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422
423화 왕을 잃은 자들 (3)
갈사동의 고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결국, 임시에 불과한 살군이라는 것들이 일을 벌이고 말았다. 짐작하기로 한두 해 사이의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뿌리도 깊을 터였다.
향향, 그 아이가 이곳으로 종남의 검성을 이끈 것도 과연 무슨 이유이겠는가. 살정은 이미 과거의 살정이 아닌 까닭이다.
‘여기에 나라고 책임이 없겠는가.’
냉랭한 얼굴에 수심이 어리면서, 한숨이 짙게 맴돌았다.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하였으면서도, 갈사동은 일선에 물러났다는 핑계로 굳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갈사동은 고진무에게 살정과 ‘교’가 손잡은 정황을 들으면서 참담할 따름이었다.
이제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뭐가 되었든 수를 내어야 했다.
갈사동은 한숨을 삼켰다.
“본정을 이대로 둘 수는 없겠구려.”
“어찌 방도가 있겠습니까?”
“으음.”
고진무가 진지하게 물었다. 방도를 묻는다면, 갈사동도 바로 답을 낼 수는 없었다.
다만 이런저런 사정을 생각한다면, 피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흐음, 적어도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면, 역시 머리를 쳐야겠지요. 검성.”
“그렇다면, 살군인가요?”
“그렇소.”
갈사동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살군’이라는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본래에 없는 자리를 멋대로 만들더니, 이제는 하나도 아니고 셋으로 늘어났더구려.”
“지금은 둘입니다. 갈 노사.”
“후후, 알고 있소. 종남에서 당했다지?”
“예.”
“참 한심한 놈이요.”
고진무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떻든 살정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다. 본파에서 화를 당하였다는데, 쉽게 말 꺼낼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갈사동은 쯧 혀를 찰 뿐이었다.
종남파에 대한 감정보다도 상대도,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살군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살정을 망치고 있다는 것도 있지만, 살수로서도 부족하지 않은가.
갈사동은 새삼 각오를 다잡은 듯이 눈매를 가늘게 뜬 채, 조용히 말했다.
“어떻든 외부 세력과 손잡아서 내부를 단속한다는 것은 살정이 나아갈 길이 아니오. 이전의 살정으로 돌아가야 할 터.”
“이전의 살정이라면, 살왕께서 계실 때가 아닙니까. 헌데, 여전히 어디에 계신지는 누구도 모를 텐데. 어찌……?”
고진무는 한층 조심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살왕의 행방은 특히나 외인인 자가 쉽게 입에 올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살군과는 무게가 전혀 달랐다. 갈사동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쓴웃음이 머물렀다. 어색하지만, 그래서 더욱 본심이었다.
“그야 그렇지. 살왕께서는 대체 어디서 화를 당하셨는지. 아마 하늘도 모를 거요. 검성.”
“저어, 그럼 어찌하시려고요?”
“살정은 그 역사만큼이나 여러 시기가 있었다오. 처음부터 살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 이 정도만 말해 두겠소.”
“아, 그렇군요.”
고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사 당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살정인 만큼, 세월 속에서 여러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동구호 향향 역시 살정이 이 지경까지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어느 정도 불안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갈사동의 말을 빌리자면, 종종 전언을 주고받으면서 수상한 기색을 토로하였다고 하니. 그런 까닭에 갈사동은 마음이 더욱 무거운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 또한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것을 핑계로 지켜보고만 있었으니까.
고진무는 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었다.
‘살정에서 ‘교’를 밀어내는 것만도 성과라고 하겠지. 그리고 잘하면, 살정을 통해서 ‘교’의 무리까지 더듬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고서야 마주하기보다는 먼저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고진무는 문득 불가 너머에 앉은 남궁완의 모습을 보았다.
남궁완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안색은 돌아왔다. 그래도 시무룩한 기색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갈사동이 평생 몸담은 살정의 상황에 괴로운 만큼, 남궁완 또한 나고 자란 가문의 안위로 심정이 한없이 복잡하고 의기소침했다.
“남궁 소협은 이제 어찌하시겠소?”
“예? 예? 저, 저요?”
“듣자니, 강호 경험을 위해서 가문을 나온 것이라 들었소만.”
“그, 그렇지요.”
남궁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처음의 각오는 물거품이 된 지가 오래였고, 오히려 갈 곳을 잃어버린 꼴이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걱정이고, 동시에 자신을 저버린 친족에 대한 실망이 도드라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살정의 입을 통해서 실제를 듣고 말았으니까.
이제껏 대체 뭘 믿어온 것인지.
그나마 위안거리로 삼는다면, 살정으로 직접 처리해 달라는 의뢰가 향한 건 아니라는 정도일까.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은공.”
“그런……가.”
남궁완은 불현듯 속이 불편했다. 배를 양껏 채운 것이 문제였을까. 입술을 꾹 말아 물고서, 괜히 명치 어림을 툭툭 두드렸다.
“남궁 소협, 남궁가는 어떤 곳인가?”
“본가요? 본가는 으음, 그러니까.”
“약 다섯 대를 이어온 가문이지요. 풍파가 끊이지 않는 강남 무림에서 오대를 무탈하게 이어온 것은 나름의 저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머뭇거리는 남궁완을 대신해서, 갈사동이 설명했다.
어째서인지 그는 남궁가에 대해서 적지 않게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궁완은 흠칫하여서 갈사동을 돌아보았다. 설마 다른 이의 입에서 가문의 세세한 사정을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남궁가는 황산 일대의 토호들과 연관이 깊기도 하지만, 관을 대신해서 치안을 단속한 공이 있습니다.”
“공이요?”
“예, 검성. 남궁가에서는 가문의 검객을 종종 내보내서, 바닷가에서는 왜구를 소탕하고, 동북에서는 비적 무리를 토벌하는 데에 항상 거들었지요.”
“그럼 영향력이 상당하겠습니다.”
“아무렴요. 황산 주변에서 남궁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나름대로 저력 있는 무가이지요.”
남궁완은 가문의 얘기를 들으면서 더욱 움츠러들었다.
고약한 사정은 다들 있는 것이겠지만, 가문의 일이라고 하면, 그 심적 충격은 다른 말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내막을 대강 듣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남궁완은 뒤늦게 방에서 챙겨 나온 가문의 검을 슬쩍 꺼내 들었다.
옛적의 양식으로 고풍스러운 검이었다. 그러나 달리 눈에 띌 것은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의뢰는 이 검이었다고 하는 만큼, 남궁완은 새삼스럽게 철검을 앞뒤로 살폈다.
역시 모르겠다.
“대체 이 검이 뭐라고.”
검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허허, 그리 말할 게 아니네. 남궁 소협.”
“예?”
가문의 내밀한 사정까지는 남궁완도 미처 알지 못하였는지,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서 말똥거리는 눈동자로 갈사동의 파리한 얼굴을 빤히 보았다.
“보아하니 소협은 가문의 내부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이구려.”
“아, 아직 어리다 보니까.”
“허어.”
갈사동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한 눈으로 주눅이 든 남궁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갈사동이 맡은 마운곡과 남궁가는 거리로 말하면 그리 멀지 않았다. 이런저런 사정을 대강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가문 내에서 일어난 갈등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남궁가의 상황을 말한다면, 일촉즉발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남궁완이 들고 있는 가문의 검이었다.
***
기다렸다.
약속된 날이 지났고, 거기서 이틀을 더 기다렸다. 그래도 답이 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실패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의뢰를 잘못한 것이었을까. 남궁의 성을 쓰는 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완 녀석을 그리 내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고개를 비틀었다.
검이 아이에게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남궁의 중년인은 사방이 조용한 팔각 정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주변으로는 죽림이 빼곡하게 자라 있어서, 내리는 햇빛이 간신히 스며들 정도였다.
그늘 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남궁의 중년인, 남궁소는 한숨을 깊이 삼켰다. 무성한 대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그가 앉아 있는 정자까지 닿았다.
늘어뜨린 남색 장삼의 옷깃이 잠시 흔들렸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데, 그는 전에 없는 한기를 느끼면서 옷깃을 다잡았다.
가문을 홀로 나선 남궁완의 밝은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을 때에야 더없이 아끼는 조카이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문의 정통을 따질 수밖에 없었다.
조카의 자리를 탐하는 못난 숙부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손 놓고 있다가는 변변한 것 하나 없이 가문이 절단 날 판이었다.
남궁소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찔리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한 법이다.
“형님, 형님께서는 대체 어찌하여서 아이에게 하필 그 검을 주었단 말이오. 어찌하여서! 내가 그리도 못 미더웠소?”
남궁소는 덜컥 주먹을 그러쥐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면서 부르르 손이 떨렸다.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어, 지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후.
남궁소는 이내 숨을 토하면서 움켜쥔 손을 풀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붉게 남았다.
참 투박한 손이었다.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했다. 남궁소는 이 손으로 남쪽에서는 왜구를 상대했고, 동쪽에서는 마적을 상대해왔다.
그야말로 무수한 실전을 겪으면서 단련된 남궁소였다.
가문 안에서 편히 검을 닦아온 속 편한 가인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궁소는 그만큼 무공을 갖추었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가문 안에서는 유약한 형만 못했다.
둘째의 한계라는 것인지.
그럼에도 지금 남궁가에 닥친 일은 자신이 아니고는 누구도 수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이건 틀린 일이 아니야. 아니고말고.”
남궁소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핑계 따위가 아니라고, 거듭 자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스스로 떳떳하지 않다는 것만은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푹 고개를 떨구었다.
대나무 숲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고개 숙인 그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그늘이 짙은 얼굴은 음영이 짙었다.
가장 추한 부분만이 남아서, 이대로 늙어 버린 듯한 꼴이지 않은가.
충의, 협의, 인애를 떠들던 입으로 하나뿐인 조카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흉한 말을 잘도 떠들었다.
자신을 향한 혐오가 강하게 밀려왔다. 그래도, 그럼에도 남궁소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미 각오한 일!”
그는 억지로 자신을 다잡았다. 이대로면 남궁가는 그나마 갖추고 있던 터전을 모두 잃고서, 사분오열되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 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나마 가문에서 제대로 된 검객이라고는 남궁소이니만큼,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었다. 가주 자리에 눈이 멀었다고 욕해도 좋았다.
그는 가문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각오를 다잡고서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단호한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허, 허으억!”
귀신이라도 마주하였는지, 대번에 납빛으로 물든 얼굴에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