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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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었던 거군요.”
포트니아 테론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균열이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업보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니,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와서 시간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그녀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을 얻으셨습니까.”
“네, 뭐… 일단은.”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내긴 했지만, 형진으로서도 미래의 그가 정말로 안식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뭐라 해도, 사후의 세계란 것은 신으로서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 또는 소멸 후에 어떤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쉬십시오.”
이번 일의 전말은 존재하는 모든 이들 가운데 오직 형진과 포트니아 테론 둘만의 비밀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다른 누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을 털어놓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포트니아 테론은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이니 진실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어쩌면, 그것이 형진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벌인지도 모른다.
“잠시만요.”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아무 말도 없던 포트니아 테론이 가만히 눈을 뜨며 뭔가를 결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무슨…”
심상치 않은 느낌. 혹시 또 무슨 엉뚱한 일을 생각한 것인가 싶어, 형진이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짓자, 포트니아 테론은 잔잔하면서도 조금 서글픈 눈빛으로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미래의 제가 했던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미래의 당신이 했던 일… 이라고요?”
엘리시온의 함정이 발동했다면, 그 함정을 만들 때의 의도대로 형진은 포트니아 테론을 끝장 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달리 뭔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까. 어쩌면 그와 같은 결말을 예견하고 뭔가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자신의 딸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형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표정 지으실 것 없어요. 그 일 자체는 당신에게도 당신의 딸들에게도 문제가 될 일은 없을테니까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당신의 가족들을 신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일단은…”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지요. 무엇보다도, 반신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파편을 어떤 식으로든 보유해야 하니까요.”
“설마… 그런…”
형진은 그제서야 포트니아 테론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네.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엘리시온에 들어가 스스로의 신격을 깎아내는 일을 시작할 겁니다. 아마도 그건 엘리시온을 만들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신을 만드는 일이 되겠지요.”
“…”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미친 짓이라고 대번에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스스로의 신격을 깎아내어 파편을 만들다니, 달리 무슨 말로 그것을 표현하겠는가.
“굳이 그러실 것까지는…”
“아닙니다. 처음부터 제 존재 의의는 그것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제가 만들어낸 모든 인과에 대한 응보로서도 이것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
“당신이라면 저보다 더 훌륭한 신을 더 많이 양성해낼 수 있을 겁니다. 최소한 저보다는 낫겠지요.”
형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시온 안에서는 신격이 깎여 나간 상태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건 보통의 다른 신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당신에게도 똑같이 그러한 부분이 적용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그렇게 되면 당신은 두 번 다시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포트니아 테론은 다시금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죄인이 함부로 바깥을 나돌아 다니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엘리시온의 함정을 발동한 건 다른 우주의 당신입니다. 당신이 벌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어요.”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벌입니다.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후…”
자신의 가족들을 반신으로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형진은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제가 당신에게 이 일을 말한 것은, 이런 결과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
“마침 잘 됐군요. 이 참에 아예 엘리시온을 없애버려야 겠습니다.”
“네? 하지만…”
엘리시온은 단순히 신들의 요람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신들에게 선택된 이들이, 안식을 취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기존에 엘리시온이 하던 역할은 거짓된 천국으로 옮기면 됩니다. 안식을 취하던 이들 역시 그곳으로 옮기면 되겠지요. 만약 신격에 손상이 간 이들이 생긴다면,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방도를 마련하면 됩니다.”
“…”
포트니아 테론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의 신격이 어느새 자신을 넘어설 정도의 무언가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지금의 그라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엘리시온과 같은 장소를 만들 수도 있고, 굳이 자신이 신격을 깎아 파편을 만들지 않더라도 가족들을 반신으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굳이 제가 그런 일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원하는 것을 이미 손에 넣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군요.”
“네. 확실하게 말해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려던 벌은 그 자체로 쓸데없는 짓입니다.”
“…”
포트니아 테론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어떤 신보다도 오래된, 하지만 이제는 잊혀져 버린 태초의 신은 자신조차 넘어서 버린 이 새로운 신의 모습이 너무나 눈부셨다.
형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당신의 역할이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니… 라고요?”
“그렇습니다.”
형진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아직 미숙한 신입니다. 신격이 아무리 높고, 지닌 바 힘이 아무리 강해도 결국 태어난지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존재에 불과하죠.”
“…”
“이번에 미래의 저와 마주하면서, 저는 지나온 시간이라는 것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죠.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라는 존재가 아주 잠깐 다른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는 이 우주가 얼마나 큰 위협에 직면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포트니아 테론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형진은 그런 그녀에게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래의 저에게 마지막 남은 고삐는 바로 열두 명의 딸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광란으로 인해 우주 자체가 붕괴하고 생명체가 절멸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죠. 하지만 또한 아이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뭐라 해도, 그 아이들에게는 오랜 시간으로부터 전해지는 경험과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포트니아 테론은 그제서야 형진에게 물었다.
“당신은…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형진은 바로 답했다.
“전부터 장난식으로 장모님이라고 부르긴 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제 어머니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인간 유형진의 어머니가 아니라, 주신으로 올라선 저라는 존재의 어머니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잘못하면 꾸짖어 주시고, 모자란 점이 있다면 채워주십시오. 제가 저라는 존재가 갖춘 신격과 힘에 경도되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폭주하지 않도록 고삐를 채워주십시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은 타락하기 마련, 제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지켜봐 주십시오. 당신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제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보듬어 주십시오.”
포트니아 테론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견제라니. 신에게 그런 식의 안전 장치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스스로가 자청한다는 식의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당신에게는 어여쁜 아내들이 있습니다. 귀여운 아이들도 있습니다. 얘기를 나눌 친구들이 있고, 충실한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저와는 시작점부터가 다르지요. 그런데도 굳이 저라는 존재가 필요하십니까?”
“네. 그들은 당신이 아니니까요.”
“…”
단호한 그의 대답에 포트니아 테론은 말문이 막혔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을 이토록 높이 봐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간섭을 자청하고 나서는 그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는 사실에 그녀는 또한 기뻤다.
어찌 보면 그녀가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그 오랜 세월 동안, 이런 경험 자체가 처음이나 다름 없었다. 직계라 할 수 있는 엘리시온의 신들조차 그녀를 잊어 버린 마당에, 그라는 존재가 자신을 이토록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당신께서 그러기를 원하신다면, 뜻에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다만?”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요?”
뭔가 싶어 형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이내 선선히 답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맞춰드리는 것이 옳겠지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포트니아 테론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저에게 그런 역할을 맡긴다면, 그런 저 자신에 대한 안전장치도 필요한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요. 주신의 어머니 역할에 경도되어,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일이 없기 위해서라도 그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안전장치요?”
“네.”
포트니아 테론은 가만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다른 겹쳐 포개며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보호와 균형이 당신에게 속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서 잠시…”
“저 역시 당신에게 속하고 싶습니다.”
“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아닙니다. 저는 이미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이 그런 중대한 역할을 맡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게다가 다른 신들이나 가족들이 그것을 받아들일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저에게 그 일을 맡기시고자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일입니다.”
“음…”
형진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포트니아 테론의 말에도 분명 일리가 있었다. 당장 공포와 죽음이나 희망과 생명만 해도 반발하고 나설 것이 분명한 상황이니, 그에 걸맞은 조치가 필요한 건 확실히 필요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굳이 그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요식행위에 불과한 일이니까요.”
“…”
포트니아 테론은 그저 조용히 미소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의 신이 누군가 다른 신에게 속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지만, 여기서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새로운 신격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했군요.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언약을 위해서는 이 또한 거쳐가야 할 일,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제 신격은…”
========== 작품 후기 ==========
참고로 형진의 이름은,
빛날 형, 떨칠 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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