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08
00808 185. 소동 =========================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황홀한 기분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대신 당혹감이 드룩스의 전신을 훑어 내린다.
맙소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지만 그렇게 당황한 와중에도 숙련된 외교관답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리고 행동에 옮겼다. 입안에 있던 음식을 얼른 씹어 삼키고 즈라탈이 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고개를 숙인 것이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자 그의 수행원들도 부랴부랴 일어나 그와 마찬가지 행동을 취했다.
“됐으니, 이만 앉도록.”
“감사합니다.”
즈라탈이 넉살좋게 다시 자리에 앉자 드룩스와 그의 수행원들도 감사의 뜻을 밝히고는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쪽의 식재료들로 요리를 만드는 김에 집들이도 하는 것이 어떻겠냐길래 이렇게 불렀다. 입맛에 맞을까 싶었는데, 맛있다니 다행이다.”
집들이라는 말부터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별장을 마련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들었다. 따지고 보면 폐하니 왕비니 하는 식의 인물들이 이런 식으로 직접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는 일이니, 이곳의 상식으로 생각해도 최상급의 예우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래서야 과연 먹은 게 제대로 소화나 될까 싶은 점이겠지만.
“자, 어서 드세요.”
“그럼…”
생긋 웃으며 권하는 유아의 말에 드룩스와 수행원들은 머뭇거리며 그녀가 방금 전 보여주었던 대로 쌈을 싸서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느오오옷!”
지켜보는 형진의 시선 때문에 몸둘 바를 몰라 하던 그들이었지만, 일단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 탄성인지 뭔지 모를 기묘한 음성이 새어나와 버린다.
어쩔 수 없다. 이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치 무조건 반사처럼 터져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리를 내놓고도 그런 자신의 반응에 당황할 정도다.
단순히 맛이 좋아서만도 아니다. 이미 일반적인 성녀의 단계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 유아가 정성껏 생명력을 쏟아 붓고, 그것을 달인의 경지를 넘어선 형진이 정성껏 조리했으니 여러 가지 효과가 부여되어 신체가 활성화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글 때 자기도 모르게 한숨인지 탄성인지 모르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 역시 폐하십니다.”
“있다가 좀 싸줄 테니까, 돌아가서 식구들이랑 같이 먹도록 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하하.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형진은 즈라탈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끌고 온 손수레에 담겨져 있던 것들로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그릇에 면을 담고 차갑게 식힌 육수를 부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이런 저런 고명과 다대기를 올리자, 절로 군침이 도는 냉면 한 그릇이 뚝딱 만들어진다.
“함께 드세요.”
형진이 만들고 유아가 그것을 받아 각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방문객들은 이게 뭔가 싶은 표정으로 바라볼 뿐 쉽사리 손을 뻗지 못했다. 앙그릴에 면 요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뭔가 품격 있는 정찬에 내놓을 만한 요리로는 생각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세요.”
그렇게 멀뚱하니 보고만 있는 방문객들을 위해, 이번에도 유아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올려진 다대기를 육수에 풀어내고는 새콤하고 매콤한 맛이 면에 잘 배어들자 이제는 제법 능숙해진 젓가락으로 면을 건져내어 먹는다.
“이건 다루기 어려우실 테니 편한 걸로 드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드룩스와 수행원들은 감히 젓가락을 쓸 엄두는 못내고 포크로 유아가 했던 것처럼 다대기를 풀어낸 다음 스파게티 먹듯이 면을 건져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오! 이건!”
“이런 맛이라니!”
시원하면서도 달달하고, 새콤하면서도 알싸한 매운 맛이 혀를 마구 자극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조합된 맛을 그들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고기랑 같이 드세요.”
“알겠습니다.”
흐뭇하게 그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아가 다시 한 마디 건네자, 그들은 말 잘듣는 어린 아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말을 따랐다.
“대, 대단해!”
“이런 조합이 가능하다니!”
열기를 한껏 받아서 잘 구워진 갈비구이와 시원하면서도 새콤매콤달콤한 냉면의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입 안에서 휘몰아치는 그 느낌이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형진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던 방문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비우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들의 이성이 돌아온 것은 어느 틈엔가 차려진 음식이 전부 동이 나버린 뒤의 일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그만 실례를…”
드룩스는 뒤늦게서야 자신들의 추태를 깨닫고 그렇게 급히 사과했다. 하지만 정작 형진은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고, 유아 역시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맛있게 먹어 주시니 오히려 기쁜 걸요.”
“감사… 합니다.”
아까 쌈을 받아먹었을 때만 해도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유아가 이 자리에 함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만약 그녀가 없는 상태였다면,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그 맛을 음미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즈라탈. 유아를 도와주도록.”
“네. 폐하.”
테이블을 정리하기 위해 일어서는 유아를 돕기 위해 즈라탈이 몸을 일으키자, 다른 이들도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음식을 차리는 일이야 경황 중에 도울 틈이 없었다 쳐도 치우는 일까지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뒤이어 들려온 형진의 말 한 마디가 그들을 다시 자리에 눌러 앉혀 버린 것이다.
“너희들은 남아. 할 얘기가 있다.”
거부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결국 그들은 끽 소리도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사실 드룩스나 그의 수행원들은 아직까지도 형진의 정확한 신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단서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즈라탈은 유아를 왕비님이라고 불렀고, 형진은 또한 폐하라고 불렀다. 폐하라는 건 황제에 대한 존칭이니, 아마도 형진은 이전에 앙그릴을 순방했던 카트린의 친족이 아닐까 싶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딱 봐도 유아와 보통 사이가 아닌 듯 보이는 그의 태도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식으로 호칭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것은 형진의 잘못이기도 하다. 타나토스 전체를 선도하는 황제국의 위엄을 갖추고 있음에도 왕실의 호칭 같은 것을 개정하거나 하는 식의 문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카트린이 순방 때 황녀 칭호를 사용하게 된 것도 곁다리로 낀 라만과 격을 맞추기 위해서일 뿐이다.
하지만 드룩스나 그를 따라온 외교관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조약이나 협정에 들어갈 단어 하나를 가지고 몇날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그들에겐 이런 식으로 정리되지 않은 호칭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좋은 집이더군. 마음에 든다.”
“급박하게 준비하느라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원하시는 다른 조건이 있으시다면, 그에 맞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형진은 치하의 말을 건넸지만 드룩스는 사죄의 말을 건넸다. 겸양의 뜻도 있고, 형진이 이런 말을 꺼낸 진의를 아직 모르니 알아서 긴 셈이다. 사실 외교적인 만남에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진의를 감춘 채 돌려 말하는 경우는 상당히 흔한 편이고, 형진의 태도도 마음에 든 것 치고는 그리 기꺼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집에 관한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마음에 든다. 문제는 집 밖의 것들이겠지.”
“죄송합니다.”
드룩스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집 밖을 기웃거리는 자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그의 책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잘잘못을 따지고 들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물론 평소의 그였다면 아운 제국의 국격을 위해서라도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사죄를 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외교는 주고받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사과라 할지라도 상응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건네주는 것이 통념이니까.
문제는 지금 마주한 상대가 그런 식의 통념이나 원칙이 먹히지 않는다는 점. 공연히 본전 찾겠다고 뻗대봐야 오히려 손해나 입지 않으면 다행이니 무조건적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로서도 신경이 쓰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언제까지 못 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따로 뜻이 있으신지요.”
“대단한 건 아니고. 어차피 마주쳐야 할 상대라면, 그들도 한 번쯤 불러서 얼굴을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지, 직접… 말씀이십니까.”
“뭔가 문제라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드룩스는 잠시 머리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자신들로서도 눈앞의 인물이 정확히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지닌 인물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본국에서 연락을 보내온 라만이 절대로 무례를 저지르지 말라고 당부한 탓에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 있을 뿐. 본래는 상대의 정확한 신분부터 묻는 것이 먼저겠지만, 어쩌다 보니 그런 식의 통성명을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묻자니, 대화 상대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큰 결례가 될 수도 있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야 그렇다 쳐도 동서 제국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점이 문제다. 그들 역시 부양선이 들렀을 때 극진한 대접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늘을 나는 거대한 함대의 위용에 질려 머리를 숙인 결과일 뿐, 지금처럼 정확히 신분이 뭔지조차 모르는 상대에게까지 그렇게 대우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드룩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들에게 전갈을 보내 만남의 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주선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저희들의 언질만으로 격에 맞는 인물을 불러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간단하게나마 폐하의 뜻을 밝힌 초청장을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초청장에는 서명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자연스럽게 형진이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도 파악이 된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으면서도 형진의 지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공식적인 초대라면 초대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 드룩스로서는 실로 일거양득의 묘수라 할 수 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형진이 고개를 끄덕일 즈음, 다시 유아와 즈라탈이 안쪽에서 손수레를 끌며 모습을 드러냈다. 디저트를 겸한 다과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아이스크림이란 거에요. 드세요.”
“감사합니다.”
와인 글라스에 파르페 식으로 담아 놓은 아이스크림이 놓여지자, 드룩스는 물론이고 수행원들도 이게 뭔가 싶은 표정이 되었다.
“스푼으로 떠서 드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입 안에 넣어보니 눈송이보다도 더 부드럽고 차가우며 달콤한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맛이 일품이다.
“우리 집 아이들이 만든 것이다. 마음에 드는가.”
“물론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아이들이라니. 드룩스는 새로운 정보를 다시 머리 속에 입력했다. 형진도 유아도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이런 멋진 요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자녀가 있는 것일까.
형진은 그들이 디저트를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며,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저들의 문자를 내가 잘 모르니, 그대들이 대신 글을 작성하고 마지막에 내가 서명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드룩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럼 제가…”
“맡기겠다.”
드룩스는 어떻게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고 광택이 도는 종이와, 따로 잉크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 신기한 필기도구를 손에 잡고는 형진이 부르는 대로 간단한 초대장을 작성했다. 외교적 수사 따위는 전혀 없는, 자신이 즈라탈에게 전해 들었던 내용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서명이다. 드룩스는 내용의 작성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그것을 형진에게 내밀었다.
“작성이 끝났습니다.”
저들의 글을 잘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 읽는 것뿐이라면 큰 문제가 없다. 익숙하지 않은 글자를 괘발개발 적어 놓기가 싫어서 대필을 맡겼을 뿐이다.
형진은 초대장을 보고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자 그곳에 동서 제국의 문자로 몇 글자를 적고는 서명을 했다.
“맡기겠다.”
“바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룩스는 공손하게 초대장을 다시 받아들고 말미의 서명을 슬쩍 훑어보다가 문득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양식의 조금 낯선 필체로 밤의 신이라는 호칭이 적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