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445
446화. 종남검성(終南劍聖) (3)
고진무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탁한 숨을 가늘게 밀어냈다.
지그시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혀 아래에서 끊임없이 종남의 경구를 읊조렸다.
‘정주일여, 정주일여.’
상황은 분명 좋지 않았다. 감히 최악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요악(妖惡)하기 이를 데가 없는 핏빛의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꼴에, 등 뒤에는 기식이 엄엄할 정도로 위태한 부상자가 있었다.
그에 반해 상대는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을 따로 두고서 무지막지한 위세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으니.
대사마는 마치 후광처럼 혈기를 전신에 휘감은 채 허공을 밟고 우뚝 서서 고진무를 눈 아래로 보았다. 입가에는 뚜렷한 미소를 그리고, 마치 더없는 가르침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나직이 말했다.
“종남의 어린 검성. 자네는 천지 사이에서 진정한 귀인(貴人)을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헛된 짓은 그만하고, 혈륜의 품으로 귀의하는 게 어떠하겠느냐?”
“…….”
이미 상황은 끝났다고 여기는 모양인지 담대한 척 내뱉는 말 한 번 오만방자하다.
고진무는 경구를 속으로 읊조리다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말은 장황하지만, 어쨌든 알아서 항복하라는 뜻이지 않은가. 외법에 취하더니 진짜 신인의 반열에라도 오른 줄 아는 건가.
“대사마께서는 참 말씀이 많으시군. 그리고 귀인이라면 오히려 뒤에 계신 대사공이 더욱 귀인이시지. 당신은 아닌 것 같은데.”
“뭐라?”
“화산, 하동, 경조부, 형호로, 개봉부.”
고진무는 무표정한 채, 한 지역, 한 지역을 빠르게 읊조렸다.
“그게 전부가 아니겠지. 그렇지 않소?”
“허, 허허허. 검성, 검성. 네놈의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대사마는 하도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진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교’의 행사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가당찮은 일.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 대사마는 핏빛으로 온통 붉게 물든 눈을 번들거렸다.
험악한 기파가 퍼져 갔다. 광명정을 전부 아우르고 있는 혈기가 일렁거렸다.
그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그래서. 네놈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어쩌기는. 당신을 베어서, 이제껏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해야지. 그리고 당신의 외법에 갇힌 혼백 역시.”
“…….”
고진무는 한 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그제야 검초 속에서 청명검이 달칵, 스스로 튀어나왔다.
그 검자루를 자연스럽게 그러쥐고서,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신과 검초가 스치면서 맑은 쟁명이 새삼스럽게 울렸다.
대사마의 여유가 잠깐이지만 흔들렸다. 혈광 앞에서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고검의 검광이 워낙에 맑은 탓이었다.
‘응? 이것 봐라, 현문의 파사기인가. 상당한 수준의 법보인 모양인데.’
어떻게 혈라금막(血羅錦幕)을 가르면서 들이닥쳤나 싶더니.
저 고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구나. 저것은 특히나 외법과는 상극이라고 할 만한 법보이지 않은가.
“흐으음.”
이를 드러내던 대사마는 잠시 멈칫한 채, 혈광이 일렁거리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제압하지 못할 건 없지만, 상극이라 할 현문의 신령한 법보를 상대하는 것이니만큼 자칫 혈륜이 상하거나 외법이 흔들리지 않을까.
대사마는 걱정하는 한편, 바로 손을 휘저었다.
광명정 전체가 크게 요동쳤다.
이제까지 손을 쓰고 있던 것은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핏빛의 운무가 손짓에 바로 반응했다.
쏴아아아!
몰아치는 바람에 깃발이 거칠게 흔들리는 것처럼 세찬 소리가 울렸다. 위아래 구분 없이 광명정 일대를 에워싼 혈라금막이 고진무와 대사공을 노리고 밀려들었다.
물러설 곳은 조금도 없었다.
눈앞은 온통 붉고, 귓가에는 몰려오는 소리가 요란했으며, 코끝으로 지독한 피비린내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고진무는 그만 머리가 어찔할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혈기가 요동치니 모든 감각이 흐트러졌다. 심지어 기감마저 핏빛 안개가 고인 것처럼 흐렸다.
“흠!”
고진무는 청명검을 미간 앞에 곧게 세웠다.
천지에 가득히 밀려오는 붉은 물결.
환상 따위가 아닐까 싶었지만, 저것 하나 하나가 수십, 수백의 혼백을 집어삼킨 혈기라고 할 수 있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
혈륜, 무슨 외법인지는 몰라도 고진무는 저 수레바퀴가 참 고약한 마물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단순하게 요악한 힘을 발휘해서가 아니었다.
대사공이 한 수만에 패퇴한 사정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맨손이었기에 피해가 더 컸겠군.’
단순한 검기로는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고진무에게는 청명검이 있지 않은가.
청명검이 한차례 몸을 떨었다.
지이이잉!
더없이 맑은 소리가 요란하게 밀려오는 소리를 뚫고서 또렷하게 울렸다.
고진무는 청명의 검명에 퍼뜩 정신을 다잡았다.
그는 번쩍 두 눈을 다시 떴다. 선명한 청광이 맺혔다가 깊이 잦아들었다.
대사공도 인정한 바가 있는 정안, 그 맑은 눈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혈무 앞에서 약간이나마 늦게 청명검이 움직였다.
“흐읍!”
대사마의 눈썹이 바짝 솟구쳤다.
제법 한 수가 있으니 나섰을 것이고, 검성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혈기를 밀어내면서 외법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괘씸한…….”
으득!
잇새가 맞물리면서 험악한 소리가 튀었다.
고진무의 무심한 표정이 크게 거슬린 까닭이었다.
한층 높은 곳에서 혈무를 뿌리듯이 손을 쓰던 차였다. 직접 손을 쓰기보다는 혈기로 농락하고, 절망을 마주하였을 때에 그대로 압살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자신한 수법이 고진무 앞에서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고진무는 호흡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자신의 검세를 단단히 지켰다.
맴도는 검운이라니.
성취도 성취였지만, 검법의 고절함은 대체 무엇인가.
“저게 진정 종남의 유운검법이라고?”
분명 종남파의 정종 검법 중 하나이지만, 그만큼 유명했으며 비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자신도 종남파의 삼대 검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견식이 있는 바였다. 그러나 지금 고진무의 검 끝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변화와 경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검 끝에 맺힌 것은 고도의 강기로, 검운의 경지이지 않은가.
상당한 경지라 할지라도 분명 혈라금막 아래에서 자리만 지키는 데에 급급한 상태였건만 이제껏 눈 하나 깜빡하지 않다니.
제놈도 혈륜처럼 어디 마르지 않는 힘의 원천이라도 따로 갖추고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런 것이 있다면 저런 법보를 지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뭐냐, 달리 믿는 바가 뭐가 있다고 계속 그런 눈이냐!’
왈칵 짜증이 일었다.
법보고 뭐고 역시 단숨에 짓눌러버렸어야 했을까.
잠깐의 동요였다.
고진무는 대사마가 어찌 놀라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장은 그의 반응 따위보다, 지금 전심전력을 다할 뿐이었다.
검 끝에 검운지망의 검운이 짙게 맺혔다.
오채의 검기를 품은 검운이었다. 검 끝에 맺힌 구름이 산봉을 타고 노니는 것처럼 고진무와 대사공의 전면을 모조리 아우르면서 나아갔다.
백운요산에서 시작하여 유운소일, 운중산영으로 검초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팟! 파팟! 파파팟!
연이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대사공은 움푹 팬 흑강의 단단한 석벽에 등을 기대고 허어, 한숨을 흘렸다.
“아무리 법보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상대할 수 있을 줄이야.”
자조 섞인 한마디가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떠했던가. 소수마강의 경지에 취해 힘으로 부딪치기 급급하지 않았는가.
대사공은 이제 파리하게 질리고, 검은 핏자국이 여전히 흥건한 입술 끝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자신의 반성이야 어떻든 고진무의 검세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유운이라 할 정도가 아니다. 흐르는 구름이 아니라, 거대한 구름을 불러온 셈이다. 혈라의 장막 안에서, 오채의 검운으로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사공은 고개를 더 세웠다.
핏빛의 장막이 머리 위에 짙었다.
대사마는 그 너머에 있을 터였다.
그리고 저주받을 피의 수레바퀴도.
‘저 수레바퀴를 어쩌지 못하는 한, 대사마 또한 힘이 다하지 않을 텐데…….’
혈륜이 건재한 이상 힘은 마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고진무가 자신의 안위까지 신경 쓴다는 건 역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자신 때문에 고진무가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고작 너댓 걸음 정도에 불과했다.
제대로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면서, 대사공은 어렵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짰다.
“검성, 나는 그만 내버려두시오. 나까지 신경 쓸 필요 없소!”
“…….”
고진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일이 대꾸할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몰려오는 혈기의 움직임이 흔들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허초인가?”
약간의 흐트러짐이라 고진무는 의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그 틈바구니를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지체할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유운검법의 검운지망으로 엄밀하게 검세를 지키고 있었지만, 끝도 없이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때에 고진무는 자신을, 그리고 청명검을 믿고 찰나에 공세로 나섰다.
스걱!
광명정으로 뛰어들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 신령하면서도 위력적인 검광이 치솟았다.
천하검법의 검여일성이다.
하늘로 향하는 유성의 빛줄기가 혈무를 꿰뚫었다.
“크, 크아악!”
한층 높은 곳에서 노려보던 대사마는 더 참지 못하고 온몸을 떨어 대면서 분노한 일성을 버럭 내질렀다. 그 심중을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맴돌고 맴도는 혈륜이 한층 빠르게 돌았다.
대사마의 온몸에서 혈기가 한층 짙어지면서 강렬하게 핏빛의 광휘를 뿌려 댔다.
핏빛의 기운이 좌우로 갈라지고, 청령한 고검을 높이 치켜든 고진무가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처음보다 더욱 집중하였건만,
혈라금막이 다시 갈라지다니.
대사마는 괴성을 짧게 내지르고는 이내 흐흐흐, 험악한 실소를 흘렸다.
“그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네놈, 아니지. 자네는 분명 검성이라고 불릴만해.”
눈앞의 검성은 그저 허명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경을 이루어 낸 검객이다.
대사마는 인정하는 만큼, 분노가 들불처럼 일었다.
억지웃음을 그린 채 그는 스르르 아래로 내려섰다. 더는 멀리서 어설프게 손을 쓰지 않겠다는 의중이었다.
고진무라고 마다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다만 내려선 대사마를 보면서 입술을 질끈 물었다.
드리운 혈기를 갈랐다고 하지만 아직 핏빛 기운은 한참 짙게 남아 있었고, 지금도 허공에서 돌고 있는 혈륜을 통해서 계속 흐르고 있었다.
고진무는 대사마를 상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저놈의 시뻘건 수레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