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325
325화. 고찰조양(古刹朝陽) (5)
요령사자는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그는 홍련사 구석의 어느 선방에 축 늘어져 있었다. 말이야 선방이라고 하지만, 그저 비좁은 골방에 지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살피지 않아서 흙먼지가 가득했고, 거미줄이 무슨 비단 천 늘어뜨리듯이 길게 매달려 있었다.
검게 물든 벽은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마침 스며드는 햇빛이 요령사자의 눈가를 찔렀다.
요령사자는 긴 눈썹을 움찔거리다가, 한참만에야 느릿느릿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으, 으으.”
신음이 낮게 맴돌았다. 골이 지끈거렸고, 깜빡이는 눈가에는 초점이 없었다.
요령사자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눈동자를 겨우 옆으로 굴렸다. 먼저 보이는 것은 텅 비어 있는 어깨였다.
정신 잃은 사이에 그래도 제대로 처지를 하여서 깨끗한 면포가 단단히 감겨 있었고,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 악몽 따위가 아니군.”
그는 지친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팔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물론이고, 두려움도 없었다. 고통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만 윙윙 울릴 뿐이었다.
요령사자는 비어 있는 어깨를 향해서 오른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꼴인지 깨달았다. 오른손도, 두 다리도 단단히 결박된 상태였다. 다른 수법이 아니라, 무슨 고치라도 되는 양 단순하게 동아줄로 칭칭 감아두었다.
“아, 그렇지. 제대로 당했지. 정안의 검객. 그에게…….”
그자는 과연 어지간한 무림의 금제가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손을 쓴 것일까.
요령사자는 이렇게 단단히 묶어 놓은 것 때문에 잠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무슨 수법에 정신을 놓았던 것인지 깜깜했다.
“흐음, 뭐 어떻든, 지금 내게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건 분명한 일이지.”
그는 더 고민하기보다는 한숨을 푹 내뱉으면서 긴장한 몸에 힘을 쭉 뺐다. 골이 지끈거리고, 몸은 무겁다.
손가락 하나 어쩌지 못하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쪽에서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자전사령이 이 꼴을 알면 또 뒷목을 잡겠군.”
그는 불현듯 자색전광을 휘감은 채 부르르 몸을 떨어댈 자전사령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대로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었지만, 하동 일의 책임자로, 요사이 어려움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듣자니, 큰 임무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교’의 큰 보물까지도 잃어서 엄청나게 입지가 쪼그라든 처지였다.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겠다고 나름대로 절치부심하여서, 살정은 물론 자신까지 끌어들였건만.
살정은 채 하루 반나절 만에 끝장이 나버렸고, 마지막엔 자신마저 이 꼴이 되었으니.
혈사 내에 이혼대법으로 제압한 괴뢰를 심어 놓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목전에서 물거품이 된 셈이었다.
과연, 그가 이 상황을 알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생각만으로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요령사자는 처지를 잠시 잊고서 숨죽여 키득거렸다.
선방 밖에서, 고진무와 흑건아는 잠시 멈칫했다.
“으음.”
키득거리는 소리에 일단 깨어났다는 건 알겠지만, 어째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하여서 들어서기가 꺼려지는 탓이었다.
고진무와 흑건아는 곁눈질로 서로 힐끔거렸다.
“그…… 괜찮을까요? 흑 도형.”
“아, 뭐. 그게. 심상치 않기는 하네요. 은공.”
둘이서 주저하니, 한걸음 뒤에서 단청이 혀를 찼다.
“다 잡아 놓고서 뭘 머뭇거려요? 무슨 죄지었어요?”
“하핫, 그, 그런 건 아니다만.”
뾰족하게 쏘아붙이자, 고진무는 손을 흔들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단청은 입매를 삐죽거리고는 두 사람 사이로 성큼 나섰다.
문을 벌컥 열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아…… 사매 분께서 과격하시네요.”
“과감하지요.”
흑건아는 잠깐 눈동자를 굴리고는 넌지시 속삭였다. 고진무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랴부랴 선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자, 이름이야 어떻든, 직책부터 말씀해 주실까요. 도고.”
“…….”
단청은 바로 소리 높여서 이름보다 먼저 직책을 물었다. 그러자 요령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단청을 빤히 보았다.
당황스러운 것도 물론이지만, 먼저 꺼낸 물음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성명, 내력이 아니라, 직책을 묻는다. 과연 어디의 직책을 묻는 것이겠는가.
요령사자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하! 짧은 한숨을 뱉었다.
“아는군.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그래서, 사자이실까, 사령이실까?”
“거기까지?”
요령사자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뒤로 뺐다.
그는 단청도 그렇지만, 뒤이어 방으로 들어서는 다른 두 사내도 돌아보면서,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들은 대체 정체가 뭐야? 당신들 모두 혈사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아, 아아!”
단청은 눈을 돌리는 요령사자 앞에 손을 활짝 펼쳐서 말을 막았다. 그리고 한층 눈빛을 번뜩였다.
“질문은 이쪽이 먼저.”
“흐읍……!”
요령사자는 덜컥 숨을 삼키면서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는 자신이 눈앞에 있는 어린 여검객의 속셈에 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단한 고문이나 심문을 떠나서, 여기서 입 다물고 있기에는 한참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요령사자는 핏방울이 말라붙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차갑게 말했다.
“요령. 요령이다. 사자를 맡고 있지.”
“음, 요령사자시군요.”
“그래!”
단청은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입매는 빙긋 웃었지만, 지그시 노려보는 눈초리는 섬뜩할 정도로 새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그래서, 대단하신 요령사자께서는 과연 뭘 노리시는 걸까요?”
“흥! 노쇠한 혈사를 다시 일깨우고자 하였을…… 네놈! 무슨 허튼수작을 부리는 게냐!”
요령사자는 저도 모르게 대꾸하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건 단순히 방심했다고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눈을 치뜨는 그를 보면서, 단청은 사뭇 차갑게 대꾸했다.
“허튼수작은 그쪽에서 벌이는 짓이야말로 허튼수작이지.”
***
자색 일색의 복면과 장포로 온몸을 휘감은 사내, 자전사령은 드러난 눈썹을 한껏 치떴다.
미간에 팬 골이 깊었다. 그는 서둘러 오대산으로 돌아와, 요령사자와 마주한 버려진 암자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불과 한 걸음이었지만, 그는 바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여기에 있어야 할 요령사자의 기척이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낯선 기척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자전사령은 바로 알아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억지로 다잡았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탄하듯이 중얼거렸다.
“딱 하루였건만, 그 사이에 마지막 안배까지 이렇게 무너지다니. 하늘이여, 정녕 때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낙조에 물들어가는 붉은 하늘을 원망했다.
흑마령을 잃어버리는 통에, 그야말로 온갖 궂은일과 모욕을 마다치 않으면서 여기까지 일을 끌고 왔건만, 그 마지막까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갈 줄이야.
좌절이 어깨를 짓눌렀고, 원망이 가슴에서 치밀었다. 그러나 자전사령은 곧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으, 으윽! 아니다. 이렇게 무릎 꿇을 수는 없지!”
다그치는 동시에 자전마공을 한껏 일으켰다.
자신을 감춘다고 다잡았던 자색의 전광이 섬뜩하게 치솟으면서 일대를 휘감았다.
타탁! 타타탁!
허공에서 불꽃이 절로 튀었다. 다 기울어 있는 암자가 들썩거렸고, 전광이 땅거죽을 타고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큰 의미는 없었다.
암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인영 중에서, 그 정도에 눈 하나라도 깜빡할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드리운 그늘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발치의 자색 전광을 무시하듯 짓밟았다.
전부 승려의 행색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승려의 얼굴을 하는 자들은 없었다. 하나같이 흉터가 서넛씩은 남은 얼굴로 살기가 등등했다.
무엇보다 뽑아 든 붉은 칼날이, 노을빛을 받아서 한층 흉하게 번뜩였다.
자전사령은 붉은 칼날을 보고서, 으득!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칼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하나같이 붉은 혈기를 품고서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오대산에서 붉은 칼을 지닌 승려라면 과연 누가 있겠나.
“혈도승…….”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전부 열둘에 이르는 혈도승이 암자 주변을 단단히 에워싸고 있었다.
눈빛을 고요하게 번뜩이는데, 단지 흉험한 기세 따위가 아니었다. 자전마공에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살기가 일대를 꽉꽉 채웠다.
이만한 살기를 그렇게 꼭꼭 감추었다니. 경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본좌가 여기에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자전사령은 이를 악문 채 바삐 눈동자를 굴렸다.
누구를 통해서 새었을까 생각하면, 여기에 없는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는 자전마기를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흩뿌리고서, 한층 눈을 부라렸다.
자색 전광이 눈초리에서 타올랐다. 솟구치는 눈썹 끝으로 파지직, 번뜩일 정도였다.
아무리 혈도승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자전마공의 당대 계승자로, ‘교’의 사령에 오른 자였다. 순순히 목을 내어 줄 수야 없는 일이었다.
“크큭! 혈도승이면 혈도승답게 칼을 휘두를 일이지. 뭘 그렇게 빤히 지켜만 보고 있는 게냐? 자, 와라! 본좌가 진정한 마공을 보여 주마!”
자전사령은 호기롭게 외쳤다. 자색 전광을 드리우면서, 자색의 장포가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혈도승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들 보기에 자전사령의 모습은 순전히 허세였다.
다만 자전마공까지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를 상대할 사람이 따로 있을 뿐이었다.
“여봐, 네놈 상대는 여기 이분이시다.”
차가운 목소리가 한쪽에서 울렸다.
자전사령의 눈초리가 흠칫 돌아갔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허공을 향해서 일장을 떨쳤다.
“흣!”
퍼엉! 파직! 파직!
떨친 자전의 일장이 허공에서 터졌다. 그 여파가 주변으로 흩어졌다. 자색 전광이 불꽃을 일으키면서 마구 흩날렸지만, 큰 영향을 없었다.
손을 쓴 자전사령이 오히려 당황했다.
“뭐, 뭐냐! 뭐야?”
분명 엄습하는 살기를 감지하고 손을 썼건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사이 한 혈도승이 느긋하게 다가섰다. 어깨 위에 혈도를 걸쳤다.
다른 혈도승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승려의 행색도, 붉은 칼날도.
그런데 마주하는 순간, 자전사령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여기에 있는 혈도승 전부보다도 저 하나가 더욱 위험하다.
나선 혈도승 광륜은 히죽 웃었다. 그는 곧 자전사령을 향해서 혈도를 곧게 세웠다.
“흐흐, 그래. 댁이 그러니까, 자전…… 뭐라고?”
“자전사령이시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혈사, 광륜.”
광륜은 비스듬히 턱 끝을 치켜들고 대꾸했다.
보기에는 한참 광오한 모습이었지만, 자전사령은 분노할 수 없었다.
광륜은 단순한 살기, 도기를 뛰어넘은 기세를 두르고 있었다. 광오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자신감이었다.
“크…… 으윽!”
자전사령은 이를 악물면서 한껏 울부짖었다. 움츠러든 자신에 대한 분노였고,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파지지직!
한층 강렬한 자색 전광이 그를 휘감고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자전사령은 벼락같은 일성을 터뜨리면서 땅을 박찼다.
“광륜!”
“하핫!”
광륜은 마주하여서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