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만검고(萬劍庫) (4)
양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몰라도 먼저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어찌나 호되게 후려쳤는지 통증과 함께 골이 계속해서 흔들리는 듯했다. 귓가에 울리는 이명이 괴로웠다.
머리를 흔들면서 흐린 신음이 흘렀다.
“으음…….”
“정신이 드느냐?”
“크흠, 예.”
차분한 중년인의 목소리에 양하는 흘깃 눈만 들었다. 바로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당황스러운 속내를 다잡고 양하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은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다른 금제까지 해 두었는지, 내공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너 걸음 앞에서 사진초가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더없이 차가운 눈초리였다.
양하는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머리가 아픈 것은 둘째 치고, 그는 일단 차분하게 물었다.
“초숙,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이제 하루. 아니군, 이틀이 되었다.”
“그러시군요. 또 개구멍으로 들어오신 겁니까?”
“그렇지.”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그럼,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양하는 일단 차분하게 물었다.
제압당한 지금 꼴도 그렇지만,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치는 기습에는 주저함도 없었을 뿐더러, 약간이라고 하지만 감정마저 실려 있었다.
다른 누구라면 양하도 당연히 벗어날 궁리를 하겠지만, 앞에 있는 것은 사진초였고, 사운경 또한 너머에 멀쩡한 모습으로 있었다.
양하는 일단 사운경이 무사한 것만으로 마음을 놓았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유는 일단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사진초의 의심 가득한 눈길을 마주했다.
‘대체 무엇을 의심하시는 거지?’
사진초는 우선 확인하듯이 물었다.
“양하, 네가 지금 외당 당주를 맡고 있다 들었다.”
“예, 초숙.”
“그럼, 지하 뇌옥. 그곳도 네가 맡았느냐? 못 본 새에 하나가 더 늘었더구나.”
“뇌옥 말씀입니까? 그곳은 외당이 아니라 만검당에서 관리하고 있지요.”
양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없는 뇌옥에 대해서 왜 묻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럼,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느냐?”
“……근래에 뇌옥이 쓰일 일은 따로 없었을 텐데요?”
양하는 얘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사진초는 한층 가늘게 뜬 눈으로 양하의 눈매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흐음,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군.”
“초숙, 제가 굳이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양하는 이번만큼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붙들려 있는 것보다는 거짓을 의심하는 게 더 불편했다. 그런 기색에도 사진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진지함 앞에서 양하는 묵묵히 기다렸다.
“한쪽 뇌옥에는 무수한 시체가 쌓여 있고, 푸줏간처럼 널어놓았더구나.”
“……예?”
“아이들을 토굴을 파서 생매장하다시피 가두어 놓기까지 했고.”
“…….”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항시 냉정, 침착하다고 하는 양하였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진초 말에 그만 말문이 덜컥 막히고 말았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생각하지만, 가슴에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 지금 초숙께서는 본 장이 죄 없는 이들을 붙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였다는…… 그런 말씀을…….”
“그리고 다른 쪽 뇌옥에는 요괴로 만들었는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움직이는 시체 꼴인 자들이 갇혀 있었다. 대부분은 일대의 개방 제자들이더군.”
“초숙,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너 사령전 일을 알지 못하느냐?”
“사령…… 그 살인광이 이름은 또 왜?”
“그가 돌아왔었으니까.”
사운초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리고 양하의 반응을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치떴다.
양하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사령전, 가문의 수치라는 말 하나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지독한 오점이다.
“그 미치광이 쾌락 살인광이 돌아왔단 말씀입니까? 저, 정말로 그가…….”
“산장에서 이미 끔찍한 짓을 잔뜩 저지른 모양이더구나. 바로 그 뇌옥 안에서 말이다.”
“허, 허…… 허…….”
거푸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불신이 가득했고, 그런 만큼 마음도 크게 흔들렸다. 양하는 이내 힘주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그는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사령전이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묵인 또는 호응한 자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말대로라면 만검산장의 세월과 영명이 단번에 끝장날 수도 있었다.
무조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할 것은 아니지만, 신중해야 마땅했다.
양하는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다잡았다.
“초숙, 그리고 장주. 지금 그 말씀은…….”
“저기 세 아이가 보이느냐?”
“…….”
양하는 말문이 덜컥 막혔다.
그는 방 한쪽의 넓은 침상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영락없는 거지꼴인 아이 셋이 저들끼리 뒤엉켜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생매장 꼴로 갇혀 있다는 아이들이 저기 셋이라는 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양하는 일그러진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죄과는 또 어찌할 것인가.
만검산장 대소사를 관리하는 외당주라는 직분으로도 물론이지만, 만검산장의 검객으로서도 양하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아.”
적어도 지금 반응으로는 양하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운경은 더는 보고 있기 힘겹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얼굴은 착잡함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 양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하면, 사운경의 갑작스러운 주화입마 또한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 장주. 장주께서도 혹여……?”
“음…….”
사진초는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망이 신중하게 사운경을 살펴서, 은밀한 암습의 흔적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허!”
양하는 그만 헛바람을 토해 냈다.
고진무는 그들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양하라고 하는 외당주는 몸을 떨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만검산장에 마수를 뻗은 ‘교’를 향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괴로움과 분노가 손에 잡힐 듯했다.
“고 소협.”
“예, 선고.”
고진무는 문득 다가선 불망에게 고개를 숙였다.
불망은 잠시 멈칫했다.
지금 마주한 고진무의 모습이 어딘지 달랐기 때문이었다.
운공에 들기 전에는 초조함과 자책 속에서 애써 자신을 다잡으려고 애쓰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한결 차분할 뿐만 아니라, 아주 고요했다.
“으음? 자네 모습이 달라 보이는데.”
“그렇습니까? 그저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을 뿐입니다.”
“흐음.”
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하지만, 불망은 의아함을 잠시 다잡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만검산장의 일이었다.
“상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군. 뇌옥에서 시귀를 모두 베었음에도 장원이 한참 조용하다는 건. 사태를 모르고 있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제일 걱정하던 상황인 듯하네.”
“예, 만검산장의 대부분은 ‘교’에 넘어갔다고 봐야겠지요.”
고진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안으로 장원 내부를 살피면서 유독 사기가 짙게 고여 있는 몇 곳을 떠올렸다.
그중 하나가 외당 한쪽에 자리한 큰 전각으로, 지금 생각하면 그곳에 있는 자가 아마도 신임 장주일 터였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단지 ‘교’의 마수에 넘어간 정도가 아니라, 무쌍장 서량붕권처럼 기수 또는 그에 버금가는 지위의 인물이라고 봐야 했다.
고진무는 문득 말했다.
“선고, 저기 아이들이 걱정입니다.”
“음.”
불망도 공감하는 바여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검산장의 대부분이 ‘교’의 그림자 밑에 들었다고 볼 수 있었다.
만검산장과 일대는 곧 소란에 빠져들 게 분명했다. 그 속에서 누가 죽고,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았다고 할 수 있는 개방의 세 아이의 안위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찌 방도를 찾아 봐야 하겠지.”
불망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만검산장의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고진무도 답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저기 세 사람은 믿을 만했다.
양하는 이제 결박에서 풀려나서 한층 진지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아니, 솔직히는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도 않는지라 외당에서는 그를 두고 석불당주(石佛堂主)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오늘 거듭된 충격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 고진무와 불망의 모습에 흠칫 당황하기도 했지만, 양하는 곧 상황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만검산장은 더욱 큰 죄업을 쌓았을 판이었다.
“우선 본 장에서 열기로 한 무림대회가 멀지 않았습니다.”
“무림대회라. 그게 언제인지요?”
고진무가 불쑥 물었다.
무림대회라 한참 소란한 일이니, 뭔가 사특한 짓을 벌이기에는 딱 좋은 핑곗거리가 아니겠는가.
“음, 그게…… 한데, 소협은?”
“만검고에서 귀검이 나왔고, 그것을 내걸어서 사람을 모은다고 듣기는 하였습니다만.”
“…….”
고진무는 내력을 묻는 말을 가볍게 넘기면서 말했다.
양하는 속으로 무시인가? 중얼거렸지만, 차분한 기색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음, 소협 말대로요. 장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그때에 같이 이루어진다오. 이달 보름이니, 이제 사흘 정도 남았군요.”
“그럼, 그때를 노리겠군요.”
“무엇을?”
“제물이겠지요. 제가 시귀를 모조리 베었으니, 그 시귀를 다시 충당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귀요검, 저것은 음풍옥의 법보라 하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진짜가 따로 있겠지요.”
“그럴 수 있겠군.”
길고 거창한 이름, 북방도천현세음백지검.
진짜 음풍옥의 법보라면, 불망이 쓴 어설픈 부적에 덥석 제압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지금까지 벌인 일이 또 다른 법보, 귀검을 만들어 보겠다고 손을 쓴 것이라면, 그만한 목숨을 희생시키겠다고 작성할 터였다.
“그럼, 진짜 법보는 과연 어디에?”
“음.”
뇌옥에는 없었다.
샅샅이 살핀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북방도천현세음백지검이라 하는 법보는 그 지독한 귀기 때문이라도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양하는 이제 풀려나서 잠시 멍한 눈으로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귀검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만검산장에서 따로 검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어디 다른 곳이 있을 수 있겠나.
“만검고…….”
양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만검고는 몇 달 전부터 만검당이 살피겠다고 하면서, 외당이 손을 뗀 바가 있었다. 그러면서 검고를 정리한다고 소란했고, 희대의 귀검이 튀어나왔다고 떠들지 않았던가.
지금 고진무 말대로라면 그것 모두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다.
양하는 으득 이를 악물었다.
아직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어린 후배 앞에서 보일 만한 일은 아니지만, 울컥 치미는 심사를 어쩔 수는 없었다.
“사우천……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