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13)
>113 화>
* * *
“…….”
“도착했다.”
“네?”
카리나가 또다시 멍청하게 반문 했다.
멍청한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멍청이가 되는 기분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사태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자, 가지.”
“네?”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덥석 품에 안은 채 성큼성큼 천막으로 들어 갔다.
그가 주섬주섬 카리나를 한쪽에 앉히곤 침대 위에 떡하니 누웠다. 정말 중심에 자리 잡았다.
“…….”
“…….”
“준비됐으니 덮쳐도 돼.”
조금 수치스럽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조금 많이 수치스러웠다.
카리나는 진심으로 제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가리고 싶었다. 조금 울고 싶기도 하다.
덮친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던 건가?
이런 게 도대체 그 소설 속에선 왜 그렇게 달콤하고 야릇하게 보였던 거지?
밀라이언의 기대감 가득한 눈동자를 보며 카리나가 주섬주섬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기듯이 밀라이언의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뭘 어떻게 덮치면 되지?’
통나무처럼 일자로 누워 있는 밀라이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카리나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긴장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꿀꺽, 침을 삼키곤 조심스럽게 밀라이언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덮치라고……’
카리나의 무릎 사이에 밀라이언의 다리가 자리 잡았다.
그녀가 그대로 몸을 숙여 밀라이언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푹 묻었다. 밀라이언의 위에 카리나의 몸이 겹쳐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나무와 통나무가 겹쳤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했다. 카리나가 그 상태로 뻣뻣하게 굳어 애꿎은 눈동자만 데굴 데굴 굴렸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귀여움에 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자신과 전혀 다른 걸 생각한 것이 분명 했다.
‘괜히 혼자 들떴군.’
아무렴 어떤가. 솔직히 이것 역시 나쁘진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가르쳐주는 것보단 그저 조용히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좋군.”
카리나를 품에 가둔 밀라이언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몸을 옆으로 뉘었다.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걸로 된 건가?’
카리나의 표정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대체 평소에 이불 속에 숨어들 때와 다를 게 뭔가 싶다.
“그대가 자주 덮쳐 줬으면 좋겠어.”
“아……, 네.”
이게 덮치는 거라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괜히 긴장했네.’
소설에서는 너무 긴박하게 묘사를 해 둬서 그녀도 긴장을 했었다.
물론 뒷내용은 보지 못했지만.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카리나가 숨을 삼켰다. 코끝에 가득히 파고드는 그의 냄새가 좋았다.
“밀라이언.”
”응.”
“이게 꿈이라면 좋겠어요.”
카리나가 밀라이언을 품에 끌어 안으며 말했다. 그가 미간을 좁히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째서?”
“이게 꿈이라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테니까요. 모든 것들이 영원하겠죠.”
“…….”
밀라이언이 호흡을 멈췄다.
언제까지고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해서 이어질 테니까.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밀라이언이 그녀를 마주 안았다.
“카리나, 나는…….”
“카리나 있습니까?”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카리나가 손을 더듬거리며 밀라이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냉큼 무릎을 꿇었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재빠르게 정리한 그녀가 벌겋게 물든 얼굴로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네! 있어요!”
삑사리가 섞인 우렁찬 대답이었다.밀라이언의 얼굴이 말 그대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밀라이언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천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페리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놈은 대체 타이밍이 왜 이따위야?”
“자네는 대체 아픈 사람 붙잡고 뭘 하는 건가?”
“뭘 하든 너와 상관은 없지.”
밀라이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페리얼이 팔짱을 낀 채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조금 난감한 눈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일단 카리나에게만 말할 생각이었는데.’
카리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슬쩍 눈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입 안이 썼다. 페리얼이 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서 멈춰서 있자 밀라이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포기하고 들어오도록 해. 비켜 줄 마음 전혀 없으니까.”
“…….”
페리얼의 표정이 조금 불만스럽게 가라앉았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서. 그가 낮게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로 있었던 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페리얼은 밀라이언의 눈을 피하는 것을 포기한 듯 안으로 들어 왔다. 언젠가 밀라이언에게도 해야 할 이야기다. 페리얼이 착잡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단……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그럼요. 괜찮아요.”
어색한 분위기의 카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근처의 탁자에 앉았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페리얼을 바라봤다. 낮은 한숨을 내쉰 페리얼이 천천히 그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일단 카리나, 저택에 가면 당신 명의로 그림의 경매 낙찰금이 도착해 있을 겁니다.”
“아! 고마워요.”
“화가 ‘카리나’의 앞으로 사인 요청이나 전시회 요청, 초대장 같은 것들이 잔뜩 오긴 했는데…… 일단 그것도 가져다 두긴 했어요.”
“그림은 다 팔렸나요?”
카리나가 여전히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까지는 그림을 그려 페리얼에게 넘긴 후의 일을 의도적으로 묻지 않았다. 괜히 실망하고 싶지 않았고 페리얼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최근에는 그에게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을 걸어 본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카리나의 질문에 페리얼이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시선이 마주 쳤다. 그녀는 차마 이번엔 피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다 팔려요?”
페리얼의 목소리에 황당함이 묻어났다. 카리나가 뻣뻣하게 굳어 눈동자를 굴렸다. 혹여 자신이 너무 곤란한 질문을 한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 팔린 수준이 아니죠.”
“네?”
“카리나가 그린 것이라면 어떤 작품이든 좋으니 예약을 걸게 해 달라고 온갖 뇌물이 칼로스 가문으로 들어오는 중입니다. 얼마나 들어오고 있는지 골머리가 썩을 지경입니다.”
“……정말요?”
“네, 물론 경매는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줘야 하니 전부 거절하고 있습니다.”
“와아, 그 정도예요?”
“네, 물론 외부와 차단된 지금의 북부에선 전혀 와 닿지 않겠지만요. 당신의 이름이 얼마나 드높아졌는지 머지않아 체험하게 되실 거예요.”
페리얼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달콤한 미소에 카리나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차례 백작가에서 당신의 소재를 묻고 강압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제압했습니다.”
“……네.”
“수도 그리고 수도와 근접한 남부 지역에선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기분 좋은 소식에 그녀 역시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수도를 비롯한 남부는 특히나 예술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곳에선 살아남는 것이 힘들지만 살아남는다면 그 이름이 역사에 새겨지는 경우도 많았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리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리나.”
“네.”
“한 가지만 더 말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난 당신에게 화가 난 일이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그럴 마음도 없고 당신이 날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속상합니다.”
페리얼의 솔직담백한 말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
“당신의 의지가 아닌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피하는 것이 내겐 더 상처가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해서요.”
카리나가 묵묵히 페리얼의 말을 들었다.
그녀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밀라이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상처가 됐다면 미안해요. 누군가를 때린 감촉이 소름 끼쳐서 그랬어요. 내가 페리얼을 상처 입혔잖아요.”
“내가 당신이 그림을 그리려는 것을 막았잖아요.”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절 위해서였잖아요.”
“카리나 역시 살기 위해서였고요.”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거잖아요.”
페리얼의 담담한 말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밀라이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페리얼을 바라봤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자아조차 놓아 버릴 만큼 끔찍한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렇게라도 지금을 살고 싶어서.”
“…….”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페리얼이 말했다. 굳건한 눈동자는 파고들 틈조차 쉽게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말을 덧붙이면 그는 분명히 크게 화를 낼 것이다.
그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카리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좋습니다.”
페리얼이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냉랭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녀가 조금 곤란한 듯 볼을 긁적이다가 이윽고 작게 미소 지었다.
상황을 살피던 밀라이언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차마 카리나에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애꿎은 페리얼을 노려봤다.
페리얼이 밀라이언의 눈빛을 한번 보더니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름이 아니라 몇 가지 얘기를 드려야 해서 왔습니다.”
“이야기요?”
“네, 하론과 카리나에 대한 얘기입니다.”
페리얼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물러 보이던 눈동자는 어쩐지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다.
“무슨 말이지?”
“하론은 이전에 추측했던 대로 기적의 대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공하거나 하론의 성분을 추출하면 예술병의 통증을 억누르는 것도 가능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카리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마치 페리얼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간에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페리얼이 긴장한 듯 손을 쥐었 다 펴며 이윽고 결심한 듯 입매를 굳혔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사실 좀 충격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