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52)
오랜만에 만난 유리는 더 예뻐진 모습이다.
흰색 티셔츠에 도트무늬가 들어간 플레어스커트를 입었고, 밝은색 금발은 하나로 올려서 리본으로 묶었다.
화장을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좀 더 성숙해보였다.
잠시 후, 유리는 입을 열었다.
“헤에, 그렇구나. 선배 그 외국인 언니랑 사귀는구나.”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왠지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 그래?”
유리는 손가락으로 금발을 꼬았다.
“뭐, 남녀가 만나다보면 사귈 수도 있는 거죠.”
난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
“그러다가 헤어질 수도 있는 거고.”
“응?”
유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오늘은 영화나 봐요.”
“그, 그럴까?”
우리는 미리 예매해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평일 낮인지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왠지 영화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유리가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깜짝 놀랐다.
“헉! 왜 울어?”
유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영화가 너무 슬퍼서요.”
“…….”
스크린에서는 거대 로봇끼리 열심히 치고받는 중이었다.
로봇에 감정이입하고 있나?
영화가 끝난 후, 밥을 먹고 난 유리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난 뒷자리에 놓아둔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스마트폰. 임진용 회장한테 받은 거야.”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사 봤어요. 임진용 회장이 매장에서 직접 사줬다면서요?”
우리가 서성디지털프라자에 나타난 일은 외신에까지 보도되었다. 서성전자 입장에서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홍보효과를 누린 셈이다. 아니, 임진용 회장 입장에서는 1천만 원 쓴 건가?
“친한 사람들한테 나눠주라네.”
유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포장을 벗기고 폰을 꺼내들었다.
“와아! 핑크골드네요.”
“이 컬러 좋아하잖아.”
예전에 같이 L6 사러갔을 때 유리는 핑크골드를 사려다가 재고가 없어서 못 샀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걸로 가져왔다.
“기억하고 있었네요. 고마워요.”
“뭐, 내가 사주는 것도 아닌데. 나 말고 임진용 회장님께 고마워해.”
“헷, 그래도 저한테 준 건 선배니까, 선배한테 고마워할래요.”
유리는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엘리 언니랑 결혼할 거예요?”
“응?”
이건 뭔 소리야?
유리는 생긋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럼 다음에 봐요, 선배.”
“잘 들어가.”
난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걸로 잘 마무리 된 거겠지?
* * *
난 택규와 함께 골든게이트 빌딩으로 건너갔다. 지사장실에는 현주 누나와 엘리가 같이 있었다.
난 엘리에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받으세요.”
“이게 뭐야?”
“서성전자 스마트폰이요. 임진용 회장이 나눠주래요.”
엘리는 기뻐했다.
“정말요? 광고 보면서 갖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택규는 책상 위에 쇼핑백을 올려놓았다.
“누나 것도 있어.”
현주 누나는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데이터 옮기기 귀찮은데.”
“내가 해줄게, 누나. 요즘은 터치 몇 번이면 돼.”
택규는 유심을 옮겨 끼우고, 데이터를 옮겨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액정필름까지 깔끔하게 붙여주었다.
누가 보면 서성전자 직원인 줄.
책상과 응접 테이블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현주 누나는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글로벌 IB에서 발행한 암호화폐에 관한 리포트들이야.”
난 적잖이 놀랐다.
“그래요?”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글로벌 IB들은 암호화폐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새 시총이 2천억 달러를 넘어서며,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시장으로 성장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1년 안에 암호화폐 시장규모가 1조 달러를 넘을 거라고 예측했다.
“IB뿐만이 아니야. 시카고옵션거래소(COBE)에서는 반트코인 선물거래를 검토 중이야.”
역시 돈이 된다 싶으니 다들 움직이는구나.
엘리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같이 보느라 며칠 동안 계속 야근했어요. 진후가 뭐라고 좀 해줘요.”
“제가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난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었다.
메릴린치에서 발행한 리포트였다. 블록체인에 대한 개념과 함께 각 코인별 특징과 그래프가 빼곡하게 나와 있었다.
JP모건,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노무라증권, 골든게이트는 물론, 국내 증권사들이 작성한 것들도 있었다.
“읽어보니 어때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대한 개념은 이해했어. 그런데 왜 오르는지는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사실 저도 이해는 안 돼요.”
일단 가격이 오르니 매수세가 따라붙으며, 계속 가격이 오르는 형국이다.
기존 경제학으로는 지금의 암호화폐 폭등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과 투자전문가들은 암호화폐 열풍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골든게이트 역시 마찬가지.
아시아지사장 체이스 사우스웰은 암호화폐는 거대한 버블이며, 절대 관련 상품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현주 누나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이거 얼마나 더 갈 것 같아?”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겠죠.”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었던 것을 알듯이, 폭락하고 나서야 버블인 줄 안다. 만약 폭락하지 않으면 버블이 아닌 거고.
문제는 암호화폐의 가치평가 기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쓰는 PBR, PER, ROE 같은 지표들은 전혀 의미가 없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가치가 없을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시장이 커지며, 새로운 암호화폐공개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마치 주식을 상장하는 IPO와 절차가 비슷해서 이를 ICO(Initial Coin Offering)라 불렀다.
온갖 코인들이 새로 생겨났다. 한 번 시장에 안착하기만 하면, 수십 배 오르는 것은 예사였다.
새로운 코인의 등장으로 반트코인의 비중은 점점 주는 추세다. 하지만 단일 코인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만큼, 여전히 암호화폐 시장의 기축통화로 군림했다.
택규는 데이터 전송작업을 끝마친 새 폰을 현주 누나와 엘리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코인 때문에 게임하는 애들과 포커 치는 애들도 난리야.”
“웬 포커?”
“온라인 도박사이트에서 텍사스 홀덤 쳐서 돈 버는 애들이 있어.”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포커가 운으로 하는 도박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운 이상의 실력이 필요한 두뇌 스포츠에 가깝다.
한두 판이라면 운 좋은 초짜가 돈을 딸 수도 있겠지만, 결국 여러 판을 하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돈을 따간다.
그러니 프로 포커 플레이어라는 직업도 있고, 세계대회도 열리겠지.
하지만…….
“그거 불법 아니야?”
“외국 도박사이트에 접속해서 하는 거지. 아예 조직적으로 모여서 포커방을 운영하기도 하고.”
한국은 도박에 대해 엄격하다.
강원도 정선에 내국인 카지노 하나가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종류의 카지노는 불법이다. 온라인 카지노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일부 국가에서는 온라인 카지노를 허용한다.
그러나 아무리 외국에서 합법사이트라고 해도 내국인이 거기에 접속해서 게임하는 건 불법이다. 외국에서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포르노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이트는 전 세계 포커 플레이어들이 접속하다 보니, 판돈을 송금하는 절차가 꽤 복잡했거든. 승인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래서 일부 사이트에서는 오래전부터 송금을 반트코인으로 대체했어.”
이러한 상황은 국제적으로 이뤄지는 게임 아이템거래에서도 비슷했다.
때문에 게임사이트나 도박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암호화폐를 먼저 접했다.
택규 역시 암호화폐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 게임 캐릭터와 아이템을 처분하며 반트코인을 손에 넣었던 거고.
“벌써 수십억, 수백억 번 애들도 있어. 어제까지 골방에서 포커 치던 애가 벤틀리랑 람보르기니 몰고 다닌다니까.”
개당 1, 2원에 산 코인이 수십 배가 뛰어서 돈벼락을 맞았다는 건 더 이상 꿈이 아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쪼그려 앉아 포커 쳐봐야 두 배 벌기가 힘들다. 그런데 코인은 며칠 만에 그 몇 배를 벌 수 있었다.
심지어 온라인도박은 불법이지만, 코인은 합법이다!
이용자들이 암호화폐 거래소로 빠져나가며, 도박사이트들은 이용자 감소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가 그렇게 단속을 해도 잡히지 않던 도박사이트가 암호화폐 덕분에 자체 폐업을 하게 된 것이다.
현주 누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인터넷으로 쇼핑도 하고, 금융거래도 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그 정도일까?”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가격이란 내가 얼마의 가치를 부여하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얼마의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코인열풍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은 유독 열광적이었다.
암호화폐는 개별 거래소끼리 시세가 연동되지 않는다. 때문에 같은 코인이라 하더라도 거래소마다 금액에 차이가 난다.
재밌는 사실은 다른 나라보다 유독 한국에서 암호화폐 가격이 높다는 것이다. 반트코인만 보더라도 현재 미국 가격에 비해 7퍼센트 이상 비싸고, 다른 코인들 역시 5~10퍼센트 가량 비싸게 거래 된다.
이를 ‘김치 프리미엄’이라 불렀고, 외국에서도 한국의 비이성적 열기에 관심을 나타냈다.
“어째서 한국에서만 이렇게 비싸게 거래되는 거야?”
“일단 재정거래가 막혀있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겠죠.”
동일한 상품이라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시장마다 가격이 차이날 수 있다. 이 경우 가격이 싼 시장에서는 상품을 매입하고, 비싼 시장에서는 상품을 매도하는데, 이를 재정거래(Arbitrage)라고 한다.
재정거래가 계속되면, 싼 시장에서는 매수로 상품 가격이 올라가고, 비싼 시장에서는 매도로 상품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에 양쪽 시장의 가격이 어느 정도 비슷해진다.
이론적으로는 가격이 싼 미국이나 일본 거래소에서 반트코인을 매입해서, 가격이 비싼 한국 거래소에서 매도하면 그만큼의 차익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외국 거래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에 계좌를 만들고 송금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고 환전과 송금 수수료가 발생한다.
외국 거래소에서 산 반트코인을 다시 한국 거래소로 옮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걸리는 시간과 수수료 등을 감안한다면, 한국 거래소에 사는 것과 금액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외국에서의 공급은 제한적인데, 수요가 계속 늘고 있으니, 프리미엄이 점점 올라가는 것이다.
“가격이 오르기만 한다면 프리미엄은 문제 될 거 없잖아요.”
지금은 그야말로 대세상승장. 어느 코인이든 사기만 하면 일단 오른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30분까지만 열리는 주식시장과는 달리, 코인시장은 24시간, 주 7일 열려 있다.
여기에 공시제도나 각종 규제도 없고, 심지어는 상하한가도 없다. 실제로 하루에도 몇 배씩 오르거나 떨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돈 놓고 돈 먹는 도박판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이러니 도박사이트들이 줄줄이 망할 수밖에.
현주 누나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때 투자한다고 했을 때 같이 들어갈 걸 그랬나?”
K컴퍼니가 대규모로 암호화폐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을 때, 현주 누나는 큰 우려를 나타냈다. 언제 폭락할지 모르는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락은커녕 그 이후 말도 안 되는 폭등세가 펼쳐졌다. 주가상승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덕분에 우리는 벌써 몇 배를 벌어들였다.
현주 누나는 골치 아프다는 듯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지금 투자해도 괜찮을까?”
“글쎄요. 시장규모가 커졌다 해도 아직 주식이나 채권에 비할 바는 아니잖아요. 반트코인이랑 알트코인들 다 합쳐봐야 아직 서성전자 시총에도 미치지 못하는데요.”
얘기를 듣던 택규가 한마디 했다.
“옛날에는 1반트코인이 1천 달러 넘었을 때만 해도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었는데.”
“닷컴버블 이후 최대의 버블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증시에 비해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개별 코인의 상승세만 보자면 이건 닷컴버블보다도 더한 수준이다.
과연 이 버블의 끝은 어디일까?
“어쩌면 이제부터 진짜 상승이 시작될 수도 있어요. 운용자산 일부만 투자하는 건 나쁘지 않을걸요.”
“흐음.”
현주 누나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택규가 말했다.
“진후 말 들어, 누나.”
엘리가 맞장구 쳤다.
“맞아요. 언제 진후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있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현주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장에 고객들 돈을 밀어 넣을 수는 없다. 다행히 한국지사는 어느 정도 현금을 확보해놓은 상태다.
현주 누나는 채권을 매각한 돈과 유보금을 합해 300억을 마련했다. 그리고 조용히 반트코인과 ICO를 준비하는 알트코인들을 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