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 stacking hunter RAW - volume 9 (4)
9-4장.
“오! 이 헌터. 이렇게 바로 와 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정말 고맙네.”
이수현은 곧장 엘프들과 함께 미국의 헌터 협회장을 만났다.
수백의 이종족을 달고 왔지만, 미국 협회장은 두 팔 벌려 이수현을 환영했다.
예언가 유리아가 자국 내 S급 게이트 사태를 예견한 상황.
게다가 이번에 상대할 보스는 드래곤이다. 지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수현을 토벌 작전에 끌어들여, 빠르게 수습하길 원했다.
“오랜만이다, 이수현.”
“이수현 님,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 조셉, 그 반지는…….”
조셉과 유리아도 이수현을 반겼다.
이수현은 둘에게 인사하려다, 달라진 걸 확인했다.
조셉과 유리아의 손가락에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수현은 고갤 끄덕였다. 조셉의 사랑이 그새 결실을 이뤘나 보다.
“내년 초쯤에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야. 청첩장 보낼 테니 너도 꼭 와라.”
“좋지. 쨔식, 미리 축하한다.”
이수현은 조셉의 어깰 두들기며 칭찬했다. 조셉은 말이 나온 김에 은근슬쩍 질문했다.
“넌 뭐 기쁜 소식 없냐?”
“나?”
“그래. 저번에 보니 강현정 헌터랑 묘한 기류를 풍기더니.”
피식.
이수현은 조셉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묘한 기류는 무슨.
연애하더니 모든 게 다 그런 쪽으로 보이나 보다. 이수현은 고갤 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거 절대 아냐, 인마. 그리고 같은 팀원끼리 그러면 안 돼.”
“에이, 그건 너무 고리타분한 규정이잖아. 요샌 2~3급 헌터들도 눈치 안 보고 연애하고 그러는데.”
“그래?”
협회에서 같은 팀원끼리 연애를 하지 말라 권고하는 건, 팀의 결속과 던전 공략에 지장을 줄까 우려해서다.
하지만 그것도 상위 헌터에겐 큰 의미 없었다.
하물며 이수현 수준의 강자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크흠. 조셉, 지금은 그런 얘기나 할 때가 아니에요.”
“미, 미안해요. 유리아.”
유리아의 한마디에 조셉은 꼼짝을 못했다. 그래도 존칭을 뺀 걸 보니 확실히 연인다웠다.
이수현은 둘의 풋풋한 모습에 은근히 부러웠다.
미 협회장은 자리에 앉고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국 협회장에게 대강 들었네. 미국의 지원을 바란다고?”
“예. 레드 드래곤이 세계수를 불태워 죽이고, S급 게이트를 넘어오기 전에 놈을 칠 생각입니다.”
“음. 게이트가 아직 열리지도 않았는데 그게 가능한가?”
이수현의 설명에 협회장은 의문을 표했다.
차원 게이트가 열리기도 전에 보스를 잡겠다니. 게임으로 치면 그건 버그 플레이다.
“물론 제가 놈을 공격하는 건 아닙니다. 저와 함께 오신 엘프들이 시간을 끌어 줄 겁니다.”
“엘프들이……?”
이수현의 소환수가 된 엘프들은 대륙과 지구를 왕복할 수 있다.
즉, 현 시점에선 레드 드래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병력이다.
“물론 엘프들이 강한 이종족인 건 나도 아네. 강력한 마법과 정령술에 활 솜씨마저 백발백중이라지.”
미 협회장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엘프들이 대단해도, 드래곤은 못 이기지 않을까.
이건 이수현이 직접 나서야 할 문제다.
“물론 지금 당장은 못 이기죠. 아니, 놈의 비늘에 생채기도 못 낼 겁니다.”
“그럼?”
“그래서 미국의 힘이 필요합니다. 저는 엘프들에게 총을 비롯한 현대 병기를 쥐여 줄 생각입니다.”
“현대 병기를? 설마…….”
미국도 당연히 소식은 들었다.
이수현과 한국의 군대가 현대 병기로 4성급 던전을 순식간에 공략했다는 걸.
미 협회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몬스터에게도 먹히는 현대 병기를 양산해 낼 방법이 있는 건가?”
“가능합니다. 물론 지폐 찍어 내듯 대량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고요.”
이수현의 말에 세 사람은 할말을 잃었다.
정말로 몬스터한테 통하는 병기를 만들 수 있다니.
“하지만… 몬스터에게 먹힌다는 건, 헌터한테도 통한다는 뜻일 텐데. 정말 괜찮은 건가?”
“무엇이 말입니까?”
“저 엘프들이 총구를 우리한테 돌리면 어쩌냐는 말일세.”
미 협회장의 말은 지구의 언어라서 엘프들에게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엘프들의 눈은 상대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엘프 장로, 나이샤는 미 협회장과 다른 두 사람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걸 눈치챘다.
“저, 이수현 님. 잠시 통역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장로님.”
이수현은 엘프어로 능숙하게 화답했다.
보고서로만 듣던 이수현의 능력에 미 협회장의 눈이 반짝였다.
“저들이 무얼 두려워할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희가 인간분들을 해칠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그걸 저들께 확실히 짚고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예, 장로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헌터, 방금 저 엘프와 무슨 말을 나눈 건가?”
“여기 엘프들도 형식상으론 제 소환수입니다. 그러니 묘인족이나 인어들처럼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제야 엘프들이 찬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 똑같은 형태라서 일족의 전통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구의 물건이었다.
미 협회장은 안도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그럼 문제는 없겠군. 뭐, 이 헌터가 딴맘을 품을 리도 없고.”
“제가 세상을 지배하려 했다면 귀찮게 이런 연극을 할 이유도 없죠. 순수한 선의입니다. 엘프분들한테 도움받은 것도 갚을 겸.”
“…크흠, 의회를 설득해 보겠네.”
미 협회장은 살벌한 농담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실제로 이수현이 하고자 할 마음만 먹으면 말릴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수현이 조용히 지내는 건 잃을 게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가족과 팀원들.
그 마지노선이 무너지면 이수현은 헌터에서 악마로 돌변할지 모른다.
‘종종 멍청한 놈들이 이수현 헌터의 주변인들을 건드리려 했지.’
어정쩡하게 강할 때는 암암리에 이수현을 견제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협회도 그런 불순분자가 해코지 못 하게 감시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너무나도 강해졌다. 적으로 돌리는 게 두려울 정도로.
‘헌터 킬러 사태 때, 이수현 헌터가 지구에 없던 게 천만다행이었어.’
실제로 헌터 킬러를 믿고 행동한 자들이 있었다.
러시아는 자국의 정상급 헌터, 안드레이가 죽은 것 때문에 조용히 이를 갈아 왔는데.
로키가 만든 헌터 킬러가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러시아와 몇몇 동맹국은 이수현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함정을 팔 계획을 짰다.
이수현과 동맹 관계였던 협회들은 그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다 이 헌터가 극적인 타이밍에 복귀해서 잘 해결됐지.’
이수현이 로키를 제압하자, 암시장에 퍼졌던 헌터 킬러도 힘을 잃었다.
돌이켜 보면 아찔한 상황이었다.
“엘프들에게 화기 다루는 걸 가르쳐 줄 교관들이 필요합니다.”
“암. 물론이네. 미국 내 최고의 교관들을 배치해 주지.”
“배우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 못합니다.”
세계수가 오래 버텨 봤자 3~4일이다.
즉, 당장 착수해도 시간이 빠듯하다. 이수현과 엘프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 * *
“헉, 헉…….”
드래곤의 고대신, 이그니스는 지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용과 거목이 대치한 지 벌써 20시간이나 지났다. 세계수는 아직 건재했다.
[당신이 계속 무시했던 이수현 님이 만든 결계입니다. 성능이 어떠신가요?]“다, 닥쳐!”
고작 저딴 결계에 발목을 묶이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보호막의 재생 속도가 조금 늦춰졌다. 계속 몰아붙이면 깨질 거야.’
이그니스의 공격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여유로운 말투로 용을 조롱했지만, 세계수 역시 점차 지쳐 갔다.
그래도 두려움은 없었다.
엘프들은 무사히 지구로 피신했고, 이그니스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응?”
이그니스는 눈동자를 굴려 숲속을 바라봤다.
방금 나무와 수풀 속에서 뭔가 움직인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타다다당-!
하지만 용의 감각은 정확했다. 지상에서 뭔가가 발사됐다.
“뭐?”
페어리들의 주술로 은신을 한 엘프들이 활을 쐈다.
아니, 활이라고 부르기엔 그것은 너무도 길쭉했다. 마치 막대기 같았다.
조그만 금속 물체들이 이그니스에게 날아들었다.
‘뭐지?’
이그니스는 엘프들이 몰래 다가와 기습을 했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저딴 벌레들이 아무리 공격한들 자신의 비늘엔 흠집조차 안 난다.
그랬어야만 했다.
푸욱! 퍽!
수천 발의 금속이 용의 비늘을 뚫었다.
총알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한곳으로 집중되자 비늘에 금이 갔다.
“……!”
이그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는 용의 정신력으로 겨우 참았다. 벌레한테 물려 비명을 지른다니.
그랬다간 부끄러워서 차마 고갤 들 수 없었다.
이그니스는 급히 실드 마법을 펼쳤다.
아니나 다를까, 후속타가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터더더덩-!
드래곤의 실드도 총알 세례 앞에선 버티지 못했다.
당황한 이그니스는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건 대체……!”
수풀에 숨어 있던 엘프들이 보인다.
그들은 초당 100발 이상을 갈길 수 있는 미니건을 들고 있었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신을 지키고자, 미국의 크고 아름다운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발포!”
위이이잉-!
여러 개의 총열이 빠르게 돌아갔다.
엘프들은 이 택티컬한 활의 발사 원리를 몰랐다. 하지만 결과는 이해했다.
무자비한 폭력이 이그니스에게 날아들었다.
콰직!
실드 마법이 마침내 깨졌다. 시커먼 죽음들이 붉은 용의 온몸을 두들겼다.
“크아아아악!”
용은 비명을 지르며 더 높이 날아올랐다.
총알이 닿지 못하는 상공까지 올라가서야 날갯짓을 멈췄다.
이그니스는 엉망이 된 몸을 살폈다. 용의 피가 흐른다.
마법이나 소드 오러가 담긴 칼이면 또 모를까.
자신의 눈곱보다도 작은 금속 물체 때문에 다쳤다. 용은 크게 분노했다.
“이, 망할… 벌레 자식들이!”
몸을 회복한 이그니스가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왔다.
가증스러운 엘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분노로 눈이 돌아간 이그니스가 마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결계가 엘프들을 보호했다.
[이그니스.]“……!”
세계수의 혼이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나타났다.
수모를 겪은 이그니스가 이빨을 드러낸 채 그녀를 노려봤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도망치세요.]“뭐, 뭐라고?”
[이수현 님께선 며칠 뒤에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제 아이들이 쥔 무기는 그분의 힘이 깃든 아티펙트입니다.]“저게 그 녀석의 힘이라고……?”
이그니스는 콧김을 훅 내뿜었다. 확실히 대단한 무기였다.
드래곤에게 통할 정도의 아티펙트라니.
‘그 녀석도 유일신 후보자라 이건가?’
이그니스는 놈을 조금이나마 인정했다. 그 녀석이 무슨 수로 저걸 엘프들에게 쥐여 줬는지는 모르겠다만. 꽤 아팠다.
“내가 이깟 거에 겁을 먹고 꼬릴 말 거라 생각하나!”
화르륵!
이그니스는 브레스를 뿜었다.
그러자 미니건의 총알들은 몸에 닿기도 전에 녹았다.
이것이 유일한 약점.
내력을 불어넣어도 내구도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크하핫! 금속 덩어리 따위론 내 분노를 막을 수 없…….”
슈웅-!
어디선가 큼직한 포탄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RPG, 일명 로켓 런처였다.
지구인은 조그만 총알을 날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이어볼을 과학으로 개발했다.
콰아앙-!
이그니스의 머리에 폭발형 로켓이 명중했다.
“커, 헉……!”
방심하다 한 대 맞은 레드 드래곤은 피를 질질 흘렸다.
콰앙! 쾅!
어지러움에 머릴 흔들다 또 한 방 맞았다. 미국의 기상을 등에 업은 엘프들은 부유했다.
이수현의 내력도 전보다 대폭 늘어난 탓에 현대 무기의 양질이 좋아졌고.
엘프들의 목적은 드래곤을 잡는 게 아니다.
놈을 방해하고, 최대한 열받게 하는 것.
“크아아아! 이 잡것들이!”
이수현의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이그니스는 도망치듯 상공으로 피신했다.
명사수 엘프들은 환호하며 이수현의 이름을 연신 부르짖었다.
드래곤이 여길 포기하고 내뺄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용은 자존심 빼면 시체니까.
붉은 용은 숲 외곽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가 멈춰 선 곳엔 수 초 내로 무장한 엘프들이 나타났다.
이건 세계수의 능력이다. 이 숲의 나무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엘프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젠장, 사각지대가 없잖아.’
이그니스는 숲 주위를 빙빙 도는 걸 멈췄다. 적어도 이 숲에서 엘프들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저 벌레 같은 것들이 감히…….”
이그니스는 현대 병기로 무장한 엘프들에게 크게 데였다.
하지만 그는 세계수의 결계를 부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좀 아프긴 하지만, 엘프들의 무기는 날 죽이지 못한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아팠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건 벌에게 침을 쏘인 정도다.
계속 맞지만 않으면 목숨을 앗아 갈 수준은 아니었다.
이그니스는 엘프들의 독침이 무서워, 비행 고도를 높였다.
적당히 날아오른 이그니스가 지상을 내려다봤다.
숲속의 엘프들이 개미보다도 작게 보인다. 총알과 로켓 런처는 닿지 못할 거리였다.
“후, 적룡왕인 내가 저런 것들을 먼저 피한다니…….”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저놈들이 이 광경을 본 이상, 이그니스는 밤잠을 설칠 거다.
적룡왕은 자신의 숙면을 위해,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멸하기로 했다.
학살자의 변명치곤 굉장히 옹졸했다.
“이 높이에선 나만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다.”
거리 때문에 브레스와 마법의 위력이 조금 줄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콰과광!
조용했던 숲의 보호막이 다시 요동쳤다. 이그니스의 마법 폭격이 시작됐다.
지상의 엘프들은 벌벌 떨었다.
그들은 잠시나마 몰아냈던 녀석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상기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어도 역시 드래곤…….]전신을 난자했던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다. 이수현의 내력이 담긴 무기도 용의 재생력은 어쩌지 못했다.
일반적인 생명과는 태생부터가 달랐다.
세계수는 그가 저 괴물을 어떻게 잡을지 걱정했다.
“세계수 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나이샤, 이수현 님께선 우릴 버리지 않으셨군요.]“예, 그분께선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엘프의 장로, 나이샤가 신목 앞에 도착해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뒤엔 현대 무기로 완전무장한 엘프들이 도열했다.
세계수와는 하루도 안 되어 재회했지만, 엘프들은 고된 밀리터리 훈련이 몇 년처럼 느껴졌었다.
세계수가 혹 잘못되진 않았을까 전전긍긍했는데, 이젠 한시름 놓였다.
[그렇군요. 차원 균열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벌어서…….]세계수의 영혼이 고갤 끄덕였다. 이수현의 계획대로 된다면 단 한 명의 희생자 없이 이그니스를 무찌를 수 있다.
엘프들은 이수현이 도착할 때까지만 시간을 끌어 주고, 지구로 도피하면 된다.
[하지만 그 신묘한 힘도 이젠 닿질 않는군요.]세계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높이 날아오른 이그니스가 쉴 새 없이 결계를 두들겨 댔다.
저 가증스러운 붉은 용은 체내의 마력이 무한대에 가까웠다.
‘드래곤 하트.’
동양의 용이 입에다 여의주를 문 것처럼, 드래곤도 체내에 조그만 구슬을 품고 있다.
그 구슬은 몸의 주인에게 막대한 마력을 공급해 준다.
‘드래곤 하트를 삼킨 자는 그 힘을 일부 다룰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이수현이 이그니스를 잡는다면, 드래곤 하트를 취할 수 있으리라.
대륙의 왕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인간이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까? 세계수는 회의적이었다.
“세계수 님,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끝난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저흰 선발대입니다. 다루기 쉬운 무기들만 익혔지요.”
[예?]그러고 보니 엘프 전사들의 인원수가 한참 모자랐다.
신경 쓸 경황이 없어 세계수도 이제야 눈치챘다. 엘프 장로는 희미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저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드래곤조차 모독할 수 있는 사상 최대의 무기들의 위력을요.”
[드래곤을 모독한다니. 대체 무슨 무기길래…….]미국은 엘프들에게 말로 설명하는 대신 시연을 보여 줬다.
그들의 병기는 대지를 뒤흔들고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마력을 품은 자에겐 안 통한다고 했지만, 이수현은 그 제약마저 없앨 수 있다.
엘프들은 확신했다.
드래곤에게 저것들을 날릴 수만 있다면, 시간을 끄는 것쯤 식은 죽 먹기라고.
[……!]숲속에 새로운 생명체 반응들이 감지되었다.
다른 곳에서 훈련을 수료하고 온 엘프 전사들이었다.
엘프들은 커다란 전차에 탑승해 있었다. 게다가 탑승자들 사이에 인간들도 일부 섞였다.
미숙한 엘프들을 도와줄 미군들이었다.
이들이 차원을 넘어올 수 있었던 건, 전부 이수현의 능력 덕분이었다.
이수현 소유의 차량에 사람이 탑승하면, 그들은 전부 보조 장비로 취급된다.
이수현은 그걸 역이용해, 차원 게이트 없이 미군을 지원 병력으로 파견 보냈다.
* * *
엘프 전사들이 고향으로 복귀하기 몇 시간 전.
이수현은 미국의 제안에 아연실색했다.
“…이 많은 전차를 저한테 공짜로 주시겠다고요?”
“물론입니다. 나라를 구하는 데 이 정도면 싼 편이죠.”
한두 대도 아니고 전차 수십 대였다.
게다가 제조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들.
이수현의 금전 감각으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지만, 미국은 사고방식부터가 달랐다.
이그니스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부담하리라.
“다른 건 몰라도 돈만큼은 미국이 세계 제일입니다.”
별 네 개가 새겨진 군복의 사내가 그리 말했다.
이수현은 미국의 호의를 감사히 받았다.
그는 엘프 전사들을 불러다, 국방부에서 딴 전차 조종수 자격증을 대여해 줬다.
“수명이 3년? 강력한 능력의 대가치곤 너무 싸군요.”
“마음 같아선 30년은 드리고 싶은데…….”
미국이 돈이라면, 엘프들은 가진 수명이 남달랐다.
그들은 적어도 수천 년을 산다.
엘프 장로는 말했다.
엘프들에게 특별한 일이 없다면 1만 년도 거뜬히 버틸 거라고.
전차를 모는 자격증 하나에 수명 3년? 엘프들은 이수현에게 미안해했다.
고작 3년만 바쳐서 이만한 힘을 얻는다니. 엘프 입장에선 너무도 혜자였다.
‘전차 조종수 자격증이 있으면 엘프들의 마력만으로도 포탄을 강화할 수 있다.’
즉, 이수현이 포탄에 내력을 실어 줄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물론 자격증을 대여한 거라 포탄의 위력은 이수현 때보다 못하겠지만.
전차 한 대가 아니라 무려 수십 대다.
개인의 힘이 부족하면 물량으로 찍어 누르면 된다.
“장관님, 엘프들에게 지원해 줄 포탄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허허,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미군은 헌터들이 등장하고 오랫동안 늙은 독수리 취급을 받아 왔다.
그런데 날개를 펼칠 기회가 왔다. 돈 많은 독수리가 웃었다.
* * *
“저, 저것들은 또 뭐야?”
이그니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거대한 마차들이 숲속의 나무를 짓밟으며 다가왔다.
강철로 만든 마차 안에는 괴상한 복장의 인간들과 엘프들이 타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미군이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레이너 사령관님, 목표물을 발견했습니다!”
“저게 그 망할 드래곤이군. 햐, 덩치 한번 살벌하구먼.”
이번 작전에 파견된 미군 부대의 대표자가 붉은 악마를 바라봤다.
레이너 사령관은 전 병력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 오랜만에 날뛰어 보자고.”
위이잉!
전차의 우람한 포신이 하늘을 향했다.
제자리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던 붉은 도마뱀은 멍청하게 쳐다만 봤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인간의 마법이니 여기까진 닿지 않을 거다.
“죽어라, 이 외계 괴물 녀석아!”
콰과과광!
천지가 흔들렸다. 수십 대의 전차들이 밤하늘을 향해 폭격을 가했다.
엘프들은 활뿐만 아니라 전차 포격에도 능했다. 전차 조종수 자격증까지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수십 발의 포탄은 드래곤에게 전부 명중했다.
첫 번째 포탄이 드래곤의 보호 마법을 와장창 박살 냈다.
“크아아아아악!”
드래곤은 비명을 질렀다. 총알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했다.
용이 흘린 피가 비처럼 내린다. 그것은 지상을 흠뻑 적셨다.
“크하하! 맛이 어떠냐, 이 외계인 녀석아!”
레이너 사령관의 함박웃음에 미군들도 덩달아 웃었다. 이 얼마 만의 안전한 사냥인가.
정신이 번쩍 든 드래곤은 도망치듯 비행했다.
‘젠장, 젠장……!’
상처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지만, 놈들의 공격은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엘프 전차병들은 노련하게 예상 비행 지점을 노렸다.
쾅! 콰앙!
불꽃 축제 같았다. 포탄의 폭발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탄약은 많다고, 도마뱀 친구.”
사령관은 비릿하게 웃으며 드래곤을 쫓았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을 때까지 괴롭혀 주마.
* * *
이그니스는 며칠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다. 상처는 재생되어도, 정신적으론 피폐해져 갔다.
도망치려면 언제든 할 수 있었다. 전차도 하늘을 날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드래곤의 자존심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는 하등한 인간들이다.
“허억, 허억…….”
이그니스가 흘린 피를 전부 끌어다 모은다면 작은 강을 이룰 것이다.
끝없을 줄 알았던 드래곤의 마력도 며칠 사이 꽤 줄었다.
이그니스는 포탄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쉬지 않고 세계수의 결계를 공략했다.
쩌적!
이그니스는 이질적인 소리에 눈을 반짝였다. 결계의 수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군. 저 강철 마차들이 돌아다니며 숲을 훼손한 덕분에…….’
세계수를 보조하던 숲의 마력이 줄어들었다. 조금만 더 하면 뚫을 수 있다.
이그니스는 활짝 웃었다.
이 망할 결계만 없으면 저깟 벌레 놈들은 한입 거리도 안 된다.
“……!”
이그니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결계 안쪽에서 묘한 변화가 보인다.
숲 중심지의 상공이 소용돌이처럼 마구 뒤섞였다. 공간이 왜곡됐다.
‘설마……!’
저게 차원 균열인가?
하지만 세계수는 아직 건재하다. 그녀를 죽여야만 열리는 줄 알았는데.
‘뭐지?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이그니스는 차원 균열을 보자 불길함을 감지했다.
원래 살다 보면 이런 류의 직감은 돌연 찾아온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대부분 빗나가질 않는다. 차원 균열이 완전히 열렸다.
이그니스는 브레스도 멈추고, 잔뜩 긴장한 채 균열을 노려봤다.
“…….”
그의 예상과 달리 잠잠했다. 이그니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기분 탓이었구나.
파직.
안도하던 이그니스는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차원 균열 안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강철로 만든 새였다. 지구에선 전투기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전투기 위에는 한 남자가 바람을 맞으며 고고히 서 있었다.
“…이, 이수현!”
이그니스는 남자의 정체를 깨닫곤 경악했다.
전투기와 함께 차원 균열을 넘어온 건 이수현이었다.
쌔앵-!
초음속마저 돌파한 제트기가 드래곤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수현은 만신창이가 된 레드 드래곤을 보며 인사했다.
“며칠간 처맞느라 많이 힘들었지?”
“이, 이놈이……!”
화르륵!
놈의 조롱에 이그니스는 아가리를 쩍 벌렸다. 제트기를 향해 브레스를 쏘았다.
“느려.”
그러나 전투기를 조종하던 미군이 중얼대며 급선회했다.
용의 숨결은 스치지도 못했다. 이그니스는 마법을 캐스팅했다.
하지만 아무리 드래곤의 마법도 초음속을 돌파하진 못했다.
공격 마법을 전부 피한 미군이 버튼을 눌렀다.
“맛 좀 봐라.”
전투기는 맞대응했다. 이그니스에게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콰앙-!
미사일은 실드를 가볍게 뚫고 이그니스의 얼굴에 꽂혔다.
용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죽여 버릴……!”
서걱!
드래곤의 양 날개가 잘렸다.
전투기 위에 서 있던 이수현은 그새 몸을 날려, 이그니스에게 칼을 휘둘렀다. 레드 드래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아래로 수직 낙하하던 이그니스는 이수현의 중얼거림이 선명히 들렸다.
“이야, 날이 아주 잘 드네. 뱀 군주는 짝퉁 드래곤이라서 잘 안 통했거든?”
“……!”
용살의 신격을 흡수한 마검이 이그니스에게 내리꽂혔다.
용의 날개가 잘렸다.
정확히는 깔끔하게 잘렸다기보단 우악스럽게 찢겼다.
날개를 완전히 자르진 못했지만, 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리라.
그렇지만 드래곤의 육체는 강인했다.
마검의 예리함과 이수현의 괴력으로도 뼈와 살을 절단하지 못했다.
‘드래곤의 카운터 무기인 용살검 앞에도 이 정도나 버티다니.’
이수현은 땅으로 추락한 이그니스를 노려봤다.
반짝거리는 붉은 비늘이 순식간에 피와 먼지로 얼룩졌다.
쿠아아아아!
날개 잃은 용이 성난 함성을 내뱉었다. 동시에 수십 가지의 마법이 유성우처럼 꽂혔다.
콰과광!
이수현은 잽싸게 피하며 레드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내 드래곤 피어가 안 먹힌다고?’
이그니스는 경악했다.
드래곤의 포효는 나약한 자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아무리 강대한 자라도 몸이 굳기 마련이다.
심지어 대륙의 왕도 눈썹 정도는 까딱했다.
그런데 이수현은 달랐다. 드래곤 피어를 정면에서 받고도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네놈……!”
이그니스는 숨결을 내뿜었다. 단순한 화염 방사는 아니다.
그의 불꽃은 마치 뱀처럼 어지러이 움직였다. 이수현의 대응법은 단순하고 호쾌했다.
서걱-!
불꽃을 검으로 갈랐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다.
이수현의 검이 녹기는커녕 피부조차 그을리지 않았다.
“입 벌려, 칼 들어간다!”
“……!”
촤악!
이수현은 용의 아가리에 용감히 뛰어들었다. 용의 입천장에 칼날이 콱 박혔다. 피가 철철 쏟아졌다.
이그니스는 덥석 깨물었지만, 이수현은 진즉 칼을 회수하고 물러섰다.
‘이 벌레 같은 게……!’
후웅!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쳤다. 이수현은 측면에서 날아든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힘에선 밀렸다.
드래곤은 마법뿐만 아니라 피지컬 면에서도 우월했다.
“…윽!”
「이수현, 괜찮아요?」
마검의 혼이 울렸다. 이수현은 다인에게 괜찮다고 대답할 여유도 없이 땅을 굴렀다.
쾅!
드래곤은 육탄전에도 자신 있다는 듯 꼬리와 발을 휘저었다.
급하게 캐스팅한 마법보다도 훨씬 빠르고 정확했다. 그걸 본 이수현은 슬쩍 웃으며 중얼댔다.
“그래,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뱀 군주의 힘은 이그니스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만큼은 드래곤에 버금갔다.
“용용아, 마구 내리쳐!”
쿠르릉!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이그니스는 기이한 조화에 순간 당황했다.
번쩍!
섬광과 함께 푸른 벼락이 떨어졌다.
이수현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뱀 군주의 여의주가 들려 있었다.
[여의주] [등급: 레전더리]– 천둥의 힘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용의 보물.
– 지니고 있으면 모든 전기 계열 능력이 대폭 향상된다.
“이런……!”
쾅! 콰앙!
날개 잃은 드래곤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실드 마법은 용케 펼쳤지만, 강화된 벼락 앞에선 어림도 없었다.
한 방에 실드 마법이 깨지고, 벼락이 이그니스의 비늘을 따라 흘렀다.
“크아아악!”
드래곤의 고대신은 강렬한 충격에 파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고통이었다. 드래곤이 살면서 벼락이란 걸 맞아 봤겠는가.
이수현의 뇌운, 용용이는 수십 번을 내리치고서야 잠잠해졌다.
“커, 커흑…….”
쿵!
이그니스는 머리를 바닥에 떨궜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육체의 데미지보다는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말하자면 죽지 않을 정도로 전기 고문을 가한 셈이다.
“왜, 몸이 잘 안 움직이니?”
뻐억!
이수현의 고문은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의 발차기가 용의 턱을 걷어찼다.
피가 팍 튀며 이그니스의 머리가 붕 떴다. 용의 이빨 몇 개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비틀대는 드래곤에게 용살검이 쏘아졌다.
용의 비늘을 단숨에 뚫고, 살점을 헤집었다.
“…허억, 허억!”
피투성이가 된 이그니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유일신 후보라고는 하지만 놈은 순혈 인간이다. 심지어 신격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본체로 변한 자신을 압도하다니. 이그니스는 인정했다.
“이수현, 네놈은 사력을 다해 싸웠어야 할 존재였구나.”
“뭐래.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말고 얼른 죽…….”
죽어 버리렴. 그렇게 말하려던 이수현은 움찔하며 뒤로 피했다. 순간 바닥 전체가 붉은 선으로 도배됐다.
공격에 정신이 팔렸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쓸데없이 감이 좋은 녀석이야.”
“……!”
이그니스의 몸이 서서히 변했다. 드래곤의 육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극적인 변화에 이수현은 잠시 공세를 멈췄다. 여전히 놈의 주변은 새빨갰다.
“뭐야, 기껏 변신한 게 인간이냐?”
이수현은 김빠진 목소리로 감상평을 늘어놨다. 이그니스는 적발의 젊은 남성으로 변했다.
“이 모습으로 싸우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야. 영광으로 생각해라. 이건 대륙의 왕에게만 보여 줬던 내 진짜 모습이니까.”
“아, 그러세요?”
뱀 군주랑 똑같은 짓거릴 하네.
덩치가 크면 이수현 앞에선 그저 샌드백이다. 이그니스도 그 진리를 맞아가면서 터득했다.
‘저놈 주변에 붉은 선들이 빼곡하네. 저런 건 처음 봐.’
이수현의 스킬, 사활의 경계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작동했다.
붉은 선에는 빈틈이 없었다. 그것들은 너무 빼곡해서 마치 구체처럼 보였다.
저래선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다.
‘대체 무슨 능력이지?’
머리론 위험성을 이해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다치는 걸 감수하더라도 놈을 죽이고 힘을 흡수한다.
“와라.”
이그니스는 초탈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붉은 선이 회오리처럼 요동쳤다. 자세를 보아하니 마법을 쓰려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권법가에 가까웠다.
‘무공?’
순간 절정고수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중국의 천마를 만나 처음 대치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지.
이수현은 자세를 잡았다. 이그니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까 네놈도 체계적인 검법을 구사했지. 인간들은 그러한 동작을 무수히 연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너흰 그걸 기술을 갈고닦는다고 말하더군.”
“……?”
“하지만 말이다. 그런 건 아둔하고 재능 없는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야.”
이그니스는 아리송한 소릴 했다. 이수현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적룡왕이 히죽 웃었다.
“난 말이다. 굳이 너희처럼 학습하지 않아도, 매 순간 최적의 동작들이 보인다. 지금 네놈의 검법을 수십 가지의 방법으로 꿰뚫고, 몸뚱이에다 주먹을 쑤셔 넣을 수 있단 거다!”
붉은 사내가 이수현에게 달려들었다.
드래곤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빨라졌다.
까앙-!
용살검의 날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이그니스가 인간의 형태로 바뀌어서 추가 피해가 적용되지 않은 것이다.
이수현은 이를 악물고 놈의 주먹을 받아쳤다.
캉!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이수현은 이그니스 주위의 붉은 공간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저 붉은 공간은 놈의 주먹이 닿는 제공권이다!’
퍼억!
이수현은 첫 타를 허용했다. 빗맞았는데도 수 미터나 밀려났다.
발밑에는 고랑처럼 땅이 일자로 파였다.
“…퉤!”
이수현은 가래처럼 입안의 피를 뱉었다. 이그니스는 조금 놀랍단 표정을 지었다.
“죽일 생각으로 친 건데, 그걸 버티다니.”
“…….”
“하지만 이제 나와의 격차를 깨달았겠지? 내 앞에서 기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용의 눈에는 물리적인 변화와 그에 따른 법칙이 보였다.
이수현의 근육 조직 하나하나가 훤히 내비친다.
이그니스는 그것을 통해, 상대의 공격이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예지할 수 있다. 그다음은 쉬웠다.
상대의 동작을 파훼할 방법만 떠올려 내지르면 된다.
“크하핫! 너와 이렇게 재밌는 싸움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그니스의 기세가 되살아났다.
아까까진 찌질하게 처맞았던 주제에, 인제 와서 멋진 척이냐 따지고 싶었지만. 이수현에게 그럴 여력이 없었다.
타다다당-!
용의 주먹이 태풍처럼 몰아친다. 이수현은 그걸 검으로 쳐냈다.
용살검의 힘 덕분에 마검은 부러지지 않고 버텼다.
“이수현, 네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무슨 제안?”
이수현은 피를 왈칵 쏟았다.
눈동자 속 투지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상처는 시간에 비례해 조금씩 늘어갔다.
이그니스는 만신창이가 된 이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피의 계약을 맺고, 용인이 되어라!”
“…용인?”
“그래. 나약한 인간의 몸뚱이를 벗어던지면, 지금보다 맹렬한 투쟁도 할 수 있다. 넌 더 강해질 수 있어!”
콰직!
이수현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이그니스는 공세를 잠시 늦췄다.
이대로 끝장을 내기엔 아쉬웠다. 이그니스는 이수현을 용인으로 만든 뒤, 제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
결국 이수현을 죽이려는 건 똑같지만, 이그니스의 기억 속엔 더욱 가슴 뛰게 만든 전사로 남을 것이다.
“난 함부로 계약 안 해. 특히 너처럼 뒤가 구린 놈들은 결정적인 걸 숨기거든.”
“…넌 역시 감이 좋아.”
이그니스는 히죽 웃었다. 이수현의 지적은 정확했다.
드래곤과 피의 계약을 맺은 자는 강한 육신을 얻지만, 계약한 드래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즉, 용인이 되어 이그니스를 능가하더라도 이수현은 죽는다.
“용인이 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죽어라!”
콰당탕!
이그니스의 주먹이 이수현의 방어를 뚫었다. 그의 복부에 주먹이 꽂혔다.
이수현은 날아갔다. 수십 미터나 튕겨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그니스는 이걸로 승패가 갈렸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재밌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랑 넌 다르다. 녀석은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거든.”
이그니스는 주먹에 묻은 피를 핥으며, 대륙의 왕과 치른 싸움을 돌이켜봤다.
왕에게선 어떤 정보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적룡왕은 패했다.
드래곤의 신은 처음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분석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하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걸로 난 자유다!”
“누구 맘대로? 네가 무슨 도비냐? 자유 운운하게.”
“……!”
이그니스는 이수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당황했다.
분명 급소를 찔렀다. 놈의 숨통을 끊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이수현은 비척대며 일어났다. 그의 머리색이 밝은 금색으로 변했다.
“좀 놀아 주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굴어요.”
“뭐, 뭐야…….”
이수현은 태양신의 힘을 발동했다.
이그니스는 눈에 훤히 보였다. 이수현의 신체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졌다.
‘용인… 아니 그 이상이다.’
꿀꺽!
저런 힘을 숨겨 두고 있었다니. 이그니스는 묘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그래도 이길 수 있다. 놈의 움직임은 아직 예지가 가능한 범위였다.
그에겐 세상의 법칙을 훤히 내다보는 용의 눈이 있으니까.
“너 아까 내 움직임이 잘 보인다는 둥 얘기했지.”
“……?”
“그런데 눈에 물체가 보이는 원리는, 사물에 반사된 빛이 망막에 닿아야만 성립하거든?”
이수현은 검지를 슬쩍 들어 올렸다.
팍.
이그니스의 세상이 암전됐다.
붉은 용은 이수현의 권능으로 헤임달처럼 장님이 됐다.
“내, 내 눈이 왜……!”
“연습하니까 되더라고. 빛을 지배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거야.”
퍼억!
이수현은 눈앞이 컴컴해진 이그니스를 두들겨 팼다. 마검으로 죽이는 건 맨 마지막이다.
“아까 개소리하면서 신나게 팼지? 오냐. 너도 어디 개처럼 두들겨 맞아 봐.”
“커헉!”
빠악! 퍽!
이그니스는 시력을 빼앗기자 샌드백으로 전락했다. 반격해도 소용없었다.
이수현은 이미 이그니스의 권법을 학습했으니까.
“네놈에게 평생 자유는 없어. 죽으면 마검 안에 갇힌 친구들이 환영식 해 줄 거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그, 그만둬. 폭력 멈춰!”
“내가 등신도 아니고. 그런다고 누가 멈추겠냐.”
푹!
이그니스는 마지막 유언과 함께 심장을 찔렸다. 마검은 드래곤의 영혼을 쭉쭉 먹어 치웠다.
이수현의 눈동자가 드래곤의 것처럼 세로로 길쭉해졌다.
드래곤의 힘마저 흡수하자, 머릿속이 환해지고 세상이 달리 보였다.
* * *
대륙의 왕은 이그니스의 영혼이 소실됨을 느꼈다.
예측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지자 기분이 아리송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온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왕은 조소를 지었다.
‘이그니스. 너는 훌륭한 드래곤이었다.’
왕은 이그니스를 높이 평가했다.
드래곤들이 왕으로부터 용들의 차원으로 도망칠 때, 시간을 번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적룡왕이 제 목숨 다 바쳐 희생하지 않았으면, 수십의 드래곤도 왕과 하나가 됐을 것이다.
‘그래. 내게 첫 타격을 입힌 것도 최후의 불꽃이었지.’
화염 군주에게 준 권능도 이그니스의 불꽃이었다.
당시 이수현을 죽기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자폭기.
딱!
왕은 손가락을 튕겼다. 이것은 이그니스를 추모하기 위한 불꽃이다.
‘그를 죽이진 못하더라도, 세계수는 희생될 것이다.’
* * *
이그니스의 죽음에 세계수는 안도했다. 이수현이 정말로 해낸 것이다.
인간이 드래곤을, 그것도 그들 중 최강자를 꺾었다. 기적이란 말로는 부족했다. 그의 위업이다.
[……?]그런데 이수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눈이 이그니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룡왕은 인간의 형태에서 드래곤의 본체로 되돌아왔다.
저 시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다들 결계 밖으로 나오지 마!”
이수현은 그리 소리쳤다.
그의 승리를 축하하려고 다가오던 엘프들이 멈칫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오려던 자들이 결계 앞에서 멈췄다.
‘이건 화염 군주의……!’
이수현은 용의 눈으로 이그니스의 변화를 감지했다. 놈은 곧 폭발한다.
그냥 놔두면 이 일대의 모든 걸 휩쓸 것이다.
‘시체의 드래곤 하트가 폭주했어.’
드래곤의 자폭이면 화염 군주 때 폭발 정도론 안 끝날 거다.
어서 대처법을 떠올려야 한다.
안 그러면 이수현을 제외한 모두가 죽는다.
뚫리기 직전인 세계수의 결계가 폭발을 견뎌 줄 리 없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화염 군주 때보다 폭발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고작 몇 초지만.’
이수현은 일단 움직였다. 일일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덥석!
그는 드래곤의 시체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켜보던 이들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한 엘프가 이변을 알아채곤 소리쳤다.
“요, 용의 시체에서 불이……!”
타앙-!
이수현은 시체를 들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상공에서 터진다면 저들이 직격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좀 다치긴 하겠지만, 날 죽일 정도는 아니야.’
태양신의 힘으로 그는 육체가 강화됐으니까. 화염 군주 때도 그랬었지.
태양의 기사 스킬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때마침 와 준 동료들 덕에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 혼자서만 휘말렸다.
아리엘과 체셔는 폭발에 휩싸이기 직전, 역소환으로 대피시켰다.
‘그래, 전부 역소환!’
이수현은 태양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치며 소환수들을 돌려보냈다.
도와주러 온 미군들도 엘프들과 함께 지구로 송환됐겠지.
꾸드득!
드래곤의 시체가 부풀어 올랐다. 곧 터진다. 이수현은 지상과의 거리를 살폈다.
‘시간이 부족해.’
소환수들을 전부 돌려보냈으니, 숲에 남아있는 건 딱 한 명뿐이다.
세계수. 그녀는 대지에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다.
[이수현 님, 전 괜찮습니다.]세계수의 음성이 귓가에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도 이그니스의 시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눈치챈 모양이다.
“흐아압!”
후웅-!
이수현은 기합 소리와 함께 시체를 있는 힘껏 던졌다.
적룡왕은 죽고 난 이후에도 창공을 훨훨 날았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상공에서 일어났다. 이수현이 가장 먼저 휩쓸렸다.
“크악!”
드래곤의 자폭은 상상 이상이었다.
직격탄으로 맞았으면 이수현도 크게 다쳤으리라.
최후의 불꽃은 눈이 멀 정도로 밝았다. 이수현은 떠밀리듯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 모습이 마치 유성처럼 보였다.
유성은 하나가 아니었다.
드래곤의 시체가 터지면서, 용의 비늘들이 사방으로 분산됐다.
몇몇은 가까이에 있던 이수현의 몸을 때렸고, 나머지들은 아래로 쏘아졌다.
[꺄아아악!]세계수의 비명이 울렸다.
그녀의 결계는 방금의 폭발로 진즉 무너졌다.
지켜 줄 방패가 사라지자 유성우들이 세계수와 숲속을 폭격했다.
종말이 찾아온 것처럼 모든 게 불타오른다. 세계수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쿵!
이수현은 땅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쿨럭대며 기침했다.
푹!
몸 여기저기 박힌 용의 비늘을 손으로 뽑아냈다.
크기가 워낙 커서 날카로운 화살처럼 보였다. 상처에서 피가 줄줄 쏟아졌다.
‘난 괜찮지만, 세계수가…….’
이수현은 비통한 얼굴로 숲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가장 높이 자란 나무는 반절 이상이 불탔다.
숲속도 엉망이 됐다.
이대로 두면 숲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황무지로 변할 거다.
엘프들의 터전이 사라져간다. 이수현은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엘퀴네스!’
이수현은 물의 정령왕을 불렀다.
아니, 다른 속성의 정령왕들까지 전부 소환했다.
물을 비롯한 4대 원소들의 지배자들이 이수현 앞에 부복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아 줄 틈이 없었다. 이수현은 곧바로 명령했다.
“내 남은 내력을 전부 가져다 써도 괜찮으니, 저 화재를 진압해.”
정령왕들은 이수현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자, 허둥지둥 움직였다.
‘방금의 자폭은 이그니스가 한 짓이 아니야.’
놈은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영혼을 흡수당해 죽었다.
즉, 누군가가 원격으로 자폭 스위치를 누른 것이다.
이수현이 알기로 그런 게 가능한 건 딱 한 명뿐이다.
‘대륙의 왕. 그 녀석이 한 짓이야.’
놈이 드래곤 하트에 이상한 짓거릴 해 뒀다.
드래곤 하트를 날려 먹은 건 둘째치고, 고래 싸움에 애꿎은 세계수만 휘말렸다.
뿌득!
이수현은 왕에게 제대로 농락당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가 네놈 제삿날인 줄 알아라.
[이수현 님.]“세계수, 너……!”
세계수의 영혼이 이수현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색이 완전히 바랬다.
거기다 흐릿한 게 곧 사라질 것 같았다. 이수현은 세계수의 본체를 쳐다봤다.
거목에 들러붙은 불은 전부 떨쳐 냈다. 하지만 상처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아니, 아직 안 죽었잖아. 내가 저번처럼 치료하면…….”
[아뇨. 이그니스가 날린 최후의 불꽃은 제 영혼에 타격을 줬습니다.]세계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 잎새가 불타오르는 듯한 광경이 눈에 보였다.
영혼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세계수는 이수현이 치료를 해 보기도 전에 죽을 거다.
‘내 자격증으로도, 이미 죽은 나무를 살리진 못해.’
그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세계수는 몇 분 뒤에 죽는다. 이수현은 오랜만에 무력감을 느꼈다.
[저는 당신께 마지막으로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뭐?”
[이수현 님. 마검으로 제 영혼을 거둬 주세요. 제가 완전히 불타 사라지기 전에…….]그녀의 말에 이수현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올랐다.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세계수의 말도 일리가 있다. 왕과의 결전이 머지않았다.
그러니 능력 하나라도 허투루 버릴 수 없다.
세계수의 영혼이 가진 힘은 뛰어난 재생력. 어찌 보면 치열한 전투에 있어 이만한 권능도 없으리라.
챙!
이수현은 각오와 함께 칼을 뽑았다.
엘프들에게는 면목 없지만, 그녀의 영혼을 거둔다.
[제 아이들을… 엘프들을 부탁드립니다. 이곳의 터전은 완전히 망가져서 새로 정착할 곳이 필요합니다.]“그래. 지구에 머무를 수 있도록 내가 손을 쓸게. 그러니 안심해.”
[정말로 감사합니다.]세계수의 영혼이 이수현에게 다가왔다. 그의 칼날이 그녀를 관통했다.
소멸하기 직전의 세계수는 마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상처가…….”
용의 비늘에 꿰뚫렸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세계수의 열매와는 비교도 안 될 재생력이었다.
게다가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이수현은 착잡한 마음으로 불타 없어진 숲을 바라봤다.
[계약자시여. 명령을 완수했습니다만…….]“수고했어. 너흰 돌아가도 돼.”
할 일을 마친 피닉스와 정령왕들이 머릴 바짝 숙였다.
불길을 급히 진화했지만, 애초에 이 숲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충분한 시간만 흐르면 숲도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엘프들에겐 당장 머물 곳이 필요했다.
‘아마존의 밀림을 조금 빌려주면 되겠지.’
브라질 입장에선 외부인에게 영토를 내주는 게 영 껄끄럽겠지만, 엘프들을 받아들여 얻을 이득도 상당했다.
협상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이수현이 부탁하면 미국 협회도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설 거고.
“참 씁쓸하고 엿같은 승리네.”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 않았다.
대륙의 왕은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걸까?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이그니스만 보낸 건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이다.
‘드래곤 하트는 흡수 못 했지만, 용의 눈을 얻었다.’
어쩌면 놈을 상대할 새로운 방법이 보일지도 모른다. 이수현은 이를 갈며 놈을 떠올렸다.
* * *
이수현은 쓸쓸히 지구로 복귀했다.
엘프들은 그가 무사한 걸 보곤 기뻐했지만, 세계수의 죽음을 전해 듣고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엘프들은 나약한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이 희생해 살려 낸 목숨이다.
“이러다 지구가 대륙처럼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체셔는 TV 예능을 보며 그리 중얼댔다.
아마존에 엘프와 페어리들이 거주한다는 얘기에, 브라질로 관광객들이 잔뜩 몰려왔다.
그 유명한 요정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브라질의 아마존은 남미 최고의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해선 안 돼요.]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동료 연예인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캬, 저 진행자 연기 맛깔나게 잘하네.”
체셔는 피식 웃었다. 안전한 걸 알면서, 저렇게 유난을 떨다니.
엘프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다.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엘프한테 자꾸 엉겨 붙는 진상 관광객들도 있으니까. 저 정도면 약과지. 강제로 추행하려는 악질들도 있어.”
이수현의 말에 체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반인이 엘프한테 그 짓거릴 한다고?
“진짜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지구에는 네 생각보다 훨씬 무식한 사람들이 많아.”
일반인이 엘프한데 치근거린다니. 나 좀 죽여 달라고 시위하는 꼴이다.
어쩌면 아인종을 못마땅해하는 세력이 고용한 걸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잘 해결됐다.
“그게 신살검이야?”
“그래. 어때?”
“…왠지 보기만 해도 불쾌해지는데.”
“성능 확실하네.”
이수현은 블랙 스미스 공방에 들렀었다.
헤파이토스와 드워프 형제들이 힘을 합쳐 만든 역작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신살의 힘이 담긴 온갖 무구를 녹여서 만든 검.
‘그놈한테도 잘 통하면 좋을 텐데.’
엄밀히 따지면 놈은 신이 아니다. 신 후보지.
그래도 체셔가 반응을 보이는 걸 봐선, 신격을 품은 자에게도 먹히는 모양이다.
“벌써 끝이네.”
“응?”
“왕을 잡으면, 대륙은 평화로워질 거잖아. 그럼 나랑 동포들이 지구에 있을 필요도 없지.”
체셔는 그렇게 말했다.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봐선 고민이 많은 모양이다.
이수현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왕이 죽어도, 너흰 그냥 남아 있어도 돼.”
“어?”
“지구를 떠나고 싶다면 안 말리겠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자생하는 몬스터들은 상당히 많았었다.
그 숫자가 묘인족들 덕분에 차츰 줄고 있다.
이대로 쭉쭉 줄여 나가다 보면, 죽음의 땅이란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지 않을까.
체셔는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 지구에 남아 있어도 돼?”
“그래. 너흰 세금도 내잖아. 아리엘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이수현은 그렇게 답하며 마검으로 신살검을 깨트렸다.
거대한 힘이 빨려 들어왔다.
우우웅!
마검이 공명했다. 이로써 신을 죽일 최강의 검이 탄생했다.
이수현은 눈을 번뜩이며 중얼댔다.
“그 새끼, 나한테 걸리기만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