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05
204
에녹은 그저 한쪽 눈썹을 까딱였을 뿐이다.
“‘지혜’가 이젠 성검에 대해서도 알려 줘?”
그에 진이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저렇게 태평할 수가 없는 일인데, 에녹은 제게 얼마나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든 관심 없는 태도였다.
“이건 숲이 알려 준 거야. ‘지혜’로는 성검에 대해 알 수 없는 거 알잖아.”
성검은 신의 힘이 깃든 신의 물건. 결코 지상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혜’에는 성검에 대한 기록이 쌓이지 않는다. 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어디까지나 숲이 그에게 속삭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에녹 소서가 300년 동안 품고 있는 성검.
태양처럼 찬란하고 역동적이던 생명의 힘이 이제는 다 타들어 간 촛불처럼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너에게서 느껴지는 생명의 힘이 거의 꺼져 가고 있대.”
그리고 아마도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에녹일 것이다. 필멸의 존재로 태어나 영생에 가까이 목숨을 이어 가고 있는 그를 지금까지 살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성검의 힘 덕분이었다.
그런 강력한 힘이 숲이 느낄 지경까지 고갈되었다면 하루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천천히 꾸준하게, 성검의 힘이 꺼져 들고 있었던 거다.
“뭐, 짚이는 거 없어?”
“글쎄.”
사태의 심각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상황에도, 에녹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나에게도 드디어 끝이 다가오는 모양이지.”
“지금 그런 태평한 소리나 할 때야……?!”
보다 못한 진이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어떠한 경각심도 없어 보이는 에녹의 태도에 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발을 쿵, 굴렀다.
“현재 지상에 살아남은 영웅은 너 하나뿐이야. 너마저 없어지면 이곳에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몰라서 이래?”
“…….”
“네가 맞서야 할 적은 여태까지와는 달라! 넌 그가 누군지조차 모르잖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시기에 넌 왜 이렇게 태평해?”
이 시대엔 여차하면 함께 싸워 줄 동료 따윈 어디에도 없다고!
진은 네가 지상의 마지막 희망임을 잊지 말라며 눈을 부릅떴다.
이제는 새삼스럽기까지 한 그 말을 강조하는 시선은 명백하게 과거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숲에 요정들이 넘쳐 나고, 지상에 동화와 신화가 노래처럼 퍼져 나갈 적에는 에녹 말고도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선한 인간.
세상을 구원할 자.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나 영원을 살 수 있는 절대자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재앙이 휩쓸고 지나갔는지 에녹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알지.”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난 에녹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들 약삭빠르게 죽어 버리는 바람에, 나 혼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에녹이 성검의 주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의 이야기다.
한때, 든든하게 지상을 지키던 영웅들은 모조리 죽었다.
마녀의 탑에 갇혀 있던 왕자도, 그 왕자를 구해 낸 공주도, 마녀를 물리친 용사도, 머리 아홉 개 달린 괴물 뱀을 벤 전사도….
에녹은 아직도 창밖으로 몸을 날리던 왕자의 마지막 얼굴을 기억한다.
사랑하던 이를 잃고, 무언가를 지켜야 할 의지도 잃고, 오로지 죽음만을 바라고 그것을 행하던 얼굴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비단 사랑하는 이의 곁으로 가기 위해 세상을 등진 이는 왕자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살아남은 이들은 변질되기 십상이었다. 소중한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들은 손쉽게 타락했고, 자신이 심판하던 적이 되어 같은 영웅의 손 아래 목숨을 잃거나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에녹도 몇 번이나 그런 자들의 심장에 성검을 박아 넣었다.
그런 자들은 요정들의 손에 의해 모든 기록이 지워졌다. 그들을 위해 만들었던 동화, 그들의 업적, 명성, 하다못해 이름 한 글자까지도 전부.
필멸하기 위해 태어나 영원을 손에 넣은 많은 자들이, 제 어깨에 짊어진 영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러졌다.
단 한 사람, 에녹 소서만 빼고.
“나도 그때 알아봤어야 했어…….”
쯧, 낮게 혀를 찬 에녹이 그때 미래를 예견하고 제 목이나 그어 버릴 걸 그랬다는 말을 남 이야기하듯 중얼거렸다.
“그랬다 하더라도 넌 죽지 못했을 거야.”
말만이라도 달콤한 그 가정에 찬물을 뿌린 이는 이번에도 진이었다.
“그랬겠지. 못 죽게 하려고 성검에 갖은 수를 다 써 놨으니.”
에녹은 그마저도 익히 알고 있다며 별 감흥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먼저 간 영웅들만큼이나 약삭빠른 신은, 에녹만큼은 어떻게든 숨을 붙여 두기 위해 영원과 더불어 원치도 않았던 불사까지 함께 선사해 주었다.
영원과 불사는 다르다.
영원은 시간의 흐름만을 막아 줄 뿐 죽음은 막아 줄 수 없으나, 불사는 죽음마저도 틀어막아 에녹을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머무르도록 만들었다.
“성가시게….”
“에녹.”
또다시 죽음을 그리는 듯한 에녹의 태도에 진이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살폈다.
“지금은 죽어 버릴 생각 같은 거 없으니 걱정 마. 요즘만큼 살맛 나는 날도 없거든.”
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는 에녹이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과거의 화려했던 전적이야 어쨌든, 세라가 제 곁에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에녹이 무언가를 포기할 일은 없었다. 그게 제 목숨이든, 지상이든.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그래서 더 걱정이라는 소리다.”
진은 이제 와 새삼 그의 우울 따위가 걱정되지는 않는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떻게든 죽고 싶어 발버둥 치던 때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굳이 꼽자면 살맛 난다는 요즘이 에녹 소서를 더욱 위험한 인물로 만들고 있었다.
“넌 이 세상보다 세라 로젠바움이 더 중요한 놈이니까.”
“당연하지.”
그게 뭐 문제라도 되나?
에녹은 별 당연한 소리를 다 듣겠다며 가볍게 그 사실을 시인했다.
“결국 또 위기에 빠질 세상보다 세라가 훨씬 가치 있으니까.”
“…….”
그를 추앙하는 자들이 들었다가는 비난받아 마땅할 말이었으나, 진은 도리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놀랍게도 진 또한 에녹의 말에 절반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신의 선택을 받은 영웅이 나타나 구원을 이행해도 그 순간뿐.
지상은 결국 새로운 재앙에 휩쓸리고야 만다.
전쟁, 음모, 침략, 배신, 혁명, 재앙…….
이름만 바꾼 수많은 갈등이 지상을 화마로 뒤덮었고, 에녹은 그때마다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 주었다.
그렇게 300년이었다.
하지만 에녹의 구원으로 지상이 나아졌던가.
새카만 가시에 꿰뚫린 지금의 세상을 둘러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구해 낼 때마다 쉼 없이 타락하는 세상을 지켜보며, 영웅은 무엇을 느꼈을까.
하물며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마저 제 손으로 앗아 가며 지켜 낸 세상인데.
그가 세상을 구하는 일에 예전만큼의 열의를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의 에녹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한번 잃었던 것을 되찾았으니 오래도록 괴로워하던 영웅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불사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과연 과거와 같은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을 때. 에녹 소서는 이번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확신이 서지 않은 진은 무언가를 가늠하듯 긴밀한 눈으로 에녹을 살폈다.
“너, 세라 로젠바움이 안타레스 편에 서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오-.”
“야, 방금 내심 좋아했지!”
이것 보라지!
진은 오히려 솔깃한 반응을 보이는 에녹을 배신자 보듯 바라보았다. ‘지혜’는 세라 로젠바움이 이제 와 안타레스 쪽에 붙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신해 주었으나, 에녹의 저런 태도는 신의 사자라 불리는 영웅이 지니기엔 지나치게 방관적이었다.
“신선하다고 했지. 어떻게 하겠다곤 안 했어. 세라가 그럴 일은 없지만, 만에 하나 안타레스 쪽에 서고 싶다고 하면…….”
흥분하지 말라는 듯 말을 덧붙인 에녹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던 그는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론을 내놓았다.
“부숴야지. 안타레스를.”
없어지면 그쪽에 서겠다는 말도 안 할 거 아니야.
에녹이 어깨를 가볍게 들었다 놓았다. 그 대답은 너무나도 흔쾌해서, 듣기에 퍽 안심이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진의 의심을 샀다. 당연했다. 그만큼 세라 로젠바움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녀석이었기에, 그녀가 바라는 일에 훼방을 놓겠다는 발언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그 말, 진심이야?”
눈매를 가늘게 좁힌 진이 이래도 그 결정을 고수할 것이냐며 에녹이 흔들릴 만한 단서를 덧붙였다.
“세라 로젠바움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고 해도?”
“고작 그런 게 두려웠더라면-.”
에녹은 그거야말로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다는 듯 즉답했다.
“처음부터 그 애의 심장에 성검을 박아 넣을 생각 따윈, 감히 하지도 못했을 거야.”
“…….”
진은 흔들림 없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지그시 마주 보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고통받았음에도, 에녹은 그래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번에도 기꺼이 사랑하는 이의 반대편에 설 용의가 확고해 보였다.
언뜻 보기에 사사로운 감정보다 세상의 안녕을 택한 숭고한 희생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 저변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안녕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다.
“네 의지가 그렇게 확고하다니 다행이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염세적인 영웅에게 아직 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망설이던 진이 비로소 결단이 선 것처럼 차분해졌다.
“대체 무슨 조건을 내걸려고 이렇게 비장해?”
그쯤 돼서 에녹은 이상한 방향으로 빙 둘러온 대화의 본질을 일깨워 주었다. 결국 이 모든 대화는 한 가지 결론으로 향하기 위한 길목에 지나지 않았다. 서론을 이쯤 쌓았으면, 대충 어떤 부탁을 해 올지 감이 잡혀야 하는데 도무지 짚이는 바가 없었다.
“너에게 해가 될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진은 찝찝해하는 에녹을 안심시켜 주었다.
“에녹 소서.”
크게 심호흡을 한 진이 진지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웅을 마주한 요정이 차분하게 제가 원하는 조건을 읊조렸다. 숲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풍성한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음이 그와 뒤섞였다.
“……?”
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에녹의 두 눈이 의외라는 듯 커졌다.
요정이 입을 다문 것과 동시에 바람이 그쳤다. 해야 할 말을 끝낸 진이 후련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내 조건이야.”
***
따라오지 말라는 듯이 가 버리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따라오지 않을 줄이야.
세라는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에녹이 슬슬 신경 쓰였다. 그래도 제 말 한마디에 여기까지 달려온 놈인데, 내가 너무 야멸차게 굴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고개를 든 것이다.
내가 먼저 찾아가? 말아? 찾아가? 말아?
쉽사리 결론을 짓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진이 그녀를 찾아냈다.
“여기 있었네…? 따라와. 같이 갈 곳이 있어.”
“에녹-.”
“에녹도 있으니까 따라와.”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만 더더욱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기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진의 뒤를 따랐다. 끽해야 하얀 숲이나 숲 외곽 정도를 생각했으나, 그는 여태껏 세라가 가 보지 못했던 숲의 깊은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숲의 모양이 몇 번을 바뀌고도 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세라가 목적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무작정 안으로만 들어가는 진을 향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숲에서 가장 중요한 곳.”
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에서는 평소답지 않게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자신이 모르는 뭔가 중요한 사건이 있었음을 감지한 세라는 그때부터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세라가 조용하니 대화가 사라졌다.
진은 이정표 하나 없는 숲길을 잘도 찾아 걸었다.
진은 이정표 하나 없는 숲길을 잘도 찾아 걸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는 점점 빽빽해졌고 수풀이 높아졌다. 마치 숲이 온몸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조차 멈추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사라졌다. 그러다 푹신한 이끼가 깔린 곳을 걷게 되자 흙길을 밟는 발걸음 소리마저 사라졌다.
이제 세라의 귓가에는 자신이 내뱉는 거칠어진 숨소리가 소음의 전부였다.
그 침묵이 이상하리만치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야, 잠깐-.”
뇌리를 스치는 기시감에 세라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처음 마차를 타고 시그너스 길드로 향하던 창문 밖. 달빛 아래 요요히 빛나던 침묵의 로우드.
새카맣게 죽어 버린 흑백의 세상, 그곳을 지배하는 것처럼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거대한 가시….
“혹시, 이 근처에 가시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