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 stacking hunter RAW - volume 9 (5)
9-5장.
이수현은 대륙의 왕과 치를 마지막 결전을 대비하기로 했다.
대책을 마련하려면 우선 적을 알아야 한다.
빛 군주가 이수현의 부름을 받고 7팀 숙소에 도착했다.
“…편해 보인다?”
“뭐가.”
쪼록.
빛 군주는 커피 잔에 꽂힌 빨대를 쪽 빨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복장도 요즘 유행하는 것들로 도배를 해 뒀다.
그녀는 지구의 문물에 완벽히 적응했다. 체셔와 아리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수현은 현대 문물에 물든 천사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완전 지구인이 다 됐네.
‘따지고 보면 쟤 외계인이잖아.’
이수현은 자잘한 지적 같은 건 미루기로 했다. 당장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지.
“빛 군주, 네 정보가 필요해. 그땐 뱀 군주 잡으랴, 수련하랴 바빠서 못 물어봤었지.”
“왕의 능력 말이지?”
대륙의 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빛 군주는 왕과 태양신의 싸움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천사다.
태양신이 놈에게 곱게 먹혀 줬을 린 없다. 분명 대판 싸웠을 터.
“왕에겐 여러 능력이 있지만, 가장 위험한 건 두 개야.”
“그 두 개의 힘은 각각 어떤 거지?”
“하나는 심해의 고대신, ‘아르토스’.”
심해의 고대신, 아르토스.
노덴스를 비롯한 다른 심해의 신들을 통치했던 대표자였다.
아르토스가 왕에게 흡수당하자, 그를 따르던 고대신들은 심해의 밑바닥으로 도망쳤다.
‘최소 주신급의 권능이란 거군.’
어떤 능력일까. 빛 군주는 아르토스의 능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피어났다.
“아르토스의 권능은 ‘망각’이야.”
“망각? 기억을 잊는다고?”
“그래.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 내가 누구였는지도 일순 까먹게 되어 버려. 왕은 그 능력으로 천사 군단을 순식간에 무력화했지.”
“…….”
자기가 싸우고 있다는 것도 순간 까먹고, 멍하니 있게 된다면…….
고수들의 싸움이 미세한 차이로 판가름 난다.
그걸 감안하면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내가 누군지 잊는다는 건, 자신의 힘이 뭐였는지도 인지할 수 없게 된다는 거야.”
“싸우는 법마저 까먹게 된다는 거야?”
“그래. 몸도 마음도 모든 걸 잊게 되어서 나중엔 움직일 수조차 없게 돼. 지구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식물인간처럼 된다는 거지.”
이수현은 한숨이 나왔다. 이거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무조건 지겠는데.
설사 왕을 죽인다 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되면 무슨 소용인가.
해결책은 팀원들과 의견을 나눠 보며 찾아야겠다.
“다른 하나는?”
“마계의 지배자였던 ‘이클립스’의 권능이야. 태양신님의 권능과 상반되는 능력이지.”
저번에 얼핏 듣긴 했었다.
태양신이 허망하게 패했던 이유가 상반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일식이 뭔지 알지?”
“당연히 알지. 태양이 달에 가려지는 거잖아?”
“그래. 이클립스는 말 그대로 태양의 빛을 삼키는 권능이야.”
마계를 지배했던 고대신, 이클립스는 태양과 햇빛을 자신의 어둠으로 뒤덮을수록 강해진다.
즉, 놈 앞에서 태양신의 능력을 썼다간 힘을 보태 주는 셈이 된다.
‘그럼 태양신의 힘과 태양의 기사 스킬도 못 쓰는군.’
가장 강력한 버프 능력이 봉인됐으니, 이수현의 승산도 곤두박질칠 터.
역시 끝판왕답게 만만찮았다.
빛 군주는 태양이 어둠에 잡아먹히던 그 날의 악몽이 떠올랐는지, 쓴 커피를 쭉 들이켰다.
“나머지 왕의 능력들은… 네 튼튼한 몸뚱이면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그게 조언이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도 있잖아?”
빛 군주는 픽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수현은 끙 소릴 내며 한숨을 지었다. 물론 맷집으로 버티며 상대의 수법을 파악하는 건 곧잘 써먹던 전략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망각의 권능을 지녔다. 기껏 분석해도 까먹으면 소용없다.
“네 기상천외한 능력이면 왕의 까다로운 권능들도 맞받아칠 수 있겠지.”
“그래. 모델 쪽에서 일한다고?”
“응. 길 걷다가 스카우트됐거든.”
빛 군주는 그리 말하며 일어났다.
정보가 필요해서 반쯤 협박해서 소환수로 삼았는데.
지구의 문화에 잘 적응해서 다행이다.
최근엔 엘프들과 설인들까지 데리고 왔다.
‘스승님이 월럼프랑 히말라야 산맥을 갈 줄이야.’
검귀, 한철용은 한창 바쁜 제자 대신 귀엽고 듬직한 설인 친구를 길동무로 삼았다.
엘프들이 아마존 지대에 머무르는 것처럼, 설인 월럼프는 주인을 따라서 지구로 넘어왔다.
월럼프는 추운 설산 지대가 그리웠는지 히말라야 산맥을 새 보금자리로 삼았다.
등산에 미친 검귀가 그런 앨 놓칠 리 없었다.
마침 로키 사건 이후로 검귀는 맘 편히 은퇴도 했겠다.
이젠 산악 취미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실 때다.
‘월럼프 덕분에 나도 안심이 돼. 내가 없어도 스승님이 더는 적적하시지 않겠지.’
물론 서로 말은 안 통하겠지만, 사람들은 반려동물과도 충분히 교감하지 않던가.
검귀에게 월럼프는 주인을 따라서 어떤 산이든 오를 수 있는 강아지였다.
“수현 오빠, 궁상맞게 혼자 앉아서 뭐 해요?”
“아, 예린아.”
7팀의 팀장이 문을 열고선 머릴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이수현에게 권능을 빌린 뒤로 부쩍 밝아졌다.
급속히 강해진 것보단 이수현을 도울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왕이랑 어떻게 싸우면 좋을지 생각하는 중이었어.”
“음. 그런 것치곤 눈동자가 우수에 젖었던데…….”
“그간 이뤄 낸 것들을 쭉 돌이켜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라.”
“흐음.”
나예린은 뭔가 직감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이수현과 눈높이를 맞췄다.
“왕이랑 싸우다 잘못될 걸 걱정하고 있는 거죠?”
“…….”
“오빠가 그놈한테 지면 세상도 어차피 끝이에요. 그러니까 이기는 것만 생각해요.”
나예린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얘가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았구나.
이수현은 피식 웃으며 불길한 상상을 접었다. 그래.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내가 지면 지금껏 이룩한 것들도 싹 사라지겠지.
‘그런 녀석이 유일신인지 뭔지가 되면, 지구와 대륙 둘 다 끝이야.’
반드시 이겨야 한다.
신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여기서 지면 모든 게 날아가니까.
나예린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슬금슬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눈까지 꼭 감은 채 뭔가 기다리는 사람처럼 군다.
“……?”
이수현은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나예린은 작은 숨결을 뱉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오빠, 눈치 없게 진짜 왜 그래요.”
“내가 뭘?”
“아니, 보통은 이런 분위기엔 꼭 껴안아 주거나 입이라도 맞춰 주는 게 예의 아니에요? 생일 선물도 안 줬으면서.”
“…예린아,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니?”
이수현은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됐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던데.
사실 나예린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설산에서 이수현에게 능력을 빌린 뒤, 한 달 가까이 그와의 밀회를 즐겼다.
하지만 둘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매일 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대부분 전기 능력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관해서였다.
서민아가 우려했던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예린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실의에 빠졌다. 그녀는 엄마에게 연애 상담을 했다.
‘수현 씨는 네 아빠랑 성격이 똑같구나.’
나예린의 어머니는 웃으며 딸에게 조언해 줬다.
이수현처럼 반응이 느리면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네가 먼저 들이대야 한다고.
눈치 없는 남자는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혹은 그냥 나 혼자만의 착각이겠지 하고 넘긴단다.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니?”
이수현은 자식에게 돌직구를 던지신 나예린의 어머니를 다시 봤다.
아무리 그래도 막 성인이 된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엄마가 우리 아빠랑 어떻게 결혼한 줄 알아요?”
“어떻게?”
드르륵.
이수현은 불길한 마음에 의자를 뒤로 끌었다. 주변에 붉은 선이 보였다.
머릿속이 경고했다. 나예린과 어서 거리를 벌려야 한다고.
덥석!
하지만 나예린은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의자를 붙잡았다.
“이렇게요.”
나예린은 의자를 슬쩍 넘어트렸다. 바닥에 두 사람이 엎어졌다.
이수현은 그녀의 행동에 당혹스러워서 벗어나려다 딱 멈췄다.
문틈 사이로 눈동자가 보였다. 서민아였다.
“허억!”
이수현은 불륜 현장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기겁했다.
그의 몸에 올라탔던 나예린도 의아한 얼굴로 고갤 돌렸다.
그러다 서민아랑 눈이 딱 마주쳤다.
나예린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이 핼쑥해졌다.
“…둘이 왜 같이 있어요?”
끼익.
오늘치 수련을 끝내고 나온 서민아가 으르렁댔다.
나예린은 팀장의 권위도 잊고 더듬더듬 변명했다.
“이, 이건 그냥 장난…….”
“뭐 레슬링이라도 하려고요?”
“마, 맞아요! 그냥 놀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요? 저도 어릴 때 레슬링 많이 봤었는데…….”
서민아는 차갑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예린의 옷깃을 꽉 붙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이수현은 그걸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근육 파괴술?”
쾅!
서민아는 몸소 레슬링 기술의 로망을 보여 줬다. 나예린은 켁 소릴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서민아는 손을 탁탁 털며 궁금한 걸 질문했다.
“근데 언제부터 나 팀장님이 수현 씨를 오빠라고 부른 거예요?”
“그, 예린이 어머니를 치료했을 때…….”
“세상에. 그때면 이미 한참 됐잖아요? 그걸 여태껏 숨긴 거예요?”
서민아는 대단하다는 눈으로 나예린을 쳐다봤다.
7팀 팀장은 팀원을 볼 면목이 없는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수현 씨를 믿어요. 설마 막 성인이 된 팀장님을 건드리진 않았겠죠?”
“민아 씨, 미쳤어요? 제가 그런 쓰레기로 보입니까!”
이수현은 발끈해서 반박했다.
서민아는 다행이란 눈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면서 귓속말로 뭐라 했다.
“이따가 제 방에 오세요. 씻어야 하니까 간편한 복장으로 입고 와요.”
“그게 무슨… 씻다니, 왜요?”
이수현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되물었다. 서민아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오싹!
중년 가장들이 느낀다는 공포가 그를 찾아왔다.
* * *
다행히 서민아의 발언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씻는 건 그 둘이 아닌 복덩이였다.
둘은 오랜만에 늑대 상태의 복덩이를 씻겼다. 털이 푹 젖은 복덩이는 파르르 몸을 털었다.
“가만히 좀 있어, 복덩아.”
“복덩이는 사람 상태로 샤워하는 걸 무서워하더라고요.”
서민아는 손이 많이 가는 복덩이의 털을 말리며 웃었다.
모처럼 이수현과 함께 보내는 일상이었다. 평생 이랬으면 좋겠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아까의 일을 언급했다.
“아까 강 매니저님한테 들었는데, 빛 군주가 찾아왔다면서요?”
“예, 제가 불렀어요.”
“혹시… 둘이 그런 사이 아니죠?”
“대륙의 왕에 대한 정보를 들으려고 부른 거예요. 중요한 얘기니,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 박박 우기더라고요.”
서민아는 안도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이수현은 왕의 성가신 능력들을 말했다.
망각의 힘과 모든 빛을 삼키는 어둠.
서민아는 복잡한 문제를 접하면 단순한 방식으로 접근하곤 했다.
혹시 모른다. 또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해 줄지.
“으음. 타인의 기억에 간섭하는 힘이라니…….”
서민아 역시 망각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복덩이의 머릴 쓸어내리며 잠시 고민했다.
“으음. 이건 제가 예전에 어디서 본 내용인데, 해결책은 아니고 그냥 관련 지식이라…….”
“편하게 얘기해도 돼요. 돌파구의 실마리가 될지 모르잖아요.”
“망각, 사람이 뭔가를 잊는 현상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래요.”
“예?”
그녀의 말에 이수현은 고갤 갸웃거렸다.
“한번 본 게 평생 잊히지 않고 매 순간 떠오르면, 그 사람은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없겠죠? 아마 괴로운 삶을 살 거예요.”
“그렇겠죠.”
“수현 씨한테도 전자두뇌 스킬이 있잖아요. 완전 기억 능력처럼 한번 본 걸 까먹지 않는… 그럼 평소에도 원치 않은 정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괴로워요?”
“아뇨. 그 스킬은 필요한 정보를 그때마다 서랍에서 꺼내 쓰는 느낌이라…….”
이수현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이수현은 서민아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전 종종 그런 생각을 해요. 저와 민아 씨와 만난 건 신이 점지한 운명이라고.”
“네, 네?”
“고마워요. 민아 씨 덕분에 한시름 놨어요.”
이수현은 털을 다 말린 복덩이를 보며 웃었다.
그에겐 서민아 역시 복덩이였다.
* * *
이수현은 망각의 권능에 어떻게 대처할지 감을 잡았다.
이제 남은 건 태양과 빛을 삼키는 이클립스의 권능.
‘태양이 뜨지 않은 시간에 딱 맞춰 싸울 거란 보장도 없고.’
막말로 지금 당장 게이트 안에서 대륙의 왕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제 그 녀석한테 남은 수단은 몸소 움직이는 것뿐이니까.
지금처럼 태양이 중천에 떠 있다면, 왕은 이클립스의 권능으로 훨씬 강해질 거다.
반면에 이수현은 태양의 힘을 아예 이용할 수 없게 된다. 그에겐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
“방법이 뭐 없을까요?”
“태양을 아예 없애라니. 불가능해요.”
“그럼 햇빛이 차단된 공간에서 싸우면요?”
서민아의 질문에 나예린과 강현정은 고갤 저었다.
그 말은 대륙의 왕과 실내에서 싸우란 건데, 건물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이수현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햇빛을 차단한다…….’
그렇게 되면 이수현도 태양신의 권능을 발동 못 하지만, 대륙의 왕도 이클립스의 권능을 못 쓴다.
즉, 공평하게 기본 스펙으로만 싸운다.
이수현에겐 차라리 그게 나았다.
왕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강해지면 진짜 답도 없을 테니까.
“햇빛이 차단된 넓은 공간. 어디 없을까요?”
“수현 오빠랑 그 괴물을 가둬 둘 공간이 지구에 있을 리가…….”
나예린은 서민아한테 비밀을 들키고 난 뒤부터 편하게 오빠라 불렀다.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뭔가가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뭐 좋은 생각 났어요?”
“지구엔 없지만, 다른 곳에 있어요.”
“다른 곳?”
“태양이 ‘아예’ 없는 곳이요.”
나예린의 말에 이수현과 강현정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서민아만 감을 못 잡고 눈치를 살폈다.
“현정 언니, 팀장님이 말한 곳이 어디예요?”
“지하 도시야. 거긴 태양이 없으니까.”
“지하 도시? 거기 밝지 않아?”
서민아는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본 적 있다.
휘황찬란한 밤의 도시. 야경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아침이 없다. 어두컴컴한 밤의 세상이다.
“거긴 전기로 태양을 대체했어요.”
“즉, 도시를 밝힌 빛도 전부 가짜란 거지.”
이수현은 걱정했던 것보다 해결책이 쉽게 나오자 미소 지었다.
그러나 서민아가 밝아진 7팀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왕을 거기까지 어떻게 데려가죠?”
“…….”
그렇다. 놈의 힘을 봉인할 장소를 찾은 건 좋은데, 거긴 지구가 아닌 아예 다른 차원이었다.
지하 도시에 차원 게이트가 열릴 리 없으니, 왕과 이수현의 결전은 지구 아니면 대륙에서 치르게 될 터.
지구에서 지하 도시로 왕을 유인하는 건, 생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격이다.
상식적으로 그게 될 리가 없다.
“괜찮은 방법 같았는데…….”
“씁.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럼 어쩌죠?”
이수현과 다른 팀원들이 침울해졌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그걸 구현할 방법이 없다면 그저 망상에 불과하다.
서민아는 자기가 계획을 망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 그래도 처음 상황보단 훨씬 낫잖아요! 일단 거기까지 끌고만 가면, 승산이 오른다는 거니까…….”
“문제는 놈을 지하 도시로 데려갈 방법이 없죠.”
서민아는 이수현의 반박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이 방법은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서민아는 말을 더듬대며 직관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그럼 커다란 암실을 만들면…….”
“놈이 언제 어디로 도착할지 모르는데, 지금 착수한들 제때 완공될까요?”
“게다가 상대는 수현 오빠랑 대등하거나 그 이상인 괴물이에요. 어지간한 부지로는 1분도 못 견딜걸요?”
나예린의 설명이 정론이었다.
당장 이수현과 아무 고대신이랑 맞붙어도 암실은 무너질 거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대도시 이상의 영토를 암실로 만들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만들 수 있다 치더라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건물이 완공된들, 마법 결계처럼 옮길 수도 없다.
‘왕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 방법은 무리야.’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다. 태양이 없는 지하 도시로 놈을 유인하는 것.
지하 도시라면 이수현과 그의 병력들이 맘껏 싸울 수 있다.
도시에 피해는 있겠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잠시 대피하면 된다.
순식간에 건물은 폐허가 되고, 유령 도시처럼 변할 거다.
하지만 지구에서 깽판 치는 것보단 이쪽이 백 배, 천 배 낫다.
‘무너진 도시는 새로 재건하면 돼. 거긴 교통의 요충지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이 돈을 쏟아붓겠지.’
“그럼 저희가 궁리할 건 놈을 유인해 낼 방법이겠네요.”
나예린의 말에 모두 한숨을 쉬었다.
목표는 명확한데 방법이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서민아는 팀의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도 아직 생각할 시간이 있잖아요? 당장 내일 오는 것도 아니고…….”
우웅-!
이수현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스마트폰이다.
서민아를 비롯한 팀원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수현에게 직통 연락이 온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니까. 제발 광고 전화이기를.
“…유리아?”
그의 입에서 발신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나예린과 나머지 팀원들은 직감했다.
예언가가 직접 연락했다는 건, 최소 S급 게이트의 예고일 터.
지금 상황에서 S급 게이트가 나타날 상황은 하나뿐이다.
‘대륙의 왕이다.’
이수현은 연락을 받고 예언가와 대화했다. 얘길 듣던 그의 표정이 굳었다.
“삼 일 뒤, 타임스 스퀘어 광장에서 S급 게이트가 열린다고?”
[네…….]예언가는 벌벌 떨며 이수현에게 말했다. 모든 게 특정되지 않은 존재가 게이트 안에서 걸어 나온다고.
고작 삼 일이다.
무언가를 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수현은 차원 게이트가 발생하는 장소와 시각을 확인했다.
“…일단 알았어. 우리가 최대한 준비해 볼게.”
유리아는 이수현이 평소보다 자신감이 없단 걸 깨달았다.
즉, 지구 역사상 유례없던 위기가 닥쳤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로 어려운 싸움이겠지만, 부디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는 이제… 이수현 님 말곤 믿을 만한 분이 없습니다.]“포기 안 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꾸역꾸역 올라왔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넌 내년에 올릴 결혼식이나 고민해.”
[…알겠습니다.]이수현이 결혼식을 운운하자 유리아의 떨림이 멈췄다.
조셉의 끈질긴 구애에 그녀도 마음을 돌렸다.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 능력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의식중에 그녀를 꺼리거나 도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조셉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그녀가 마음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다.
“다들 들었죠? 왕이 지구로 넘어오는 건 삼 일 뒤, 뉴욕이에요.”
남은 일자에 다들 침묵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이수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삼 일 뒤,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단 미국 협회에 연락해 보고, 협조를 구해야겠죠.”
이수현이 부탁한다면 협조는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도와준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까.
‘결국, 놈을 지하 도시로 끌어내지 못하면 끝이야.’
대화로 어떻게 설득될 녀석이 아니다.
이수현은 고뇌했다. 팀원들도 같이 고민했다.
십여 분의 고민 끝에도 마땅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았다.
7팀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그때였다.
위잉!
숙소 회의실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입에 문 츄르를 쪽쪽 빨아먹으며 꼬릴 흔드는 묘인족, 체셔였다.
“응? 다들 왜 이리 죽상이야? 뭔 일 있어?”
팔자 좋은 고양이의 질문에 이수현은 짜증이 팍 났다.
저 녀석. 내 얘기 듣고 혼자만 잽싸게 도망치진 않겠지?
이수현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짜증남, 도주. 그 두 가지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이수현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먼 옛날, 아르키메데스가 욕조 속 물이 넘치는 걸 보고, 비중의 개념을 깨우친 것처럼.
그의 반응에 체셔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체셔, 네가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다니. 요 가증스러운 녀석!”
“뭐, 뭐야? 형, 드디어 미쳤어?”
이수현은 체셔를 번쩍 들어 올려 부모가 자식과 놀아 주듯 높이 들어 줬다.
어린애 같은 취급에 체셔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수현은 하하 호호 웃으며 덩실거렸다.
‘진짜로 미쳤나?’
체셔는 주인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한 고양이처럼, 너무 두렵단 표정을 지었다.
* * *
대륙의 왕은 이그니스의 죽음을 감지하고, 왕좌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그는 눈을 감고 대륙 전역을 관조했다.
크고 작은 차원의 일그러짐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시시각각 나타나고 사라졌다.
왕은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것들만 남겨 두고 나머진 전부 솎아 냈다.
그러자 후보지가 확 줄었다.
“드디어 내 삶에 종지부가 찍히겠군.”
대륙의 왕은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었다.
이수현과 모든 걸 걸고서 싸우고, 이기든 지든 그는 죽을 것이다.
전지전능해지기 위해 타인의 영혼들을 삼켜 왔다. 그러다 그는 고대신 아르토스와 맞붙었다.
‘아르토스가 흡수되기 직전에 사용한 망각의 저주. 그것은 나 자신을 잊게 했다.’
그 후로 왕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뭘 위해 싸워 왔는지 하나도 떠올릴 수 없게 됐다.
왕에게 잡아먹히던 아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놈은 그 망각의 저주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라고.
그 말은 정확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왕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됐다.
타인의 영혼을 삼키는 짓도 그 후론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속이 텅 빈, 살아 있는 시체가 되었다.
한참을 방황하던 왕은 뱀 군주와 만났다.
‘안구스, 용의 지식을 원했던 작은 뱀.’
무한한 지식을 갈구하던 뱀의 모습에, 왕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동질감이었다.
그래. 아르토스를 흡수하기 전, 그의 목표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려던 거였다.
뱀 군주와의 만남 덕분에 왕은 자신의 오랜 꿈을 떠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름이나 그런 뜻을 품게 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이수현과 마주쳤고, 왕은 자신의 사명을 떠올렸다.
그들은 각 차원에서 태어난 유일신 후보자였다.
“이수현. 내가 널 흡수한다면 유일신이 되어 내가 누군지, 이름은 뭐였는지 떠올릴 수 있게 되겠지.”
이수현의 혼을 흡수한 뒤, 왕은 자신이 누군지 떠올려 낼 것이다.
그다음은 간단하다. 흡수했던 이수현을 도로 뱉은 뒤, 왕은 그에게 죽어 줄 것이다.
‘물론 너 역시 다른 혼들처럼 자아를 유지할 수 없겠지.’
왕에게 잡아먹힌 이는 기억과 자아를 유지할 수 없다.
이그니스는 드래곤들의 신이었기에 겨우 가능했지만, 이수현은 인간이다.
사람의 정신력으론 버틸 재간이 없을 터.
이것은 소중한 부하이자 친우였던 뱀 군주를 죽인 것의 복수다.
‘너 역시 나처럼 무한한 갈증에 허우적댈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잃은 이수현은 그처럼 괴물이 되어, 지구의 모든 영혼을 삼킬 거다.
제 손으로 지켜 왔던 이들을 자기가 직접 죽이는 거다.
그게 왕이 바라는 복수다.
대륙의 왕은 차원 균열이 발생할 장소에서 며칠을 기다렸다.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서, 잠도 자지 않고 무언가를 먹지도 않았다.
파지직!
며칠이 지나자 차원 균열이 발생했다.
왕은 천천히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왕은 낯선 풍경에 고갤 돌렸다.
차원 균열과 연결된 곳은 미국의 어느 대도시였다.
피난 경보 때문에 행인들은 없었지만, 휘황찬란한 고층 빌딩과 전광판들이 왕을 반겼다.
“…이수현?”
왕은 전광판을 보며 이수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모든 전광판은 광고 대신 한 남자의 얼굴을 비쳤다. 이수현이었다.
[대륙의 왕, 드디어 납셨군.]“…내가 여기 나타날 걸 알고 있었군.”
[그래. 예언가한테 들었지.]왕은 눈을 꿈틀했다.
놈은 그걸 알면서도 여기서 기다리지 않았다.
“설마 싸움을 피할 생각인가?”
[아직 너한테 이길 자신이 없어서 말이야. 난 지금 네가 있는 곳과 다른 차원에 있어.]“…다른 차원?”
[그럼 안녕, 아디오스.]핏!
전광판 속 이수현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가 싸움에서 도망쳤다.
파렴치한 짓거리에 왕은 분노했다.
왕은 시커멓게 암전된 전광판을 터트렸다.
쾅!
수십 개의 전광판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어우, 진짜 쓰레기 같은 놈이죠?”
“…….”
왕은 뒤에서 들린 대륙 공용어에 고갤 돌렸다. 작은 고양이었다.
새로운 어둠 군주로 임명했던 묘인족, 체셔. 소년은 왕 앞에 섰다.
“죽고 싶어서 왔나?”
“아뇨? 전 살고 싶어서 왕님께 왔는데요.”
체셔는 간신배처럼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제가 길 안내를 좀 잘하는데. 어떠십니까? 이수현이 어딨는지 알려드릴까요?”
“…네 주인을 배신하겠다고?”
“예. 저도 저런 놈일 줄은 몰랐거든요.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다니.”
“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만약 거짓말이라면, 널 죽이겠다.”
“아유, 그럼요. 바로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대륙의 왕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체셔는 그림자 도약을 사용해, 왕과 함께 차원 터미널로 향했다.
차원 게이트 터미널은 승객 한 명 없이 조용했다. 그곳을 관리하는 직원들만 있었을 뿐.
체셔와 대륙의 왕은 바닥의 그림자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직원들은 불청객을 보고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늘은 각국 협회들의 압박으로 하루 쉬는 날인데.
“성인 둘이요.”
“…….”
체셔는 창구로 다가와 능숙하게 말했다. 그러자 직원이 헐레벌떡 안내했다.
옆의 남자는 누군지 모르지만, 체셔의 얼굴은 이미 전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이수현의 소환수다!’
‘그럼 저 남자가…….’
‘S급 게이트에서 나온 괴물?’
직원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다만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 게, 종종 차원 터미널을 이용하는 고위 헌터처럼 보인다.
당연했다. 이곳의 직원들이 경외하는 대상은 헌터니까.
“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이 체셔와 대륙의 왕에게 길을 안내했다.
왕은 건물 안쪽에 있는 차원 균열을 보고선 눈을 움찔했다.
‘내가 알던 균열이랑 다르다. 불안정하지 않고 고정됐어.’
차원 균열은 강제로 뚫린 구멍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메워진다.
하지만 저 균열은 달랐다.
다른 차원과 직결되어 있으면서도, 형태는 안정화됐다.
“이 안에 이수현이 있습니다.”
“…….”
왕은 체셔의 설명에 망설임 없이 발길을 옮겼다.
그는 이수현의 노림수가 뭔지 얼핏 눈치챘다.
‘날 이 안으로 끌어들일 셈이군.’
그걸 위해 애써 지켜 온 세상마저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이수현은 왕의 목적이 뭔지 잘 안다. 왕은 지구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이수현의 영혼뿐.
그러니 싸움을 회피하면 왕은 그를 뒤쫓을 수밖에 없다.
‘네 나름대로 결론을 낸 거겠지. 그 안에선 날 이길 수 있다고.’
대륙의 왕은 조소를 머금었다. 물론 이수현의 능력은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왕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드래곤을 물리친 건 대단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영역은 딱 거기까지다.
‘그 이그니스조차도 날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힘을 좀 흡수한들 뭐가 달라질까.
왕이 이그니스를 이수현에게 보낸 건, 대결의 구색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그에게 한 번 죽어 주려면, 싸움이 성립할 수준까진 끌어올려야 하니까.
파지직!
왕이 게이트를 통과했다. 체셔도 그 뒤를 따랐다.
대륙의 왕은 배신자 역할을 자처한 이수현의 소환수를 흘끗 보았다.
‘이 아이도 한결같군.’
대륙의 왕에게 권능까지 하사받고, 뻔뻔하게도 이수현에게 붙은 어둠 군주.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영혼과 권능을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왕은 그러지 않았다.
“너는 이수현이 날 이긴다고 생각하나?”
“…….”
왕의 질문에 체셔는 침묵했다.
왕은 지하 세계에 도착하기 전, 체셔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듣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를 배신하고 내게 붙어라. 그러면 너는 살 것이다.”
왕은 체셔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안다.
체셔는 제 한목숨 지키고자, 왕과 군주들을 배신했다.
박쥐 같은 고양이다. 체셔는 이수현이라는 인간이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자길 지켜 줄 힘만 있으면 된다.
“음. 왕님, 그건 불가능해요.”
“…불가능하다고?”
의외의 답변에 왕은 조금 놀랐다.
고민조차 안 하고 거절할 줄은 몰랐으니까.
“저도 죽기는 싫죠. 저희가 왕님을 이길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거,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도 나와 싸우겠다고?”
“그래야만 하니까요.”
체셔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왕은 어둠 군주의 굳센 의지를 느꼈다. 왕이 무슨 말을 해도 체셔는 뜻을 바꾸지 않을 거다.
‘무엇이 그를 저렇게 바꿨지?’
왕은 궁금했다.
배신자한테서 충성심을 끌어낼 만큼 이수현이 대단한 인물이란 말인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저는… 악마에게 혼을 팔고 계약을 했어요.”
“악마? 이수현이 악마라고?”
“음, 진짜 악마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그런 녀석 아닐까요?”
체셔는 반쯤 진심으로 그렇게 투덜댔다. 왕은 이해가 안 갔다.
말투를 보아하니 충성심마저 결여됐는데, 어째서 그를 배신하지 않지?
“제가 이수현을 배신하고 왕님한테 붙으면 살 확률이 높겠죠. 하지만 츄르는 평생 입에도 못 댈 거예요.”
“…츄르?”
“그런 게 있어요. 정말 끝내주는 물건이죠. 전 츄르에 낚여서 그 악마한테 영혼을 팔았어요.”
그게 뭐지? 왕은 고양이의 마음을 몰랐다.
“거의 다 도착했네요. 아무리 왕님이라도 바짝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차원 균열의 끝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이수현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왕을 반길 것이다. 왕을 찌를 창칼을 든 채로.
‘오랜만이군. 나 혼자서 대군을 상대하는 건.’
대륙의 왕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게 마지막 싸움이다. 그리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환한 조명으로 가득 찬 지하 도시의 거리가 왕을 반겼다.
그리고 이곳의 주민이 아닌 자들이 저마다 무기를 쥔 채, 오늘의 첫 방문객을 맞이했다.
“여기 있었군, 이수현.”
“그래. 나다, 새끼야.”
이수현은 암흑가의 보스처럼 진한 포스를 풍겼다.
그의 주위엔 인간뿐만 아니라 여러 이종족들이 병사처럼 도열해 있다.
왕은 수천의 살의를 받고도 미동조차 없었다.
‘특이한 장소로군.’
왕은 지구의 대도시를 닮은 낯선 풍경 속에서 묘한 그리움을 받았다.
먼 옛날에 들렀던 곳을 우연히 발견한 기분이었다.
왕의 상념은 이수현의 부름에 깨졌다.
“혼자 왔네. 아직 싱글이야?”
“날 따르던 자들은 네가 다 죽였지.”
“방치한 게 누군데.”
“그래. 난 그들의 자유와 의사를 존중해 줬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지. 그들은 너보다 약해서 죽었을 뿐.”
파아앗!
왕은 그렇게 말하며 힘을 발산했다.
망각의 권능. 의식조차 심해로 끌어내리는 고대신, 아르토스의 저주가 이수현 일행을 집어삼켰다.
불길한 기운이 몸에 들러붙자 이수현의 군단이 당황했다.
모든 게 머릿속에서 지워져 간다.
그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 무엇에 그리도 분노했는지,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망각의 늪에 빠진 이들이 허우적대다 우뚝 멈췄다.
“…….”
이수현조차 그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를 포함한 모든 이가 딱 멈췄다.
분명 숨을 쉬고 살아 있지만, 자유 의지를 상실한 인형처럼 변했다.
왕은 그들을 쭉 둘러보다 옛날 생각이 났다.
“그래, 태양신과 그를 따르던 창공의 전사들도 너희와 같은 꼴이 됐었지.”
저벅저벅.
왕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이수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그니스의 힘을 흡수하고, 너와 조금은 싸울 수 있길 바랐는데. 내 욕심이었구나.”
왕은 이수현 앞에 도착했다. 태양신도 이랬었다.
자신의 힘을 맹신하다 왕의 힘에 절망감을 느끼고, 영혼이 송두리째 먹혔다.
덥석.
왕은 이수현의 목을 붙잡았다. 이제 그의 혼을 거둘 시간이다.
‘나는 유일신이 되어, 내 이름을 떠올릴 거다.’
그래. 이름만 떠올리면 내가 뭐였는지도 전부 기억나겠지.
왕은 이수현의 영혼을 빨아들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영혼 포식이 안 됐다.
이수현의 영혼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육체와 분리가 안 됐다.
영혼 흡수에 실패하는 경우는 딱 하나다.
‘내 힘에 저항했다고?’
영혼을 먹는 왕의 능력은 분명 강력하지만, 무작정 먹어 치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상대를 굴종시켜야 한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줘서 절망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영혼은 제 육신을 버리고, 왕에게 흡수된다.
‘하지만 자의식마저 잊었는데, 어떻게 저항할 수 있지?’
왕은 당황해서 모두를 둘러봤다.
이수현뿐만 아니라 군단의 영혼들도 미동조차 없었다.
“왜, 뭐가 잘 안 돼?”
“……!”
빠악!
망각의 늪에 삼켜진 줄 알았던 이수현이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왕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통이었다.
왕은 피를 퉤 뱉고, 멀쩡한 이수현을 노려봤다.
“어떻게…….”
“기억을 안 잃었냐고?”
아르토스의 망각의 권능은 왕조차 막아 내지 못할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어찌 인간이 그걸 이겨 냈지?
왕의 의문에 이수현은 씩 웃었다.
“망각이란 건 기억을 완전히 지우는 게 아니야. 의식의 밑바닥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처박아서, 봉인하는 거지.”
“…완전히 지우는 게 아니라고?”
“그래. 까먹었던 일이 뒤늦게나마 생각나는 게 바로 그 증거야.”
이수현은 망각의 허점을 역이용했다.
그의 전자두뇌 스킬은 뇌를 컴퓨터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한번 받아들인 정보를 데이터처럼 저장하고, 필요하면 적재적소에 꺼내 쓸 수 있다.
“내가 가진 능력 중 하나가 알고 보니 망각 능력의 카운터였지 뭐야.”
“그래, 네놈이 망각의 저주에서 벗어난 건 이해했다. 하지만 저들은…….”
왕은 주변을 돌아보며 따졌다.
이수현뿐만 아니라 모두가 망각의 저주로부터 멀쩡했다.
“내가 가진 능력을 빌려줬어. 마치 너처럼.”
“…저들 모두에게 똑같은 능력을 부여했단 말이냐?”
“그래.”
왕과의 결전에 합류하기 위해 저들에게서 몇 년의 수명을 징수했다.
그는 자신의 동료와 소환수들에게 전자두뇌 스킬을 대여해 줬다.
왕은 그 사실에 경악했다.
물론 자신도 영혼과 권능을 나눠 줄 수 있다. 하지만 여럿에게 똑같은 능력을 부여하진 못한다.
이수현은 웃으며 말했다.
“왜, 너보다 상위 호환이라서 부러워? 그러길래 평소에 공부도 좀 하고, 다른 사람한테 베풀고 그랬어야지.”
“…….”
“너처럼 날로 처먹는 놈하고, 나처럼 노력하는 사람하고 동일 선상에 두면 안 되지. 안 그래?”
스릉!
이수현은 검을 뽑았다.
그를 따라서 모두가 무기를 쥐었다.
그들이 행동할 때마다 망각의 저주도 스멀거렸지만, 아주 잠깐 멈칫할 뿐 기억을 잃지 않았다.
왕은 굳게 믿었던 권능이 무용지물로 변하자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부럽고 대단하구나. 내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다들 공격!”
이수현은 왕의 사연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수천의 병사가 주인의 뒤를 따랐다.
콰과광!
왕에게 온갖 무기와 마법, 현대 화기까지 쏟아졌다.
“해치웠나?”
체셔는 연막이 걷히기도 전에 그렇게 중얼댔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자욱한 운무 속에서 왕이 걸어 나왔다.
곳곳에 두들겨 맞은 흔적은 있지만, 치명상으로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망각의 저주를 알고 경계했단 건, 빛 군주가 미리 언질을 줬겠지.”
“정보가 곧 힘이야. 뭐 불만 있냐?”
왕은 이수현의 깐족거림에 고갤 저었다. 그의 싸움 방식이 어떤지 알았다.
그에게 어이없이 당한 천둥 군주도 이런 심정이었겠지.
“그럼 이클립스의 권능은 어쩔 셈이지? 한낱 인간이 태양을 가릴 수는 없을 터.”
스윽.
왕은 한 손을 하늘로 뻗었다.
저 하늘 위에 가려진 태양을 어둠으로 뒤덮고, 막대한 힘을 움켜쥐는 마계룡의 권능.
이수현의 군단은 제법 매섭지만, 못 이길 정도는 아니다.
저들의 대장인 이수현만 처리한다면 왕은 또 승리할 것이다.
“……?”
어둠의 힘이 모여들지 않았다. 아예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왕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없었다. 태양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왕은 그제야 눈치챘다. 지하 도시의 불빛이 유달리 밝았던 이유.
그건 태양이 없는 이 세상을 비추기 위함이었다.
‘…태양이 없다고?’
왕은 그 사실을 깨닫고선 뭔가 생각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수현은 악당을 기다려 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버프의 힘을 못 쓰지. 물론 나도 태양신의 힘을 못 쓰니 똑같은 상황이야.”
“…….”
“그렇게 생각했지?”
이수현의 옆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7팀의 유일한 서포터, 교단의 성배를 쥔 강현정이 모두에게 축복을 걸었다.
성배로 강화된 그녀의 버프는 태양의 기사보다도 월등한 효과였다.
이수현은 만족스럽게 몸을 풀며, 왕에게 마검을 겨눴다.
“지금까지 많이도 해 처먹었지? 이젠 네가 죽을 시간이야.”
전방위에서 공격들이 날아든다.
적룡왕을 괴롭혔던 탄환들, 정령왕들의 마법들.
병장기들에 실린 전기나 얼음 등 대여한 자격증에서 비롯된 강력한 권능까지.
대륙의 왕은 직감했다. 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햐아압!”
쾅!
왕은 건물 벽을 부수고 그 속에 처박혔다. 이수현의 공격은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했다.
칼이 아니라 망치에 맞은 느낌이었다.
왕은 무너진 잔해 속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또 맞았다.
‘드래곤의 눈…….’
이수현은 왕이 머리를 굴릴 틈을 주지 않았다. 마구 몰아쳤다.
그러면서도 왕의 행동 패턴에 대한 분석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용의 눈을 얻고, 그의 분석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더라도 행동을 읽히는 게 너무 빨랐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왕은 속수무책으로 칼날에 찢겼다.
터엉!
사각지대로 공격을 날려도 이수현은 어김없이 피하거나 막는다.
왕은 그제야 알아챘다.
이수현은 혼자서 싸우는 게 아니란 걸. 그와 함께 싸우는 동료와 소환수들도 눈과 귀가 되어 줬다.
‘저들 모두의 의사가 연결되어 있다?’
촤악-!
왕은 신살검에 팔다리가 날아갔다. 금세 복구됐지만 피가 쏟아졌다.
마검 본연이 가진 능력이 발동됐다.
강자의 피를 먹을수록 칼날도 날카로워져 갔다.
“그렇군. 저들에게 권능을 나눠 주면서, 시야와 생각도 공유할 수 있게 된 건가?”
“그래. 이게 집단 지성이란 거다.”
푹! 촤악!
이수현은 대답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벌써 수십 번은 죽였다. 그런데도 왕은 죽지 않았다.
이수현은 그 끈질긴 생명력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하면 모든 게 끝장나니까.
피투성이가 된 왕은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이수현은 그런 녀석을 계속 때려눕혔다.
“…인간이지만 놀라워.”
“포격 개시!”
왕의 감탄은 정령왕과 소환수들의 마법 세례에 파묻혔다.
갖가지 마법이 왕과 이수현에게 포탄처럼 떨어졌다.
둘의 거리가 딱 붙어 있어 이수현 역시 폭발에 휩쓸렸다.
하지만 소환수의 공격은 주인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 상처 입는 건 왕뿐이었다.
“…쿨럭!”
왕은 목구멍 속에서 끓어오른 피를 뱉었다.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무한할 것 같던 왕의 생명력에 금이 갔다.
이수현이 때려 박았던 독이 드디어 활동을 개시했다.
“…독인가? 뱀의 신, 고르고스의 권능으로도 해독할 수 없다니.”
“방사능 맛이 어때?”
왕은 지구에서 생소한 것들을 많이 접했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콰당!
이수현의 공격에, 왕은 땅바닥에다 얼굴을 처박았다.
고운 입자의 모래가 얼굴에 묻었다.
‘붉은 모래?’
왕은 뺨을 쓸어내리며 사막의 모래를 만지작댔다.
싸움 도중에 한눈을 팔자, 이수현은 검으로 급소를 찢어발겼다.
그런데도 왕은 죽지 않았다.
“헉, 헉…….”
이수현은 조금 지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왕은 바닥에 자빠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쿨럭!
쌓이고 쌓인 방사능이 왕의 몸을 좀먹었다. 그는 왈칵 피를 쏟았다.
“붉은 사막…….”
“뭐?”
이수현은 왕이 뭐라 중얼대자, 검을 들어 올렸다.
이상한 짓거릴 하기 전에 목구멍을 찢어 둬야 한다.
서걱!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도 왕의 머리는 계속 말했다.
목 아래에서 아예 새로운 육체가 자라났다.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이었다.
‘뭐 이딴 괴물이…….’
이수현은 놈의 심장을 터트리고, 주요 장기를 칼로 헤집고, 척추를 끊었다.
그런데도 놈은 죽지 않았다.
왕은 땅바닥을 쓸어 담아 붉은 모래를 움켜쥐었다.
“그래. 기억났다.”
왕은 홀린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고층 빌딩들이 늘어선 탓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싸움의 여파로 건물의 숲이 무너지자, 지하 도시의 원형이 드러났다.
이곳은 본디 아무것도 없는 붉은 사막이었다.
“이수현.”
“왜. 인제 와서 살려 달라고 해 봤자…….”
“네가 이겼다.”
왕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맥 빠지는 항복 선언에 이수현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나는 이곳의 풍경을 보고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태어났고, 목적은 뭐였는지.”
“갑자기 뭔 헛소릴…….”
“난 이 붉은 사막의 차원에서 홀로 태어난 생명체다.”
왕은 인간의 손길로 많이 달라진 자신의 고향을 훑어봤다.
대륙의 왕은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다.
“이곳의 차원이 멸망할 때, 사막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씨앗을 심었었다.”
“씨앗? 그게 너라고?”
붉은 사막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차원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어떤 생명체도 탄생하지 못했다.
사막은 자신의 차원을 이런 식으로 설계한 신을 증오했다.
그래서 붉은 사막은 마지막 힘을 전부 쥐어짜 내 자신의 분신을 만들고,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보냈다.
다른 차원의 생기 넘치는 모든 것을 증오하고, 모조리 집어삼켜라.
“이 세상이 살아날 수 없다면, 다른 차원을 황무지로 만들어라. ‘적사막’은 날 만들 때, 그런 의지를 심어 뒀지.”
“적사막? 이 차원의 이름이야?”
“그래. 난 적사막의 분신이다.”
띠링-!
이수현의 귓가에 알림음이 들렸다.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녀석의 이름이 갱신됐다.
아니, 정확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건 왕의 정체였다.
[적사막의 분신]적사막, 이 붉은 차원의 마지막 의지를 이어받아 태어난 괴물.
다른 차원의 생명을 먹어 치우고, 그 차원도 이런 사막처럼 만드는 게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니 대륙의 왕은 유일신 후보조차 아니었다.
“그럼 네가 유일신 후보다 뭐다 했던 건 뭔데? 전부 개소리였냐?”
“…아니, 넌 유일신 후보자가 맞다. 널 보고 나 역시 같은 존재일 거라 멋대로 착각했을 뿐이지. 너와 내 능력은 묘하게 닮았거든.”
대륙의 왕은 이수현의 혼에 새겨진 본질을 알아채고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유일신 후보인 걸 알아채고, 자신도 후보일 거라 망상했다.
전부 그의 착각이었다.
“유일신은 오직 한 명뿐이다. 그러니 후보자가 여럿일 필요도 없지. 난 그저 멸망 직전의 차원이 만들어 낸 괴물일 뿐이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 혼자 착각했다 이거지?”
파스슥!
왕의 손가락이 점차 바스러졌다.
끝없을 것 같던 왕의 생명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간 먹어 치웠던 영혼들이 간직한 힘들이 하나둘씩 사멸했다.
‘많이도 먹어 치웠구나.’
왕은 심해의 고대신, 아르토스를 떠올렸다.
망각의 저주로 왕이 자기 자신을 잊지 않았더라면, 대륙은 진즉 사막처럼 변했으리라.
그랬으면 뱀 군주를 포함한 몇몇 군주와도 아예 만나지 못했겠지.
“…나는 내가 대단한 사명을 품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아르토스가 건 망각의 저주로 내 소중한 이름을 떠올릴 수 없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지.”
왕에겐 애초부터 이름이 없었다.
그저 적사막이 만든 분신일 뿐이다.
이수현을 흡수해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되면, 잊었던 이름과 사명을 기억해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바람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수현, 네가 이겼다. 날 죽여라. 날 흡수하면 네 영혼은 유일신에 오를 자격을 얻을 거다.”
이수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왕의 가슴을 검으로 꿰뚫었다.
왕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줄곧 품어 왔던 꿈이 헛된 것이란 게 서글펐다.
왕과 왕에게 잡아먹혔던 수많은 영혼들이 마검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영혼과 교감하는 권능이 이수현에게 생겨났다.
이수현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름이 없으면 그냥 네가 정하면 되잖아.”
“…뭐?”
“사내 새끼가 뭐 그딴 걸로 울고 있어. 마검 안에 다른 영혼 친구들도 많으니까, 잘 상의해서 정해. 싸우지 말고.”
왕은 이수현의 뜬금없는 해답에 당황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왕은 다른 세상으로 떨어졌다.
* * *
“……?”
왕은 눈을 떴다.
분명 이수현의 칼날에 가슴을 꿰뚫려 죽었는데. 멀쩡히 호흡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 그래. 이수현의 마검은 죽인 자의 영혼을 흡수하는 무기였지.’
대륙의 왕은 주변을 돌아봤다.
마검의 안은 그가 태어난 사막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수많은 영혼이 돌아다녔다.
적사막이 그토록 바랐던 차원의 주민들이었다. 왕은 천천히 일어났다.
“……?”
세상을 보는 시야가 확 낮아졌다. 정확히는 그의 몸이 작아졌다.
왕의 영혼은 아주 어린 꼬마였다.
사막에 불시착한 어느 조종사가 만났다던 어린 왕자와 모습이 비슷했다.
스르륵.
무언가가 뒤에서 다가왔다. 어린 왕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갤 돌렸다.
작은 사막 뱀이었다. 그 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어린 왕자에게 소리쳤다.
“왕이시여!”
“…안구스? 설마 너야?”
“그렇습니다.”
“의식을 찾았구나!”
왕의 영혼과 분리된 뱀 군주가 자의식을 되찾았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친구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뱀 군주가 끝이 아니었다.
푸드득!
작은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날아왔다. 천둥 군주였다.
“오랜만이다, 대륙의 왕. 근데 여긴 대체 어디냐? 네 모습은 왜 꼬맹이가 됐고…….”
어린 왕자는 작은 뱀과 매 한 마리를 데리고서 사막을 걸었다.
그는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놨다.
왕은 속 시원한 대화 속에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뭐야, 고작 이름 하나 기억해 내려고 싸워 온 거냐? 너도 참 웃기는 놈이야.”
“천둥 군주! 왕께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라!”
천둥 군주의 영혼이 키득대며 웃었다.
그러자 사막 뱀이 작은 매를 쏘아봤다.
뱀 군주의 혼은 무례한 언행을 삼가라 소리쳤다.
“안구스, 난 이제 왕이 아니야.”
“예?”
“이수현에게 패하고, 모든 힘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친구들을 되찾았지.”
“그럼 새로운 이름을 지어야겠군. 안구스, 넌 우리 중에 가장 똑똑한 놈이니 멋들어진 이름으로 하나 지어 봐.”
“제, 제가 왕의 이름을요?”
사막 뱀은 황송한 마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린 왕자는 친구가 지어 준 이름을 듣고선 깔깔대며 웃었다. 마음에 든 표정이었다.
“다인 님, 정말 저대로 놔두실 생각입니까?”
어린 왕자 일행을 감시하던 이들도 있었다. 이 영혼 세계의 관리자이자 마검의 자아를 담당하는 기사, 다인.
그녀는 왕의 본질을 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이수현이 승리하면, 왕에게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해맑게 웃는 꼬마 왕자를 어떻게 건드려요. 다들 철수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다인은 깔끔하게 복수를 포기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선 상대를 죽여도 소멸하지 않으니까.
* * *
이수현은 왕과 수많은 영혼의 힘을 흡수하고, 유일신이 될 자격을 얻었다.
쿠구궁!
그런 그의 앞에 커다란 탑이 생겨났다. 어찌나 높은지 탑의 꼭대기가 안 보였다.
‘이런 게 지구에 안 생긴 게 다행이네. 지하 도시에서 놈과 싸우길 잘했어.’
이수현은 저 탑이 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곳은 유일신이 될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장소.
왕을 죽인 것과 동시에, 후보자 앞에 시험대가 나타났다.
이수현은 함께 싸워 준 동료들을 돌아봤다. 다들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수현 오빠, 저건 대체 뭐죠?”
“타, 탑이 생겼어요…….”
“어쩐지 좀 불길한데요.”
이수현은 나예린과 서민아를 바라봤다. 그는 저 안에 들어가면 쉽사리 나올 수 없단 것도 깨달았다.
저 탑은 유일신이 되느냐 못 되느냐 결정짓는 시험장이다.
‘그런 시험이 하루아침에 끝날 리 없어.’
이수현은 팀원들에게 탑의 존재 의의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들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 그럼 오빠가 들어갔다가 못 나올 수도 있단 거예요?”
“그럼 그냥 때려치워요. 굳이 수현 씨가 신이 될 필요 없잖아요?”
“민아 말이 맞아요. 수현 씨, 당신은 아직 지구에 필요해요.”
“으음. 이건 제 감인데요. 제가 저 안에 들어가면, 차원 게이트도 더는 안 열릴 거예요. 헌터들의 능력도 사라질 거고.”
이수현의 발언에 모두 당황했다.
차원 게이트가 안 열리고 헌터들의 능력이 사라져?
세상은 헌터들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돌연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질 거다.
나예린이 다급히 설득했다.
“다른 차원의 몬스터보단 일반인들이 문제예요. 헌터들의 능력이 모조리 사라지면…….”
이수현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안다.
로키의 헌터 킬러로도 그 소란이 났는데.
능력자가 전부 사라지면 그간 억압되어온 자들의 분노가 폭발하겠지.
“예린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예?”
“저 탑이 내 머릿속에다 말하고 있어. 그런 일은 없도록 할 테니 빨리 들어 오라고.”
이수현은 뜻을 굳혔다.
저 탑은 이수현을 부르고 있다. 여기서 거절했다간, 세상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뭐, 일단 도전해 보고 시험에 탈락하면 그냥 내보내 주겠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저, 전…….”
나예린은 울먹이며 이수현한테 매달렸다. 서민아와 강현정도 그녀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수현은 애써 밝게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럼 시험 조지고 올게.”
그가 탑으로 걸어갔다. 근처까지 다가가자 이수현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예린과 서민아는 급히 탑으로 뛰어갔다.
퉁-!
하지만 그녀들은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에 튕겨 나왔다.
* * *
이수현은 탑의 내부를 둘러봤다.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전지(全知)의 탑에 온 걸 환영합니다, 후보자시여.]“넌 누구지?”
[저는 탑의 관리자입니다.]이수현은 도서관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갤 돌렸다. 모습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유일신이 될 시험을 치르나? 설마 탈락한다고 해서 막 죽이는 건 아니지?”
[당신은 이미 전능의 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니 탈락할 일은 없습니다.]“오, 그래?”
이수현은 무조건 합격한다는 말에 솔깃했다. 신이 되고픈 마음은 없지만, 여기서 나가려면 신이 되어야만 했으니까.
“그럼 뭣 때문에 날 불렀지?”
[전능함은 입증했으니, 남은 건 전지입니다.]“모든 걸 알라고? 그게 가능할 리 없…….”
[제가 돕는다면 가능합니다. 이 서고는 우주 만물의 법칙과 원리가 기록된 아카식 레코드니까요.]“…아카식 뭐?”
이수현은 처음 들어 본 명칭에 고갤 갸웃했다.
탑의 관리인은 알기 쉽게 설명했다.
[이곳에서 보관 중인 정보를 당신의 머릿속에 전부 덧씌울 겁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전지전능한 존재가 완성되는 거죠. 당신에게 전자두뇌라는 권능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걸 잘 활용하도록 하죠.]“지식을 덧씌운다니. 어떻게?”
[한꺼번에 많은 정보가 들어가므로 좀 고통스러우실 겁니다.]관리자는 설명을 끝냈다. 동시에 이수현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뭔가가 온다.
탑이 보관하던 지식들이 그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악! 자, 잠깐만! 멈춰! 멈춰 봐!”
[뭐죠?]지식의 공급이 일순 멈췄다. 이수현은 헉헉대며 애원했다.
“무식하게 죄다 쑤셔 박으면 어떡해! 머릿속이 엉망이 되잖아. 좀 더 천천히…….”
[지구로 빨리 돌아가고 싶으신 게 아니셨나요?]“그, 그건 그렇지만…….”
[엄살 피우지 마시죠. 당신은 유일무이한 유일신 후보입니다. 이 정도로 영혼이 망가지진 않아요.]탑의 관리자는 빠른 복귀를 빌미로 이수현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는 무한한 탑의 지식 속에서 헤엄쳤다.
빨리 팀원들 품으로 돌아가려면 이 망할 지식 전수를 끝내야만 한다.
* * *
이수현이 전지의 탑으로 들어간 지 반년이 훌쩍 지났다.
헌터와 차원 게이트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헌터와 관련된 기록들도 싹 사라졌다.
아예 그런 역사가 없었던 것으로 현실이 조작됐다.
엘프 같은 아인종들이 지구 곳곳에 살아도 지구인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 애가 왜 연애를 안 하겠다고 버티는지 모르겠어요.”
“분명 우리 딸한테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서민아의 어머니는 맞선을 보지 않겠다는 딸의 고집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이수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민아가 왜 맞선을 거부하는지 몰랐다.
‘수현 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어.’
이수현과 긴밀하게 지냈거나, 그와 자격증을 대여했던 이들은 이전의 기억이 남았다.
탑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서민아는 미국으로 향했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다.
이수현의 지인인 조셉과 유리아의 결혼식에 그녀도 초청받았다.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7팀 여러분들.”
“이젠 헌터도 뭣도 아닌걸요.”
조셉은 먼 이국땅에서 결혼식장을 찾아와준 7팀 전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예린이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조셉은 아쉽단 목소리로 그 녀석을 언급했다.
“이수현, 그 녀석이 이런 식으로 제 뒤통수를 때릴 줄은 몰랐습니다.”
조셉은 7팀에게 사연을 전해 들었다.
이수현이 복귀할지도 모른다 생각해 결혼식을 미루고 미뤘지만, 그는 소식이 없었다.
결국 조셉은 석 달 가까이 미뤄 온 결혼식을 진행했다.
“와, 부럽다…….”
서민아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바라봤다.
유리아의 자태에 조셉은 물론이고 모두가 감탄했다.
서민아도 언젠간 저런 예복을 입어 보길 원했다.
야속하게도 그녀의 마음을 앗아 간 남자는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할짝.
늑대에서 평범한 강아지로 돌아온 복덩이가 엄마의 손을 핥았다.
서민아는 복덩이를 달래며 결혼식을 쭉 지켜봤다.
“부케 던지기도 하나요?”
결혼식이 끝나자 대학생이 된 나예린이 의욕을 불태웠다.
신부, 유리아가 쿡쿡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서민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부가 던진 부케를 잡으면 곧 결혼한다고 하던데.
‘어쩌면 수현 씨가 돌아올지도 몰라.’
아무래도 좋았다. 저걸 잡아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으니까.
서민아는 오랜만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옆을 보니 나예린도 질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럼 던질게요!”
유리아가 빙 뒤돌아선 채, 부케를 높이 던졌다.
그녀들 쪽으로 던져진 부케.
콰당!
서민아와 나예린은 과한 경쟁으로 엉켜서 쓰러졌다.
결국, 두 사람은 부케를 놓쳤다.
신부의 부케가 땅바닥에 톡 널브러졌다. 그걸 복덩이가 잽싸게 낚아챘다.
“왕!”
“복덩아, 그걸 네가 잡으면 어떡하니…….”
개라서 공 던지기 놀이를 하는 줄 알았나 보다.
서민아는 우울한 표정으로 낙담했다.
우우웅-!
그때였다. 결혼식장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부케를 입에 문 복덩이는 귀를 쫑긋거리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뭐, 뭐지?”
“공간이 일그러졌어……!”
이수현에 대한 기억이 남은 자들은 그게 뭔지 단박에 알아봤다.
반년 전에 소실됐던 차원 게이트다.
과거 헌터였던 자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됐다, 성공이야!”
불쑥!
곧 차원 게이트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그 사람은 이수현이었다.
그는 탑으로 사라졌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를 거다. 이수현이 얼마나 오랫동안 탑 안에서 공부했는지.
“왕!”
복덩이가 이수현을 알아봤다.
녀석은 부케를 입에 꼭 문 채 달려갔다. 이수현은 복덩이를 알아보았다.
그는 활짝 웃으며 녀석을 품에 안았다.
“복덩아! 형 보고 싶었어?”
“끼잉!”
“오구오구, 그랬어? 근데 이건… 부케잖아?”
이수현은 분명 7팀의 기운을 추적해서 게이트를 열었는데, 낯선 장소였다.
그는 그곳이 결혼식장인 걸 깨달았다.
“수현 씨!”
“오빠, 어떻게……!”
이수현은 그리운 목소리에 고갤 돌렸다. 그는 그녀들의 까맣게 탄 속내도 모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 돌아왔어요. 조셉의 결혼식인 걸 보니 벌써 1년이나 지났나 봐요?”
저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너무도 그리웠다.
서민아와 나예린은 울먹이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복덩이가 신난 표정으로 왕 짖었다.
[완결]스펙 쌓는 헌터 9권 [완결]
지은이 │ 긍정론적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33길 11. 1101호(구로동, 에이스테크노타워 8차. 11층)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홈페이지 │ https://blog.naver.com/jayplemedia1
ISBN │ 979-11-396-0047-6 (05810)
ISBN │ 979-11-396-0038-4 (set)
정가 2,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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