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20)
임승용 사장은 임진용 부회장과 얼굴이 많이 닮아있었다.
헤어스타일이 비슷하고, 둘 다 안경을 썼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나이는 만으로 32세. 임진용 부회장이 만 45세니, 13살이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예. 앉으세요.”
내 말에 임승용 사장은 우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주시면 저도 기쁘겠네요.”
임승용 사장은 생수병을 따서 물을 마셨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장례식도 장례식이지만, 그 전부터 계속 어머니와 함께 병상을 지켰으니, 지칠 만도 하지.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예상했던 일이고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허탈한 기분이 드네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어떤 기분인지 잘 압니다.”
임승용 사장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마 내 가정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나와 은성차의 악연도.
난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서성그룹은 임진용 부회장님께서 경영하시겠네요.”
임승용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재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경영권이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경영권이 없다면, 그건 그저 현금이 많은 부자일 뿐이다. 반면 보유지분이 적어도 경영권을 손에 쥐고 있으면, 수십조짜리 회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임승용이 받은 것은 서성중공업과 서성엔지니어링.
이 두 개만 합쳐도 시총이 7조가 넘는다.
이 정도만 되도 재계에서 충분히 큰소리 칠 만하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는 법.
40조 중 7조를 받았다면 모를까, 400조 중에 7조를 받았다면 얘기가 좀 다르다.
반면 물산, 전자, 생명, 바이오 등 알짜는 전부 형의 몫이었다. 그것에 비한다면 그가 받은 건 쭉정이나 다름없다.
더 큰 문제는 중공업과 엔지니어링 모두 경영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진해운이 파산한 것만 봐도 알겠지만, 조선은 해운과 동반 침몰 중이고, 플랜트 역시 중국의 저가공세에 밀리는 중이다.
그래서 서성SB라도 갖겠다는 건가?
형을 등지기로 한 이상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군을 필요로 할 것이다.
내가 한국 재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돈이 많다.
서성그룹이나 은성차그룹을 제외하면, 우리 정도 현금자산을 가진 재벌그룹이 얼마나 되겠는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이 돈으로 재계를 흔들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나 영향력이 작지, 미국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러스트벨트에서 사업을 크게 벌이는 중이고, 백악관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했겠지.
사실 내 입장에서는 서성SB를 누가 가져가든 별 관심 없다. 은성차만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면 말이지.
난 냉정하게 생각해보았다.
임일권 회장은 형들을 물리치고 그룹을 차지했다. 그런 만큼 능력만 된다면 형이든 동생이든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중공업과 엔지니어링만 떼어준 것은 그릇이 딱 그 정도 크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그 이상을 욕심내는 중이다.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인데…….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그걸 충고해줄 만한 입장은 아니다. 어차피 밥도 다 먹었고.
난 택규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실 텐데,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빈소를 나왔다.
통로를 걸어 나오는데, 맞은편에서 두 명의 중년남자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는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더니, 이내 나에게 말을 걸었다.
“OTK컴퍼니 강진후 대표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자 머리가 반백인 남자가 옆에 있는 안경 쓴 남자를 툭 치며 말했다.
“거봐. 맞다니까.”
그러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류철균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난 깜짝 놀라며 그 손을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강진후 입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이야…….”
내 말에 상대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를 알고 계십니까?”
“그럼요. RCK브로스 회장님을 모를 리가 있나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금융계에서는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경영학과에 입학한 후 그의 무용담에 대해서는 질리도록 들었다.
그 때문에 IB에서 PEF 쪽으로 마음을 바꾼 선배들도 한둘이 아니다.
“그럼 이쪽 분은……?”
안경 쓴 남자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신병두입니다.”
류철균 회장과 같이 온 걸 보고 짐작은 했다.
“딸아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학교선배가 OTK컴퍼니 대표님일 줄이야.”
“저도 유리한테 전해 듣고 놀랐습니다.”
신병두 부회장은 지금도 미중년 느낌이지만, 젊었을 때는 잘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것 같은 외모다. 자세히 보면, 유리랑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난 택규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제 친구…… 이자, OTK컴퍼니 부대표 오택규입니다.”
“안녕하세요.”
택규도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류철균 회장은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번 엑스캅 인수건에서 한 방 먹었습니다. 대단하던데요.”
진짜 대가에게 이런 칭찬을 들으니 좀 쑥스럽다. 예지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난 현주 누나에게 공을 돌렸다.
“실사부터 입찰까지 오현주 지사장님이 다 하셨는데요.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신병두 부회장이 물었다.
“서상원 팀장이 OTK컴퍼니로 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벌써 소문이 퍼졌나 보네요.”
“잘된 일입니다.”
감사팀의 감사결과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고, 은성차그룹에 제출한 사표는 별 문제없이 수리되었다. 그리고 서상원 팀장은 팀원들과 함께 며칠 안에 우리 쪽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이미 사무실 공간까지 전부 세팅해놓았다.
“별로 좋은 소문은 아니겠네요.”
류철균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소문 따위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레드스톤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는데, 그럴 사람들이 아니에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랬다면 애초에 영입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 다른 회사 정보를 팔아먹는 사람이, 나중에 우리 회사 정보를 팔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는 피식 웃었다.
“은성차만 바보짓 한 거죠. 엑스캅에 이어서 훌륭한 인재들까지 빼앗기다니.”
언론기사나 칼럼에서 비춰지는 모습은 날카롭고 깐깐한 이미지인데, 막상 만나보니 장난스럽고 시원시원하다.
아마 전자는 일할 때의 성격이고, 지금 모습이 평소 성격인 듯했다.
“저희는 이제 조문하러 왔는데, 끝나고 돌아가는 길인가요?”
“예.”
류철균 회장은 아쉬워하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일찍 올 걸 그랬네요. 중국 출장 갔다가 방금 공항에 내려서 오는 길이라서요.”
그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왔구나.
“시간 내주시면,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든지 환영이죠.”
우리는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류철균 회장은 신병두 부회장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일 끝나고 근처에서 맥주 한 잔해요. 강남에 이 친구랑 자주 가는 펍이 하나 있어요.”
“예.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빈소로 들어갔고, 우리는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 저 두 사람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택규가 내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야?”
“게임계로 치면, 로스트 판타지 개발자 이치카와 시게루랄까?”
택규는 바로 납득했다.
“전설의 레전드구나.”
이 일을 하면서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전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체이스 사우스웰과 제임스 C. 골드맨에 이어서 류철균 회장과 신병두 부회장까지 직접 보게 되다니.
이러다가 나중에 워렌 보트도 만나는 거 아닌지 몰라.
* * *
임일권이 연소현과 결혼했을 때만 해도 재벌이 언론의 눈치를 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양쪽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서성그룹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반면, 조중일보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미 언론권력은 신문사에서 포털사이트로 옮겨진지 오래다. 사람들은 신문구독 대신 포털 메인화면에 떠있는 기사만 클릭했다.
어렵게 배당받은 두 개의 종편채널은 수익은커녕 적자만 내고 있었다. 당장 대기업들의 광고가 끊기면 생존을 걱정해야할 판이다.
연소현 입장에서 조중일보는 한때 아버지가 경영했고, 지금은 그녀의 오빠가 경영하는 가족기업이다.
그런데 그 기업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남편이 나서서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광고를 배당해줄 뿐 그 이상의 지원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이후 남편이 건강악화로 물러나고 장남이 경영을 맡게 되자, 그녀는 다시 도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아들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다시 말해 오로지 자신과 서성그룹만을 생각했다.
몇 번의 설득 끝에도 거절당하자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졌고, 연소현은 장남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녀에게 경영권은 없지만, 계열사 주식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 동생 연소진이 은성차의 제안을 전해주었다. 일이 잘 풀릴 경우 그 대가는 조중일보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임진용이 정식으로 회장직에 오르고 나면, 계열사의 경영권을 빼앗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교묘하게 막내아들을 부추겼다. 다행히 임승용은 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는 모든 것을 가져간 형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몫으로 하나라도 더 챙기고 싶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임승용은 자신의 지분과 어머니의 지분, 그리고 국민연금의 지원을 받으면, 충분히 서성SB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 * *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달력이 2월로 넘어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로날드의 취임식과 임일권 회장의 장례식도 이제는 지난 일이 되었다.
유산은 유언장에 따라 유족들에게 분배되었다. 네 자식들에게는 각자 경영을 맡은 회사의 주식이, 아내인 연소현 관장에게는 각종 부동산과 채권, 현금이 쥐어졌다.
상속세는 그야말로 역대 최대였다. 아마 정부는 올해 세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임진용 부회장은 경영안정을 위해 그룹 내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어차피 임일권 회장이 쓰러진 뒤부터 계속 그가 대행을 맡아왔기에 큰 혼란은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회장직에 오르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계열사들은 새로 이사진을 꾸리고, 조직을 정비했다. 임일권 회장이 대표이사로 있던 기업들은 임시주총을 열고 새로운 대표이사 선임을 안건으로 올렸다. 여기에는 서성SB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장례식이 있기 전부터 계속해서 서성SB 주식을 사들였다. 시중에서 거래되는 주식수는 전체의 20~25퍼센트 정도.
자동차용 배터리가 중국에서 인증에 실패하고, 은성차와의 계약도 불발되며, 한때 32만 원을 찍었던 주가는 17만 원 초반에 머물렀다.
헨리는 여러 외국계 증권사에 계좌를 분산시켜 주문을 넣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길고도 지루한 작업이다.
한 번에 많은 물량을 매수하면 순식간에 주가가 치솟게 된다. 때문에 매도물량에 맞춰 지속적으로 소량주문을 넣어 체결시켜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조용히 사들여도 유통물량이 줄어들면 주가가 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주가가 더 오르기 전에 자사주 매입협상을 시작했다. 이런 일은 나 대신 전문가가 나서야 한다.
서상원 팀장은 상대측과 비밀리에 접촉해서 협상을 벌였다.
보유주식은 이제 4퍼센트가 넘었고, 그 사이 주가도 15퍼센트 이상 올라 20만 원에 근접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공격적인 매수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가가 치솟았고,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서성SB 뭔 일 있냐?
-갑자기 왜 이렇게 오르지?
-호재라도 있는 모양인데.
-외국인들이 계속 사들이고 있습니다.
-조만간 좋은 뉴스 터질 것 같으니, 물량 털리지 말고 존버하세요.
난 혀를 찼다.
“눈치 챘나 보네.”
택규가 물었다.
“우리가 산다는 걸?”
“누군지는 몰라도 물량을 야금야금 쓸어가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겠지. 그래서 그쪽에서도 지분을 늘리기 위해 매수에 나섰나본데.”
“그럼 이제 어떡해?”
“어차피 이제 멈추려고 했어.”
현재 우리가 사들은 지분은 4.7퍼센트. 5퍼센트가 넘으면 규정에 따라 공시를 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 공시를 띄우면, 사람들은 어째서 OTK컴퍼니가 서성SB 주식을 사들였는지 궁금해 할 테고 답을 알기도 전에 매수에 나설 것이다.
알다시피 OTK컴퍼니는 모든 투자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런 만큼 추격매수가 따라붙어도 이상할 게 없다.
우리가 매수를 멈춘 시점에서 서성SB는 공시를 터트렸다. 서성SB가 보유한 자사주 6.3퍼센트를 OTK컴퍼니에 전량 매각한다는 내용이었다.
OTK컴퍼니 역시 자사주를 포함해 서성SB 지분 총 11퍼센트를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공시가 뜨자 서성SB 주가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