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75
174
“…….”
에녹은 그녀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라가 이런 식의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양 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순진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진실을 호도할 기미가 보이자 세라가 선수를 쳐 으름장을 놓았다.
“대답 잘해라. 솔직하게. 이번에 대답하면 두 번은 안 물을 거니까.”
생각을 읽힌 에녹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으로 세라를 바라봤다. 두 눈에 즐거운 이체가 서렸다. 하지만 여전히 선뜻 대답해 주기 곤란한 것처럼 또르르 눈알을 굴린다.
“만약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도 애인 시켜 줄 거야?”
아직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답변이 세라를 언짢게 할 것이라는 예고에서부터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아, 내가 들은 게 다 사실이 맞구나. 불안하게 술렁이던 심장이 쿵, 하고 발치까지 떨어졌다.
“너랑 애인은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싸한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세라는 순순히 그가 원하는 바를 파격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누울 자리를 확보한 에녹이 안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라는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네가-.”
그녀가.
“세라 로젠바움이랑 닮아서.”
자신의 첫사랑과 닮아서라고 말하겠…….
“……어?”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잠겨 있던 세라는 제 귓가를 스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못 들었어?”
반면 태연한 낯을 한 에녹이 못 들었으면 다시 말해 주겠다며 한 번 더 대답해 주었다.
“네가 세라 로젠바움이랑 닮아서라고.”
하지만 두 번 들어도 세라의 얼굴을 뒤덮은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문장인데 엉망으로 섞인 퍼즐 조각이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대던 감정이 저도 당황하여 덜컥, 중간에 멈춰 섰다.
“……첫사랑을 닮아서가, 아니고?”
에녹은 그 말은 또 어디서 들었냐는 듯이 눈썹을 까딱이다가.
“응. 그러니까.”
곧 그게 그거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순간, 세라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새하얗게 덧칠된 머리 위로 ‘에녹 소서의 첫사랑 = 세라 로젠바움’이라는 충격적인 공식이 쓰였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그 위를 빼곡히 수놓았다.
“……?!”
경악한 세라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에녹이 시무룩하게 눈매를 늘어뜨렸다.
“……화났어?”
“……그럼 그 요정은?”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서로를 향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혼이 쏙 빠져 버린 세라는 에녹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으므로, 대화는 세라가 던진 주제를 타고 흘러갔다.
“요정이라니?”
에녹은 여기서 요정이 왜 나오냐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물음표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인 세라는 모두가 그의 첫사랑이라 알고 있는 요정과 그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은 대로 늘어놓았다.
“길드에 온다는 그 요정은 뭔데? 수백 년간 같이 살았다며. 어디를 가도 그 곁으로 돌아가고. ……애도 있다던데?”
마지막에 애도 있다는 말은 들은 게 아니고 세라의 추측이다.
에녹처럼 정력적인 놈이-심지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젊었을 텐데- 수백 년간 한 여자와 살면서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먹었으면 못해도 아이 한둘쯤은 낳았을 것 같아서.
“뭐?! 애?!”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있지도 않은 자식새끼를 들먹이는 말에 에녹이 펄쩍 뛰었다.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그는 그 요정과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며, 그러므로 아이는 말도 안 된다며 정색했다.
“대체 왜 다들 걔랑 못 이어서 안달이야? 나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데…….”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에녹은 다소 거친 말을 내뱉으며 요정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그리고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웁, 하고 헛구역질을 해 대기도 했다.
아주, 지긋지긋하고 치가 떨린다는 반응이었다.
진정성이 절절히 느껴졌다. 세상 사람 모두가 진실로 알고 있던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얼이 빠진 상태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라가 겨우 더듬대며 말문을 열었다.
“그럼, 그럼 정말…. 세라 로젠바움이-.”
“내 첫사랑이라고.”
차마 제 입으로 내가 네 첫사랑이냐고 물을 수가 없어 어물거리는데, 에녹이 잽싸게 문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세라를 빤히 들여다보며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난 네가 세라 로젠바움이랑 닮아서 애인이 되고 싶은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세라는 제 첫사랑의 대용품이 맞고, 그렇기에 애인이 되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의 모든 애인들을 절망케 했던 그 냉정한 말이, 세라에게는 전혀 다른 온도로 다가왔다.
땅바닥을 나뒹굴던 심장이 대번에 원래 자리로 올라붙었다.
그리고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이 쿵, 쿵, 쿵, 쿵, 거센 진자 운동을 반복했다. 일견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마저 든 세라가 연신 잘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또 쓸어 올렸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고개를 든 건 반감이었다.
‘네가 나를 좋아했다고?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그런 기미라고는 조금도 없었잖아. 내 기억이 잘못됐나…?’
그다음으로는 제 기억을 의심하고.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첫사랑한테 왜 그랬는데? 얘 혹시 증오와 애정을 착각하는 거 아니야?’
마지막으로는 에녹을 의심했다.
세라가 아니라 다른 누가 들었더라도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사실은 안타레스교에서 떠받들고 있는 여자를 마음에 담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여태껏 그를 신봉하던 사람들이 배신감에 치를 떨 게 뻔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면서도 봐도 세라 로젠바움과 에녹 소서는 한 묶음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므로 개소리하지 말라고 코웃음을 쳐 줘야 맞았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잖아.”
하지만 고작 한다는 말은 어딘가 연약해 보이는 물음이 전부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말문을 연 세라는 자신을 향한 세간의 평가를 주르륵 나열했다.
나쁜 년, 죽지도 않을 악마 새끼, 세라 로젠바움 같은 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이고,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 원수 아니야? 심하게 대립했던 사람이고, 안타레스가 숭배하는 사람인데…….”
제 입으로 설명하기도 공교로워 발음이 거의 옹알이를 하는 것처럼 불명확했다. 그러나 ‘영웅인 네가 어떻게 그런 악당을 좋아할 수 있느냐’는 의도는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
에녹은 세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 첫사랑을 나쁘다고 말하는 세라를 타박하지도 않았고, 사실은 네가 몰라서 그렇지 세라 로젠바움이 좋은 사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포장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을 뿐이다.
그리고 갑자기 진지해져서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좋아하면 안 돼?”
허락이 필요한 일도 아니건만, 에녹은 답이 궁금한 사람처럼 세라를 빤히 들여다봤다. 속을 꿰뚫어 볼 기세로 올곧은 눈동자가 쓸데없이 진지했다. 세라는 행여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들킬까 시선을 피하고 싶었으나, 에녹은 끈질기게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속엔 원수를 마음에 두었다는 번뇌나 자신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일말의 부채감도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세라의 앞에 낱낱이 까발렸다.
세라 로젠바움이 나쁜 년인 것도 맞고.
세상 사람 모두가 싫어하는 악당인데. 뭐 어쩌라고. 내 첫사랑인데?
“안 돼?”
침묵하는 그녀를 향해, 에녹이 재차 응답을 요구했다.
시비를 거는 기세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궁금한 투였다. 영웅인 에녹 소서는 악당 세라 로젠바움을 좋아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자기는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있지만, 그래도 그녀의 대답이 뭔가 중요한 영향이라도 미치는 것처럼 장난기를 완전히 쏙 뺀 진지한 얼굴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부정하던 세라마저 ‘괜찮지 않나?’ 하고 멈칫할 만큼 간절한 얼굴로.
“…….”
더없이 솔직한 그 모습은 물음표로 가득 찬 세라의 머릿속에 강한 파문을 남겼다.
그는 지독한 첫사랑을 아직도 못 잊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세라가 하는 모든 말을 인정했다. 나쁜 년, 악당, 죽지도 않을 악마 새끼, 에녹 소서의 원수, 이 세상에 세라 로젠바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전부.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세라 로젠바움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
담담한 에녹의 태도는 세라의 물음표를 하나씩 지워 나갔다.
물음표가 사라진 자리에 다시 나타난 공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녀가 여전히 얼떨떨한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되지… 않을까?”
강한 확신 따윈 없는 애매한 대답이었음에도 에녹은 바라던 답을 들은 사람처럼 단번에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되지?”
“어, 어어…. 되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세라는 기분이 몹시 묘했다.
돌이켜 보니 면전에서 고백을 들은 거라는 걸 방금 깨달은 탓이다. 자신이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게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티를 낼 수도 없었다.
“……그, 허, 참, 아니, 이게, 허-.”
뭔가 기가 막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겠어서 세라는 계속 말이 되지 못하는 단어들만 의미 없이 나열하기만 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내일 그 요정 오는 것 때문에 오늘은 이만 가 봐야 돼.”
그때, 시간을 확인한 에녹이 고장 나서 굳어 버린 세라를 향해 무어라 무어라 사정을 설명하고는 뺨에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으악!”
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 놀란 세라가 괴성을 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봐. 자기야.”
찡긋, 능글맞게 교태로운 윙크를 날린 에녹이 정말 급한 일이 있는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가다가, 뭔가 잊은 말이 떠올랐는지 ‘아…!’ 하고 중간에 멈춰 섰다.
다시 돌아온 그가 하마터면 잊고 갈 뻔했다며 다급히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난 네 성격이 제일 좋아.”
“……???”
그러고 맥락 없는 고백을 갈기며 다시 쪽, 뺨에 입을 맞추고 가 버렸다.
“…….”
멀어지는 뒷모습에 세라의 기막혀하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의 뒷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세라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사이에 정신과 감정이 몇 번이고 오락가락한 그녀는 완전히 넋이 빠진 얼굴로 에녹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더듬거렸다.
……미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