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444)
를 보는 투자자 443 >
난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엘리는 침대에 누운 채 창밖에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꼈는지 엘리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깼어요?”
“왜 그렇게 비를 좋아해요?”
“그냥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엘리는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내년에 진짜 결혼하는 거예요?”
“안 믿겨져요?”
“헷, 주위에서 벌써 저 유부녀 취급하는 거 알아요?”
“그래요?”
표정을 보니 왠지 좋아하는 것 같다.
“아이는 몇이나 낳을까요?”
“어, 음.”
잠깐. 여기까지는 아직 생각을 못했는데.
……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한 명?”
내 말에 엘리는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설마 오답인가?
“무슨 말이에요? 셋은 낳아야죠.”
“예?”
셋은 키우기 힘들지 않을까?
“진후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딸이 좋을 것 같은데.”
엘리를 닮은 딸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귀여울 것 같다.
“왜요? 전 진후 닮은 아들도 좋을 것 같은데.”
“제가 어렸을 때 얼마나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 몰라서 그래요.”
“푸훗, 나중에 어머님께 들어봐야겠네요.”
엘리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매만졌다.
“진후는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
* * *
새만금 투자와 관련해 청와대에서 기업인 오찬이 열렸다.
20여 명의 회장들이 청와대에 모여들었다. 다들 표정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긴장했다. 나이 지긋한 재벌회장들조차도 숨소리를 죽였다.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최근 재계에 있었던 두 가지 큰 사건을 꼽아보자면, 임진용 회장의 구속과 한찬영 회장의 은성차 대표이사 퇴진이다.
전자는 허창민 대통령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강진후 대표와 관련이 있다.
재벌회장들 중에서 털어서 먼지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동안은 경제에 기여한 점을 감안해 집행유예로 끝났다. 그런데 설마 서성그룹 총수를 구속시킬 줄이야.
강진후가 은성차를 손에 넣은 것 역시 그에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재벌들 사이에서는 형제의 난이라면 모를까, 상대 그룹의 경영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 이제까지 경영권 공격사례를 살펴봐도 전부 해외자본이 벌인 일이다.
그런데 강진후는 보란 듯이 은성차그룹의 핵심인 은성차를 빼앗았다. 한찬영이 표 대결도 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주주들이 사실상 강진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OTK컴퍼니가 작정하고 주식을 매입해 경영권을 공격하면, 멀쩡할 대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시총규모가 큰 서성그룹이야 괜찮겠지만, 다른 그룹들은 OTK컴퍼니가 마음만 먹는다면 계열사 한두 개쯤 집어삼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어느 쪽이든 밉보였다가는 좋은 꼴 보기 힘드니, 회장님을 입장에서 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어차피 이런 자리는 밥 먹고 덕담이나 나누는 자리다. 언론사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조용히 밥이나 먹고 가려는데, 강진후가 마이크를 잡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 * *
점심식사가 끝난 후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새만금은 모든 게 자동화된 첨단도시입니다. 예상 전력소모량을 감안했을 때 현재의 예비전력량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TWR 건립을 요청했으나,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할 뿐 아직 이렇다 할 얘기가 없습니다. 향후 전력사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지금 서둘러 건설에 나서야 합니다.”
새만금에 건설하는 TWR은 로사톰과 한수원이 손을 잡고 짓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TWR 기술과 운용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다.
기존 원전에서 발생한 폐연료봉을 재활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다들 필요성에는 공감을 하지만, 현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관계자들은 원전 추가건설에 난색을 표했다.
허창민 대통령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TWR은 아직 운용상의 문제점이나 안전성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제 막 상용 원자로를 짓고 있는 중이니까.
“TWR은 완전히 새로운 기술도 아니고, 기존 원자로를 발전시킨 기술입니다. 이미 실험을 통해 안정성이 충분히 검증됐고,현재 칼리닌그라드에 건설 중입니다. 안전성에 문제가 있었다면 진작 주변 국가들이 반대에 나섰을 겁니다.”
허창민 대통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신재생에너지와 같이 검토해 진행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난 작정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무인트럭과 관련한 규제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합니다. 현재 운전수 부족으로 자재가 제때 운송되지 않아 공기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졸음운전과 운전미숙 등으로 하루에 두세건 씩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미 무인트럭은 캘리포니아 복구사업에 쓰이고 있고, 현재까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노동시장 혼란을 감안해 면밀한 검토를 하는 중입니다.”
“또한 모듈러 주택과 건축용 3D 프린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설 분야에 신공법이 많이 생겨났는데, 규제로 인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만금에 한해서라도 일부 규제를 풀었으면 합니다.”
허창민 대통령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고, 청와대 인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말씀은 기업의 편의에 따라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부의 편의에 따라 규제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외국에서는 멀쩡히 잘만 쓰이고 있는 기술들이 한국에만 오면 안 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실행을 해본 적이 없으니 안전성과 부작용에 대해 알 수 없고, 안전성과 부작용에 대해 모르니 실행을 못하겠다고 한다면, 신기술을 개발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 * *
난 간담회가 끝난 뒤 허창민 대통령을 따로 만났다.
지난 번 봤을 때에 비해 얼굴빛은 별로 좋지 않았고, 주름도 깊어진 듯했다. 정치하면 늙는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하긴 그 사이에 일이 좀 많긴 했지.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별다른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편한 느낌이었다.
그는 차를 마시며 얘기를 꺼냈다.
“결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허허,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당연하지만, 이런 좋은 얘기하자고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자본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그래서 임진용 회장을 구속시키고, 역외탈세를 조사하며 기업인들을 압박한 거겠지.
“지금 한국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위기라고 봐야겠죠.”
난 한마디 덧붙였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단 한 순간도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지만요.”
한국은 굴곡진 근현대사만큼이나 경제 역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어왔다. 그래도 그 위기들을 잘 극복해내고 이제 간신히 선진국 문턱에 도달했다.
인구가 5천만 명 이상인 나라 중에서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는 전 세계에 고작 7개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은 연합국 아니면 추축국이었을 정도로 원래 선진국이었던 반면,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한때 각국의 원조에 의존하며 살던 최빈국이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산업변화, 경제성장률 둔화, 인구고령화 등 산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여기서 다시 추락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 문제도 있지 않습니까? 며칠 전 또 미사일을 발사했던데.”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핵무기로 무장한 적성국을 바로 옆에 두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무너져도 문제고, 안 무너져도 문제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정권을 유지한 채 조금씩 개혁개방을 하며 경제를 개발하는 거지만…….
허창민 대통령은 단언하듯 말했다.
“북한은 변화의 길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
“한 경제학자가 그러더군요.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실수는 희망을 반영하는 거라고.”
내 말에 대통령의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경제발전에 나서는 것은 허창민 대통령의 희망이다. 그는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전 정권과는 달리 유화정책을 펼쳤고,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도 성사시켰다.
불과 얼마 전까지 불바다 드립(?)을 치던 북한정상과 두 손을 꼭 잡은 채 악수하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경제협력이 이뤄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다 할 만한 변화가 이뤄진 것은 없었다. 북한은 여전히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심심하면 동해상에 미사일을 날리는 중이다.
“그럼 대표님께서는 북한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무슨 북한전문가도 아니고.
이전 정부 때만 해도 전문가들은 금방이라도 북한이 망할 것처럼 떠들어댔다. 이것 역시 예측이라기보다는 희망사항이었겠지.
“둘 중 하나겠죠. 지금보다 나빠지거나, 좋아지거나. 어느 쪽이 됐든 대비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죠.”
북한이 지금보다 나빠지면 정권이 붕괴될 수 있다. 지금보다 좋아지려면 경제개발에 나서야 한다.
전자든 후자든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째서 역외자산 자신신고를 거부하신 겁니까?”
난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자진신고니까요. 자진신고면 안 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대표가 한국인이라 해도 외국법인에 대해 한국정부가 뭐라 할 권한은 없다. 미국과의 투자협정 등을 생각했을 때 법적으로 이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CEO라는 자리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대통령이라는 자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갑자기 실내 공기가 무거워졌다.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통령의 권한과 권위가 절대적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후에는 누구도 그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 임기는 정해져 있지만, 대표님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허창민 대통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시스템적으로 견제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난 삶에서 그가 얻은 지식이자 신념일 것이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지내며 군사정권과 맞섰다. 그때 같이 있었던 동료들 중 변절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누구는 보수가 돼서 군사정권 시절의 경제성장을 찬양했고, 누구는 아예 주사파가 돼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그 역시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됐고, 국회의원에서 대통령이 됐으니, 변했다고 할 수 있겠지.
“신념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이어서 한마디 덧붙였다.
“타인에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 그레이스 로스차일드의 제안을 떠올렸다. 만약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난 허창민 대통령을 똑바로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서로 입장은 다르겠지만, 한국경제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실 겁니다.”
어차피 사람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그나 나나 마찬가지겠지.
한참 후, 허창민 대통령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이걸로 대화가 끝났다.
“차 잘 마셨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OTK컴퍼니는 한국기업이라고 봐도 좋겠습니까?”
난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대답했다.
“자본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어느 기업이든 한국에 투자한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