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09
00809 185. 소동 =========================
꿀꺽.
감히 진위여부를 따질 엄두는 내지도 못한다.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바짝 엎드린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번만큼은 그의 감이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만약 드러나는 겉모습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만만하게 여겼다가는 어떤 꼴이 되었을까. 그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방이라도 멈춰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벌렁거리는 심장을 어떻게든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 별장을 빠져 나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허둥대며 대표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드룩스는 형진에게서 건네받은 초대장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어 동서제국 측에 전달했다.
절대로 무례하지 말 것을 간절하게 당부하는 쪽지 한 장을 추가로 첨부해서.
초대장을 받아든 양 제국 측은 발칵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뭐? 밤의 신? 직접 지상에 내려와 있단 말인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이 내용대로라면…”
“허어…”
초대장을 받았으니 받아들이든 거부를 하든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물론 어느 쪽으로 결정할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 접촉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던 상황인데, 이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있겠는가. 문제라면, 과연 누구를 보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상대는 스스로를 밤의 신이라 칭했다. 정말로 신이라고 불릴 만한 초월적인 존재인지는 일단 차치해 놓고서라도, 그런 상대와 대면하려면 그에 걸맞는 격이 필요하다.
보통 각국 정상 간의 대면이 이루어지려면 그 중간에 실무자급에서 여러 가지 협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특히나 계급제 사회가 확립되어 있는 앙그릴에서는 서로에 대한 호칭부터 시작해서 사용하는 식기나 착용하는 의복에 이르기까지, 정말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싶을 정도로 세세한 협의를 필요로 한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 하나가 각국의 자존심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카트린의 순방도 그런 점에서 보면 실로 엄청난 파격이나 다름없었다. 황녀쯤 되는 지위의 인물이 그런 사전 조율조차 없이 막무가내로 각국을 돌아다닌 것부터가 상식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보다 더 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스스로 밤의 신이라 칭한 이가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이건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바로 황실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이 걸립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터인데…”
“어쩔 수 없지. 일단 아운 제국의 대표부에 사정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외교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렇다. 중재를 청하고자 한다면 그에 걸맞은 반대급부를 제공해야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다행히 드룩스는 그들의 요청을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들이 얼마나 당혹해 할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장 대가를 받지 않는다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순순히 요청을 수락하는 것이 저들에게 더 큰 빚을 만들어두는 방법이기도 하다.
“상관없다. 주위가 시끄럽지만 않다면.”
형진은 양 제국의 의사를 전하러 찾아온 드룩스에 그렇게 대답했고, 그의 뜻은 곧바로 상대에게 전해졌다.
이제 동서 제국에서 파견된 자들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아운 제국의 대표부나 형진이 머무르고 있는 별장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본국에서 회견을 맡을 인물을 보내올 동안 불의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였다.
앙그릴 최대의 상업도시, 카살 제르토나의 수뇌부들은 며칠이나 지나서야 그러한 정황을 파악했다.
“이것들이 무슨 꿍꿍이지?”
아운 제국의 대표부와 동서 제국의 인물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을 뒤늦게 파악한 시장은 겁이 덜컥 났다.
아운 제국은 현재 앙그릴 최강의 패권국이며, 카살 제르토나의 양쪽에 도사리고 있는 동서 제국 역시 아운 제국에 비하면 흠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이다. 카살 제르토나라는 도시가 현재처럼 독자적인 중립 도시로 유지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동서로 나뉘어진 양 제국과 아운 제국이라는 세 나라의 절묘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낸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세 제국이 자신들의 도시에서 빈번하게 회동하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으니, 이들로서는 등 뒤가 절로 서늘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아내라! 무슨 일인지 알아내!”
하지만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운 제국에 이어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기회를 잡은 동서 제국은,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훼방 놓거나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상대 제국을 제외시키고 자신들만이 접촉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 와중에 다른 누군가가 곁다리로 끼어드는 것을 방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시장 측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적당히 언질을 줘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도록 철저하게 극비에 붙이고 있으니, 분명 자신들과도 무관하지 않은 사안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얼마 전부터 동서 제국의 요원들이 별장 하나를 보호하고 있는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별장은 아운 제국의 대표부 명의로 구입된 곳입니다.”
“양 제국 황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대규모 사절단의 파견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뭔가 중대한 사건이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으니 시장으로서는 가슴 속이 그저 새카맣게 타들어갈 뿐이다.
뭔가 강제적인 수단이라도 동원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니 더욱더 난감하다. 하다못해 문제의 별장을 살펴보는 것도, 이번에 파견될 양 제국 황실의 인물들을 막아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참으로 무력하기 이를 데 없구나.”
시장은 그렇게 탄식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운 제국의 대표부로 간다.”
수차례 접촉에도 불구하고 동서 제국으로부터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으니, 남은 것은 아운 제국 뿐이다. 시장이 직접 아운 제국의 전권 대사를 찾아가는 일조차도 양 제국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자제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언가를 가리고 말고 할 수 있는 상황조차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가 언급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간곡한 어조로 부탁해 봤지만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드룩스는 이내 시장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모른 척 하는 것이 상책이었겠지만, 혹시라도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시장이 엉뚱한 짓을 저지르게 되면 모처럼 성사된 회담이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지금까지는 감히 꺼내들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을 저지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드룩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시장을 향해 한 마디를 더 건넸다.
“이번 회담에 저희측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시장이 바로 반응했다.
“참여하지 않는다고요?”
“그렇습니다. 저희가 주선한 만남인 것은 맞지만, 저희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
이게 무슨 의미일까. 아운 제국이 주선하기는 했지만, 아운 제국은 참여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논의하는 자리이길래.
“아울러 카살 제르토나에 위해를 끼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게 무슨…”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는 식의 외교적 수사에 대해서는 시장도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였지만, 드룩스의 말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장에게 드룩스는 힌트를 한 가지 더 주기로 했다.
“양 제국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둘이서 함께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죠.”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하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시장은 이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드룩스는 그가 자신이 건넨 힌트를 이해했음을 확인하자 다시 엄중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 회담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저희 아운 제국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양 제국 또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 군요.”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 또한 같은 이유입니다.”
“…”
시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드룩스에게 인사를 하고 대표부를 빠져 나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드룩스의 언질과 경고를 들은 시장은 형진이 머물고 있는 별장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들였다.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돌려 말한 이유를 납득했기 때문이다.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어설프게 끼어드느니 그렇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잠시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던 시장 측 인물들은 이내 모습을 감추었고, 별장 주변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형진과 유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도시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새로운 식재료를 찾아내는 일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런 둘의 움직임은 양 제국의 요원들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설마 형진이 초대장을 보낸 장본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결혼한지 얼마 안 되는 신혼부부가 자신들이 모시는 분을 위해 열심히 맛있는 식재료를 찾아다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양 제국의 함대가 카살 제르토나에 입항했다.
“무슨 일이지?”
“저거… 황실 깃발 아니야?”
“헉! 정말이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시장 측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은 갑작스럽게 황실의 깃발을 단 양 제국의 함대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의외로 양 제국의 함대에서 내린 사절단들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미리 준비된 숙소로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런 그들의 출현에 당황했던 시민들도, 사절단이 소리 없이 숙소로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가 맡은 일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마음속에 남은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사절단은 일단 하루 정도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미리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별장을 방문했다.
“역시 당신이 온 건가요.”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잘도 그런 몰골로 이곳을 찾았군요.”
운명의 맞수라고 해야 하나. 양 제국의 사절단을 이끄는 인물은 각각의 황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황녀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속이 뻔히 드러나 보이는 수작이다. 일부러 황실의 금지옥엽을 이렇게 서둘러 파견한 이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일테니까.
하지만 그래서일까. 두 황녀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황실의 결정에 의해 이렇게 보내지긴 했어도, 이렇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새삼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게 된 탓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태어난 그녀들은 어릴 적부터 서로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실제로 얼굴을 마주칠 일은 드물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상대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는 위치라고 해야 하나. 서로가 속한 황실이 상대에게 지닌 경쟁심 때문에라도, 그녀들은 서로 맞붙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녀들이 황실의 꽃으로서 군림할 때의 이야기. 누군가와 결혼하여 황실을 떠나게 되면 그런 식의 경쟁 구도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황녀는 지금 이 자리에 서고서야 알았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벌여왔던 경쟁은 고작 서막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마주 하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지지 않을거에요.”
“누가 할 소리.”
두 황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별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들은 또한 몰랐다. 자신들이 아무리 경쟁이니 뭐니 해봐야 별장 안에 머물고 있는 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일이란 사실을, 그녀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