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17)
택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야야, 정신 차려.”
어느새 눈앞에 있던 홀로그램은 사라졌다.
임진용 부회장은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잠깐 딴 생각하고 있었어요.”
택규는 무슨 일인지 눈치 챘을 테지만,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얘가 원래 얘기하다가 지 혼자 생각에 빠지고 그래요.”
잠깐 봤다고 생각했는데, 남들 눈에는 한동안 멍하니 있는 걸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정신을 차린 나는 임진용 부회장에게 물었다.
“방금 무슨 얘기 하셨죠?”
“협력에 대해 얘기 했습니다.”
난 예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배터리 공급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임진용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터리뿐 아니라 자동차 사업 전반에 걸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현재 서성전자는 차량용 AP 엑사루스 오토의 양산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택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앗, 진짜요? 원래 모바일 AP 엑사루스를 변형해서 쓰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동작조건, 유지기간, 안전성 등에서 차이가 있으니까요.”
“이번 엑사루스8 성능이 드라군5.4보다 괜찮다는 얘기가 많던데.”
얘가 또 이런 쪽은 빠삭하지.
AP(Application Processor)는 사람으로 따지면 두뇌로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부품이다.
최근 자동차에도 각종 전자장치들이 탑재되며, 이를 제어하는 AP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특히 자율주행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AP의 존재가 필수다.
AP를 직접 설계하는 능력은 엔플이나 퀄콤, 서성전자 등 몇 개 기업만 보유하고 있다.
난 냉정하게 생각해보았다.
운영체제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 성능이 받쳐줘야 한다. 여기에 각종 카메라, 센서, 통신 등 각종 첨단 전자부품이 필요하다.
서성전자는 세계최대의 IT 제조업체.
반도체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다른 부품들 역시 이미 스마트폰을 통해 완성된 기술력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서성그룹과 손을 잡으면, AP, 전자장비, 배터리 등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배터리야 서성SB 외에도 다른 업체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전자분야에서는 서성전자 이상의 파트너를 찾기 힘들다.
당장 엔플만 해도 매년 서성전전자의 부품을 수십억 달러씩 구매하고 있으니.
“생각해 보니, 허먼도 있네요.”
내 말에 임진용 부회장은 안경을 매만지며 말했다.
“과거 서성그룹과 은성그룹은 재계 1위 자리를 놓고 다투던 경쟁자였습니다.”
은성그룹이 은성전자를 만들어 전자산업에 진출하자, 서성그룹 역시 서성차를 만들어 자동차산업에 진출하며 두 재벌그룹의 대결구도가 심화되었다.
하지만 은성그룹이 왕좌의 난으로 계열사가 쪼개지고, 은성전자는 부도가 나서 채권단에 매각되었다. 서성그룹 역시 IMF 외환위기 당시 어려움을 겪다가 서성차 지분 대부분을 매각하며 자동차산업에서 손을 뗐다.
이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조금씩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민구 회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임일권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난 이유도 있지만…….
“결정적 계기는 서성전자의 허먼 인수였죠.”
허먼은 카오디오를 포함한 자동차 전자장비 분야의 최강자로 유수의 완성차업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서성전자는 작년 말쯤 80억 달러를 투자해 허먼을 통째로 인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민구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은성차 입장에서 허먼은 경쟁사들의 파트너였기 때문이다.
“아! 혹시 그래서 은성차가 엑스캅을 인수하려 했던 거야?”
택규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 은성차그룹은 보안과 경호를 서성그룹 계열사인 디에스에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디에스와의 거래를 끊었고, 엑스캅을 인수해 자체적으로 보안업체를 키우려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눈앞에서 고작 10만 달러 차이로 빼앗겼지만.
한 번 실수한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꽤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것 같기도 하고.
택규는 임진용 부회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직접 사도 되지 않아요? 돈도 많으시잖아요.”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임진용 부회장의 재산은 약 16조로 아버지인 임일권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부자순위 2위였다.(어떤 졸부 때문에 3위로 밀렸지만)
“그러면 좋겠지만,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별로 없습니다.
재벌들은 재산이 많다.
하지만 그게 현금이 많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그래서 온갖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회사 돈을 빼돌려서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의 재산 대부분은 경영권 유지를 위한 서성그룹 계열사들 주식으로 되어있다.
서성전자에 70조에 달하는 사내유보금이 있지만, 이 돈을 형제끼리 경영권 다툼을 위한 사적인 목적으로 쓴다면 주주들은 물론 정부(서성전자 최대주주도 국민연금이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비자금 물려받은 거 없어요? 전에 기사 보니까 임일권 회장님 차명계좌만 1300개라던데.”
택규의 물음에 임진용 부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 비자금이 조 단위일 테지만, 자금출처가 문제가 될 테니 이런 일에 동원하기는 힘들겠지.
이번에는 내가 질문했다.
“다른 그룹사에 자사주 맞교환 같은 걸 제한한 적은 없나요?”
“없습니다.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돈 앞에서는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다. 오로지 이익과 손실이 있을 뿐이다. 임승용 사장 뒤에는 은성차 그룹이 있고, 그 뒤에는 다시 박시형 대통령과 여당이 있다.
조금이라도 세가 기운다 싶으면 언제든지 이기는 쪽으로 갈아탈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는 믿으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은성차와 사이가 안 좋지 않습니까?”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요.”
차라리 방관을 할지언정 내가 은성차와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난 다시 계산을 해보았다.
연소현 관장, 임승용 사장, 국민연금 지분을 합치면 26.6퍼센트. 반면 임진용 부회장, 서성전자, 서성SB 자사주를 합치면23퍼센트.
그리고 여기에……
“골든게이트가 얼마나 가지고 있죠?”
임진용 부회장 역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바로 대답했다.
“1.8퍼센트입니다.”
금액으로 치면 400억 정도인가?
생각보다 크진 않구나.
임진용 부회장은 나를 보며 물었다.
“언제쯤 대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실 예지를 본 순간부터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이지 사기나 다름없는 능력이다. 미래의 일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얻은 것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정할 수 있으니.
난 그에게 말했다.
“기꺼이 돕겠습니다, 선배님.”
그제야 임진용 부회장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다행입니다.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서성그룹과 손을 잡고 주식을 매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은성차와 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쪽에서도 매수에 나설 테고, 그러면 매물이 사라지고 주가가 폭등하겠지.
어째서 사람들 눈을 피해서 왔는지 알겠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후배님.”
* * *
스탬퍼 호텔을 나온 임진용은 준비되어 있던 차에 올라탔다. 안에는 60대 중반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서성그룹의 핵심조직인 미래전략실을 담당하는 김명수 실장이었다.
“직접 만나보니 어떠십니까?”
그의 물음에 임진용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재계에서 강진후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어떤 이들은 대단한 투자자라고 추켜세웠고, 어떤 이들은 운 좋게 돈을 번 금융투기꾼 정도로 치부했다.
아무래도 후자 쪽이 훨씬 많았다.
한국경제와 함께 성장한 재벌들은 몇 세대에 걸쳐 자신들만의 성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들은 다른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그 역시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IT업종은 유통업이나 제조업에 비해 성공과 쇠퇴가 빠르다.
노키아나 소니 같은 초일류 기업들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았고, 구블, AMZ, 페이스노트, 알리지니 같은 신생회사가 한 세대도 안 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도 보았다.
실리콘밸리에는 신생회사와 젊은 기업인들이 넘쳐났다. 그들 중에는 상속을 받은 그보다 더 큰 부를 만들어낸 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한국 재계는 고인물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다들 갑자기 튀어나온 강진후라는 존재를 경계했다.
“표정을 보니 일이 잘 풀린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강진후 대표가 최대한 주식을 매입한다 해도 저쪽에서 더 많은 우호지분을 확보할 수도 있으니까요.”
임진용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어머니든 승용이든 지금이라도 멈췄으면 좋겠는데요.”
김명수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돈과 권력은 마약과도 같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이미 다 겪으셨던 일입니다.”
그는 오랜 기간 임일권을 곁에서 모셨고,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장남인 임진용과 달리 임일권은 삼남이었다. 그룹후계자로 지정되자 형들의 강한 반발에 시달렸다. 임일권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형제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칼 같이 쳐냈다.
피가 튀지 않았을 뿐이지 골육상잔이나 다름없었다.
“중공업과 엔지니어링. 두 개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차라리 증권이나 카드를 원했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성SB는 전자와 연관성이 깊고, 배터리는 미래의 핵심 산업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드론, 전기차 등 전기로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배터리가 들어간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경영권을 넘겨줄 수 없었다.
“하나를 주면 둘을 바라는 게 사람입니다. 마음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임진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왕국을 세우지는 못할망정 물려받은 왕좌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 앉아있을 자격이 없을 테니.
* * *
임진용 부회장이 나간 후.
택규는 재빨리 나에게 물었다.
“아까 뭘 본 거야?”
난 그대로 말해주었다.
“카로스에 서성SB 배터리가 탑재된데.”
“그래? 간만에 예지가 떴네.”
그렇게 되려면 서성SB가 은성차에 넘어가게 놔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재벌과 손을 잡아도 되는 거야?”
“안 될 게 뭐있어?”
“너 재벌 싫어하잖아.”
“응? 내가?”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다.
사실 재벌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너 중심의 책임경영이라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다 망했겠지.
주주들의 눈치를 보며 단기실적에 연연하는 계약직 CEO들과는 달리 재벌들은 장기전망을 가지고 기업을 경영할 수 있다.
만약 임영철과 임일권이 총수일가가 아니었다면, 주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반도체에 투자할 수 있었겠는가?(마찬가지로 주주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추진한 서성차는 쫄딱 망했지만)
“내가 무슨 재벌해체나 경제시스템 개혁에 나설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안 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한국경제는 잘만 굴러간다.
“재벌그룹의 문제가 뭔지 알아?”
“한두 개가 아닌데, 뭐부터 말해야 돼?”
“…….”
뭐, 그렇긴 하지.
난 정해진 답을 말했다.
“혼자서 다 해먹으려고 한다는 거야.”
원래 은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은성차는 다시 거대 그룹이 되었다. 먼저 은성차는 완성차를 만든다. 그걸 운송하는 일은 글로마스가 광고와 마케팅은 리노션이 한다.
은성제철에서 직접 철강과 철판을 제조해 공급하고, 은성MD는 부품개발과 제조, 서비스센터를 운영을 맡는다.
용광로에 쇠를 끓이는 것부터, 유통, 판매, AS까지 모든 걸 다하는 것이다.
1차, 2차, 3차에 이르는 밴더들에게 부품을 납품받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청’이지 ‘협력’은 아니다.
만약 은성차에서 협력을 제의했다면 서성SB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민구 회장은 인수라는 방식을 택했다.
과거라면 이런 방식이 통했을 수도 있지만 현재는 다르다. 세상은 바뀌었고, 재벌그룹이라고 해도 혼자서 모든 걸 다할 수는 없다.
은성차는 서성SB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전기차 시장에 진출할 생각이다. 그런데 인수에 실패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다른 업체 찾으면 되지 않아?”
“서성SB 정도로 기술력과 생산력을 갖춘 기업은 전 세계에 몇 곳 안 돼. 그리고 설비가 놀고 있다면 모를까 배터리는 생산량을 갑자기 늘리기 힘들어.”
결국 각종 사업계획에 제동이 걸리게 될 것이다.
난 일단 상엽 선배에게 전화했다.
[취임식 잘 봤어. 화면에 니 얼굴도 나오던데.]“그보다 일이 하나 생겼어요.”
[뭔데?]“당장 서성SB 주식을 매수하세요.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아! 골든게이트 계좌 말고 다른 외국계 증권사를 이용하세요.”
OTK컴퍼니와 골든게이트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골든게이트를 통해 주문하면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챌 수도 있다.
“이유는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알았어.]상엽 선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