김강우 환자!”
* * *
판테르 대륙, 마모트에게 점거된 아이드 성.
마법을 튕겨 내고 대지를 끓어오르는 용암으로 만들던 마모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러곤 그 피처럼 붉은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이 신기루처럼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헙, 허, 헉.”
“뭐, 뭐지? 뭐야, 사, 사라졌어?”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들은 눈앞의 상황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세실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 아이드 성을 중심으로 온 세상을 까맣게 덮고 있던 어둠이 걷히고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것이다.
“이, 이겼어, 이겼어! 이겼다아!”
“와아아아!”
“가브가 해냈군.”
“주군이 마모트를 쓰러트렸다!”
“우리가 이겼다!”
땅에 깔려 있는 검은 것들이 햇빛에 닿기 무섭게 빠르게 타올라 없어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제야 마모트가 사라진 것을 실감하며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세실리아는 가브가 사라진 지점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그가 돌아오길 가만히 기다렸다.
* * *
마모트가 사라진 지 1년, 가브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국, 왕국을 따지지 않고 가브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그는 죽음의 마신 마모트로부터 판테르를 지켜 낸 희대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그 외의 50인의 영웅들도 살아 있는 전설처럼 사람들이 그들을 찬양하고 떠받들었다.
푸티엘과 에리얼, 그리고 엘프들은 아히가르 숲으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는 본분을 다하였다.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다면, 오늘과 같을 때일 것이다.”
힐 아슈는 펜릴과 함께 제국으로 돌아가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펜릴 공작님만 믿을게요.”
“저는 백작입…….”
“이제부터 공작이에요.”
이엘은 가브의 유언 같은 말을 받들어 이엘 아이드로서 아이드 왕국을 다스렸다.
“아이드 왕국은 그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제국을 능가하는 최강의 왕국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것입니다.”
발튼은 제국에서 자신에게 테라 단검을 선물로 주었던 제이니 크레스와 다시 만나 원하던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이엘 옆에 남아 훈련 교관의 직위는 유지했다.
“그. 그때 단검은 왜 준 거지?”
“모를 줄 알았어요. 상관없어. 그래서 내가 직접 찾아왔잖아.”
위케리스와 특무대는 이엘 옆에 남아 그녀를 보좌했다.
“한 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 특무대는 이엘 아이드 전하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었는가!”
“와아아아! 대장 맘 내 맘!”
헤딘은 에런과 함께 밤까마귀에 완전히 정착했다.
“누, 누님 요즘 너, 너무 평화로워서 거, 걱정이에요.”
“그래 보여도 여기 아이드 왕국에서도 하루에 수십 명씩 죽고 있어. 너 줄 시체는 많으니까 걱정 마.”
“여, 역시 누님 곁에 있어서 다, 다행이에요.”
셀은 렘과 함께 사해를 재건했다.
“세상이 추앙하는 가브 선배님이 사해 출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에 걸맞은 해수가 되기 위해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태제, 대련은 언제쯤?”
“나중에.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아 어지럽다.”
“세실리아 선배님이 그립군요.”
렘은 어느새 부쩍 강해져 셀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렘은 오늘도 대련 상대를 찾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펜릴, 푸티엘, 셀, 발튼과 더불어 5대 영웅으로 추대되고 있는 세실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한마디만 남기고.
[주군을 찾으러 간다.]발튼과 셀이 수소문했지만 그녀를 보았다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죽음의 신 마모트로 인해 생긴 판테르 대륙의 상처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며 천천히 아물고 있었다.
* * *
대한민국, 2021년 5월 5일.
거리는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손을 붙잡고 돌아다니고 있다.
김강우는 조그마한 카페 야외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었다.
가브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이곳의 시간이 멈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지냈던 22년의 딱 절반, 11년이 지났다.
김강우는 11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누워 있었고, 네비아 여신이 무슨 수를 썼는지 후원을 받고 있어 아직 살아 있던 것이다.
츕.
이제 서른일곱 살이 된 김강우는 한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그곳에 머리를 괴고 누웠다.
따르릉, 따르릉.
또각, 또각, 또각.
빵, 빵.
“어제 학교에서 로하랑 싸웠는데.”
“엄마, 나 이거 사 줘!”
“와, 이거 예쁘다.”
“네가 더 예뻐.”
“닥치고 사 줘.”
가만히 누워 있으니 주변의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다. 한가롭다. 몸은 나른하다.
마치 꿈만 같다. 아주 긴 꿈, 더럽게 힘들고 잔혹했지만, 그리운 꿈.
저벅, 저벅, 저벅.
“커피 가져왔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에 강우가 몸을 일으키다가 서빙 쟁반을 툭 건드렸다.
“어어!”
그로 인해 쟁반이 뒤집히며 커피가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때 강우의 손가락이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그러자 떨어지던 커피가 다시 컵 안에 들어가고 강우의 손에 잡혔다.
강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 잔을 들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아, 어, 네. 맛있게 드세요.”
아르바이트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떴다.
이것만 아니라면 꿈이었다고 치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강우의 몸에는 짙은 마나와 마기가 공존하고 있다.
영혼에 새겨진 마나와 마기가 차원을 건너온 것이다.
“후.”
세상을 뒤집을 힘이 있지만, 딱히 힘을 쓸 데도 없다.
그리움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료함으로 변하여 강우를 나태하게 만들었다.
그때 카페 앞쪽 횡단보도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마기를 극한으로 끌어 올렸을 때처럼 굴절되어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아직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강우만은 미간을 좁히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곳에서 강렬한 마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각, 또각, 또각.
“어?”
“응?”
선명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그곳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무광의 검은 가죽 스커트,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 허리춤에 달려 있는 길고 가느다란 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김강우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는 살짝 놀랐다. 갑자기 나타난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니지만, 희한한 옷차림에 눈에 띄는 미인이기에 절로 시선이 향한 것이다.
“와!”
“어디서 나왔지?”
“영화 촬영 중인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그녀, 세실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강우에게 다가왔다.
또각, 또각, 또각.
강우는 천천히 일어나 세실리아와 마주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영롱하게 빛나는 진갈색 눈동자, 칠흑같이 검은 긴 생머리, 선이 또렷한 콧날에 살짝 말려 올라간 연분홍색 입술.
확실하다. 1년이 지났지만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단연 가장 그리웠던 사람이 분명하다.
가짜인가? 환상인가?
김강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세실리아의 뺨을 향해 뻗었다.
탁-!
세실리아의 하얀 뺨에 손이 닿기 직전, 그녀가 먼저 강우의 손목을 사납게 낚아챘다.
강우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이 가브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그저 처음 보는 남자가 얼굴을 만지려 했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눈앞에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가브의 외형이 아닌 것이 절망스럽다.
그때, 얼음장 같던 그녀의 눈빛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리며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찾았다.”
올라간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그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완벽한 미소다.
강우, 아니 가브는 세실리아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암살자였던 군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