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55)
무려 3년 만에 복학이다.
중앙도서관 근처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가는데, 모든 게 낯설었다. 저번에 엘리와 함께 왔을 때도 느꼈지만 진짜 많이 변하긴 했구나.
심지어는 경영대 건물을 못 찾아서 잠깐 헤맸을 정도다.
수강 신청하는 법도 까먹어서 유리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어차피 둘 다 2학년이라 전공과목은 같이 들어야 하고, 교양과목은 그냥 유리가 찍어주는 걸로 듣기로 했다.
경영대 건물 근처로 가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민영이와 경일이는 날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이, 강진후.”
“왔어?”
민영이는 작년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경일이는 그 전에 한 번 휴학을 해서 현재 둘 다 4학년이다.
졸업, 유학, 군대 등등의 이유로 동기들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얘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복학 안 하고 1년 동안 뭐했어? 연락도 잘 안 되더만.”
“그냥 여기저기 여행 다녔어.”
경일이는 재빨리 나에게 물었다.
“그때 같이 왔던 미녀랑은 아직 만나?”
“엘리? 진작 홍콩으로 돌아갔지.”
그래서 며칠 전 내가 홍콩으로 가서 만났다.
민영이는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보다 이번 신입생 중에 MCK푸드 회장 아들 있는 거 알아?”
“마스터치킨?”
대한민국은 치킨공화국이다. 전세계 맥도날드 매장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치킨집이 이 좁은 땅에 몰려 있다.
그 중에서도 마스터치킨은 매장수만 1800개가 넘는 초대형 치킨 프랜차이즈다.
신사동에 30층짜리 본사사옥이 있고, 회사는 코스닥에 상장 되어있다. 시가총액은 대략 1200억.
치킨 팔아서 이 정도라니. 대체 우리나라 사람들은 치킨을 얼마나 먹는 거야?
한때 택규도 자주 시켜먹긴 했지.
“삼수해서 들어왔다는데, 애가 좀 문제가 있는 모양이야.”
“무슨 문제?”
경일이가 말했다.
“OT 때 보니까, 게임시키고 여자애들한테 억지로 술 먹여서 토하게 만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자기 나이 많다고 선배들에게도 말까고.”
“선배들이 뭐라고 안 해?”
“그게 말이지······.”
어느새 다가온 한 무리의 학생들이 힘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남녀 할 것 없이 한눈에도 어린 티가 물씬 풍겼다.
“아! 이쪽은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들. 민영이는 알 테고, 이쪽은 내 동기 강진후. 이번에 복학했어.”
경일이는 신입생들을 일일이 나에게 소개시켜주었다. 휴학이 길었던 데다가 OT나 신입생 환영회를 안 갔더니, 누가 우리 학과 후배인지도 잘 모르겠다.
경일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처럼 OT를 갔어야지.”
“4학년이 잘도 그런 데 가네.”
“훨씬 고학번 선배들도 많이 왔거든.”
그러고 보니 나 신입생 OT 때도 졸업한 선배들이 단체로 술 사들고 왔었다. 어린 나이에 뭔 아저씨 아줌마들이 왔나 신기해했었지.
“커피 사주세요, 선배님.”
“전 카라멜 마끼아또요.”
선배들한테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건 신입생들의 특권이다.
민영이가 물었다.
“너도 갈래?”
“아니. 학과장님과 면담 있어.”
민영이와 경일이는 후배들을 데리고 교내 카페로 갔고, 난 학과장실로 향했다.
* * *
경영학부 학과장 김명준.
비교적 젊은 나이인데다가, 강의 스타일이 재밌고 학생들을 잘 챙겨주었다. 때문에 경영학과 애들 사이에서 인망도 높았다.
김명준 교수님은 날 보더니 말했다.
“3년 만이네. 무사히 학교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예.”
집이 망해서 휴학을 했다는 것쯤은 들어서 알고 계실 거다. 물론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잘 생각했어. 그래도 학교는 졸업하는 게 좋지.”
“졸업해도 취업 힘든 건 마찬가지 아니에요?”
내 말에 교수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불경기라 그렇긴 하지. 그래도 네가 졸업할 때쯤에는 경기가 나아질 테니,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
“알겠습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술 한 잔 정도는 사줄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난 교수실을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왜 그래?”
“선물 하나 드릴게요.”
그러자 김명준 교수님은 손을 내저었다.
“안 받아. 김영란법 때문에 학생에게 음료수 하나 받으면 안 되는 거 몰라? 마음만 받을 테니까 도로 가져가.”
“그냥 종이 한 장이에요.”
난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휘갈겨 쓴 사인과 함께 ‘To. Professor Kim MyoungJun’ 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체이스 사우스웰 사인이요. 교수님 그분 좋아하시잖아요.”
“······응?”
용무를 끝마친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 한참 후, 뒤에서 ‘야! 이거 어디서 났어?’ 라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했다.
나중에 친구 누나가 골든게이트에서 일한다고 말해주면 되겠지.
* * *
2학년이 되며 전공과목도 늘어났다.
회계, 경영과학, 기업법, 마케팅 사례,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등등.
기업법 강의가 끝나고 나자 유리는 서적을 챙기며 나에게 물었다.
“어때요, 선배? 할 만해요?”
“으음.”
직전까지도 필드(?)에서 뛰다온 나지만, 막상 강의를 들으니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론과 실전은 다른 건가, 아니면 내 머리가 굳은 건가?
복학하면 A학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기저기 큰 소리 친 게 후회된다. 학점 잘 따서 취업할 것도 아니니, 그냥 이수를 목표로 해야겠다. 출석과 과제만 제대로 해도 F학점은 안 맞겠지.
“끝나고 개강파티 가실 거예요?”
“글쎄.”
“가요, 선배. 앞으로 학교 다니시려면 이런 기회에 후배들과 좀 친해져야죠. 지금 같이 수업 듣는 애들도 잘 모르시잖아요.”
“그렇긴 하네.”
어차피 내 동기 놈들은 대부분 3, 4학년이라 정작 수업에서 얼굴 볼 일은 별로 없다. 편하게 학교 다니려면 애들 얼굴 정도는 익혀놔야 할 것 같다.
“알았어. 같이 가자.”
내 말에 유리는 생긋 웃었다.
“약속한 거예요.”
* * *
오전 강의가 끝난 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중앙도서관 앞에서 동기들을 기다리는데, 여학생들이 주차장 한쪽에 몰려 있었다.
“와아! 이 차 봐봐.”
“뭔데뭔데?”
“i8이야. 나 실물은 처음 봐.”
“차 너무 예쁘다. 대체 이런 차는 누가 탈까?”
“······.”
놀랍게도 오택규가 탄다.
오늘 타고 온 건 나지만. 그동안은 한국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찮았지만, 이제 학교 다니려면 나도 차가 있어야 한다. 안 그래도 무슨 차를 살지 알아보는 중이다.
여학생들은 실컷 차를 구경하더니, 그 앞에서 셀카까지 찍었다.
“여기 연락처 붙어있는데, 연락해볼까? 우리 학교 학생일 거 아니야?”
“······.”
그러지 마. 그거 오택규 연락처야. 우리 학교 학생 아니야.
잠시 후, 민영이가 먼저 왔다.
“경일이는?”
“이따 오겠지. 어 저거 i8이네. 누가 타고 왔지?”
오택규카나 i8이나 둘 다 눈에 띄긴 마찬가지구나. 무슨 차를 사야 눈에 좀 덜 띄려나? 그렇다고 은성차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번 신입생들 중에 예쁜 애들 많이 들어왔대. 경일이는 학기 초에 빨리 여자친구 만들어야 한다고 서두르던데, 넌 관심 없어?”
난 고개를 저었다.
“됐어. 비싼 등록금 내고 왔으면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지성의 전당에서 연애가 웬 말이냐?”
“하긴.”
“그러는 너는?”
“나도 관심 없어. 취직 걱정하기도 바쁘다.”
내가 선아와 사귀다 헤어진 것처럼 민영이 역시 과내에서 여선배와 사귀다가 깨진 경험이 있다.
그 때문인지 캠퍼스 연애는 사절이라는 느낌이다.
계속 경일이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유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금발 때문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민영이는 유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우리 학과 투톱은 선아랑 유리지.”
“그런가?”
하긴 유리 정도면 걸그룹에 데뷔해도 될 정도의 외모다. 단지 예쁜 걸 떠나서 특유의 매력이 있기도 하고.
우리를 발견한 유리는 손을 흔들었다.
“진후 선배! 민영 선배!”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다가온 한 남자가 유리의 손목을 붙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여기 있었네. 아까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아?”
그걸 보고 처음에는 둘이 친한 사이인줄 알았다.
그런데 유리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손 놔.”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손목을 붙잡은 채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가자. 내가 사줄게.”
유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선배한테 말 놓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에이, 어차피 나이도 동갑인데, 뭘 그래? 서로 편한 게 좋잖아.”
“손 놓으라니까.”
유리는 억지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왜 이렇게 까칠해? 설마 오늘 그날?”
“뭐?”
“아하! 표정 보니까 정곡을 찌른 모양인데.”
유리는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하는 듯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저 새끼 뭐야?”
민영이 역시 어이 없어하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신입생 중에 마스터치킨 아들이 있다고.”
보다못한 내가 유리에게 다가갔다.
“그 손 좀 놓지?”
내 말에 녀석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세요?”
“나 경영학과 강진후.”
녀석은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채명호예요. 반가워요, 선배.”
태도를 보니 별로 안 반가운 것 같다. 나도 안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난 일단 유리의 손목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을 쳐냈다. 그 다음 유리를 내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채명호의 표정이 변했다.
“뭐하세요?”
“그러는 너는 뭐하세요?”
녀석은 내 앞에 섰다.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평소 운동을 좀 하는지 어깨가 벌어져있고 몸이 좋았다.
얼굴은 꽤 잘생긴 편이고, 입고 있는 바지와 코트는 대충 봐도 명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배들끼리 밥 먹으려는 거니까, 선배는 좀 빠져주세요.”
“아니야. 밥은 선배들끼리 먹을 테니까, 후배인 니가 좀 빠져줘. 안 그래, 유리야?”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밥은 진후 선배랑 먹을게.”
채명호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하아, 뭔 듣도 보도 못한 게 선배랍시고 끼어들고 지랄은······.”
초면에 쌍욕이라니. 이 새끼 인성 보소.
“방금 뭐라고 했나?
“혹시 저 누군지 몰라요?”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아냐?”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졌다. 어느 한쪽이 먼저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민영이와 유리가 우리를 떼어놓으려는데, 그 순간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군인처럼 짧은 머리에 후줄근한 츄리닝을 입은 덩치 큰 남자였다.
“야, 강진후! 너 후배 데리고 뭐해?”
“어! 규원 선배.”
다른 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대는 군기가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군기 잡는 선배는 한 명쯤 있기 마련.
경영학과에서는 이규원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나저나 아직도 졸업 안 했네.
규원 선배는 다짜고짜 나에게 화를 냈다.
“야! 대학교에 군기문화 사라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후배 군기를 잡고 있어? 선배면 선배답게 행동해, 임마.”
“그게 아니라······.”
내가 상황을 설명하려하자, 규원 선배는 호통을 쳤다.
“어디서 선배한테 말대꾸야!? 선배가 선배 같이 안 보여? 이 자식 휴학 길게 하더니 군기가 다 빠졌네.”
“······.”
나보고 군기 잡지 말라더니, 본인은 군기타령 하고 있다.
채명호는 그 모습을 보며 실실 쪼갰다. 그러더니 규원 선배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만해요, 선배. 이쯤 했으면 진후 선배도 알아들었겠죠.”
“아니야. 명호야. 이런 건 따끔하게 혼내줘야 돼.”
그러자 채명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만하라고 하잖아요. 못 들었어요?”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규원 선배는 움찔하며 말했다.
“어. 아, 알았어, 명호야. 혹시 이런 일 또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해.”
“밥이나 먹으러 가요. 제가 사줄게요.”
“그, 그래. 고마워.”
규원 선배는 채명호의 뒤를 따라가며 나에게 말했다.
“너 앞으로 내가 지켜볼 테니까, 조심해.”
따라가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가 주인에게 꼬리치는 것 같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걸핏하면 군기를 잡으려고 들어 좀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경우 없이 이러는 사람은 아니다.
“규원 선배 왜 이래?”
민영이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니가 좀 이해해. 저 선배는 좋아서 저러겠냐?”
“그럼?”
“규원 선배 아버지 작년에 명퇴 당하셨어.”
“그게 무슨 상관인데?”
“치킨집 차리셨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