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01)
>101 화>
* * *
페리얼 칼로스가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 무언가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다.
“살려.”
“카리나를 죽게 할 마음은 나도 없어. 네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와 그렇게 크게 싸운 것은 처음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그는 늘 밀라이언을 귀찮게 굴곤 했다. 밀라이언은 늘 그를 밀어 냈고. 그래도 이 정도로 크게 싸운 적은 없었다.
“후발대가 오면 오늘은 쉬고 내일은 새벽부터 토벌한다.”
“알겠습니다!”
밀라이언이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움직이는 기사단을 감독하던 유리가 밀라이언을 힐끗 돌아봤다.
“어디 가십니까?”
“바람 쐬러.”
바람을 쐬러? 사방이 뻥 뚫린 숲에서 무슨 바람을 쐰단 말인가.
그러나 눈치 빠른 유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밀라이언이 향하는 방향이 대충 어디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마중하러 가시는군.’
시간상으로만 따지면 후발대가 올 때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그러나 밀라이언은 움직였다.
가만히 있다간 초조함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무사히 오고 있겠지?’
평생 두려움이라곤 느껴 본 적이 없었던 밀라이언은 술렁이는 가슴을 꾹 내리눌러야 했다.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 * *
“크르르-.”
헤르타가 답답한 듯 몸을 털었다.
마차가 너무 느렸고 병사의 행렬이 더뎠다. 사람이 많다 보니 행렬 자체가 무척 길고 지루했다.
“답답해?”
크릉!
헤르타가 고개를 털었다. 답답해 죽겠다는 목소리다.
카리나가 웃음을 터뜨리곤 조심스럽게 아래를 바라봤다. 아래엔 고레든이 말에 탄 채 움직이고 있었다.
“고레든!”
카리나의 목소리에 고레든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음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반응했다.
카리나가 입을 열려는 순간 고레든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어?”
그러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고 헤르타의 튀어나온 등껍질을 밟는다. 그리고 그대로 곧장 한 번 더 몸을 도약했다.
크르르……
제 등껍질을 밟는 묵직하고 낯선 발길에 헤르타가 낮게 울었다.
위협적인 목소리였지만 카리나에겐 어쩐지 그것이 불만스럽게 들렸다.
헤르타의 등껍질 위로 묵직하게 착지했다.
오죽하면 헤르타의 거대한 몸이 조금 흔들린 것도 같았다.
“……와.”
“크와아아악-!”
헤르타가 몸을 흔들며 불만을 표했다. 거친 포효에 아래쪽이 시끄러워졌다.
쿵, 쿵-!
헤르타가 두어 번 거칠게 발을 내리찍었다. 땅이 크게 울렸다.
“흐아악!”
“얘 왜, 왜 이래?!”
“잠깐, 헤르타!”
카리나가 손을 뻗어 헤르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달래자 헤르타가 뚱한 표정으로 발을 내렸다.
쿵!
물론 순순히 내려놓지는 않았고.
헤르타를 달랜 카리나가 멍하니 난장판 속에서도 담담히 서 있는 고레든을 바라봤다.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날아오른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뭐야, 이 대단한 사람은.
그녀가 눈을 끔뻑이자 고레든이 살짝 몸을 낮췄다.
“부르셨습니까?”
“아, 별 건 아니고 헤르타가 답답해하는 것 같으니 혹시 먼저 가도 괜찮을까 해서요.”
“……먼저 말입니까?”
고레든의 미간이 좁아졌다.
곤란한 듯 좁아진 미간에 카리나가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카리나가 눈동자를 조용히 굴렸다.
“헤르타가 있으니 안전할 거예요.”
고레든이 고개를 돌려 도착 지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때 보았던 헤르타의 속도로 간다면 사실 3, 4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 거다. 걸어가는 이들로서는 서너 시간은 훌쩍 넘겠지만.
‘말이 쫓아가기엔 속도가 부족 하고.’
뭣보다 헤르타처럼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데려가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고레든 자신이 이 위에 타고 같이 가는 수도 있었지만 그는 후발대의 총책임자였다.
“이대로 뒀다간 날뛸 것 같습니까?”
“아니,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것 같긴 한데…….”
아래쪽의 사람들이 겁에 질린게 절로 느껴졌다.
고레든이 잠시 고민했다. 그녀를 보내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헤르타의 속도나 그 난폭성을 보아 가는 길이 위험해질 확률도 극히 적었다.
‘이 주변엔 도적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니.’
마수는 숲 밖으로 웬만해선 나오지 않을 거다. 그리고 숲의 입구는 아마 선발대가 지키고 있을 테고.
고민하던 고레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 계속 멈추지 않고 움직이 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멈추지 않고?”
“혹시 가다가 무슨 일이 있거나 길을 잃은 어린아이를 보더라도 외면하고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서 카리나가 낮게 웃었다.
고레든의 얼굴에 잠시 의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멈추지 않고 갈 테니 혹시 그런 이들을 보거든 고레든이 도와준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전 고레든을 믿고 멈추지 않는 걸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헤르타에게 몇 가지 시험을 해 본 결과 후각이 제법 좋은 걸 알아냈습니다. 아마 어렵지 않게 찾아갈 겁니다.”
고레든의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다는 것 같더니 언제 이런 훈련 같은 것도 했는지. 카리나의 대답을 본 고레든이 그대로 헤르타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헤르타.”
“크릉.”
“밀라이언이 있는 곳으로 가자.”
“킁!”
콧김을 훅 내뿜은 헤르타가 서서히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카리나가 공기저항을 덜 받기 위해 몸을 한껏 낮춰 헤르타의 등껍질 사이로 숨자 헤르타가 한껏 속도를 높였다.
– 흥. 약한, 인간.
귓가를 파고드는 쇠를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카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이 녀석이 지금 자신을 약하다고 한 것인가?
한마디 해 주고 싶어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카리나는 헤르타의 등에 붙어 있기 바빴다.
그나마 헤르타가 한껏 치켜든 목 뒤쪽으론 공기저항이 거의 없었다. 빠르게 달리는 헤르타에 카리나가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크와아아앙-!”
헤르타가 크게 울었다. 포효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근처에 굉음처럼 울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헤르타의 등껍질에 가려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슬슬 재미가 없어졌다.
슬슬 느려지기 시작하는 속도를 느낀 카리나가 고개를 쏙 빼 헤르타의 머리 너머를 바라봤다.
누군가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밀라이언?”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자 나무에 서 있던 인영이 이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
“밀라이언, 왜 여기에 나와 있어요?”
헤르타가 몸을 낮추기도 전에 밀라이언이 성급하게 두 팔을 뻗었다.
후발대와 함께 마차에서 편하게 오라니까 그녀는 대체 왜 헤르타의 위에서 내려오는 것인가.
걱정이 역력한 기색으로 밀라이언이 손을 뻗었다.
헤르타가 슬쩍 몸을 낮췄다. 밀라이언이 끙끙거리며 내려오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그대로 품에 끌어안았다.
“얌전히 오라니까 그걸 또 못 참고…….”
“헤르타가 달리고 싶어 했어요.”
눈을 가늘게 뜬 밀라이언의 시선을 피해 카리나가 웅얼웅얼 대답했다. 헤르타의 몸은 어느새 모래와 먼지투성이였다.
“그리고 엄청 재밌었으니까 괜찮아요. 말도 혼자서 타면 이런 기분일까요?”
숲에서부터 바람이 불어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언젠가 해 보고 싶다.”
카리나가 제 흐르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밀라이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주먹을 꽉 쥐곤 상의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 줬다.
“아, 괜찮아요. 이 옷도 엄청 따뜻해서.”
“그래도 겨울바람이 차.”
“으음, 정말 괜찮은데. 헤르타랑 올 때도 문제없었어요.”
다행히 발작도 없었고 헤르타의 얼굴이 대신 바람을 가려 줘서 괴롭지도 않았다.
주변의 풍경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일 이었지만.
“그리고 괜찮다면 틈틈이 말 타는 법을 알려 줄게.”
“……정말요?”
“그래.”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정말 소박한 사람이었다. 남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을 일을 무척 기뻐한다. 그것이 더는 돌아올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카리나는 그래서 모든 것을 기뻐하고 모든 것을 달갑게 여기는 것이다.
밀라이언이 지끈거리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척하며 카리나를 따라 흐리게 마주 웃었다.
“의외네요.”
“뭐가?”
“절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기뻐요.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거든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의 미간이 좁아졌다.
버킷 리스트? 그건 또 무슨 목록이란 말인가. 그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자 카리나가 손뼉을 짝 쳤다.
“아, 버킷 리스트는…… 제가 떠나오기 전에 수도에서 유행하던 거예요.”
“그런가? 난 처음 들어 본 단어야.”
“음…… 사람은 언제나 죽잖아요?”
쿵-.
순간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밀라이언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봤지만 그가 밟고 서 있는 곳은 모두 흙밖에 없었다.
시뻘겋게 낭자한 피도 펄떡거리며 뛰고 있는 제 심장도 없었다.
“…….”
“근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살면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는 취지래요. 사실 귀족들보단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거긴 했어요.”
평민들의 삶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귀족들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목이 날아가거나 귀족 모독죄로 처벌받는 경우도 많았다.
계급에 눌리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돈에 짓눌리며 살아간다.
한평생 힘겹게 살아왔어도 귀족에게 잘못 걸리면 한번에 가는 것이다.
남부는 특히나 풍요로운 데다가 귀족들의 콧대가 높았다. 작은 실수도 봐주지 않는 경우가 많을 정도다.
그래서 버킷 리스트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리나도 우연히 듣게 된 것일 뿐이지만.
“저도 한번 해 보는 거예요. 그 때 적고 있었던 하고 싶은 일 목록도 그거예요.”
“또 뭐가 있는데?”
“네?”
“그 버킷 리스트라는 거, 혼자 말 타 보는 거 말고 또 뭐가 있어?”
“음…….”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대개는 밀라이언과 관련된 일이었다. 자신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 가족들의 콧대도 눌러 주고 싶었다.
죽기 전까지 그리고 싶은 풍경도 가득했다.
하지만 가장 해 보고 싶은 것들은 대개 밀라이언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와 한 침대에서 자 보고 싶다거나…….
…….물론 이건 예상하지 못하게 최근 이루고 말았다.
손을 잡고 싶다거나 키스를 하고 싶다거나…….
‘……이것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전부 이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